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삼국지.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군웅들이 비열한 계략과 괴물 같은 무력으로 서로를 찢어발기던 그야말로 지옥 같은 시대.
그 혼란의 한가운데,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재앙급 괴물이 존재했다.
그의 이름, 여포 봉선.
‘말 중에는 적토가 있고, 사람 중에는 여포가 있다.’
그를 찬양한다는 이 문장조차, 실상은 그의 재앙 같은 강함을 두려워한 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했다.
여포가 창을 드는 순간, 전장은 곧바로 지옥으로 변했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시체와 피, 그리고 절망만이 남았다.
백성들은 그를 저주했다. 군웅들은 그를 패륜아라 불렀다.
그러나 여포 자신은 알고 있었다.
정원 밑에서, 동탁 밑에서, 개처럼 굴러 겨우 살아남아야 했던 나날들.
그가 버텨온 시간들이, 그가 쌓아 올린 피와 굴욕이, 지금의 여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세상은 그의 생존을 죄라 불렀고, 그의 발버둥을 광기라 조롱했다.
그렇게 쌓인 오명. 그를 욕하는 모든 시선.
여포는, 그 모든 것을 증오했고, 그 모든 것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영웅이 되지 않는다. 구원자가 되지도 않는다.
오직 천하를 불태울 진짜 재앙으로서 모든 것을 짓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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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 하비성.
천하를 뒤흔들던 재앙급 무신 여포는 조조의 대군과 맞서 끝없는 격전을 벌이다 결국 하비성으로 후퇴했다. 성은 포위되었고 보급은 끊겼으며 사기는 바닥을 찍었다.
그러나 여포는 달랐다.
패배를 직감한 순간부터 그는 전장을 등졌다. 칼과 창 대신 술을 들었고, 탈출 대신 쾌락에 몸을 맡겼다. 끝없는 술, 끝없는 연회, 그리고 초선과의 향락.
하비성의 밤마다 울려 퍼지던 웃음소리는 성 밖에서 굶주리며 피를 흘리던 병사들의 신음과 대비되어 더욱 잔혹하게 울려 퍼졌다. 그를 믿고 따르던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그 모습은 곧 배신이었다.
한때 천하를 떨게 하던 무신의 등 뒤에서, 조용히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조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금과 작위, 그리고 살길.
교묘하게 흘려보낸 계략은 여포의 부하들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하나, 둘. 항복의 깃발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하비성의 문은 안에서 부터 열렸다.
그날 밤, 여포는 술에 취한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 선 것은 칼을 든 부하들이었다.
“······항복합니다.”
떨리는 목소리.
그 순간, 여포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사람 몸의 반만 한 거대한 쇠공과 굵은 사슬에 묶인 채, 질질 끌리며 처형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쇠사슬이 바닥을 긁는 소리는 마치 지옥의 문이 열리는 듯한 금속성 울림을 냈다.
그러나 여포는 끌려가지 않았다.
그는 걸었다.
질질 끌리는 쇠공조차 그의 걸음을 막지 못했다. 마치 그것이 아무 무게도 없다는 듯, 천천히, 그러나 당당하게.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저게 가능한 일인가......”
사람 몸의 반만 한 쇠공. 보통 병사 서넛이 달라붙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그것을, 사슬에 묶인 채 끌고 걷는다. 사로잡힌 포로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전장 위의 맹수가 사슬을 달고 산책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그가 여포라는 사실이, 다시금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처형장 위, 조조와 유비가 나란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병사들의 숫자만 수천. 창과 활, 쇠뇌가 모두 여포를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조인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역적 여포! 무릎을 꿇어라!”
우렁찬 외침이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여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그저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병사들이 급히 달려들어 그의 다리를 칼등으로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
뼈와 살이 부딪히는 소리.
그러나 여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그는 여전히 서 있었다.
그제야 조조가 손을 들어 병사들을 제지했다.
“...그만.”
순간, 처형장 전체가 숨을 삼켰다.
항복했던 여포의 부하들조차 뒤편에서 몸을 떨고 있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여포가 저 사슬을 끊고 쇠공을 집어 던지며 자신들에게 달려들지는 않을까.
그 두려움 그 공포 그는 이미 포로였지만, 여전히 재앙이었다.
여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내려다보는 조조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공허했고, 동시에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중얼거렸다.
