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편 만남1
1권 1편 만남1
현우는 아주 오랜만에 보는 꿈을 꾸고 있었다.
육상 트랙이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수백 번을 달려왔던 붉은 레인.
몸은 가볍고, 호흡은 리듬을 탔다. 발바닥은 땅을 톡톡 치며 앞으로 밀려 나갔다.
‘아, 이 느낌······ 진짜 오랜만인데.’
그러나 곧 익숙한 통증이 전조처럼 스쳐왔다.
왼쪽 햄스트링이 살짝 당기며 균형이 흐트러졌다. 다리의 힘이 한순간 빠지며 시야가 기울었고, 땅이 휘어지듯 배경이 번져버렸다.
그다음.
쿵 소리도 없이, 그저 어떤 깊은 곳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차가운 물속이었다.
몸이 가라앉았다.
폐가 타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런데도 꿈이라 그런지 아무 감각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어둡고, 무겁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물속.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의 차가움은 곧 공기처럼 사라졌다.
오히려 가벼운 압력이 목과 머리를 부드럽게 누르는 느낌이었다. 물이 아니라, 뭔가 완전히 다른 공간에 빠져드는 느낌.
어둠이 흐릿해지고, 희미한 빛의 줄기들이 번져 들어왔다.
청색과 은색이 섞인 낯선 밝기.
파형이 살짝 흔들리는 듯한 빛의 움직임.
‘여기가······ 어디지?’
천천히, 정말 천천히 의식이 떠올랐다.
먼저 청각이 돌아왔다.
아주 낮고 규칙적인 웅음.
심장박동처럼 일정하지만, 기계의 떨림 같은 소리.
그다음은 촉각이었다.
등 뒤로 딱딱한 바닥이 느껴지고, 옆으로는 공기가 아닌 금속성 냉기가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시야가 열렸다.
현우는 가늘게 눈을 떴다.
정면에는 청백색의 선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고, 천장은 금속 패널이 맞물려 있는 구조였다.
낯설고, 차갑고,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선명한 공간.
“여······ 여기가 도대체······.”
입술에서 새어 나온 작은 목소리는 물속에서 처음 공기를 마실 때처럼 어색하고 떨렸다.
현우는 눈을 몇 번 세게 깜빡이더니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머리가 띵했고 몸이 조금 흔들렸지만, 바닥을 짚어 상체만 천천히 일으켰다.
일단 일어나기는 조금 무서웠다.
그는 앉은 채로 고개만 돌려 주변을 살폈다.
왼쪽에는 금속판 같은 벽이 이어져 있었고, 오른쪽에는 유리 같은 판에 얇은 빛줄기들이 흐르듯 움직였다. 천장에는 파도처럼 번지는 조명이 조용히 켜져 있었다.
어디를 봐도 기억 속에서 전혀 떠오르지 않는 장소였다.
현우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
“난 어디······ 여긴 누구······?”
방금 내뱉은 농담에 현우는 스스로 피식 웃었다.
지금 상황은 웃길 일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말이라도 해야 심장이 덜 뛰는 기분이었다.
“자, 진정······ 진정하자. 일단 숨부터.”
그는 등을 곧게 세우고 천천히 공기를 들이마셨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냄새 없는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두 번, 세 번 호흡을 반복하자 어지러웠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았다.
현우는 뺨을 살짝 때리며 스스로에게 작게 중얼거렸다.
“정신 차리자, 현우야. 일단······ 살아 있잖아.”
호흡이 조금 안정되자 현우의 머릿속에 끊어진 기억이 다시 이어졌다.
산책로.
푸른 불빛.
손을 뻗던 순간.
그리고 강한 섬광.
“······아, 맞다. 내가 그걸 만지려다가······.”
현우는 눈을 크게 뜨며 주변을 다시 훑어봤다.
“혹시······ 누가 보고 신고해서 병원 같은 데로 데려온 건가?”
그럴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해 보았지만, 이 금속 벽과 파도처럼 번지는 조명은 평범한 병원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현우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아니······ 이거 병원은 아니지, 아무리 봐도.”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확 올라왔다.
“잠깐만······ 나, 설마 납치······?”
