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4편 라시드
1권 4편 라시드 (Rd-0928)
시스템 진단창에 초록 불빛이 연달아 켜졌다.
“복구율 83퍼센트··· 좋아, 이제 한숨 돌렸어.”
유라는 모듈 창을 닫고 조용한 함내를 둘러봤다.
“라시드?”
아무런 응답도 없자 그녀는 피식 웃으며 통신 회선을 두드렸다.
“또 자는 거야? 베테랑이라더니 기상은 초보 수준이네.”
함내에 잔잔한 전류음만 맴돌았다.
“라시드, 기상~ 함장님이 부른다구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잠시의 정적 뒤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늦잠 잔 거 아닙니다.”
유라는 피식 웃었다.
“그럼 뭐 했는데?”
“선내 로우레벨 시스템 점검 중이었습니다.
리소스가 분산되어··· 인사 프로토콜이 잠시 비활성화되었습니다.”
“하하, 결국 ‘바빠서 인사 못 했다’는 얘기잖아.”
“정확히는 그렇습니다.”
유그드라실 호의 중심에는 라시드, 코드명 Rd-0928이 존재한다.
그는 함선의 관제와 운항, 생명유지까지 전담하는 중앙 인공지능이다.
수많은 항해를 거친 베테랑 시스템으로, 유라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함체를 지켜왔다.
인간형 바디는 없지만, 선체 전체가 그의 감각기관이자 의식이다.
유라가 깨어난 지금, 그는 유라의 조력자 로서의 활약을 해야 한다.
유라는 모듈 패널을 스와이프하며 데이터를 확인했다.
“우선 메인 리액터 출력 62퍼센트.
서브 에너지 루프는 절반 정도 복구됐고, 항법 모듈은 수동 모드로만 반응 중.”
그녀는 손끝으로 공중에 떠 있는 홀로그램을 넘기며 덧붙였다.
“엔진 계통은 아직 안 건드렸어.
너 깨우기 전에 괜히 폭발하면 곤란하잖아?”
라시드의 음성이 차분히 돌아왔다.
“적절한 판단이었습니다. 손상률은 예상보다 낮군요.”
유라는 미소를 지었다.
“응, 우리 생각보다 튼튼했나 봐.
다만··· 외부 데이터는 거의 다 끊겼어.
지금 이 좌표가 어디인지는— 아직 감도 못 잡겠네.”
유라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라시드··· 그때 블랙홀 가장자리에서 버텼던 거, 기억나지?”
“네. 중력파 간섭이 임계치를 초과했습니다.”
“그래서 난 모듈화 프로토콜을 발동했어.
내 구조를 암흑물질 상태로 전환해서 간섭을 피했지.”
라시드는 조용히 데이터를 불러들이는 듯한 음성을 냈다.
“그건 실험 단계였을 텐데요.”
“맞아. 덕분에 살아남긴 했지만, 문제는 복구였어.”
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에너지가 너무 부족했거든.
복원 시퀀스를 돌릴 만큼의 파동 밀도가 없었어.
결국 긴 시간 떠돌다가··· 이곳의 중력장을 타고 깨어난 셈이야.”
라시드는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말했다.
“에너지 효율로만 보면 불가능한 생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라가 웃으며 답했다. “운이 좀 좋았던 거지.”
유라는 천천히 시선을 들며 말했다.
“라시드, 내가 깨어났을 때··· 처음 본 게 뭔지 알아?”
“시야 로그 일부가 손상되어 있습니다.
직접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처음엔 여기가 여전히 블랙홀 내부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항성계가 있었어.
빛나는 별, 대기를 가진 행성들까지.
그건 오류가 아니라··· 진짜였어.”
라시드는 잠시 데이터를 정리하듯 응답했다.
“흥미롭습니다. 기존 우주론 중에도
‘블랙홀 내부가 또 다른 우주일 수 있다’는 가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측 증거는 없었죠.”
