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퀄 : 빛을 삼킨 그림자―아름다운 구속 + #001 : 무례한 침입자
[#프리퀄 : 빛을 삼킨 그림자―아름다운 구속]
창조신 엘로라는 어둠의 군주를 창조했다.
‘세상의 처음이자 끝이었던 나.’
칠흑의 세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존재로 살아가던 어느 날.
시간도, 색도, 방향도 없었던 무형의 공간에 ‘그녀—루시아’가 나타났다.
찬연한 광채가 어둠의 심장을 가르듯 스며들었다.
빛의 이름을 가진 여신이 그곳에 서 있었다.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앞이 잘 보이질 않잖아.”
그녀가 손끝으로 공기를 스치자, 정적의 세계가 일었다.
‘흐읔, 내 몸을 만신창이로 찢어발기는··· 이 빛은 도대체 뭔가?’
어둠이 흔들렸고, 대지가 눈을 떴다.
‘넌 누구길래? 어째서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거냐?’
난생처음으로 다른 존재를 보았다.
무자비한 빛으로 인해 세상을 지탱하던 어둠의 법칙이 무너졌다.
‘명색이 어둠의 군주이건만.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닌가.’
루시아의 눈동자가 스친 순간.
스스로 한 발 물러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압도적이군. 네 빛의 원동력은 정녕 무엇이더냐.’
속수무책으로 이끌리는 무기력함.
의지도, 명령도 없었다.
‘단지, 너라는 존재 자체가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군. ···어떡하면 좋을까?’
반복되는 걸음마다 칠흑의 세상이 깎여나갔다.
루시아의 자취마다 새로운 모양이 생겨났다.
‘빛의 궤적을 쫓다 보면, 부서진 어둠이 제멋대로 낯선 형태로 재조립 당하고 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발끝에 머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말도 안 돼! 발밑에 안개처럼 고여든 게··· 진짜, 나라고?’
루시아가 고개를 숙였다.
사파이어빛 눈동자 속에 처음으로 칠흑 같은 형태가 비쳤다.
“이건 뭐지?”
그녀가 속삭였다.
그 한마디가 세상의 규율을 바꿨다.
‘내 존재를··· 드디어 인지한 건가.’
그녀는 발끝을 따라 흐르는 어둠을 보고 말했다.
“그림자.”
어둠의 군주는 전율했다.
그 이름이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이름 없는 내게 생긴 첫 이름―그림자.’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가 사랑인지 속박인지 알지 못했다.
‘빛과 그림자.’
완벽했던 무형의 심연을 찢고 들어온 눈부신 침입자.
뼈가 깎이는 생경한 고통 속에서도 기꺼이 찬연한 존재를 끌어안았다.
‘알 게 뭔가. 언젠가 나를 가두는 족쇄가 될지라도 ···절대 거부하지 않겠다!’
찬연한 빛 앞에 심연의 어둠이 무너졌다.
‘한낱 굴복일 리가. 어둠을 찢어발긴 지독한 빛줄기야말로, 형체 없던 나를 이 땅에 묶어두는 유일한 닻일 터.’
감히 물리칠 수 없는 압도적인 잠식이었다.
‘왜일까. 너를 향한 이끌림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게 돼.’
그 순간, 빛의 정원엔 바람과 잎사귀, 물줄기뿐—자연의 소리만 흘렀다.
‘어둠의 영토를 전부 잃는대도 괜찮아. 얼어붙은 대지를 어루만지는 너라는 빛을 극적으로 만났으니까.’
그림자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빛이 걸으면 따라 걸었고, 멈추면 함께 멈췄다.
‘늘 평온하던 정원에··· 서늘한 한기가 감돌다니.’
공기가 묘하게 떨렸다.
빛의 흐름이 일정하지 않았다.
‘포근하던 빛이 뾰족한 파편이 되어 그림자를 아프게 찔러오는데···.’
루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빛이 은푸른 머리칼을 쓸고 지나가며 번졌다.
실낱같은 균열이 사파이어빛 눈동자를 스쳤다.
‘···고요가 무참히 깨지다니. 믿을 수가 없어. 뭐가 문제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넌 여전히 말이 없구나.”
청아한 목소리는 여전했으나, 어쩐지 기운이 없었다.
