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구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새글

출한도
작품등록일 :
2026.01.18 20:18
최근연재일 :
2026.03.14 01:00
연재수 :
16 회
조회수 :
260
추천수 :
0
글자수 :
105,834

작성
26.01.24 00:00
조회
25
추천
0
글자
19쪽

그와 그녀

DUMMY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이곳은 지하철 역내였다.

폭발의 충격을 정면으로 맞았을 때는 분명 지상이었는데,

어떤 경로로 이 깊은 지하까지 흘러 들어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현재 이곳에 있는 인간은 살기 어린 눈을 한 남자와 그를 따르는 꼬마, 그리고 나까지 셋뿐인 듯했다.


탁!


불안정하게 타오르던 불꽃이 튀며 내 쪽으로 불똥이 날아왔다.


“으으······.”


남자가 나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저 남자는 도대체 왜 나를 결박해 두었던 걸까.

그보다 몸의 통증이 이토록 빨리 가신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자생력이 이토록 경이로운 것이었는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아까 그 꼬마였다.


“대장, 여기 열쇠요. 그리고 13호는······.”


“알았어. 됐으니까 그냥 치워버려.”


13호. 아마도 사람을 뜻하는 은어 같았다.


“야.”


남자가 나를 쳐다보며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네.”


“쇠사슬 풀고 나면 간단하게 테스트를 할 거야. 통과하면 우리 식구가 되는 거고, 아니면 알지?”


전신에 긴장이 서렸다.


스스릉.


차가운 금속 마찰음과 함께 쇠사슬이 풀려나갔다.


“좀 움직여봐.”


“감사합니다.”


가장 먼저 내 몸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허리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군대 시절, 수통을 베개 삼아 딱딱한 침상에 누워 있다 일어날 때 느끼던 그 기분 나쁜 마비 증상과 비슷했다.

결국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서야 겨우 상체를 세울 수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드러난 내 꼴은 처참했다.

옷은 온통 먼지와 오물로 뒤덮여 있었고,

짚고 있는 왼손바닥은 화상을 입은 듯 울퉁불퉁하게 변해 있었다.

다행히 오른쪽 어깨와 팔은 붙어 있었지만, 힘을 주거나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오른쪽 팔꿈치 안쪽 접히는 부분에 여러 개의 구멍이 나 있었는데, 무언가에 쏘인 것처럼 붉게 부풀어 올라 흉측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이 상처가 신경을 건드려 팔의 기동을 방해하는 듯했다.


입고 있던 바지는 여기저기 찢겨 나가 기괴한 히피 스타일처럼 변해 있었다.

비틀거리며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후들거렸지만, 일단 걸을 수는 있었다.


“허억······ 허억······.”


“힘드냐?”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아닙니다.”


“자······ 그럼 테스트를 시작해 볼까?”


남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했다.

일단 그는 멍청하고 무능해 보이는 자에게 경계심을 푸는 듯했다.


“너 군대 갔다 왔냐?”


나를 대장이라 부르라는 태도, 꼬마를 부하처럼 거느리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총을 소지한 채 ‘여긴 군대다’라고 선언한 남자였다.


“아뇨.”


나는 거짓말을 선택했다.


“생긴 건 꼭 예비군같이 생겼는데.”


“석사 과정을 공부하느라 아직 못 갔습니다. 취업이 안 돼서 도피하듯 공부만 했습니다.”


실수였다.


학력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 앞서 나갔다.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똑바로 차렷해봐.”


나는 다리를 모으지 않은 채 팔만 어설프게 몸 옆에 붙였다.


“차렷하라고, 임마.”


나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어설픈 자세를 유지하는 게 더 힘들었다.


“······야.”


“네.”


“앞으로 나를 대장이라고 불러라.”


“······감사합니다, 대장님.”


“나비야, 인수인계해.”


“······대장.”


“오랜만에 들어온 남자다. 잘 가르쳐봐.”


남자는 아까 그 꼬마처럼 불빛에 커다란 그림자를 남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야.”


꼬마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지 않았다.

앳된 티를 벗어내지 못한 청소년이거나, 갓 성인이 된 청년 쯤으로 보였다.

