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태사자와 손책
1.
엄백호군이 손책군에게 완승을 거둔지 3일 후, 우번은 약속대로, 엄백호군을 재편시켰다. 공성전에서 엄백호군의 사망자는 117명 부상자는 425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투항자 1만 1천 명을 더하니, 부상자 제외한 가용 병력이 3만 명에 이르렀다.
엄백호군이 이처럼 작은 수의 인명손실로 손책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우번의 뛰어난 지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백호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우번을 칭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번은 자신의 힘만으로 대승이 가능했다 생각하지 않았다. 성벽보강공사와 같은 전투준비와 군량 및 전략 물자 확보, 그리고 병력의 확충과 군의 사기에서 드러난 힘은 우번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전후처리 과정에서 우번은 엄백호의 능력을 다시 확인했다. 엄백호는 117명 사망자의 위패를 군영에 세웠다. 그리고 전사자 가족에게 죽기 전 받았던 봉급보다 많은, 1단계 상승한 계급의 봉급을 지급했다. 부상자에게도 최고의 의원을 투입해 치료와 재활을 도왔다.
이것은 후한시대 당시에, ‘이상적인 지도자의 덕목’에 속하는 일이었지만, 실행이 거의 되지 않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대부분 군웅들에 속한 병력은,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 부지하기 연연하다가 사망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유력자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소수 장수의 죽음은, 정중한 추모를 받았지만, 힘없는 일반병사들의 죽음에는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부상병 역시 짐짝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엄백호의 전사자, 부상자 처리 방식은 장기적으로 군의 사기를 올리고, 민심을 잡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이제 엄백호군은 자신이 죽어도 가족이 굶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투에 임할 것이다.
엄백호는 별다른 생각 없이,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적용했다. 그러나 곁에서 지켜보던 우번은, 엄백호의 파격적인 정책과 그것이 가지고 오는, 탁월한 효과를 목격하며, 엄백호가 가진 미지의 힘을 가늠하고 있었다.
정찰병의 보고를 통해, 주유가 지휘하는 손책군 1만 명이, 곡아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우번은, 회계로 2,000명의 병력을 투입해 점령하자고 간언했다.
“주공, 지금 회계에는 손책군의 잔당 500명만 남아있습니다. 병사 2,000명만 파견해도 쉽게 점령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하하. 좋군! 좋아! 이번에도 중상선생의 예측이 맞았군. 그런데 누구를 회계로 보내면 좋을 것 같소?”
“회계 인근에 산월족이 많으니, 구표두를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오!! 그래! 그래! 구표두라면 산민들과 잘 지낼 거요! 역시 우리 군사는 천하제일 지략가야!!”
“과찬입니다. 주공”
우번이 산월족 출신 구승을 회계 점령군 통솔자로 추천한 것은, 회계 방면에 묶일 병력을 최소화하면서, 회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회계 인근에 적지 않은 수의 산월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고작 2,000명의 병사로, 산월족의 침공을 막을 수 없었다.
엄백호가 비록 산월족과 교류가 깊다고 하지만, 회계에 욕심을 부릴 세력이 존재 가능하기에, 월나라 왕족 후예인 구승을 책임자로 보냈던 것이다. 이것은 고지식했던 우번이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과거 한나라의 틀에 묶였던 우번이라면, 무리해서라도 산월족이 회계 방면에서 활동하는 것을 막으려 했겠지만, 이제는 산월족과 공존을 모색하게 됐다.
명을 받은 구승은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빠르게 회계로 진출했다. 우번의 우려대로 회계로 가는 길목에는 회계를 도모하려는 산월족들이 다수 있었지만, 월나라 왕족 후손인 구승이 병력의 통솔자인 것을 확인하고, 속속 엄백호군에 합류했다.
회계 공략은 전투 없이 무혈입성으로 종결됐다. 산월족의 합류로 5,000명으로 불어난 구승의 병력을 1/10인 500명으로 막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500명의 손책군은 야밤을 타 도주했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회계 인근 산월족에게 잡혀 구승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주공, 회계로 파견된 구표두의 서찰입니다. 주공께 귀의한 산월족 병사 5,000명과 사로잡은 손책군 포로 350명을 오로 보내겠다는 전갈입니다.”
