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구애
한순간의 포효가 평야를 짓누른 가운데 여포가 앞으로 나서며 방천화극을 치켜들자 공기를 짓누르던 살기가 단숨에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흉노 기병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정적과 함께 선두에 선 흉노족 전사가 말을 몰아 돌진해오자 여포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단 한 번의 찌르기로 투구와 갑옷을 꿰뚫어 말에서 떨어뜨려버렸다.
그 장면 하나 만으로도 전장의 공기는 완전히 뒤집혔고 이어 달려드는 두 번째, 세 번째 결투자들 마저 여포의 창 끝 아래 쓰러지자 흉노 진영 전체에 동요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여포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몰아 전열을 깨뜨리며 단신으로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창이 지나간 자리마다 피가 꽃처럼 터져 올랐으며 방패와 갑옷은 종잇장 처럼 찢겨나갔고 말과 사람이 함께 나뒹구는 참상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뒤따라 돌격한 선봉대와 친위대 또한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맹렬히 따라붙어 흉노 기병대의 측면과 후방을 동시에 찢어발기며 포위망을 조여갔고, 여포에게 항복해 끌려온 흉노 병사들조차 그의 무신과도 같은 무력에 넋을 잃은 채 이를 악물고 동족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피와 흙, 부서진 무기와 짓밟힌 시체들이 평야를 덮어갈수록 여포의 존재는 점점 공포를 넘어 신격에 가까운 무언가로 변해갔고 흉노 병사들의 눈에는 그가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나절 동안 이어진 살육 끝에 천 명의 기병 중 절반이 전사하고 사백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도망치던 백여 명 또한 끝까지 추격 당해 극소수만이 간신히 살아 달아났고, 여포 역시 이백의 손실을 입었지만 이 전과는 대승이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전투가 끝난 뒤 여포는 전리품과 포로들을 모두 수습해 처음 점령했던 부락으로 되돌아갔고 그곳에는 지금껏 토벌한 모든 부락의 인원들이 모여 있었으며 그들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도 여포를 마치 주인처럼 맞이했다.
피로 쌓아 올린 그의 위세 앞에서 흉노족들은 점차 복종을 넘어 숭배에 가까운 감정을 품기 시작했으며 이제 그들의 눈에 비친 여포는 병주에서 온 장수가 아닌 초원의 신, 탱그리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전투가 끝난 뒤 여포는 전장에서 얻은 말들을 모두 끌어모았고 그 수는 어느새 팔백을 훌쩍 넘어 살아남은 병사 전원에게 기병 장비를 갖추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다.
여포는 망설임 없이 죽은 자들의 자리를 흉노 포로들로 채워 넣었고 혹시 모를 반란을 염려한 위속이 이를 만류했으나 그는 단호히 잘라 말하며 공포로 묶은 자들은 충성보다 확실한 족쇄라 일축했고 결국 천 명 전원이 말을 타는 기병으로 재편되며 단기간에 완전한 기마 군단이 탄생했다.
여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존의 소규모 부락을 과감히 버리고 더 넓고 비옥한 목초지와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찾아 이동을 명했고 살아남은 원로 추장들은 그의 명령을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부족민들을 이끌고 새로운 땅으로 옮겨갔다.
그 결과 흉노족 삼천 명이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중견 부락이 단기간에 완성되었다.
이제 이곳은 단순한 약탈 거점이 아니라 초원 깊숙이 박힌 여포의 전초기지였고 그 위세는 인근 흉노 세력들조차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기반을 다진 여포는 자신에게 복속된 흉노 병사들을 부락에 남겨 두고 친위대와 선봉대를 이끌어 태원군 진양현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했으며, 그 손에는 흉노 전사들의 머리 오백 개가 들려 있었다.
두 달에 가까운 부재 끝에 다시 밟은 진양의 땅에서 백성들이 마주한 것은 출정 당시 오백 남짓한 보병대가 아닌 전원 말 위에 올라탄 5백의 기병이었다.
그 선두에 선 여포의 뒤로 늘어선 수급 더미를 본 순간 성 안은 환호와 경악이 뒤섞인 소란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그를 맞이했고 아이들은 영웅을 보듯 외쳤으며 장정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의 행렬을 바라보았고, 단 두 달 만에 병력을 배로 불리고 기병으로 재편한 데다 수급 오백을 거두어 돌아온 여포의 존재는 병주 전역에 전율에 가까운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원은 환영 속에 묻힌 공포를 숨기지 못한 채 점점 커져만 가는 여포의 그림자를 실감하며 등 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고 이제 그의 눈에 여포는 더 이상 통제 가능한 장수가 아닌 언제든 판을 뒤엎을 수 있는 괴물로 비치고 있었다.
정원은 성문 앞에서 말을 탄 채 서 있는 여포를 바라보며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그러나 그 미소 아래에는 지울 수 없는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통제 가능한 젊은 장수였던 사내.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선 여포는, 병주 전체를 뒤흔들 재앙의 기세로 돌아온 존재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원의 심장은 서서히 조여 들었다.
그는 애써 표정을 다듬고 말을 몰아 다가가며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여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위속을 바라보았다.
위속은 준비해 두었던 목간을 앞으로 내밀며 짧게 답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한 것입니다.”
정원은 말 위에서 목간을 펼쳐 들었다.
한 줄, 또 한 줄. 글자를 따라 내려갈수록 그의 눈빛은 점점 굳어 갔고, 숨결마저 서서히 거칠어졌다.
오백의 병사를 전원 기병으로 개편. 그 사실 만으로도 이미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는데, 그 와중에 흉노를 정벌하고 항복시켜 오백의 기병을 더 얻었다는 기록은 머릿속 상상 자체를 무너뜨렸다.