‘···두렵거든. 섣불리 네 빛에 닿았다가, 고작 남은 그림자마저 영영 바스러지면 어떡하겠나.’
루시아가 손을 들었다.
찬연한 빛이 손끝에서 흘러나와 허공에 머물렀다.
“가끔은 네가 말을 걸어줬으면 해.”
휘황한 빛을 바라보다가 쓸쓸히 미소 짓는 그녀.
빛을 좇는 그림자처럼, 애달픈 궤적을 따라 가녀린 어깨로 미끄러졌다.
‘···찬란했던 머리칼에 서리가 내린 것 같군. 시린 은발이 스칠 때마다 날 것의 고통이 밀려온다.’
사파이어빛 눈 속엔 옅은 겨울빛이 머물렀다.
‘숨이 막혀. 어떡하면 좋을까.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너를···.’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고통처럼 피어올랐다.
“너를 나와 같은 모습으로 빚어낸다면 ···달라질 수 있을까.”
시선을 떨군 루시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애처롭게 떨리는 손이 찬연한 빛을 꽉 움켜쥐었다.
“조금은 잦아들까. 시리도록 아픈 외로움이···.”
그 순간, 정원의 빛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서늘한 공기의 갈라짐을 느꼈다.
‘굳건했던 경계마저 속절없이 흔들린다. 미묘한 뒤틀림이 멈추질 않는데···. 당신, 진정 괜찮은 건가.’
루시아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졌지만, 그 결심 또한 분명했다.
그녀가 손을 들자, 빛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본능은 물러서라 외쳐대건만. 굳어버린 그림자가 전혀 말을 듣지 않는군.’
이윽고 루시아의 손바닥에서 흑금이 서서히 피어났다.
빛이 어둠을 태워 차가운 금속으로 변했다.
‘아프진 않나? 섬뜩한 소리의 근원은 결국··· 빛과 어둠의 융합이잖아.’
그림자로서 빛이 타들어 가며 금속으로 굳어가는 소리를 무방비하게 듣고 있었다.
“흑금으로 너의 형태를 빚어줄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나직했으나, 어쩐지 망설임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그저 아픔만 삼켰다.
‘너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거지. 이 행위가 무엇을 바꿀지, 누가 먼저 무너지게 될지를···.’
정원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빛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어둠은 더 무자비하게 찢겨나갔다.
‘참으로 이상하군. 그림자가 타들어 가는 데도··· 전혀 두렵지가 않다니. 오히려 아픔이 잦아들며 평온해진달까.’
고통보다 강한 무언가가 텅 빈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루시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만··· 멈춰야 해!”
찬연한 빛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이건 너의 어둠을··· 끝끝내 갉아먹고 말 거야.”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빛에 닿아 영영 바스러질까, 두려워 숨죽였던 지난날.’
사파이어빛 눈 속에서 자신이 타오르고 있었다.
루시아가 강제로 빚어내는 육신 앞에서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괜찮습니다.”
목이 마르고, 입안에 쇠맛이 번졌다.
그림자가 된 후, 억겁의 침묵을 깨고 속삭이는 첫 목소리였다.
“당신이 내 어둠을 가져간다면, 그 또한 내겐 축복입니다.”
루시아가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빛이 또다시 손바닥에서 새어 나온 찰나.
‘텅 빈 가슴에 그림자의 심장이 빚어진다.’
불멸의 군주가 한낱 필멸로 부서지는 허망한 소리였다.
‘···이건 삶의 시작이 아니라, 끝의 모양을 한 탄생이겠군.’
빛의 폭발이 잦아들었다.
루시아의 손에서 새어 나오던 빛줄기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끝내 남은 건 어둠과 금속의 잔열뿐.’
난생처음으로 숨이란 것을 들이마셨다.
‘뜨겁게 아려오는 감각. 숨결을 내쉬는 고통조차 경이롭군.’
폐부를 찌른 것은 다름 아닌, 빛의 숨결이 진득하게 녹아든 정원의 공기였다.
떨리는 손을 본능적으로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살갗이로군. 뺨의 생경한 온기와 부드러운 피부 결.’
형체 없던 어둠에게 덧대어진, 끔찍하도록 생생한 필멸의 무게감이었다.
