3화
10년 전, 강진이 강씨세가의 소가주이던 시절. 그는 창운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도(大盜) ‘비연(飛燕)’을 추격 끝에 참살한 적이 있었다.
당시 비연은 죽기 직전, 목숨을 구걸하며 자신이 훔친 보물을 숨겨둔 장소를 불었다.
워낙 많은 보물을 훔쳤던 비연이었기에, 강씨세가에서도 비연의 보물을 찾으러 가자는 말이 나왔었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강씨세가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 세상에서 지워졌다.
‘그 보물들 중 하나가 낙성현에 있다 했지.’
그래, 그 비연의 보물중 하나가 바로 이 낙성현(落星縣)에 숨겨져 있었다.
강씨세가가 세상에서 지워진 지금, 이 장소는 세상에서 오직 강진만이 알고 있는 비밀 금고였다.
“도둑놈이 훔친 물건이니, 주인이 없는 셈이지.”
강진은 사당 뒤뜰의 우물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위에서부터 세 번째 벽돌. 그 뒤에 공간이 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우물 안으로 몸을 던졌다. 착. 가볍게 바닥에 착지해야 했으나, 비루한 몸뚱이는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젠장.”
발목이 시큰거렸다. 한숨을 내쉰 강진은 벽돌 틈새를 더듬었다.
이내 강진은 다른 벽돌들보다 미세하게 앞으로 튀어나온 벽돌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걸 누르면...’
강진은 온 힘을 다해 벽돌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10대 소년의 근력으로는 움직이기 힘든 벽돌이 오랜 세월 동안 습기를 머금어 더욱 뻑뻑해진 상태였다.
“하, 100포인트짜리 몸이라 이거지?”
강진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환생 전의 몸이었다면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을 단순한 작업들.
하지만 아이의 몸으로 전생의 움직임을 따라하려니 사소한 것 하나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 괴리감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보물이 코앞에 있는데 고작 누르는 힘이 부족해 꺼내지 못한다니.
강진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큼지막한 돌덩이를 집어 들었다.
“열려라, 참깨... 가 아니라, 열려라 이 새끼야!”
쾅! 쾅! 쾅!
거친 타격음이 우물 안을 울렸다. 돌가루가 튀고, 강진의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고통? 가문이 멸망하던 날의 고통에 비하면 이까짓 건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콰직. 마침내 고집스런 벽돌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덜컹.
묵직한 소리와 함께 우물 안쪽의 빈 공간이 드러났고, 벽돌 뒤편의 어둠 속에서 먼지 쌓인 조그마한 목갑(木匣)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강진은 떨리는 손으로 목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향긋한 약향(藥香)이 좁은 우물 안을 가득 채웠다.
탁구공만 한 크기의 검붉은 환약. 표면에는 옅은 양기(陽氣)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환단(小還丹)
소림사의 비약인 대환단(大還丹)의 보급형 복제 단약.
보급형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효능을 지니고 있었기에,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영약중의 영약.
내공을 10년 정도 증진시켜 주고, 막힌 혈도를 뚫어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는 영약이었다.
“비연, 그 쥐새끼가 어디서 이런 걸 훔쳤는지 몰라도... 고맙게 쓰마.”
강진은 고민하지 않았다. 영약의 기운을 한 방울이라도 더 흡수하기 위해선 최적의 환경에서 정성을 다해 복용해야 하는 법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걸 들고 나가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복용한다? 아니, 당장 1분 1초가 급하다.
나약한 몸뚱이로 감당할 수 있는 위협에는 한계가 있었고, 거지들이 언제 복수하러 올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힘이 없는 상태에서 보물을 들고 다니는 건 주변에 ‘나 죽여주쇼’ 하고 광고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꿀꺽.
강진은 소환단을 입에 털어 넣었다. 씹을 새도 없이, 환약은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마자 뜨거운 불덩이로 변했다.
“크으윽!!”
강진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위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단전(丹田)이 형성되지도 않은 일반인의 몸에, 10년 치의 내공을 강제로 쑤셔 박은 꼴이다. 마치 종이컵에 용암을 부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너무 성급했나..?’
전신의 혈관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피부가 벌개지고, 모공에서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이대로라면 혈관이 터져 죽는다.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전조였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강진은 혀를 깨물었다.
‘정신 차려라, 강진! 여기서 죽으면 진짜 개죽음이다!’
그는 억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전생에 익혔던 가전 내공심법, 청운심법(靑雲心法)의 구결을 머릿속으로 읊었다.
