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은 어디서
인간의 심리란 참으로 기묘해서, 방금 전까지 나를 압박하던 여자가 이제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소녀처럼 보였다.
내 목소리에는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너 몇 살이야?”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여자는 내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름은?” “나이빈······ 이요.”
“특이한 이름이네.”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까지 저자세로 나올지 확인해야 했다.
확실하게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지 않으면, 언젠가 저 '대장'에게 그랬듯이 나에게도 총구를 겨눌지 모를 일이었다.
여자는 나와 리볼버를 번갈아 보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발요······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릴게요. 살려만 주세요.”
“원하는 대로?”
다섯 걸음, 네 걸음, 이제 세 걸음 앞이었다.
“흐흐흐······.”
나는 일부러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려보았다.
“제발······ 흑흑.”
그녀는 두 팔로 가슴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마 과거에 비슷한 상황에서 '대장'에게 몹쓸 짓을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나는 도덕군자는 아니었지만, 이런 극한 상황에서 이성 잃은 짐승처럼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행히도 아직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양심, 도덕 같은 가치들이 본능적인 성욕보다 확연히 앞서 있었다.
나는 반드시 '인간'으로서 이곳을 나갈 것이다.
“일어나.”
여자는 가슴을 가린 채 떨며 일어섰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조명에 비쳐 보였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네.”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여자의 설명이 필요했다.
“나한테 놓았던 이 주사기, 도대체 무슨 약이야? 마약이지?”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마약은 아니라고 들었어요. 각성제 같은 거라고······.”
“이걸 어디서 구했어?”
“저희는 그저 '두부 트럭'일 뿐이에요.”
“두부 트럭? 그게 뭔데?”
“약과 돈을 세탁해 주는 사람들이요. 이 약이 어디서 오는지는 저도 몰라요.”
“너, 이 약 안 맞은 지 얼마나 됐어?”
“그걸 어떻게······.”
“아까 너희끼리 하는 말 다 들었어. 나처럼 약을 맞다가 갑자기 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구토 증세가 오고, 안 아프던 곳들이 아프기 시작해요. 님······ 님처럼 많이 다친 사람은 통증이 상상을 초월할 거예요.”
“앞으로 '님'이라 부르지 말고 '대장'이라고 불러.”
여자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는 의식적으로 리볼버를 쥔 왼손에 힘을 주었다.
“네, 대장님.”
순응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야.”
“네?”
“호칭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저, 죄송합니다.”
“됐다. 에휴. 겁줘서 미안하다.”
“네?”
“겁줘서 미안하다고.”
나는 여자 옆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았다.
여자는 여전히 나를 경계했다.
“나는 살면서 범죄 한 번 저지른 적 없고, 마약이 뭔지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몸에 약 기운이 돌고 사람까지 죽였지.”
여자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
발끝을 모아 몸 쪽으로 붙이고, 다리가 벌어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무릎을 꼭 쥐고 있었다.
“여자 몸으로 그동안 참 고생 많았겠다. 괜찮아?”
여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가 모르는 사연이 많겠지. 어쨌든 난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고 싶어. 그러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네······.”
여자의 경직됐던 몸짓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아까 듣기로 강남역에 출구가 있다고 했지?”
“네······.”
“거기 가면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거야?”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안 올라갔어?”
“그건······ 죽은 대장이 못 올라가게 했어요.”
“잡힐까 봐 두려웠던 건가?”
“네. 지상에 가면 잡혀갈 거라고 믿었어요. 그래서 올라가던 중에 같이 가던 경찰들에게서 총을 뺏고······ 그들을 죽였죠.”
“그게 아까 말한 세 명의 경찰이군.”
“네. 그러고 나서 다시 이쪽으로 도망쳐 들어온 거예요.”
“총이 두 자루뿐인 걸 보니 세 명 중 한 명은 살아남았나 보네.”
“······네.”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불안하게 떨렸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오만 원권 지폐가 아닌 다른 땔감이 있는지 주변을 살폈다.
각목 조각과 폐기물 몇 개를 집어 통 안으로 던져 넣었다.
“아, 그건 넣으면 안 돼요! 연기가 독해서 죽을지도 몰라요.”
“어? 미안.”
나는 재빨리 검고 네모난 플라스틱 뭉치를 불통에서 끄집어냈다.
“앗, 뜨거!” “크큭.”
그 모습을 본 여자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니까 예쁘네.”