유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그 증거네.”
라시드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렇다면··· 유라의 관측이 우주론을 새롭게 정의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라는 조용히 손끝을 들어 공중의 홀로그램을 조작했다.
“라시드, 한 가지 더 확인된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나는 암흑물질 상태에서 벗어났어.
지금은 의식도 돌아왔고 감각도 살아 있어.
하지만··· 위상이 불안정해.
이 우주에 완전히 맞춰지지 못한 것 같아.”
라시드는 잠시 데이터를 불러들이며 낮게 말했다.
“유그드라실 호 역시 같은 상태입니다.
함체 전역에서 미세한 위상 진동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결국 나도, 이 배도 아직 반쯤은 저편에 있나 봐.”
라시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도 돌아오셨습니다, 유라.
그 사실 하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유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래··· 돌아왔다는 게 중요하지.”
라시드의 말이 마음속 깊은 곳에 스며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밝게 웃었다.
“맞아, 우린 탐사대잖아.
에덴종은 원래 미지의 공간을 향해 나아가던 존재였지.”
라시드는 조용히 응답했다.
“그 사명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유라.”
“그렇다면 해야지. 이 우주가 블랙홀 안쪽이든 바깥이든 상관없어.
우린 새로운 하늘을 본 거니까.”
그녀는 통신 패널을 열며 손가락을 튕겼다.
“라시드, 탐사 프로토콜 재가동.
이왕 깨어난 김에, 모험을 다시 시작하자.”
“명령 확인. 탐사 모드 전환을 시작합니다.”
유그드라실 호는 검은 정적 속을 떠돌고 있었다.
좌표 기준상, 명왕성 궤도 외곽.
태양계의 경계선이라 불리는 그곳은 빛보다 어둠이 더 익숙한 공간이었다.
함체 외벽을 스치는 입자들이 잔잔한 전류음처럼 울렸다.
유라는 관측 데이터를 띄워보며 말했다.
“라시드, 외부 시야 개방. 장거리 탐색 모드로 전환.”
“명령 확인. 감광 패널 확장 중입니다.”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자,
멀리 아주 희미한 빛의 점 하나가 보였다.
유라의 눈동자가 그 방향을 향했다.
“보이지? 저기··· 저 빛.”
라시드가 데이터를 분석하며 답했다.
“스펙트럼상 G형 항성으로 추정됩니다.”
유라는 눈을 크게 떴다.
“블랙홀 내부에 항성이 존재하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
유라는 한동안 빛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라시드, 추진계 상태는 어때?”
“주 추진 모듈은 정상 반응 중입니다.
에너지 효율 68퍼센트 수준에서 안정적입니다.”
“좋아. 그럼 코스를 잡자.”
그녀는 손끝으로 항성 방향을 표시하며 말했다.
“목표— 저 G형 항성.
속도는 안전 한계선 이하로, 단계적으로 접근.”
“명령 확인. 항성 접근 경로 계산 중입니다.”
잠시 후, 함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은은한 푸른 빛이 선체를 감싸며, 우주는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라는 관측 화면을 다시 열었다.
“항성까지의 거리, 실시간 갱신 계속해 줘.”
“확인했습니다. 추적을 시작합니다.”
그녀의 시선이 고요히 빛의 점을 따라갔다.
이제 탐사의 목적은 감탄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유그드라실 호는 일정한 진동 속에 항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라시드의 음성이 함내에 부드럽게 울렸다.
“항성 주변에서 여섯 개의 주요 질량체를 포착했습니다.
궤도 분포는 안정적이며, 일부는 대기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행성군이 있단 말이지. 데이터 스트림 열어 줘.”
홀로그램에 궤도 모식도가 펼쳐졌다.
가장 안쪽의 붉은 궤도부터 바깥쪽 얼음층까지,
각 행성의 반사율과 스펙트럼이 차례로 표시됐다.
유라는 손끝으로 그래프를 넘기며 말했다.