선이 고운 얼굴이었다.

그가 반말을 내뱉었지만, 나는 고분고분한 표정을 지었다.


“네.”


“······넌 자존심도 없냐?”


“······네?”


“너보다 한참 어린 나한테 반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냐고 묻잖아, 병신아.”


“······제가 뭘 잘못했기에 욕을 하시는 겁니까?”


“왜, 병신 새끼야. 내가 욕하면 안 되냐?”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날카로운 턱선.


군데군데 그을음이 묻었지만 피부는 희고 깨끗했다.


붉은 조명이 그의 얼굴 위에서 일렁였다.


“잘못한 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깔고 그의 소매 끝을 유심히 살폈다.

손톱이 유난히 길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색이 칠해져 있었다.


여자였다.


“야, 내 눈 보면 쫄리냐? 병신아?”


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헐렁한 바지와 운동화가 성별을 감추고 있었지만, 이 지옥 같은 하수구에서 남자가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할 리는 만무했다.

키는 160cm 정도.

감기에 걸렸는지 목이 잠겨있는 느낌이었지만, 목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니 꼬마가 아니라 여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 이 새끼가······ 야, 너 나 때리고 도망가고 싶지? 일부러 병신인 척하는 거지?”


남자가 자리를 비운 상황.


제압할 기회였다.

오른손은 쓸 수 없지만 왼손의 완력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소매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팔목은 매우 가냘팠다.

그녀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야, 덤벼봐. 너 남자라며?”


확실히 여자였다.

남자가 남자에게 이런 식의 도발을 하지는 않는다.

목을 조를까, 말까. 찰나의 고민이 스쳐 지나갔다.


“말 씹냐?”


퍽!


그녀가 내 늑골을 주먹으로 쳤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는 과장되게 몸을 웅크렸다.


“야, 야, 야!”


그녀는 연달아 주먹을 날렸고, 나는 그때마다 비명을 섞어 가며 아픈 척을 해댔다.

그녀가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야, 가만히 있지 말고 쳐보라고!”


탁!


그때, 그녀 바로 옆의 화로에서 불꽃이 튀며 소리가 났다.

찰나의 빛이 회백색 벽면을 비췄고, 그곳에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일렁였다.


남자가 가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함정이었다.


“아악!”


나는 일부러 바닥에 주저앉으며 볼품 없이 넘어졌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우는 시늉을 하며 목소리를 떨었다.

벽면의 흐릿한 그림자가 잠시 움직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앞으로 나한테 무조건 복종해. 그래야 살 수 있어. 알겠어?”


“네······.”


앳된 목소리의 여자는 말이 빨랐다.

나는 정보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세웠다.


“여기는 지금 지하철 안이야. 우리 대장은 이곳에 남아서 너 같은 부상자들을 치료해주는 분이지. 너 말고도 많은 사람이 대장의 은혜를 입었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치료가 끝난 사람들은 이곳을 나갔고, 우린 또 다른 생존자를 찾기 위해 남아 있는 거야.”


“그렇군요.”


“말 끊지 마.”


그녀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너, 밖 상황 아는 대로 다 말해봐.”


“강남역에 영화를 보러 갔었는데······.”


“야, 중요한 것만 말해.”


“빌딩이 무너졌고, 폭발과 함께 의식을 잃었습니다. 깨어보니 여기였고요.”


“소지품은?”


“백팩을 메고 있었는데 사라졌습니다.”


“그 가방은 우리가 가지고 있어. 다른 짐은 더 없었나?”


“······네, 없었습니다.”


“······핸드폰도 없는 건가.”


그녀가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오른손을 슬그머니 움직여 허벅지 쪽을 만져보았다.

핸드폰이 있었다.

티셔츠에 가려진 데다 바지가 너무 터질듯이 타이트해서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너는 아직 치료가 필요한 상태야. 알겠어?”


“네.”


“그리고, 네가 나갈 탈출구는 네 스스로 만들어야 해.”


“탈출구가 있습니까?”


그녀는 나를 한번 훑어보더니 등을 돌린 채 말을 이어갔다.


“그래, 있어. 하지만 한 명이 나가고 나면 반드시 폐쇄해야 해서 지금은 닫혀 있는 상태지.”