“네?”
여자가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이며 부끄러워했다.
나는 다시 그녀 옆으로 가서 앉았다.
이제 그녀는 나를 이전만큼 경계하지 않았다.
“몇 살이야?”
“스물한 살이요.”
“대학교 2학년이겠네?”
“대학 안 다녔어요.”
“난 서른 살이야. 대학원 다녔고.”
“아······.”
“그냥 조크. 분위기 좀 띄워보려고.”
“조크...가 뭐예요? 야한 말... 그런 거예요?”
“음······.”
상식의 차이가 느껴졌다.
화제를 돌려야 했다.
“강남역까지 가려면 여기서 얼마나 걸려?”
“삼 일 정도는 걸릴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오래 걸리지?”
“불을 피우면서 가야 하거든요. 바닥에 날카로운 파편이 많아서 조명 없이는 못 가요. 식수랑 먹을 것도 구해야 하고요.”
“불은 횃불을 만들면 되고, 음식은 싸서 다니면 되잖아.”
“횃불을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요.”
“막대기랑 솜, 석유만 있으면 간단해.”
“그런 거 없는데······.”
“음, 그럼 식수랑 식량은 지금까지 어떻게 해결했어?”
“편의점에서 가져왔어요.”
“편의점?”
“네. 한 층 위로 올라가면 편의점이 하나 있어요.”
“규모가 커?”
“네, 꽤 커요.”
“그럼 거기 휘발유나 솜 같은 것도 다 있겠네. 막대기만 따로 구하면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식량을 한꺼번에 많이 가져오면 안 돼? 내가 누워 있던 시간도 꽤 긴 것 같은데.”
“아니요. 편의점에는 오래 못 있어요.”
“왜?”
“오래 있으면 죽으니까요.”
“죽다니, 왜?”
“······거기, 누군가 있어요.”
“누가 있다고?”
혼란스러웠다.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굴 죽여?”
“······죽을 때도 있고, 안 죽을 때도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야?”
“아니요, 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왜 싸워서 이기지 못했어? 너희는 쪽수도 많았잖아.”
“······시민의 숲 역에 올 때 대장하고, 음, 예전 대장들하고, 여자 세 명에 저뿐이었어요.”
“나는 누워 있었으니 제외하더라도 다섯 명이나 있었는데 왜?”
“한 명이 죽었는데······ 먹혔어요.”
“······먹혔다고?”
“네. 전 그걸 봤어요.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무슨 소리인지 자세히 말해봐.”
“그놈이 자고 있을 때가 있어요. 그때가 아니면 도저히 물건을 가져올 수가 없어요.”
여자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통로가 매우 좁아서 움직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우린 미끼를 썼죠.”
“미끼?”
“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을 구멍 안으로 밀어 넣고 큰 소리를 내게 했어요. 그러면 비명이 서너 번 들리고, 잠시 후에 안쪽 깊숙한 곳에서 소리가 나요. 아그작, 아그작······. 전 그 소리를 잊을 수 없어요. 사람이 먹잇감이 되어 씹히는 그 소리를.”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소리가 멈추고 나면 잠시 후에 코 고는 소리가 들려요. 그때 다시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자고 있다는 신호군.” “네······.”
나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용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의심스러웠다.
“정말 본 거 맞아?”
“네.”
“편의점은 몇 번이나 갔는데?”
“다섯 번 정도요.”
“잠깐만.”
“왜요?”
나는 여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갈 때마다 누군가 먹혀야 했다고 했지?”
“네······.”
“여자가 세 명뿐이었다면서 다섯 번을 갈 동안 미끼로 쓸 사람을 어디서 구했다는 거지? 사람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네 말은 신빙성이 전혀 없어.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식수와 식량, 어디서 구했어?”
“진짜라니까요!”
“난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 바른대로 말해.”
“진짜라고요!”
여자가 악을 쓰듯 소리쳤다.
증거가 필요했다.
이 여자가 나를 속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럼 편의점에서 가져왔다는 물 가져와 봐.”
여자가 카고 바지 주머니에서 500ml짜리 페트병을 꺼냈다.
뚜껑에는 손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어 있었고, 플라스틱 표면은 여기저기 긁힌 자국으로 가득했다.
“이걸 편의점에서 새로 가져왔다고?”
“네.”
“식량은?”