‘단단한 턱뼈의 감각. 정녕 이게 나란 존재인가.’
시선을 떨구자, 발끝에 고인 물웅덩이의 파문이 보였다.
천천히 몸을 굽혀, 수면 위로 맺힌 낯선 얼굴을 직시했다.
‘심연의 어둠은 흑발이 되었고··· 가장자리에 번진 것은 금속의 잔열인가.’
무엇보다 시선을 옭아맨 건, 심연의 바닥에서 천천히 떠오르고 있는 오만한 색채였다.
‘···황금빛.’
수면에 비친 눈동자는 찬연한 빛을 오롯이 집어삼킨 듯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어이 당신의 상흔이 내게 새겨진 건가.’
무게가 생겨난 육신 위로 곧장 날 것의 고통이 밀려왔다.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낯선 근육이 뻣뻣하게 조여 들었다.
‘중력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살이 찢겨나갈 듯한 끔찍한 압박감.’
“하아···.”
헐떡이는 와중에도 기어이 숨을 더 깊게 들이마셨다.
‘생경한 이 고통이야말로 이 세계에 나를 붙잡아 두는 유일한 증거일 테니까.’
아픔이 밀려왔지만, 결코 놓고 싶지 않았다.
‘날 향한 너의 시선이 이토록 뜨거울 줄이야.’
옭아매는 루시아의 시선이 생경했다.
빛은 여전히 찬란했지만, 한 자락이 사라진 듯 희미해졌다.
“당신의 빛이··· 내게 옮겨온 것이로군요.”
죄책감에 짓눌린 중얼거림을 부정하려는 듯,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세상이 곧 균형을 되찾을 거니까.”
찬연한 루시아가 미소 짓자, 세상의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하늘의 경계가 잠시 흔들리며, 빛과 어둠이 뒤섞였다.
‘···처음으로 내려앉은 저녁. 형태화된 나로 인해, 완벽했던 당신의 세상이 저물어가는 건가’
잠시 후, 정원은 다시 고요해졌다.
바람은 잦아들었고, 공기엔 낯선 리듬이 깃들었다.
루시아가 숨을 내쉴 때마다, 시간이라는 감각이 생겨났다.
‘기만적인 행태로군. 세상이 지금, 완벽을 가장하며 평화를 흉내 내고 있으니까.’
빛은 답지 않게 고요했고, 어둠은 그 빛을 흉내 내듯 잠잠했다.
‘···두렵군. 닿으면 바스러질 듯한 아스라한 정적이.’
루시아가 슬며시 눈을 감자, 찬연한 빛이 세계수―휘목(輝木)―의 가지를 타고 광채를 발하며 흘러내렸다.
그림자는 여전히 그녀의 발끝에 가만히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춘 듯 평화로웠다. 지독한 고요가 영원하기를 어리석게 기도할 만큼.’
그날 이후, 세상은 새벽, 낮과 해 질 녘, 밤으로 구분되었고, 하루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참으로 잔인한 섭리다. 빛을 밀어내야만 어둠이 존재할 수 있다니.’
빛과 어둠은 나란히 서 있으면서도 서로의 부재를 속였고, 완전한 평화를 가장했다.
***
아무도 몰랐다.
신이 눈을 감는 순간.
그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세상은 처음부터 어두웠다.
빛은 먼 외곽의 땅에 피어난 꽃과 같았다.
모든 어둠을 물리치듯, 찬란한 숨결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찬연한 이름의 루시아.
말없이 따스히 미소 짓던 빛의 여신.
생명을 불어넣고, 죽은 자를 애도하며, 산 자의 마음속에 살아갈 이유를 새기던 존재.
하나 신도 마음이 있었다.
루시아는 전쟁을 겪었다.
인간의 탐욕과 증오, 믿음의 이름으로 자행된 무수한 살상 속에서, 그녀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루시아의 곁에는 언제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이름 없는 그림자였다.
발끝에 피어나는 안개처럼 고요하고, 위협이 닿기도 전에 이미 칼끝을 막아내던 수호자.
그림자는 입술로 사랑을 말한 적 없었지만, 한 번도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고,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등을 보이지 않았다.
루시아의 미소가 피어난 순간, 그는 눈을 감았다.
오직 그 찬란한 끝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럼에도 그녀가 선택한 남자는 그가 아니었다.