‘욕심부리지 마라. 모든 기운을 흡수하려고 하면 몸이 버티지 못한다.’
강진은 체내에서 폭주하는 소환단의 약력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이 좁아터진 혈관으로는 약력을 전부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면.
‘7할은 봉인한다.’
강진은 약력의 대부분을 억지로 끌어모아, 아랫배 깊숙한 곳에 쑤셔 박았다. 단단한 껍질로 감싸듯 기운을 압축시켜 ‘가상의 단’을 만들었다.
나중에 몸이 튼튼해졌을 때 꺼내 쓰기 위한 용도였다.
‘나머지 3할.’
남은 기운을 전신의 경락으로 흘려보냈다. 내공의 증진도 중요해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꽉 막힌 혈도를 뚫고, 뼈와 근육에 낀 노폐물을 씻어내는 ‘세수(洗髓)’.
우두둑. 우둑.
뼈가 비틀리고 근육이 찢어졌다 다시 붙는 고통이 이어졌다.
강진의 입에서 짐승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그 고통을 즐겼다. 이것은 죽어가는 고통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고통이었으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물 밖의 하늘이 완전히 캄캄해졌을 무렵.
“후우...”
강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서 희미한 정광(精光)이 스치고 지나갔다.
코를 찌르는 악취. 전신이 끈적끈적한 검은 찌꺼기로 뒤덮여 있었다. 몸 안의 독소와 노폐물이 배출된 흔적이었다.
강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가볍다. 납덩이처럼 무거웠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앙상했던 팔뚝에는 작지만 단단한 근육이 붙었고, 흐릿하던 시야는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또렷해졌다.
내공을 점검했다. 단전 쪽에 콩알만한 기운이 뭉쳐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림의 기준으로 보면, 이제 막 내공을 한 줌 쥐어짜 검에 실을 수 있는 삼류(三流)의 최하위 단계. 전생의 그가 10살 때 도달했던 경지였다.
하지만 강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올라갔다.
“하루 만에 삼류라니. 나쁘지 않군.”
보통의 무인들이 입문하는 데만 3년이 걸리는 과정을, 단 하루 만에 건너뛰었다.
물론 소환단의 뛰어난 약효 덕분이기도 했지만, 전생의 깨달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적어도 이 시궁창 같은 뒷골목에서,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힘이다.
강진은 우물 벽을 짚고 가볍게 도약했다. 팟. 방금 전에는 꿈도 못 꿀 도약력으로 단번에 우물 밖으로 튀어 올랐다.
“자, 이제 씻고 가서...”
그때였다. 강진의 귀가 쫑긋거렸다. 희미한 내공이 귀에 모이자, 일반인이라면 듣지 못했을 미세한 소리가 잡혔다.
자박. 자박.
발소리. 하나가 아니다. 다섯... 여섯?
폐사의 입구 쪽에서 횃불의 불빛이 어른거렸다.
“형님! 확실합니까? 그 새끼가 여기로 온 거?”
익숙한 목소리. 아까 낮에 팔을 부러뜨렸던 그 부하 놈이었다.
“확실해! 대장간 주인이 그쪽으로 갔다고 했다니까!”
이어지는 목소리는 왕초였다. 그런데 기세가 등등하다. 아까처럼 겁에 질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강진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사당 입구로 들어서는 무리를 지켜보았다. 왕초와 부하 셋. 그리고 그들앞에 앞장서서 걷는, 덩치가 곰만 한 사내 하나.
손에 들린 묵직한 도끼와 흉터투성이 얼굴. 거지가 아니었다. 돈을 받고 사람을 패주는 용병, 혹은 흑도(黑道)의 왈패였다.
“저기 있다! 저 우물가에!”
횃불을 든 왕초가 강진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야 이 똥개 새끼야! 내가 그냥 갈 줄 알았냐?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왕초가 침을 뱉으며 킬킬거렸다. 그가 데려온 흉터 사내가 도끼를 어깨에 걸치며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이 꼬맹이냐? 겨우 이딴 놈 잡자고 날 부른 거야?”
“아이고, 형님. 겉보기엔 저래도 아주 악독한 놈입니다. 제 부하 팔을 분질러놨다니까요.”
“호오.”
흉터 사내가 흥미롭다는 듯 강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비실비실한 쥐새끼인 줄 알았더니, 제법 똘똘하게 생겼네? 팔다리 하나씩 분질러서 노예상한테 팔아넘기면 술값은 나오겠어.”