“왜 닫아야 합니까?”


“······탈출한 뒤에 구멍을 메우지 않으면 남아 있는 우리에게 피해가 오니까.”


“그게 무슨······.”


“야.”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려 나를 쏘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식사는 하루에 한 번 준다. 매일 한 번은 대장에게 가서 치료를 받아. 나머지 시간에는 탈출구를 만들고, 식량을 확보하고, 생존자를 수색하고, 땔감을 주워오면 돼.”


“알겠습니다.”


“여기 잠시 대기해. 대장에게 보고하고 올 테니.”


그녀가 사라졌다.

그녀가 간 방향을 보니 맞은편 벽면에도 불이 피워져 있었다.

저 불빛이 아니었다면, 나는 남자가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여자를 제압하려다 죽었을 것이다.


이곳은 플랫폼이 아니었다.

지상과 지하의 중간 지점쯤 되는 공동(空洞) 같았다.

의사라는 사람이 왜 권총을 차고 다닐까.

그리고 저 여자애와의 관계는 무엇일까.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왜 굳이 나를 치료해 주었냐는 점이었다.


13호라는 번호, 그리고 내가 15번째라는 말.

그렇다면 앞선 14명은 정말 탈출한 것일까?

탈출구가 있다면 저들은 왜 나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야.”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깡!


금속성 물체가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삽이었다.


“주워.”


남자가 조소 섞인 명령을 내렸다.

나는 삽자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반드시 살아남아 이곳을 나갈 것이다.


남자와 여자.

'대장'이라는 호칭을 쓰고 나이 차이가 꽤 났지만, 결코 연인 관계는 아니었다.

남자와 함께 있을 때 여자가 이성(異性)으로서 남자를 대하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야, 저쪽 통로 방향으로 가서 막힌 곳 파.”


남자가 명령했다.


“네.”


삽이라니.

군대에서도 잘 잡지 않던 삽을 손에 쥐었다.

왼손으로 삽자루 끝을 쥐고 오른손으로 중간 부분을 잡았다.

하지만 오른손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흙을 파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천천히 떠서 옮기는 수준이었다.


“하······ 진짜 군대 안 갔다 온 게 맞네.”


남자가 뒤에서 비웃음을 섞어 조소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자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뭘 봐.”


“저······ 힘이 너무 안 들어가서 그러는데, 밥부터 조금 주시면 안 될까요?”


“뭐?”


“오른손에 감각이 잘······.”


남자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팍!


“아아악!”


눈앞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나는 삽을 놓치며 뒤로 나자빠졌다.

지하 공동에 삽이 나뒹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야······ 뒤질래?”


“죄송합니다.”


“너, 저기 타는 불 보이지?”


“네.”


“저거 다 타서 꺼질 때까지 한 번만 더 나한테 말 걸거나 일 멈추면, 그때는 진짜 죽는다.”


“알겠습니다.”


“하아, 이 새끼 이거 운동장에서 완전군장하고 굴려봐야 정신을 차리는데······.”


운동장?

나는 귀를 의심했다.

운동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일단 나는 땅바닥의 삽을 집어 들고 다시 벽을 파기 시작했다.

오른손에 억지로 힘을 주자 아까보다는 진척이 있었다.

사실 이것은 흙이 아니었다.

무너진 시멘트 덩어리들이었다.

더 맞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육체적 고통을 잠시 눌렀다.


스윽, 탁.


남자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압박감에 필사적으로 시멘트 조각들을 파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무릎과 허벅지는 따로 노는 듯한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이 아니라, 마치 고장 난 로봇을 조종하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한계치를 넘어선 오버클럭 상태였으나 멈출 수 없었다.


깡!


삽 끝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걸리며 손목이 튕겨 나갔다.


“아이씨······.”


삽을 고쳐 잡으려 했으나 오른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억지 노역에 근육이 완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보다 오른팔이 더 길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강한 이질감에 어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팔이 어깨 관절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어깨가 빠진 것이었다.


“어······ 어······.”


토할 것 같은 현기증이 밀려왔다.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붙잡아 위로 밀어 올렸다.