전장을 지휘하던 자로, 참혹한 비극을 끊어낼 황제될 자였다.
빛의 여신은 야망으로 타오르는 눈동자 속에, 사랑이 아닌 만인의 안식을 그렸다.
“루시아, 나는 승전 후 그대를 황후로 맞이하겠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수호하던 그림자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던졌다.
루시아를 향한 화살은 그림자의 심장을 꿰뚫었고, 그녀를 바라보며 최후의 순간 최초로 미소 짓는 그였다.
그날 밤, 루시아의 빛은 여전했으나 눈동자엔 공허가 가득했다.
마침내 종전은 실현됐고, 곧이어 제국이 세워졌다.
영원한 제국―칼데리안.
루시아는 이끌리듯 황후가 되었고, 당연한 듯 황제의 곁에 앉았다.
하나 시간이 흐르자, 점차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 그녀.
언젠가부터 황제마저 외면했다.
모든 것에 빛을 주던 손끝은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고결한 빛이 네 심장을 뛰도록 만들었거늘. 감히 주인의 허락도 없이 어둠 속으로 도망치다니.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루시아는 병들어갔다.
그녀를 붙들기 위해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탐하기 시작한 황제.
누군가는 그런 황제의 변심을 질타하며 수군댔지만, 그는 그저 자신의 사랑을 애타게 되찾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다시 웃지 않는 루시아를 곁에 붙박아 두기엔.
그리고 어느 밤. 그녀는 떠났다.
한 줄기 바람처럼, 조용히,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황궁을···.
뭇사람은 황후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황제는 격분했고, 머지않아 폐인이 되어버렸다.
루시아의 초상화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그 앞에 매일매일 무릎 꿇는 황제.
“이리 허망한 결말을 맞을 바엔, 차라리 당신의 그림자를 살려두어 평생토록 능욕할 것을.”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온 세상의 중심이라 불리는 대륙의 가장 깊은 곳.
하늘과 맞닿은 나무가 있었다.
세계수―휘목(輝木)―.
루시아는 그 성스러운 뿌리 아래 잠들었다.
가슴에 품은 뒤늦은 후회,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사랑, 그리고 너무 늦어버린 선택.
돌이킬 수 없는 지난 날을 뿌리에 고이 묻고, 루시아는 스스로를 잊었다.
그로부터 억겁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비로소 그녀는 눈을 떴다.
최초의 울음이 세상에 닿는 순간, 전 대륙에 신성한 기운이 스쳤다.
고결한 신성을 타고난 그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빛이 잠든 그날, 다시금 빛이 태어났다.
[#001 : 무례한 침입자]
때는 2016년.
세계 각국의 수도에 휘황한 금빛의 탑, 일명 ‘황금탑’이 강림했다.
가이아 시스템에 허락된 자, ‘헌터’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로부터 어언 10년이 지난 오늘날.
영광의 상징이었던 탑은 오염에 찌든 납빛으로 변색되었다.
찬란했던 황금탑은 대지를 잠식하는 ‘잿빛 종양’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인류의 각성은 멈추지 않는다.
***
대한민국 서울, 남산 필동의 새벽은 본래 고요해야만 했다.
기와 너머 푸르스름한 빛이 번지는 풍경을 마주하는 시간.
‘갓 우려낸 홍차의 온기를 음미하며 시작하는 잔잔한 하루.’
차도윤은 일과 중 유일하게 허락된 소소한 안식이자 평온을 나른하게 음미했다.
하나 오늘 새벽, 찬연한 풍광은 지독히도 무례한 불청객에 의해 침범당했다.
느닷없이 강림한 거대한 흉물로 인해 들이닥친 인간들 탓이었다.
“···미쳤군.”
찻잔을 내려놓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결코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도리어 명백한 불쾌함에 가까웠다.
청운각 앞 전경.
‘이런, 지난 세기말(1994)에 봉인해 둔 타임캡슐 광장이 불과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증발했군.’
간밤의 대이변은 늘 평온하던 광장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숭고한 염원 따위 알 게 뭔가. 감히 내 평온한 앞마당에 이따위 흉물스러운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다니.’
참혹한 잔해는 공들여 유지해 온 일상에 날카로운 균열을 냈다.
