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곳
입안에는 점토 비슷한 질감의 무언가가 가득 차 있었다.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려보았으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입 안의 이질감이 너무나 심해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토해냈다.
서너 번을 거세게 뱉어내고 나서야 겨우 입안의 이물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쿨럭!”
내용물을 뱉어내자 깊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횡격막 부근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았지만, 앞이 보이지 않으니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통증 부위를 눌러보기로 했다.
“······어?”
오른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 어?”
정확히 말하자면 오른쪽 어깻죽지 부분이 통째로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힘을 주려 해도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불안이 엄습했다.
설마, 아니겠지. 눈을 다시 힘껏 뜨려 했으나 모래알을 씹는 듯한 거친 마찰 때문에 도저히 눈꺼풀을 지탱할 수 없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 콧잔등을 지나 입가로 떨어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혀를 내밀어 그 액체의 맛을 보았다.
“······피?”
비릿한 쇠 맛, 피가 확실했다.
눈물에서 피 맛이 났다.
설마 눈이 멀어버린 것일까 하는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눈을 뜨기 위해 더욱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으으으으······.”
하지만 눈은 떠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왼손을 들어 눈을 확인하려 했다.
다행히 왼손은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망설여졌다.
설마 눈이 잘못되었을까.
그때 늑골 쪽에서 다시 날카로운 통증이 몰려왔다.
그래, 일단은 늑골부터 확인하자.
나는 왼손을 지그시 옆구리에 가져다 댔다.
“크아아아아! 쿨럭!”
극한의 고통이 파도처럼 몸을 덮쳤다.
그제야 아까의 상황이 기억났다.
나는 분명 엄청난 충격과 함께 날아갔다.
유리벽에 부딪히며 갈비뼈가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유리 벽 옆에 쓰러져 있는 것일까.
피는 왜 흐르는 거지?
유리가 깨지면서 파편이 내 눈으로 박힌 건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가설이었지만,
따갑고 떠지지 않는 눈을 생각하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럼 오른손은 왜 감각이 없는 거지?
“크어억!”
갑자기 기침이 터지며 식도 깊은 곳에서 뜨거운 액체가 역류했다.
입안 가득 들어찬 뜨거운 액체는 불쾌감을 극치로 끌어올렸다.
가슴 속이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억지로 뱉어내려 했으나,
그 동작을 할 때마다 늑골이 비명을 질러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렀다.
왼손으로 눈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망설여졌다.
나는 왼손을 올려 오른쪽 어깨 부분을 더듬거렸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이질감이 온몸에 오한을 불러일으켰다.
분명 어깨를 만지고 있었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질감은 마치 엘리베이터의 금속 벽을 만지는 듯했다.
어깨가 없어진 것일까.
아주 오래전 보았던 영화 '퍼시픽 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거대 괴수에게 어깨를 통째로 뜯겨나가며 주저앉던 로봇의 모습.
불안이 엄습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어깨가 잘려 나갔다면 이렇게 살아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로봇이 아니니까.
“으으으으······.”
무언가 타는 냄새가 났다.
고무 타는 냄새와 오징어를 굽는 비릿한 내음이 뒤섞인 듯한 악취였다.
매캐한 연기 때문에 자꾸 기침이 나오려 했지만,
고통이 두려워 억지로 참아냈다.
입에는 다시 뜨거운 액체가 고였다.
이번에는 피 맛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아주 시고도 쓴 맛이었다.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힘을 주어 뱉을 기운조차 없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액체가 옆으로 흘러내리도록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끼이이이이이잉—”
머리 위에서 기분 나쁜 기계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려 했으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그때, 따끔거리는 눈 사이로 찰나의 환한 빛이 비쳤다.
천국의 문이라도 열리는 것일까.
“아아······.”
잠시 숨을 골랐다.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유 없는 흰 빛은 사람을 평온하게 만드는 법이었다.
“콰콰과과광!”
흰빛이 돌연 붉게 변하며 몸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크어······컥! 크아아아아!”
진동이 올 때마다 가슴은 칼로 찌르듯 난도질당했다.
나는 왼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고 흔들림을 멈추려 했지만,
손에 잡힌 금속성 물체 역시 내 몸과 함께 요동치고 있었다.
“하······ 사, 살려줘······ 제발······.”
진동은 더욱 거세졌고,
고무 타는 냄새에 이어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강렬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공사장에서 용접할 때 나던 그 매연 냄새였다.
“아아······.”
온몸이 뜨거워졌다.
특히 왼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으앗!”
나는 금속 물체에서 황급히 손을 뗐다.
뜨거운 주전자에 닿은 것처럼 손바닥 전반에 고통이 눌어붙었다.
주변의 공기가 사우나처럼 급속도로 달궈졌다.
고통이 너무 강해지자 오히려 감각이 무뎌졌다.
죽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그냥 누가 나를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었다.
“쿠구구구구궁—”
내 몸과 나를 둘러싼 모든 공간이 굉음을 내며 추락했다.