어깨에서 오돌뼈를 씹는 듯한 서늘한 소리가 났다.

고통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큰 공포가 되어 심장을 난도질했다.

식은땀이 눈으로 흘러 들어가 시야를 가렸다.


“으으······.” “야, 너 일 안 하고 뭐 해, 이 새끼야!”


뒤에서 남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파······ 팔이······.”


머릿속이 핑 돌았다.

시야가 급격히 흔들리더니 암전되었다.


쿵.


정신이 가물거리는 와중에 아까 남자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이 새끼 이거 운동장에서 완전군장하고 굴려봐야 정신을 차리는데.'


운동장이라는 단어를 쓰는 군필자는 없다.

군인이라면 누구나 '연병장'이라고 말한다.

실수일까? 아니면 의도된 거짓일까.

그가 내게 군필 여부를 물은 이유, 그리고 내가 미필이라고 했을 때 나를 살려둔 이유를 조합해 보았다.


반대급부로 이 남자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결핍을 감추기 위해 과도하게 '군대'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는 총을 쏠 줄 모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눈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총으로 가슴을 툭툭 치거나, 총을 벨트에 찬 채 주먹을 휘둘렀을 뿐이다.

진정으로 위협하고 싶었다면 총구만 겨눠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그가 차고 있는 것은 리볼버였다.

리볼버는 보통 장성급이나 경찰들이 소지한다.

여자는 그를 '의사'라고 소개했지만, 정작 남자의 행색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나비야, 이제 고집 좀 그만 피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눈을 뜨자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곳에 남자와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 옆에는 007 가방 같은 케이스 두 개가 놓여 있었고, 여자는 구부정한 자세로 남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려 하기에 나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대장······ 우리 이제 나가자.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야, 내가 말했잖아! 서울 지역만 벗어나면 안전하다고!”


“이렇게 해서 언제 서울 밖으로 나가는데!”


여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말이 점점 빨라졌다.


“저 새끼가 저 구간만 파면 돼! 강남도, 양재도 전부 지하철 통로 쪽만 무너져 있었다고! 여기만 뚫으면 바로 정자역이야! 거긴 경기도라고!”


양재와 정자 사이라면 양재 시민의 숲 근처일 것이었다. 강남역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그들이 나를 여기까지 옮겨온 모양이었다.


“얼마 안 있으면 쟤도 죽어! 대장도 알잖아. 벌써 일곱 병이나 썼어! 저 새끼가 지금 걸어 다니는 것도 기적이라고. 파다가 죽어버리면 어떡할 거야? 대장이랑 내가 저기 직접 팔래? 저번처럼 다섯 명씩 매몰돼서 죽어봐야 정신 차릴래?”


“아니, 그럼 다른 방법이 있냐고!”


“대장, 그냥 지난번에 뚫어놨던 강남역으로 돌아가자······.”


“야, 너 미쳤어?”


“거긴 확실히 통로가 있었잖아······ 우리가 조금만 다시 뚫으면······ 콜록, 웩! 크어헉!”


여자가 거칠게 기침하더니 구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참았다.


“하아······ 그러니까 내가 맞으라고 했지? 그러다 너 죽거나 미친다니까. 나 약올리냐? 지금 내가 땅을 못파니까 이지랄 하고 있는 거 아냐! 그리고 강남에서 그럴 거면 경찰 세 명을 다 죽였어야지.”


남자의 말을 여자가 다급히 끊었다.


“그건 오해라고 했잖아!”


“결국 네가 그 새끼 좋아해서 풀어주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 아냐? 그 새끼가 지상으로 올라가서 가만히 있겠어? 우리 다 불었겠지! 경찰한테 잡히면 끝장인 거 몰라? 마약류에 경찰 살해까지······ 전쟁이든 뭐든 알 게 뭐야. 서울로 돌아가는 순간 우린 끝이야.”


“대장······ 진짜야. 우리 잡을 사람 없어. 내가 핸드폰으로 봤어. 서울이 공습받았다고······ 제발 이제 올라가자.”


“야, 그때 네가 본 걸 어떻게 믿어? 약 기운에 취해 있었을 때인데! 나비야, 제발······ 경기도만 가면 다시 약 구할 수 있어. 나 못 믿어? 그때까지만 이거 맞으면서 버티자.”