“쯧, 아날로그의 심장부라더니. 안타깝게 되었군.”
남산의 허리를 찢고 억지로 끼워 넣은 잿빛 이물질.
“신성한 강림이면 또 모를까. 이토록 흉측한 몰골로 내려앉다니.”
거대한 밑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괴한 위압감이 가증스러웠다.
“미래의 약속이 찬탈당한 비운의 자리라···.”
나직한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여지없이 10년 전의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군. 뭔 대단히 기념할 게 있다고 TV 다큐멘터리씩이나 제작해서 호들갑을 떠는 건지.’
오늘과 같은 날.
세계 수도 중심부에 강림한 황금탑이 도시를 처참히 분쇄하던 그날의 기록이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참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어. 끔찍한 대재앙의 아수라장 위로, 어울리지도 않는 기이한 찬탄이 겹쳤던 것도 그때였지.’
언론은 탑이 내뿜는 광휘에 홀린 듯 찬사를 쏟아냈었다.
『재림한 황금탑.』
그따위 이름을 붙이며 경외감을 덕지덕지 붙였다.
하나 예나 지금이나 판단은 한결같았다.
‘미련하긴. 신의 강림도, 재림한 신화도 아니야. 그저 조율에 실패한 한낱 공간의 오류일 뿐인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걸 몰라.’
화려한 허구 너머로 본질적인 결함을 꿰뚫었다.
담장 너머 타임캡슐광장을 으깨고 들어앉은 잿빛 고사목이나, 과거 휘황한 금빛으로 감싸였던 용산의 탑이나 본질은 다를 바 없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겉껍질만 다를 뿐인데.’
타락한 흉물 안에는 정제되지 않은 진실의 찌꺼기 같은 괴물들이 즐비할 테다. 여전히···.
스르륵. 시익―!
희뿌연 안개를 가르고 검게 타버린 덩굴줄기가 소낙비 오듯 쏟아졌다.
고사목 정상에서부터 뻗어 내려온 몇 가닥 줄기가 누마루 난간을 무참히 점령했다.
‘미친, 저게 한 장에 얼마짜리 기완데. 남의 집 귀한 재산을 감히 부숴 먹으려 들어.’
뱀처럼 튀어 오른 검은 덩굴이 난간 위를 날뛰었다.
순식간에 뻗어 나간 줄기는 3년을 공들인 명자나무 분재를 가차 없이 조여버렸다.
“야―!”
슬리퍼를 끌며 마당으로 성큼성큼 내려섰다.
단정하게 갖춰 입은 작업복이 서슬 퍼런 걸음마다 거칠게 흔들렸다.
정밀한 조끼 주머니마다 세월의 손때가 묻은 도구들이 어김없이 자리를 지켰다.
“쯧, 지독한 유황 냄새에 썩은 이끼 향이 코를 찌르네.”
방독면 없이는 3분도 버티지 못하고 폐가 녹아내린다는 극악의 환경.
“남의 앞마당을 아주 잿빛 독무로 꽉 채워 놨군.”
애써 숨을 참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놈은 나를 죽이러 온 게 아니다. 오히려 나를 찾아 헤매다 간신히 들이닥친 것에 가깝지.’
기둥을 타고 내려와 분재를 옥죄고 있는 검은 줄기에 과감히 손을 얹었다.
“남의 마당에 발을 들여놨으면 적어도 예의는 지켜야지, 인마. 안 그래?”
서늘한 덩굴의 껍질 너머로 기이한 맥동이 전해졌다.
처음 만져보는 정체불명의 식물이었으나, 손바닥에 감기는 질감은 지독하리만큼 익숙했다.
‘···뭐지? 이것 참 묘하네. 이 감각은···.’
태생부터 제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존재의 근원에 각인된 누군가의 손을 다시 맞잡은 기분이야.’
낯선 기시감이 머릿속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기억이라기엔 희미하고, 환청이라기엔 지독히도 선명한 잔상이었다.
[대상: ‘오염된 세계수’ 최상층부의 직결 도관과 접촉했습니다.]
[주의: 현 지점은 전 세계 ‘탑’ 중 유일하게 심장부와 실시간 공명 중인 지점입니다.]
머릿속을 집요하게 긁어대는 경고음에도 줄기를 쥔 손을 떼지 않았다.