마지막까지 눈은 떠지지 않았다.
그저 희미한 붉은 빛 사이로 무언가 급격히 흔들리며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의 비참한 몸뚱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쿠와아아아아아······ 쾅!”
빛.
한 줄기의 노란 빛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조용한 목소리가 빛을 타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몸이 붕 떠올랐다.
눈이 다시 감겼다.
-
다시 빛이었다.
형체가 흐릿한 무언가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내 몸에 손을 가져다 대었고,
그들끼리 소리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시 눈이 감겼다.
“으으으······.”
“어? 대장, 이리 와 봐!”
아이의 급박한 목소리와 함께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이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욱신거렸다.
눈을 뜨자 진회색으로 점철된 평평한 천장이 보였다.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컹!
무언가 내 몸을 억류하고 있었다.
눈을 조심스럽게 뜨자, 눈이 살짝 보이기 시작했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했지만,
언뜻 보기에 그것은 쇠사슬이었다.
“이상하다. 아직 일어날 때가 아닌데.”
오른쪽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의 아이 목소리와는 다른,
성인 남자의 음성이었다.
“크어어억!”
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늑골은 아까보다 통증이 덜했다.
나는 참아왔던 기침을 마음껏 해댔다.
“쿨럭! 쿨럭!”
끈적이는 침이 먼지로 얼룩진 티셔츠 위로 뚝뚝 떨어졌다.
“으······ 더러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럽든 말든 상관없었다.
기침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토록 행복하고 귀중한 일인지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기침하면 여기가 안 아파?”
남자가 장난 섞인 어투로 물으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은 막대기로 내 늑골을 찔렀다.
“으어어어어...”
잠잠해졌던 고통이 다시 날카롭게 재발했지만,
너무 오랜만에 성대를 썼는지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 어어억!”
고통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다시 의문으로 바뀌었다.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아이가 다가와 내 오른팔에 무언가를 가져다 댔다.
“아니, 그쪽 말고 반대쪽에.”
남자가 아이에게 지시했다.
내 질문에는 대답할 가치조차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여기······ 크어어억.”
또다시 속에서 뜨거운 액체가 역류했다.
말을 하려 했으나 질질 흐르는 액체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문득 게임 속의 괴물이 떠올랐다.
지금 내 몰골이 딱 그 꼴이었다.
고통스럽고, 더럽고, 감금당한 처지.
이곳이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자행하는 실험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왼쪽 팔에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아이가 주사기로 내 팔에 정체 모를 액체를 주입하고 있었다.
“뭐 하는······ 씨..바...알... ”
“넌 좀 더 누워 있는 게 좋겠다. 그리고 다음부터 나한테 함부로 욕하면······.”
남자는 내 늑골을 찔렀던 검은 막대기를 내 이마 위로 가져다 댔다.
초점이 맞춰지며 막대기의 정체가 자세히 보였다.
리볼버 권총이었다.
"뒤진다."
“아······.”
다시 눈이 감겼다.
-
얼마가 지났을까.
다시 눈이 떠진 것은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닌, 허리를 끊어낼 듯한 극심한 통증 때문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질감이 상당했다.
중세 시대의 지하 감옥처럼 바닥 곳곳에는 네모난 통에 불을 지피고 있었고,
매캐한 연기 사이로 깨진 유리와 벽돌 조각, 휘어진 철골 구조물 같은 것들이 보였다.
철컹.
이 빌어먹을 쇠사슬은 여전히 내 몸을 구속하고 있었다.
그제야 아까 보았던 꼬마와 총을 든 남자가 떠올랐다.
리볼버 권총은 사단장 허리춤에서 군대에서나 보던 물건이었는데,
이런 폐허 속에서 마주하게 되니 생소함을 넘어 의문투성이였다.
남자의 옷차림은 군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총을 소유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꼬마는 그 남자를 ‘대장’이라 불렀다.
그것이 단순한 별명인지,
어떤 집단의 직함인지 도무지 추리할 단서가 없었다.
“으, 간지러워.”
머리가 몹시 가려웠다.
그러고 보니 몸을 짓누르던 강한 통증들은 대부분 잦아들어 있었다.
조명이 워낙 부족한 데다 누워 있는 상태라 내 몸이 어떤 꼴인지 확인하기는 어려웠으나,
다행히 눈은 무사한 것 같았다.
머리를 긁고 싶었지만 손이 묶여 방법이 없었다.
나는 목에 힘을 주어 바닥에 머리를 비벼보려 했다.
쿵!
바닥 재질은 딱딱한 돌이었다.
머리만 아플 뿐 간지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풀어줘야만 해결될 일이었다.
“저기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크앗!”
목구멍 깊은 곳에서 가래를 끌어모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힘껏 내뱉었다.
“퉤!”
하지만 뱉는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가래는 미처 날아가지 못하고 반쯤 내 얼굴에 달라붙었다.
쇠사슬에 묶인 손으로는 떼어낼 수도 없었다.