사내들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완벽한 포위. 도망칠 곳은 없었다.
하지만 강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천천히 허리춤에 매달린 낡은 철검을 풀어 손에 쥐었다.
스르릉.
녹슨 검신이 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강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공포? 당황? 그런 것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여유였다.
“타이밍 한번 기막히군.”
강진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우두둑 소리를 냈다. 방금 막 세수(洗髓)를 끝냈다. 아직 몸에 익지 않은 힘을 시험해 볼 상대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이제 막 몸 좀 풀었는데...”
강진이 검끝을 들어 흉터 사내의 미간을 겨누었다.
“딱 좋은 샌드백들이 제 발로 기어왔어.”
***
강진의 중얼거림에 사내들은 눈길을 주고받더니 곧 킬킬 웃기 시작했다.
“똥개 새끼가 곧 죽을 것 같으니 정신이 나갔나보군. 이제 막 후회가 되고 그러냐? 이미 늦었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사내들이 달려들었다. 횃불의 일렁이는 불빛 사이로 몽둥이들이 춤을 추며 쇄도했다. 공기를 찢는 투박한 소리. 그 기세만큼은 제법 흉흉했다.
“죽어라, 꼬마 놈아!”
보통 사람이라면 그 기세에 눌려 다리가 풀렸을 것이다. 하지만 강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강진의 시야에 비친 몽둥이의 궤적은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릿했으니.
‘동작이 크다. 힘에만 의존하고 있어.’
강진은 서두르지 않았다. 호흡을 가늘게 내뱉으며, 그는 전방에서 날아오는 몽둥이의 궤적을 읽었다.
정수리를 정확히 노리고 찍어 내리는 일격.
강진은 반 보(半步) 옆으로 비켜섰다. 슈욱!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감각.
찰나의 순간, 강진의 손에 들린 녹슨 철검이 뱀처럼 유연하게 휘어졌다.
청풍검 제2식, 류수(流水).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지만, 그 끝은 송곳처럼 날카로운 찌르기 기술.
퍽! 억!
둔탁한 타격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강진의 검 끝이 앞에서 달려오던 사내의 오른쪽 손목 인대와 왼쪽 겨드랑이 급소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끄아아악!!”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몽둥이를 놓쳤다. 손목 인대가 끊어지는 고통에 팔이 마비되었고, 급소를 맞은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 그가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순간.
“비켜, 이 새끼야!”
흉터 사내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거구의 몸집이 뿜어내는 위압감은 실로 대단했다. 그가 휘두른 녹슨 도끼가 공기를 찢으며 강진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느려.’
하지만 강진의 동체시력에 비친 도끼의 궤적은 하품이 나올 만큼 뻔했다.
강진은 도끼가 머리카락을 스치기 직전, 또 다시 아주 미세하게 반 보(半步) 옆으로 몸을 틀었다.
쾅-!
도끼날이 애먼 땅바닥을 강타했다. 흙먼지가 튀고, 빗나간 공격에 중심을 잃은 흉터 사내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어?”
사내가 당황하는 찰나. 강진이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몸을 회전시켰다. 회전의 원심력을 이용한 발차기가 흉터 사내의 턱주가리에 작렬했다.
빡!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흉터 사내의 고개가 뒤로 홱 젖혀졌다. 이빨 몇 개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두 명이 나자빠졌다. 남은 것은 왕초와 부하 두 명.
“히익...!”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왕초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이게... 말이 되나? 저 비실비실한 똥개가, 어떻게 저런 움직임을 보인단 말인가.
“뭐해! 저, 저 놈 잡아!”
왕초가 떨리는 손으로 강진을 가리키며 옆에 있던 부하들을 떠밀었다.
“이, 이익!”
떠밀린 부하들이 엉겁결에 몽둥이를 빼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겁에 질려 눈을 감고 휘두르는 몽둥이에 강진이 맞을 리가 없었다.
강진은 가볍게 몽둥이 피한 뒤, 앞놈의 멱살을 잡아채 엎어치기를 시전했다.
쿠당탕!
순식간에 부하 둘이 얽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제 남은 건 덜덜 떨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왕초뿐이었다.
“자, 이제 남은건 우리 둘뿐이군.”
그리 말하며 왕초를 바라보는 강진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작가의말
중간중간 외래어가 등장합니다.. 강진이 사용하는 언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사용하게 된 단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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