“싫어! 나 이제 그만둘 거야······ 대장, 우리 이제 그만하자. 서울로 가자고······ 13호가 죽는 거 대장도 봤잖아. 계속 맞다 보면 우리도 그렇게 될 거야.”


“야! 여기만 나가면 된다고! 저 새끼 죽을 때까지 파게 시키면 삼 일 안에는 나갈 수 있어!”


“이제 시간도 몰라.”


“뭐?”


“시계가 고장 났어.”


“하, 씨발! 그걸 왜 이제야 말해!”


남자의 고함이 공동에 메아리쳤다.


“대장······ 이제 규칙적으로 투약하는 것도 불가능해. 편의점 식량도 바닥났어. 우리 이제······.”


“이 씨발년이!”


“아악!”


여자가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개 같은 년! 경찰이랑 눈 맞았을 때 죽였어야 했는데! 일부러 시계 고장 냈지? 이 개 같은 년아!”


“아악! 대장! 제발······ 제발 그만해.”


탁!


왼팔에 불똥이 튀었다.

지독하게 뜨거웠다.


“으으으······.”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남자의 발길질이 멈췄다.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


“······아아아. 어깨가 너무 아파······.”


고통스러운 척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야, 이 새끼야!”


남자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퍽!


“으아아아아!”


그가 내 복부를 걷어찼다.

지옥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약 기운이 떨어졌는지, 등 밑에 깔린 삽자루의 질감까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다시는 안 졸게요!”


“병신 새끼가! 넌 오늘 죽었어.”


“열심히 일할게요. 깜빡 졸았나 봐요······.”


“후······.”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다시 주저앉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아픈 거지?


“너 가만히 있어!”


남자가 가방 쪽으로 뛰어가더니 무언가를 꺼내 왔다. 주사기였다.


“이제 그만해!”


여자가 소리치며 남자를 붙잡으려 했다.


“미친년이!”


퍽!


남자가 007 가방으로 여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여자가 쓰러졌지만,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녀의 회색 티셔츠 아래, 바지춤에 꽂힌 리볼버 권총이 살짝 보였다.

그녀에게도 총이 있었다.

경찰에게서 빼앗은 총인 모양이었다.


“야, 팔 이리 내!”


“으악!”


남자가 내 왼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가방 안에는 숫자가 적힌 견출지가 붙은 주사기들과 약병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이미 상당수의 주사기가 비어 있었다.

남자는 가장 왼쪽의 주사기를 꺼내 약병의 액체를 빨아들였다.


“야, 너 아프지? 이거 맞으면 하나도 안 아파. 흐흐흐.”


그가 주사 바늘을 내 팔에 꽂으려 했다.

아마 진통제 또는 각성의 일종인 것 같았다.

내가 고통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


“그만해! 이 개새끼야!”


여자가 소리치며 자신의 권총을 꺼내 남자의 머리를 겨누었다. 거리는 15m 정도 되는 거리.


"나비 너 미쳤어?"


남자는 당황한듯 헛웃음을 치며 여자의 권총을 치우려했지만, 여자는 권총을 천천히 장전했다.


“······그만하라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하수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 죽음의 공포 NEW 21시간 전 2 0 11쪽
15 예의 NEW 22시간 전 2 0 11쪽
14 죽음의 골짜기 26.03.08 8 0 18쪽
13 레토나 26.03.08 7 0 16쪽
12 드론 26.03.07 8 0 13쪽
11 수액주사 +1 26.03.07 8 0 15쪽
10 전차 26.02.28 8 0 14쪽
9 소대장과의 조우 26.02.14 11 0 17쪽
8 환풍구 26.02.08 10 0 16쪽
7 덕트 26.02.07 11 0 15쪽
6 오빠 26.02.01 11 0 16쪽
5 식량은 어디서 26.02.01 15 0 13쪽
4 군필의 의미 26.01.31 18 0 10쪽
» 그와 그녀 26.01.24 26 0 19쪽
2 보이지 않는 곳 26.01.18 47 0 16쪽
1 2016년 여름의 오후 날 26.01.18 69 0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