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천마
반투명한 푸른 창이 떠올랐다.
[환영합니다. ■■■■ ■■■]
읽을 수 없는 깨진 문자? 그리고···.
[이름 : 강진혁]
[클래스 : 알 수 없음]
[규격 외의 힘을 면밀히 분석중···]
이건 말로만 듣던 그 시스템?
여러가지 의문이 저절로 떠올랐다.
클래스는 불명···?
게다가 규격 외의 힘이란건 뭐지?
그런데 이거 설마, 설마!!!
나 각성한거야?
만년 대리 강진혁이?!
혈관을 타고 엄청난 도파민이 솟아 오르려 했다.
"안 돼. 안 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일단 진정하자.
마음을 가라 앉히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 하자.
그게 우선이야.
"후우...후우..."
냉정하고 차분해지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겨울도 아닌데 입김이 맺히는 것이 아닌가?
입가에 손바닥을 대고 음주측정 하듯 불어보니....
나는 수증기 같은 뜨거운 숨결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곧장 알 수 있었다.
왜냐!?
내 몸 속 깊은 곳.
아랫배 부근에서 뻗어 나오는 마그마와도 같은 알 수 없는 힘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리라.
피가 순환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다소 이질적인 느낌.
난 이 기운이 무협지에서 보았던 ‘내공’이라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다 허구가 아니고 사실은 진짜였단 말이야?
화산의 분화구가 몸속에 있는 것 같아.
끊임없이 용암이 솟아 오르는 활화산.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알코올을 섭취하면 식도가 타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듯···.
내공이라 추측되는 기운이 온몸을 휘감다 못해 통과하고 있다는게 여실히 느껴졌다.
자그마치 수백 개의 선.
이건 설마 혈자리일까?
살면서 그저 한의학의 속임수라고 생각했던 무언가···.
미신인 줄 알았던 ‘길’이 마치 고속도로처럼 뻥 뚫려 있었다.
그동안 지방에 의해 꽉 막혀 있었던 걸까?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사람의 장기란 본래 감각 세포가 없어서 느껴지지 않아야 하거늘···.
내면의 오장육부가 눈에 훤히 보이는 듯 했다.
이걸 어떻게 참아.
따라가기만 해도 뭔가 재밌는데?!
나는 무심코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기운의 흐름을 쫓았다.
작디 작은 나노 머신을 타고 혈관을 탐색하듯, 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뻗어있는 나무 줄기 하나하나를 수색했다.
그런데 활동하는 화산의 분화구에선 마그마 뿐만 아니라 검은 연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와 비슷하게 내 아랫배엔 빛마저 집어 삼킬듯한 검은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커다란 검은 뱀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
아니지.
평범한 뱀이 아니다.
천 년 묵은 이무기가 똬리를 틀고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덜덜덜.
괜히 오금이 저린다.
어쩐지 날씨가 추워진 것 같기도 하고···.
검은 기운은 마치 학창 시절 일진 혹은 깡패를 보는 것 같다고 할까?
괜히 건들기 싫고 눈을 마주치기 싫었다.
그런고로 나는 칠흑의 내공이야말로 천마가 언급했던 ‘선천진기’의 정체라고 추측했다.
그렇게 여길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타고난 것과 전혀 다른 기운.
내 책걸상을 차지하고 두 다리 뻗고 앉아 있건만, 차마 ‘거기 내 자리’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기 때문이다.
「꼬꼬댁~!」
새의 지저귐, 닭이 우는 소리에 깼다.
“후우···.”
숨을 뱉어내며 눈을 떴을 때, 뺨에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산안개가 자욱했다.
“산의 날씨는 정말 변화무쌍하네. 갑자기 웬 안개야?”
일어나려 하던 순간이었다.
푸드덕 푸드덕!
깃털과 바람이 흩날렸다.
내 머리, 어깨, 무릎 등에 새들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깜짝이야! 뭐야! 뭐야! 훠이훠이!”
나는 꼬박 24시간 동안 무아지경에 빠져 운기조식을 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등골이 서늘했다.
산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감각.
팔을 돌려 등을 짚었다.
아뿔싸!
내가 입고 있던 정장 재킷과 와이셔츠 등짝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사실상 옷이 아니라 앞섬만 간신히 가린 넝마나 다름없었다.
“거지꼴이 따로 없겠는데?”
그대로 자연스럽게 뒤를 돌자, 무너진 바위 더미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바람이 통할 만한 검은 틈새가 있었다.