“저기요! 누구 없어요!”
말을 내뱉을 때마다 가래가 얼굴 피부에서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기분 나쁜 감촉을 전했다.
또각, 또각.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하이힐 소리였다.
“살려주세요······.”
내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뒤?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지금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살려주세요······.”
바위에 깔려 죽어가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왠지 눈을 뜨면 바로 앞에 그녀가 있을 것만 같았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아 심장이 요동쳤다.
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그만 말을 걸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어디서 들리는지 모를 그녀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귓가를 맴돌았다.
“제발요······ 제가 그런 게 아니잖아요······.”
“네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네가······ 나 바위로 죽였잖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내가 안 그랬다고!”
나는 온몸에 힘을 잔뜩 준 채 비명을 질렀다.
눈이 번쩍 떠졌다.
한 남자가 보였다.
가죽 혁대에 리볼버 권총을 찬, 아까 그 남자였다.
“너 도망치면서 누구 죽였지?”
남자가 물었다.
“아니······.”
“야, 반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모닥불 같은 조명에 비친 그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확실히 군인은 아니었으나,
당장이라도 발포할 것 같은 그 표정을 보니 일단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앞섰다.
“죄송합니다.”
“야.”
“네.”
“궁금한 거 세 가지만 물어봐.”
“음······.”
“생각하지 말고 물어라.”
강남역, 아메리카노, 테니스 스커트의 여자, 미사일, 유리창, 3번 출구, 그리고 죽어가던 여자······.
기억의 파편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여긴 군대다.”
남자가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저는 왜 묶여 있나요?”
“너를 아직 믿을 수 없으니까.”
믿음을 주면 풀려날 수 있다는 뜻인가.
“저를 믿게 하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짝, 짝, 짝.
남자가 천천히 박수를 세 번 쳤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생각보다 똑똑한데? 생긴 건 꼭 좀비 같이 생겨가지고.”
좀비 같다니.
내 꼴을 볼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입가에 가래가 붙어서 덜덜 떨고 있는 새끼를 내가 어떻게 믿어?”
“아······.”
“야, 너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야?”
“가래를 떼고 싶은데요······.”
“하하하하! 이거 골 때리네. 그럼 그다음은?”
“쇠사슬을 풀고 싶습니다.”
남자의 표정이 살짝 풀리는 듯 보였다.
그를 안심시키려면 나를 철저히 저평가하게 만들어 방심을 유도해야 했다.
“쇠사슬 풀면 뭐 할 건데?”
“그건 아직 생각 안 해봤습니다.”
“야.”
“네.”
“내가 호구로 보이냐?”
남자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악!”
남자는 갑자기 내 가슴을 때렸다.
주먹이 아닌 발이었나.
타격이 생각보다 매섭지는 않았지만 통증은 실재했다.
아니, 더 아픈 척을 해야 했다.
“아아아아아아!”
“이 새끼, 이거 약이 다 떨어졌나? 왜 이렇게 아파해?”
'약이라고? 주사?'
의문이 가시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
거칠게 달려오는 발소리와 동시에 여리여리한 목소리가 남자 뒤편에서 들려왔다.
불통 속에서 일렁이는 불꽃이 뛰어오는 꼬마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가 다시 수축시켰다.
“왜 벌써 왔어?”
남자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방해받은 아이처럼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13호 상태가······.”
“야!”
남자가 꼬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 움찔했다.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너 말고. 쫄지 마.”
“대장······.”
“야, 그런 이야기를 꼭 지금 해야겠어?”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라······.”
꼬마, 아니 청소년으로 보이는 소년은 풀이 죽은 채 대답했다.
“됐고, 야!”
“네.”
“너 말고, 임마.”
남자는 나를 보며 웃기다는 듯 미소지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사과부터 내뱉었다.
“나비야, 열쇠 가져와라.”
“대장······ 벌써 15번째예요······.”
“야······.”
남자의 목소리에 다시 살기가 감돌았다.
“가져오라면 가져와.”
꼬마의 그림자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이내 멀어지며 사라졌다.
“넌 운 좋은 줄 알아라.”
“네?”
“나를 만나게 됐으니까.”
“······감사합니다.”
“재밌는 새끼······.”
남자는 다시 미소 지었다.
일단 살아남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자.
남자는 불이 붙은 통 쪽으로 걸어가더니,
철근 비슷한 꼬챙이로 그 중에서 긴 막대기 하나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야, 찬 데 오래 누워 있어서 몸이 안 움직일 테니까, 일단 몸 좀 녹여라.”
“······감사합니다.”
남자가 끌어다 준 널빤지에는 작게 글자가 쓰여 있었다.
‘타는 곳’
불이 활활 타고 있으니 타는 곳이 맞긴 하겠지만,
그 글자 옆에는 내가 너무나 익숙하게 보아왔던 지명들이 적혀 있었다.
"어...어?"
'정자, 양재 방면 타는 곳'
그것은 지하철 안내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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