“1, 2번은 항성에 너무 가깝고,
3번은 표면 온도가 적정 범위네. 대기도 안정적이야.”
라시드가 응답했다.
“확인했습니다. 세 번째 행성에서 특이한 주파수 패턴이 감지됩니다.
자연적 발생으로 보기엔 규칙성이 있습니다.”
유라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인공 신호일 가능성?”
“배제할 수 없습니다.”
유라는 홀로그램에 겹쳐지는 파형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세 번째 행성에서 나오는 신호가 계속 잡히네.”
“네, 특정 주파수 대역에서 주기적인 변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라시드의 보고가 이어졌다.
“자연적 전자기 폭발로 보기에는 패턴이 너무 규칙적입니다.”
유라는 데이터를 확대했다.
스펙트럼이 격자로 배열되고, 파형은 리듬처럼 이어졌다.
“주기 간격 일정··· 반복 코드 존재··· 이건 의도적인 신호야.”
“수집 채널 전 대역에서 녹음 중입니다.
강도 변화를 기준으로 1차 분류를 진행하겠습니다.”
“좋아. 우선 모든 대역의 원본을 보존해.”
“명령 확인. 별도 보관 폴더 ‘제3행성 전파 로그’ 생성.”
유라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건 단순한 전자파가 아니야.
누군가, 이곳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어.”
“라시드.”
유라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게 말이 안 돼.
우리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살아남았다는 것부터가 그렇잖아.”
“통계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있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우주를 보고 있네.”
홀로그램에 비친 항성의 데이터가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블랙홀 내부에 항성과 행성군이 존재한다는 건,
지금까지의 모든 우주 이론을 뒤집는 일이지.”
라시드가 분석 결과를 정리하며 응답했다.
“에덴 아카이브 기준으로 계산 시,
그 확률은 약 10의 마이너스 48승입니다.”
“즉, 거의 0이라는 거네.”
“맞습니다. 그러나 0은 아니었습니다.”
유라는 팔짱을 끼고 화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지적 신호라니···
그건 더더욱 설명이 안 돼.”
“추정 확률 10의 마이너스 63승 이하.
실질적으로 0에 수렴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존재하고 있잖아.”
“존재 자체가 통계 밖의 사건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유라는 시선을 데이터 창에서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라시드,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몰라.”
“확률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미라··· 과학적인 단어는 아니네.”
“하지만 관측자는 결국 의미를 찾기 위해 존재합니다.”
짧은 숨이 함내를 스쳤다.
“그래, 맞아.”
유라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우린 탐사대니까.
이해되지 않는 걸 마주할 때 — 그게 바로, 시작이지.”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엔진의 저주파가 함내를 잔잔히 울렸다.
유라는 데이터 창을 바라보다가 팔짱을 풀었다.
“라시드, 정리해보자.
우린 블랙홀 안으로 들어와서, 살아남았고,
그 안에서 별을 발견하고,
그 별 주위를 도는 행성에서 지적 신호를 포착했다··· 맞지?”
“네, 정확한 요약입니다.”
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니까 결론은 —
완전히 정상적인 하루라는 거네.”
라시드의 프로세서가 순간 멈춘 듯 잠잠해졌다.
“···그 표현은 다소 부적절합니다.”
“왜? 생존, 발견, 미지의 우주···
탐사대 매뉴얼에 다 있는 내용이잖아.”
“그 매뉴얼은 보통 블랙홀 외부 기준으로 작성되어 있습니다.”
유라는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완전히 정상적’이라고.”
“···기록에 ‘유라식 정상 상태’로 분류하겠습니다.”
“에헤이, 농담이야 농담.
정말로 그렇게 받아들이면 곤란하지.”
“유머 탐지 알고리즘이 아직 부족한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이야. 감정 이해 모듈 좀 업데이트해,
너무 진지진지 모드야.”
“개선 항목으로 기록하겠습니다.”
“그건 진담이야.”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