그 생각이 떠오르자 심장이 다시 빨라졌다.
누군가 산책로에서 자신을 덮쳤고, 기억을 잃은 사이 이런 곳으로 끌고 온 걸까.
그런 상상은 너무 드라마 같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마저도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곧바로 스스로 반박이 튀어나왔다.
“아니, 나를······ 왜? 납치한다고 뭐가 이득이 있다고······.”
현우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말이 안 되는 추측과 말이 안 되게 낯선 공간이 뒤섞이면서 더 혼란스러워졌다.
“아,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생각이 꼬리를 물던 가운데, 현우는 문득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팔도, 다리도, 허리도.
어디 하나 묶여 있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보고 다리를 움직여 보니 감각도 멀쩡했고 통증도 없었다. 단지,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적어도 묶여 있던 건 아니네.”
그 사실만으로도 심장에서 내려오지 않던 긴장이 조금 풀렸다.
현우는 작은 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자유롭긴 하잖아.”
조금 마음이 가라앉자, 현우는 주변을 제대로 살펴보기로 했다.
아까는 정신이 혼미해서 거의 스쳐 지나가듯 봤지만, 이제 눈을 뜨고 다시 보니 확실히 이곳은 현우가 아는 그 어떤 ‘방’의 범주에도 들지 않았다.
우선 크기부터가 말이 안 됐다.
대충 보아도 100평은 넘어 보이는 넓은 공간.
자기가 누워 있던 침대와 그 위에 덮여 있던 얇고 매끄러운 천 말고는 눈에 잡히는 가구가 단 하나도 없었다.
침대는 금속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차갑고 딱딱할 줄 알았는데, 손으로 눌러보니 말랑하고 부드럽게 감겨 들어가는 이상한 촉감이었다.
겉모습은 금속인데 느낌은 고급 메모리폼보다도 부드러웠다. 두 감각이 서로 충돌하는 이질감이 계속 밀려왔다.
조명 구조도 이상했다.
천장이나 벽 어디에도 등이나 램프는 보이지 않았는데, 벽 그 자체가 아주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빛은 눈이 시릴 정도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딱 적당한 밝기였다.
빛의 색도 흰색도 아니고, 노란색도 아니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드러운 색.
바닥도 침대처럼 금속 같아 보였지만 딱딱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현우는 살짝 발목을 굴러보며 확인했다.
‘차갑지 않네······ 이것도 금속이 맞아?’
겉은 금속인데, 발바닥 아래에서는 이상하게 따뜻하고 적당히 탄력 있는 감각이 올라왔다.
“여긴······ 진짜 뭐야.”
현우는 혼잣말을 하며 침대에서 조심스레 내려왔다.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기대했던 차가움은 없었다. 오히려 편안한 질감이 다리에 전달됐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천천히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우선 이곳이 닫힌 공간인지, 문이 있는지, 혹은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걸을수록 더 큰 혼란만 쌓였다.
벽은 사방이 매끈하게 이어져 있었고 문으로 보이는 구조는 없었다. 손으로 벽을 눌러보면 단단한데도, 어딘가 살아 있는 듯한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여기······ 병원도 아니고, 무슨 연구소도 아니고······.”
현우는 입술을 깨물며 방 안을 왕복하듯 왔다 갔다 했다.
바닥, 벽, 천장.
복도도, 문도, 창문도 없었다.
말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상자 같은 공간에 자기 혼자만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걱정과 궁금증이 뒤섞여 현우는 한참을 걸으며, 어디선가 출구가 나타나지 않을까 살펴봤다.
하지만 어디를 봐도 처음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이게······ 도대체······.”
현우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며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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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는 관측실 중앙에 떠 있는 투명 패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위에는 조금 전 텔레포트 포인터를 통해 우주선 내부로 이동해 온 현우의 위치와 상태가 표시되고 있었다.
평소라면 단순한 데이터 확인에 지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끝이 바짝 굳어 있었다.
입술도 모르게 잘근잘근 씹히고 있었다.
“생체 지표 안정. 위상도 정상 범위입니다.”
라시드의 보고가 이어졌지만, 유라는 눈을 떼지 못했다.