되레 길 잃은 짐승을 보듯 혀를 쯧, 차며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중독? 웃기는군. 이건 그저 지독하게 체한 것뿐이야.”
거창한 오염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소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작업 조끼 주머니에서 세월의 흔적이 밴 전정 가위를 꺼내 들었다.
엄격한 주인의 손아귀에 맞춰 길든 흑색 합금이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남들에겐 재앙일지 몰라도, 내 눈엔 그저 과습으로 뿌리가 상해가는 화분 속 식물에 불과하지.”
주저 없이 가위를 휘둘러 검게 죽은 덩굴의 껍질을 단숨에 오려냈다.
치익―!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불길한 기운이 들끓는 틈새로 손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막힌 도관의 핵 따위, 흑빛 마력을 실은 손끝으로 꾹 눌러 뚫어주마.”
역류는 순식간이었다.
썩어 문드러진 검은 오염물이 붙들린 손바닥을 향해 미친 듯이 쇄도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영혼까지 부식될 맹독이겠지. [심연의 흑마력]을 소유한 내겐 그저 정제해야 할 거친 영양분일 뿐이거든.’
돌차간의 정적 후 기적이 일어났다.
검게 타들어 가던 줄기가 불시에 선명한 비취색을 되찾으며 스르륵 물러났다.
[상태: 정화 완료!]
[보상: 남산 일대가 차도윤의 주권 구역, ‘헤브넌 공국(Heavnen Dukedom)’으로 귀속됩니다.]
“···공국?”
생경하기 짝이 없는 명칭이었다.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창, 그 어처구니없는 메시지를 곱씹을 새도 없이―
쿠와아앙―!
머리 위를 짓누르는 듯한 굉음이 고요하던 마당을 찢어발겼다.
독무를 거칠게 흩뿌리며 나타난 철제 그림자.
공기를 때려부수는 로터의 파열음이 고막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사나운 하향풍에 난간 위 찻잔이 힘없이 밀려나 바닥으로 처박혔다.
챙그랑―!
“아, 내 찻잔.”
인상을 찌푸리며 깨진 찻잔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담벼락 너머 상공에서 군용 헬기가 육중한 동체를 드러냈다.
로프를 타고 강하하던 국가 특수 헌터 팀이 마당 경계에 닿기도 전.
허공에서 무언가에 걸린 듯, 침입자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내 마당에 발 한 뼘 못 붙이고 대롱대롱 매달린 주제에. 감히 총구를 내 가슴팍에 들이대?’
헌터들은 전술화를 휘저으며 담장 안쪽의 흙을 밟으려 애썼다.
투명한 장막에 가로막혀 단 한 뼘도 들어설 수 없었다.
“거기! 당장 마당 밖으로 뛰세요! 안 그러면 당신, 죽고말 겁니다!”
확성기 너머로 고함을 내지르던 사내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어지럽게 훑어대는 레이저 포인터라니, 가소롭군.’
서치라이트가 독무를 뚫고 마당을 거침없이 비췄다.
‘그래. 신기하긴 할 거야. 너희들 세상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불가사의한 일일 테니.’
지옥 같은 독무 속에서 홀로 정화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한옥.
그 정점, 하늘로 이어진 덩굴줄기를 전정 가위로 다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침입자 무리를 향해 발치에 박살 난 명자나무를 가리키며 따져 물었다.
“저기요, 헌터 양반들. 이거 국가에서 보상해 줍니까?”
허공을 맴돌다가 흩어지는 언어의 파편들.
헌터들은 제 앞가림하느라 바빠 아무런 답이 없었다.
기이한 침묵에 미간이 깊게 패였다.
“젠장, 고사목한테 이 몸이 직접 청구해야 하나.”
깨진 찻잔 조각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지독히도 선명하게 정적을 갈랐다.
쿠르르릉―!
블랙 호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향풍이 고막을 찢어발기며 다시금 마당을 난타했다.
“하, ···계절 모르는 파리 떼가 유난히도 설쳐대는군. 참으로 거슬려.”
무례한 소란에는 눈길조차 사치였다.
발치에 떨어진 찻잎에 시야를 고정했다.