이는 곧 여포가 실질적으로 천 인장, 아니 그 이상의 군세를 손에 쥐었다는 뜻. 병력의 질과 기동력까지 감안하면, 웬만한 현 몇 개쯤은 단숨에 짓밟고 지나갈 전력이었다.
정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독자적인 권한을 너무 쉽게 내준 것이 문제였다. 단기간의 성과를 기대하며 풀어놓은 족쇄가, 이렇게까지 빠르게 자라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눈앞에 선 사내는 이미 병주자사라는 직함 하나로는 억누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겉으로는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의 속에서는 수십 가지 생각과 경계, 두려움과 후회가 뒤엉켜 거칠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민은, 여포의 한마디에 멈춰 섰다.
여포는 말에서 내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전장에서 거둔 수급 오백, 전부 자사님께 바치겠습니다.”
담담한 어조.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부족한 몸을 거두어 기회를 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정원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는 단순한 헌납이 아니었다. 이 모든 전공을 자신의 이름으로 조정에 보고하라는 의미.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굳어 있던 정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허허.. 허허허!”
뜻밖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원은 크게 웃으며 여포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찌 그런 큰 공을 혼자 차지하겠는가. 이 공은 함께 상신해야지.”
그는 곧장 주위를 둘러보며 명했다.
“연회를 준비하라. 오늘은 크게 축하해야 할 날이다.”
순간, 성문 앞의 분위기는 다시 한 번 환호와 축하로 들끓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창을 두드리며 함성을 질렀고, 백성들은 여포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러나 정원은 웃고 있었어도, 그 시선은 이미 다른 생각을 시작하고 있었다.
여포라는 존재는 이제 공으로 묶어 두어야 할 장수. 동시에, 언제든 목을 조일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할 재앙. 병주를 지켜 줄 검이자, 병주를 가를 칼.
정원은 미소 속에, 그 두 개를 함께 숨긴 채 여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회장은 밤이 깊어질수록 열기로 가득 찼다.
술 향이 공기를 채우고, 고기 굽는 냄새가 뜨겁게 번졌다.
병사들의 웃음소리, 장수들의 담소, 악공들의 연주가 뒤섞이며 진양성 안은 오랜만에 전쟁과 피비린내를 잊은 듯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심, 가장 높은 자리. 정원과 여포가 마주 앉은 곳만큼은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정원은 술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여포를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꺼냈다.
“봉선, 이번 공은 참으로 크구나. 병주가 봉선 너의 이름을 외치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여포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넘긴 뒤 담담히 답했다.
“자사님의 은혜 덕입니다.”
정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마침내 본론을 던졌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 혼인할 생각은 없나?”
여포의 손이 잠시 멈췄다.
정원은 웃음을 띤 채 말을 이었다.
“내 조카가 아직 혼인하지 않았는데, 가문도 깨끗하고, 성품도 단정하지. 봉선 너와 맺어진다면 내 마음도 한결 놓일 듯하구나.”
연회장의 소음 속에서도, 그 말만큼은 또렷하게 울렸다. 주변의 장수들과 문관들이 슬쩍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살폈다.
여포는 잠시 정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소장 같은 미천한 자가, 어찌 자사님의 가문과 혼인을 논하겠습니까.”
정원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미천하다니, 지금 봉선의 명성이 병주를 덮고 있거늘?”
여포는 고개를 숙인 채 낮게 답했다.
“출신이 천하고, 가문도 변변치 않습니다. 자사님의 문벌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정원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띠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하지만 그렇게까지 몸을 낮출 필요는 없네.”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봉선 솔직히 말해 보자면, 자네가 혼인할 시기는 이미 한참 지났지 않나 이쯤 나이가 들었으면 가문을 잇고, 자손을 두는 것도 사람의 도리 아니겠나?”
여포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히 답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정원은 바로 물러서지 않았다.
“언제까지 전장만 떠돌 셈이오? 칼끝에서만 사는 인생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은가?”
여포의 턱선이 굳어졌다.
“지금은 적들과 싸워야 할 때입니다.”
짧고 단호한 대답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한 짜증이 깔려 있었다.
정원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지만, 일부러 웃으며 말을 이었다.
“봉선, 이는 자네를 위함이네. 내 조카와 혼인하면 병주에서의 입지도 더욱 굳어질 것이고, 조정에서도 봉선 너를 업신 여기지는 못할 것이니 그래서 하는 말이다.”
여포는 고개를 들었다.
잠시, 정원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과분한 배려입니다. 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 말에 연회장의 공기가 한순간 미묘하게 식었다.
정원의 미소가 굳어질 뻔했으나, 그는 곧 다시 표정을 다듬었다.
“허허, 장군은 참으로 고집이 세군.”
그러나 더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바로 그때,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위속이 히죽 웃으며 끼어들었다.
“자사님,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순간, 주변의 시선이 한꺼번에 위속에게 쏠렸다.
위속은 태연하게 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저도 아직 총각이고, 나이도 적당한데요. 장군님이 안 되면 저라도..”
“그만해라.”
정원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술 취했으면 조용히 마시기나 하거라.”
차갑게 내리꽂는 한마디.
위속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 농담인데··· 왜 다 나한테만 지랄병이야..”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긴장은 그렇게 흐트러졌고, 연회장은 다시 술과 웃음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여포는 더 이상 잔을 들지 않았다.
정원 역시 웃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여포를 향하고 있었다.
서로 웃고 있었으나, 서로 속내를 감춘 채. 그렇게 연회는,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게, 속으로는 날 선 계산을 남긴 채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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