저건 동굴?
큼직하게 부서진 돌덩이가 굴을 막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세월의 풍파를 맞아 깎여 나간 거대 바위들이 꼿꼿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치워 보려는 엄두조차 안날 정도로 무거워 보였다.
‘혹시 여기가 백무진이 거처하던 동굴이 아닐까?’라는 망상을 잠시 해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럴리가 없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묘했다.
나는 넝마가 된 옷을 여미고, 돌멩이 몇 개를 주워 탑을 쌓았다.
자켓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500원은 없었다.
애초에 요즘 세상에 누가 지폐나 동전을 들고 다닐까.
애초에 내가 가진 건 카드 지갑, 게다가 천 원짜리 지폐도 수중에 없은지 몇 년째다.
말 그래도 껌 하나 못 사먹는 500원을 들고 다닐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나는 비급서를 들고 있다.
게다가 선천진기인지 뭔지 나에게 심어주고, 혈자리를 뚫어준 건 확실하지 않는가.
내가 아직 꿈 속의 꿈을 꾸고 있든 아니든, 천마 백무진은 내게 분명 선물을 줬다.
그렇다면 은인이다.
무협으로 따지면, 기연으로 만난 스승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바위 더미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정중히 재배를 올렸다.
이건 은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
우선 첫 번째 절.
“감사합니다. 천마 백무진님. 비급서는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천마신공도, 닦아오신 무(武)의 길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익혀 보려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절.
천마의 당부 아닌 당부가 머릿속을 스쳤다.
“저는 헌터가 되겠습니다.”
들은바로 삼배는 부처님께 드리는 절이라던데....
'만약 다음이 있다면, 그때는 술 한 잔 같이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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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지 흙먼지를 훌훌 털고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내 걸음걸이가 뭔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무리 내려가는게 쉽다고 생각될 지언정···.
10살 짜리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가벼운 것이 아닌가.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올 정도.
“으흠흠.”
그나저나 등산로가 어디야? 이거.
장가계의 산은 애초에 제대로 된 ‘등산로’ 개념이 없기는 하다.
겨우 두 발을 내딛을 수 있는 나무 판자라고 보는게 맞다.
그만큼 산세가 험하디 험한 악산.
괜히 무협지에서 어린 아이가 화산을 올라오면, 제자로 받아주는게 아니리라.
이딴 곳을 어떻게 꼬맹이가 오르는데···?
그저 일반인은 엄두도 안나는 코스.
그런데 지금은 내 집 안방인 것마냥, 동네 뒷산을 가듯 산책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게 문제이지만···.
깊은 산속이기에 전파가 안 터질 테지만.
문제는 애초에 휴대폰 전원이 나갔다는 것이다.
아무리 길어도 하루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놈의 베터리가 조루였다.
연락을 취할 수도, 지도를 볼 수도 없었다.
그러니 일단 무작정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고요한 산 속 어딘가에서 물 소리가 들렸다.
졸졸졸.
화장실에 가면 괜히 소변이 마렵듯, 갈증이 찾아왔다.
그러네, 나는 목울 축인 적이 없었구나.
어푸 어푸.
이야, 물이 이렇게도 맛있었던 거였나?
살면서 맛 본 물중에 으뜸이었다.
그만큼 목이 말랐던 건지도 모른다.
수분을 보충하고 나니,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햇빛에 비친 계곡물에 비친 내 몰골.
그야말로 처참했다.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세수를 하는 등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난 지금 산에서 조난당한 셈아닌가?
너무 현실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위기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혹시 야생동물이 공격할 지도 모른다.
배도 고픈 것 같고.
머리를 쓰자.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게 가장 급선무로 해결해야할 문제다.
짱구를 굴려보니, 기초 중의 기초 상식이 떠올랐다.
“해!”
해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
그건 정말이지 유용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지니까.
사실 내가 아는 조난자가 지켜야할 수칙 같은 것들이 없는게 문제지만 말이다.
어쩌겠는가.
일단 뒤를 돌아, 하늘을 올려다 봤다.
“해가 저쪽으로 가니까, 저기가 서쪽이지? 동쪽에서 뜨고. 맞아. 그러니까 저쪽이 서쪽. 내가 가야할 건 동쪽.”
동방예의지국,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은 동쪽이니까!
손가락으로 하늘을 짚었다.
그런데···!