“처음에는 도시락이나 삼각김밥 같은 걸 먹었고, 그게 썩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안 썩는 음식을 먹었어요. 제발 믿어주세요. 왜 안 믿어요?”
여자의 말이 빨라졌다.
나는 페트병을 등 뒤로 숨겼다.
확률은 3분의 1이었다.
“그럼 먹고 남은 도시락 껍데기 하나라도 보여줘 봐.”
“······없어졌어요. 다 태웠단 말이에요!”
“증거가 없는데 네가 도시락을 먹었는지 내가 어떻게 믿지?”
“진짜예요······ 진짜 편의점에서 먹었다고요. 제가 뭐 먹었는지 다 기억해요!”
“그래? 뭐 먹었는데?”
“그 여자 배우분 얼굴있는 거... 도시락이요. 아! 혜자 그려진 거 먹었어요. 확실해요. 지금까지 그거 먹으면서 버텼어요.”
“확실한 거지?”
“진짜예요! 앰창 찍고 진짜라고요!”
“그런 저급한 단어 쓰지 말고. 그러니까 물도, 도시락도 다 편의점에서 구했다는 거네?”
“네!”
“그런데, 아직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어.”
나는 천천히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여자를 미끼로 던졌을 때 한꺼번에 많이 가져오면 되잖아. 왜 조금씩 여러 번 가져왔어?”
“그건······ 아까 말했듯이 통로가 너무 좁아서 그래요. 겨우 사람 하나 들어갈 구멍이라 많이 들고 나올 수가 없단 말이에요.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 일직선으로 기어 나와야 해요.”
“야!!”
나는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여자는 깜짝 놀라 그대로 얼어붙었다.
메아리가 공동을 울렸다.
“도시락 코너랑 상온 식품 코너가 통로 하나로 이어졌을 리가 없잖아!”
“네?”
“편의점 구조상 도시락 냉장고랑 안 썩는 식품이 일렬로 늘어선 곳이 어디 있어! 너 계속 거짓말할 거야?”
“믿어주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다.
“물도 도시락도 다 같은 편의점에서 구했다고 했지?”
“네······.”
“다시 묻는다. 도시락 뭐 먹었어?”
“김혜자 도시락이요. 반찬 많은 거······.”
“야!”
“······네.” “네가 들고 있는 이 생수는 CU 자체 상품이야.”
여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런데 김혜자 도시락은 GS25에서만 팔거든.”
여자는 내 시선을 피하며 바닥으로 눈을 깔았다.
나는 여자에게 다가가 리볼버 총구를 그녀의 이마에 들이밀었다.
그녀의 동공이 미친듯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살려주세요, 흑흑. 제발요.”
“애초에 물을 500ml 병으로 가져온다는 게 말이 안 돼. 네 말대로 한 번에 많이 가져올 수 없는 극한 상황이면 당연히 1.5리터짜리 큰 병을 챙겼겠지. 안 그래? 네가 생각해도 네 거짓말이 너무 허술하지 않냐?”
“흑흑흑······.”
여자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총을 쥔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여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총구에 힘을 실어 그녀의 이마를 강하게 눌렀다.
“살고 싶으면 솔직히 말해. 이 물 어디서 났어? 500ml 통을 계속 차고 다닌 점, 표면의 흠집과 찌든 때를 보면 이건 아주 오랫동안 반복해서 쓴 거야. 맞지?”
“맞아요······.”
“그럼 어딘가에서 물을 계속 받아왔다는 소리네. 어디야!”
내가 소리를 지르자 여자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가다 보면 수도관이 터진 곳이 있어요. 거기서 물이 나와요.”
“편의점, 갔어 안 갔어?”
“못 갔어요.”
“왜!” “시민의 숲 역은 윗 층이 너무 심하게 무너져서 다이소 말고는 진입이 안 돼요.”
“다이소?”
“네. 거기서 쇠사슬이랑 자물쇠를 가져와서 사람들을 묶은 거예요.”
“그럼······ 식량은 어디서 구했어?”
여자가 나를 힐끔 보더니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식량 어디서 났냐고!”
이마에 닿은 리볼버의 반동으로 여자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여자의 통곡이 거세졌다.
잠시 후, 그녀는 참지 못하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여자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12호······.”
“뭐?”
“13호도 그랬고.”
“너, 설마······.”
나는 군대에서 처음 맡았던 역겨운 멧돼지 냄새가 나던 그 고기가 떠올랐다.
“최근에 먹은 건······ 14호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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