‘세상엔 멸망급 재앙일지 몰라도, 내겐 그저 아침의 정적을 망치는 조잡한 불협화음일 뿐이지.’
무릎을 굽혀 찻잔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것 참, 남의 마당에서··· 예의가 없군.”
나직한 목소리에 내포된 분노는 남산 자락을 뒤덮은 잿빛 탑의 심장부까지 꿰뚫을 만큼 묵직했다.
간밤에 터져 나온 게이트 변이로 세상이 절규할 때 움켜쥔 덩굴은 한낱 가련한 수족으로 전락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내 마력을 맛보더니 알아서 납작 엎드리는군.’
주인의 호흡 하나에도 명줄을 저당 잡힌 듯 애처롭게 파들거렸다.
“팀장님! 진입 불가··· 치직,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습니다!”
“당장 출력 올려! 가이아 서버 접속해서 강제 점유 코드 승인받아, 빨리!”
담장 너머 허공, 로프에 매달린 헌터들이 여전히 버둥거렸다.
방독면 너머로 거칠게 터지는 숨소리와 당혹 섞인 욕설들.
담장 밖에서 쏟아지는 헌터들의 날 선 감각을 가감 없이 받아냈다.
‘···가련한 몰골하고는. 이놈의 지독한 악취는 또 뭐고.’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덧칠한 살의.
시스템의 오류에 직면한 패닉.
타인을 지배하려는 비대한 자아 나부랭이까지.
정제되지 않은 그 모든 악의가 성역을 더럽히는 것이 못 견디도록 불쾌했다.
‘껍데기만 흉내 낸 장난감이로군. 저 무거운 고철 덩어리가 스스로를 옥죄는 관(棺)인 줄도 모르고.’
인류가 신봉하는 가이아 시스템의 주파수가 성역의 벽에 부딪혀 비명처럼 깨져나갔다.
시스템의 신(神)이라 불리는 허구가, 차도윤이 세운 법령 앞에 무릎을 꿇는 소리였다.
‘인간의 오만은 늘 같은 자리에 탑을 쌓지. 그 무너진 파편에 깔려 죽는 것 또한 인간의 몫일 테고.’
더러운 오물을 치우듯 찻잔 조각을 쥔 손을 무심하게 내밀었다.
‘어서 꺼져라. 너희의 무질서한 공포는 순수한 내 정원과 전혀 어울리지 않으니까.’
지저분해진 시야를 정리하려는 지배자의 무심한 손짓일 뿐.
물리력을 넘어 세계의 법칙을 재정의하는 비취색 파동이 해일처럼 마당 경계선을 휩쓸고 지나갔다.
“···어? 슈트 동력이? 팀장님! 제어권이··· 상실됩니다!”
“엔진! 엔진이 멈춘다! 당장 출력··· 으아아아악!”
성역의 경계에 매달려 있던 헌터들의 나노 엔진이 비명을 지르며 강제 종료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영주인 내가 허락하지 않은 불온한 에너지 따위, 감히 성역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리 없지.’
납덩이가 된 슈트에 짓눌린 헌터들은 로프를 타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동력 시스템이 잠겨버린 슈트 안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한 채 뒤집힌 풍뎅이처럼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성역 밖으로 거칠게 튕겨 나가는 헬기를 향해 툭 내뱉었다.
“잘 가라, 고물상으로. 내 마당에 너흰 어울리지 않으니까.”
상위 차원의 존재가 하위 차원의 조잡한 시스템을 ‘소거’하듯 방출해 버린 결과였다.
‘가이아 연방 시스템이라고 했던가. 너희의 방식으로는 날 이해할 수도, 담을 수도 없겠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장 밖은 폐를 녹일 듯한 독무와 추락하는 기체의 굉음이 가득했다.
고요한 낙원을 침범한 방문객들의 첫인상은 이토록이나 무례하고도 번잡했다.
한데 헤브넌 영주의 발치에는 방금 돋아난 어린 풀잎이 싱그러운 빛을 내뿜었다.
‘이제부터 이 땅의 상식은 내가 새로 쓴다.’
부러진 명자나무 가지를 다시금 살폈다.
불쾌한 소란을 가차 없이 밀어낸 다음, 정갈한 자세로 차를 우릴 준비를 했다.
청운각 가주로서 완벽한 주권을 확립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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