드디어.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공간에 들어온 지구의 생명체.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 어딘가가 낯설게 철렁거렸다.
유라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술을 한 번 더 깨물었다.
그러다 조용히, 그러나 조금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라시드······ 저 남성, 나에게 위험한 존재일 가능성은 없겠지?”
순간 라시드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말문이 멈췄다.
그리고 금세 체념한 말투로 대답했다.
“유라님. 현우를 이쪽으로 옮긴 건 저희입니다.”
유라는 순간 말이 막혔다.
라시드는 이어서 살짝 어이없다는 듯한 톤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탄소·수분 기반의 유기 생명체가 에덴인, 특히 당신 같은 고위 연산체를 어떻게 위협한다는 건지 정말 궁금합니다만.”
유라는 괜히 시선을 돌렸다.
라시드의 말이 맞았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현우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이 긴장감은 데이터가 아니라, 처음 겪는 감정에 가까웠다.
유라는 관측 패널에 떠 있는 현우의 움직임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았다.
지구의 유기 생명체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데이터로는 수없이 학습했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벽을 만져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낯선 공간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걸어가는 동작들.
“······정말 비슷하네.”
유라는 작은 호기심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놀라움을 동시에 느꼈다.
자기와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진 존재인데도, 그 반응 양상은 오히려 너무 익숙했다. 유라는 잠시 패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현우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라시드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조용히 말했다.
“유라님,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 접촉을 시작할지 정해야 합니다. 저 남성이 더 불안해지기 전에 말입니다.”
유라는 화면을 응시한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우의 반응은 놀람과 경계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자세히 보면 그 모든 동작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자신이 낯선 환경에 떨어졌다면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면 상대가 더 당황할 가능성이 컸다.
유라는 조용히 결론을 내렸다.
“······목소리만. 첫 접촉은 그게 좋겠어.”
라시드가 입력 패널을 조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성 채널 개방 준비하겠습니다. 어투는 최대한 차분하게 설정하겠습니다.”
현우는 방 안을 계속 걸어 다녔다.
벽을 두드려보고, 손바닥을 대고 눌러보고, 혹시 틈이라도 있는지 고개를 기울여 살펴봤다.
“문이 어디 있는 거야······ 진짜 방 맞긴 한가?”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바닥은 부드럽고 벽은 매끈했다. 어느 쪽도 출구라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답답함이 조금씩 올라오려던 그때.
갑자기 고등학교 쉬는 시간에나 들릴 법한 벨 소리가 공간 전체에 가볍게 울려 퍼졌다.
딩동댕동.
현우는 그 자리에서 딱 멈춰 섰다.
숨도 잠시 멎을 만큼 이상한 소리였다.
“······뭐, 뭐지 이건?”
벨소리가 울린 직후, 모니터 속 현우가 놀란 듯 멈춰 서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유라는 순간적으로 라시드를 바라봤다.
그러자 라시드는 은근히 뿌듯한 톤으로 보고했다.
“유라님,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히 들리는 신호음을 대화 개시용으로 설정했습니다. 낯선 환경에서도 친숙함을 느끼도록 유도할 목적입니다.”
유라는 잠시 화면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선택이었어. 적응을 돕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라시드는 차분히 응답했다.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유라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현우의 반응은 패닉보다는 ‘뭐지?’ 하는 혼란 쪽에 가까웠다.
라시드의 판단이 맞았다고 느껴졌다.
- 작가의말
- 판타지 소설을 읽다 보면, 설정이 ‘설명 없이’ 지나가거나 생략된 듯한 순간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 빈칸이 궁금해서 제 나름대로 이유를 붙이고, 규칙을 세우고, 상상을 더하다 보니 여러 생각들이 하나로 모여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취미로, 재미 삼아 써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70편 정도가 쌓였습니다. 앞으로 써야 할 내용도 많지만, 이미 쓴 글들을 이대로 묻어두기엔 아깝다는 마음이 들어, 1편부터 다시 정리하며 차근차근 올려 보려 합니다. 연재는 월~목, 주 4일 오후 10:00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점도 있겠지만, 끝까지 함께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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