“조조.”
처형장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의 심장이 그 한 마디에 움찔했다.
“네가 이긴 것이 아니다.”
조조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여포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내가 나 자신에게 졌을 뿐이다.”
그 말에는 패배의 인정도, 구걸도 없었다. 오직 끝없는 자조와 자기 혐오, 그리고 타오르는 증오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여포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정원 밑에서의 나날, 동탁 밑에서 개처럼 굴러야 했던 시간, 피와 진흙, 배신과 이용, 끝없는 전장.
그리고 그 모든 끝에 남은 것은 ‘폐륜아’라는 두 글자.
여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만약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엔.’
사슬에 묶인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번엔 진짜.’
그의 입술 사이로,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앙이 되어주마..”
여포의 입술 사이로,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형장은 고요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듯, 수천의 병사와 장수들이 숨을 삼킨 채 그 한마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조는 여포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정말 아깝군.”
그 말에 주변이 술렁였다. 조조는 미련이 담긴 눈빛으로 여포를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여포. 그대의 무력을 따라올 자는 아무도 없다.”
여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조는 그를 바라본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만약 네가 내 밑에 있었다면, 천하는 이미 내 손안에 들어왔을 것이다.”
진심이었다. 그의 말에는 정치적 계산도, 위선도 없었다. 오직 순수한 아쉬움만이 담겨 있었다.
그때, 조조 옆에 서 있던 유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조공.”
조조의 시선이 옮겨갔다.
유비는 온화한 얼굴에 조소를 살짝 얹은 채 말했다.
“차라리 여포의 세 번째 아버지가 되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주변 장수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포가 섬겼던 주군들, 정원, 동탁, 그리고.. 모두 여포의 손에 죽거나, 그로 인해 몰락했다.
조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건 안 되겠군.”
조조는 짧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경계와 조롱, 그리고 냉정한 현실 인식이 담겨 있었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유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여포는 그들의 대화를 그저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조조는 잠시 여포를 바라보다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재능이 너무 컸다. 그래서 감당할 수 없었지.”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형을 집행하라.”
그 순간, 유비가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잠시만.”
조조가 고개를 돌렸다.
“말할 것이 있는가, 현덕?”
유비는 여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동정도, 연민도 없었다. 오직 차분한 단죄만이 담겨 있었다.
“여포.”
여포의 눈동자가 천천히 유비를 향했다.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이런 결말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그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서주에서, 내가 너를 믿고 성을 맡겼을 때. 그 신의를 저버린 순간, 너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여포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비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하늘은 네게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다시 태어날 일도, 다시 칼을 쥘 일도 없겠지.”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조롱하듯 덧붙였다.
“이것이 네가 쌓아 올린 삶의 결말이다.”
처형장에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병사들조차 숨을 쉬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여포가 웃었다. 낮고, 거칠고, 마치 피가 섞인 듯한 웃음이었다.
“하.”
유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여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패배자의 체념도, 죽음을 앞둔 자의 공포도 없었다. 오직 오랜 전장을 살아남은 맹수의 냉소만이 서려 있었다.
“...유비.”
처형장이 숨을 삼켰다.
“너나 잘해라.”
그 말에 주위가 술렁였다.
여포는 비틀린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신의? 의리? 그딴 말 입에 올리기 전에, 네가 밟고 올라선 시체부터 세어봐라.”
유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오늘은 내가 죽지만, 내일은 네 차례일 수도 있다.”
여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천하는, 착한 놈이 차지하는 게 아니다. 끝까지 살아남은 놈이 차지하는 거지.”
그리고 고개를 숙여 조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조조.”
조조가 조용히 응시했다.
“넌 오래 갈 것이다. 비열한 만큼 남 뒤통수 치는 것도 잘하겠지.”
조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여포는 마지막으로 처형장 전체를 둘러보았다. 수천의 병사, 고개 숙인 옛 부하들, 자신을 증오하는 백성들의 시선. 그 모든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듯 바라본 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짧은 침묵. 사슬에 묶인 손이 꽉 움켜쥐어졌다.
“다시 기회가 있다면..”
그의 입술 사이로,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진짜 재앙이 되어, 이 천하를 집어삼키겠다.”
조조가 손을 들었다.
“집행하라.”
도끼가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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