숲의 빽빽한 나무 사이로 보이던 산의 정상이···.
그 고고한 봉우리가 벌써 아득하게 멀게만 보이는 것이 아닌가.
“미친···씨바···.”
한국인의 전통의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
“이거 진짜야.”
험준하기 짝이 없는 하산길이 초급 코스 같이 느껴졌던 감각을 스스로의 착각이라고 나 자신을 속여왔다.
그야, 아무리 대 각성 시대라고 해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내 보법이 빨라도 너무 빨라.
케이블카를 탄 것마냥.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만 한다.
나, 정말 초인이 된 걸지도 몰라.
“헌터가···머나먼 꿈은 아닐지도?”
그렇게 난 들뜬 마음을 안큼이나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가를 찾을 수 있었다.
살았다!
“씨에씨에.”
한적한 시골 마을.
나는 허름한 구멍가게에 들어섰다.
중국이란 나라가 가지고 있던 과거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게, 이곳은 지폐를 찾아보기 힘든 나라였다.
하다못해 길거리 노점상도 QR코드로 결제하는 나름 첨단 국가였으니까.
심지어 이런 시골 가게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뭐래도 여긴 유명한 관광지니까.
나는 선반에서 생수 두 병과 빵 몇 개를 집어 들고, 핸드폰 충전기를 빌려 달라고 중국어로 말했다.
가게 주인아줌마는 날 보더니 대뜸 미간을 찌푸렸다.
등짝에 대문짝만한 구멍이 뚫려 앞섬만 간신히 가린 너덜너덜한 와이셔츠.
게다가 하루 종일 산속에서 뒹굴어 흙먼지를 뒤집어쓴 꼴을 보니, 영락없는 노숙자였으니까.
“혹시 개방의 거지야?”
개방이란 단어는 분명 들어본 것 같은데,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나 ‘거지’라는 뉘앙스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해명을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게다가 가관인 건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워 쓰 한구어런”(저는 한국인입니다.)
그녀는 귀찮다는 듯, 파리라도 쫓듯 대충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애초에 평범한 한국인 등산객이 구태여 이런 객지의 점포를 이 꼴로 찾아올 리도 없으니 이해는 간다.
“결제, 결제하겠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지갑에서 해외 겸용 카드를 꺼내밀었다.
아무리 행색이 초라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선 카드 한 장이면 모든 게 증명되는 법이다.
심지어 천마님도 500원에 구워 삶아 먹은 나다.
자신감있게 내밀자, 마뜩잖은 표정으로 아줌마가 카드를 결제기에 긁었다.
그런데.
삐빅-!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드는게 아닌가.
“그럴리가 없는데, 다시 해보시죠?”
“에휴···어디서 이런 거지가 와서···.”
성질을 건드려도 일단 참을 수 밖에.
[삐빅-!]
아줌마의 표정이 급격히 험악해졌다.
중국어로 쏼라쏼라 소리를 지르며 카드를 툭 던졌다.
“정지된 카드야. 이거.”
“······예?”
내가 잘못 알아 들었나?
“잠깐, 잠깐만요! 정지 당했을 리가 없는데? 한도 넉넉한 신용카드고···”
그런데 정말이었다.
무심코 돌려서 보여준 결제기에 그렇게 찍혀 있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
나는 발만 동동 굴렀다.
이럴리가 없는데.
애초에 카드값 연체한 적도 없을 뿐더러 한도 초과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멀쩡했던 카드가 왜 갑자기 정지가 돼?!
"역시 거지일 줄 알았다니까! 내 눈은 못 속이지. 장사 방해하지 말고 썩 나가지 못해?!"
훠이 훠이.
"뭔가 오해가 있는 겁니다. 잠시만 휴대폰 충전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돈을 내. 돈을."
"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날 내쫓으려 할 때였다.
“어이! 맥주랑 안주 좀 내와!”
가게 문이 별안간에 쾅 열렸다.
동네 건달로 보이는 문신투성이 사내 두 명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한 것 같은 놈들은 오자마자 냉장고를 발로 걷어찼다.
뭐지?
깡패? 양아치?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들이 두려워서?
아니다.
천마의 위압감, 그 살기에 비하면 이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난 단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과연 각성한 천마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좋은 테스트 상대이지 않는가.
어어? 내 멱살을 잡으려고?
그렇다면 이건 그래, 정당방위다.
정의 구현이기도 하고.
천마가 정의 구현?
이게 맞는지 싶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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