“중상선생, 5,000명이라 했소? 산월족의 용맹함은 일반병사 두 몫을 해내는데, 5,000명이라니……. 껄껄껄! 믿기지가 않소.”
“모두 다 주공의 공덕입니다.”
구승은 회계 인근 지역 민심을 완전히 잡을 수 있었고, 6,000명의 산월족을 병사로 흡수할 수 있었다. 구승이 가진 총병력은 8,000명이 됐다. 구승은 그 중 치안 유지에 필요한 3,000명을 제외한 5,000명을 엄백호에게 보냈다.
엄백호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진 구승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보상은 다시 엄백호에게 중량감 있는 재보상으로 이어져,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 우번의 말대로 이것은 엄백호의 덕행이 만든 결과였다.
산월족의 합류는 단순히 엄백호군의 병력이 늘었다는 것을 넘어, 엄백호가 손 씨 가문의 오나라와는 다르게 강동에서 내치에 성공할 가능성을 열어준 징표라 할 수 있었다.
손책, 손권을 비롯해 손 씨 가문은 산월족을 토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월나라의 후예로 대대로 강동에 뿌리박고 살았던 산월족은, 손 씨 가문에 끈질기게 대항했고, 그 결과는 오나라의 국력 약화로 이어졌다. 엄백호는 이 악연의 고리를 끊었던 것이다.
2.
구승이 보낸 산월족 병사가 합류하자, 엄백호에게 꾸준히 귀의한 병사를 합쳐, 오성의 총병력은 4만이 넘게 됐다. 이제 엄백호군은 완전히 전투준비를 마친 상태로, 곡아로 진출해 나머지 손책군을 정벌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손책의 동생 손권이 사자로 오에 당도했다.
“태수님을 뵈옵니다.”
“손공자.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가?”
“저의 형과 장수, 병사들을 풀어주시라 청하러 왔습니다.”
14세의 손권은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담력과 지력을 갖춘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손권은 부친인 손견이 유표의 기습으로 죽자, 9살의 나이에 유표를 찾아가 손견의 시신을 수습해올 정도로, 언변이 뛰어났다. 엄백호가 아직 오군 태수로 봉해진 것이 아니건만, 손권은 엄백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태수라 지칭할 정도로, 잔꾀에 능했다.
“손공자, 그대의 형 손책을 비롯한 장수와 군사들이 강동에 끼친 해악이 막대하거늘, 죽음으로 반성해도 모자를 판에 석방해달라고 하는가?”
“강동에 기반이 약한 저희가 욕심을 참지 못하고 무리한 것입니다. 깊은 반성을 하고 있으니, 용서해주십시오.”
“어허! 손공자. 손책이 만든 혈겁이 강동을 뒤덮고 있어! 이것은 그냥 반성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
“태수님 반성의 의미로, 저희는 곡아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요망한 것! 어린 나이라 친절히 대했더니, 나를 능멸하려고 하느냐? 곡아는 물론이고 너희 가문이 점령한 말릉까지, 단숨에 점령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있어! 그런데 고작 곡아? 헛소리 그만하고 썩 물러가라! 내일 당장 손책의 목을 쳐, 성문 앞에 매달 것이다!”
“태수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손권의 연기는 전문배우 못지않게 현실감 넘쳤다. 부장들은 물론이고, 손권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는 우번까지, 애절한 14살 꼬맹이의 연기에 홀딱 넘어갔지만, 손권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는 엄백호는, 냉정하게 손권을 물리쳤다.
엄백호는 공성전에서 손책을 비롯해 정보, 한당 ,황개 등……. 손책군의 주력 장수를 포로로 잡았다. 엄백호가 손책과 부장들을 살려둔 이유는, 1만의 병력을 가진 주유의 움직임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 엄백호군의 4만 병력이 정비가 끝난 상태에서, 더 이상 손책을 살려둘 필요 없었다.
손책이 오군태수 허공, 오군 호족 추타와 정동을 주살한 것도 모자라, 부친인 손견과 교우관계가 있던 왕성마저 비열하게 살해한 것이, 사로잡힌 손책군 포로 심문에서 발각된 상황이었다. 군심은 물론이고, 민심도 손책을 처형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다수였다.
번잡한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내실에서 목련과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던 엄백호에게 엄여가 면담을 청했다. 저택 내실은 엄격히 출입이 통제된 곳으로, 엄백호 이외에 남자가 들어올 수 없었다. 그리고 내실에 있는 엄백호를 불러낼 수 있는 사람도 엄여와 우번을 포함해서 극소수에 불과했다.
“형님! 유자사 휘하의 자의 부장 아시죠?”
“자의부장? 태사자 말인가?”
“예, 그 사람이 형님 뵙기를 청합니다.”
태사자는 청주 동래군 사람으로, 용력이 출중했으며, 신의가 깊은 인물이었다. 그는 특이하게 긴 팔을 가졌는데, 활의 명인으로 알려졌다. 태사자는 당시 양주자사 유요의 휘하에 있었지만, 어리석은 유요가 허소를 중시하고, 태사자를 홀대해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심지가 굳은 태사자는 유요가 패해 예장으로 도주했을 때, 말릉 인근 사람들을 모아 끝까지 저항했다. 손책의 군세를 이기지 못한 태사자는 결국 항복했고, 손책은 자신과 맞상대할 만한 무력을 가진 태사자의 능력을 높이 사, 수하로 영입했다.
“자의부장 만나서 반갑소이다. 술이나 한잔 하시겠소?”
“영광입니다. 장군. 선약 없이 찾아온 저를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백호는 태사자를 이전에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태사자를 잘 알고 있었다. 엄백호가 손책을 죽이지 않은 숨은 이유는, 손책을 미끼로 태사자를 영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태사자는 엄백호가 쳐놓은 함정에 스스로 들어왔던 것이다.
“자 드시오!”
“아! 술맛이 참 좋습니다. 장군. 이런 귀한 술은 처음입니다.”
“쳇! 형님 사람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이거 우리 부장들과 마실 때 내놓은 것보다 훨씬 좋은 거네요!”
‘허허……. 등치는 산만해가지고. 쪼잔 하기는……. 그리고 맛좋은 건 알아가지고……. 금방 알아차리네…….’
엄백호 일행이 마신 술은 산월족의 진상품인 ‘후아주’라는 것이었다. 후아주는 원숭이가 과일을 숨겨놓은 곳에서 발효되어 만들어진 술이라는 의미로, 산월족들이 여러 가지 과일을 모아 한꺼번에 발효시킨 술을 칭했다.
혼합하는 과일의 종류, 숙성기간에 따라 후아주의 맛이 다른데, 엄백호는 태사자를 위해 그중에서 최상급을 내놓았고, 그걸 알아차린 엄여는 입이 대자로 나와 투덜거렸다.
“어허! 아우야!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그에 맞는 대접을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 아니겠냐?”
“아……. 아니옵니다. 장군! 귀한 손님이라뇨?”
“자의부장이 귀한 손님이 아니면, 누가 귀한 손님이겠소? 자 쭉 한잔합시다!”
태사자는 점점 초조해졌다. 그가 엄백호를 찾아온 것은 새로 모신 주공인 손책의 구명을 위해서였다. 처음 태사자는 과연 엄백호가 자신을 만나줄까? 걱정이었는데, 엄백호의 과분한 환대가 이어지니, 이제는 손책에 대한 얘기를 꺼낼 수 없어 고민에 빠졌다.
“자의부장. 벽력궁이라는 걸 들어보았소?”
“벽력궁이라면…….“
“손책을 단 두 방에 사로잡은, 바로 그 무기 말이요.”
“자세히 파악은 못 했지만, 매우 위력적인 활이라 들었습니다.”
“자의부장의 활솜씨는 천하제일이라 들었소? 우리 벽력궁과 시합을 해보는 게 어떻소? 만약 그대가 이기면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소.”
“소원이라면……. 좋습니다! 시합하게 해주십시오!”
“형님. 이건 좀 불공평합니다. 자의부장은 술을 많이 한 상태인데, 벽력궁과 시합이라뇨?”
“괜찮습니다, 시합할 수 있습니다!”
엄여의 우려대로 태사자는 많이 취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손책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에 더해, 엄백호가 벽력궁이라는 대단히 위력적인 활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태사자는 자신의 활 솜씨와 견주어 보고 싶은 공명심도 있었다.
Comment '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