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신전(2)

악신의 도착까지 한 달 남았을 때부터 능력자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고 열흘이 남았을 때 모두가 모였다. 이후 남은 기간은 휴식을 취하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거나 봉신진의 점검 및 마석제작으로 시간을 보냈다.
며칠 후에는 악신의 위치가 탐지범위에 들어왔는데 상아가 도착시간을 계산해 보았더니 정령왕이 말했던 시간보다 조금 늦는다고 했다.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악신이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예고된 시간에 도착할 것으로 정정했다.
도착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능력자들은 각자 맡은 구역으로 향했는데 그들은 봉신진의 12중추를 하나씩 담당하기로 되어있다. 다만 시온은 전투에 참여해야 했으므로 상아가 대신 중추를 하나 담당했다. 그리고 상아를 대신해서 소피아가 사령실에 남아 전투상황을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보조하기로 했다.
시온과 키리에, 성아는 공간도약을 통해 성계의 끝자락으로 마중을 나갔다. 달빛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고 봉신진의 영향권 밖이기도 했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기회를 봐서 유인할 예정이다.
「시온 씨, 현재 모든 인원의 배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언제든지 발동가능합니다.」
악신을 기다리던 도중 봉신진의 중추에서 대기하던 능력자들을 대표하여 단우가 연락을 취해왔다.
「악신은 조금 더 걸릴 테니 계속 대기해. 때가 되면 연락하지.」
「혹시 저희도 전투를 볼 수 있을까요? 일전에 마족침공이 있었을 때처럼요.」
「정신집중에 방해될 것 같아서 준비하지 않았어. 전투장면은 나중에 기록보관소에서 확인하든지 해.」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 대기하겠습니다.」
연락을 끊고 약 15분 뒤. 기다리다 지루해졌는지 키리에가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장난을 걸어왔다. 그 모습에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아서 자칫 싸우다 방심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웠지만 이 자리에 있는 3명 중 가장 강한 사람이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길래.”
“흠, 그 말대로 지금 나는 긴장한 것 같아. 솔직히 이번 만남이 두려워. 마치 오랫동안 외면했던 자신의 죄를 마주하는 기분이야.”
“괜찮아, 몸도 마음도 내가 지켜줄 테니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키리에는 살며시 밀착해서 기습적으로 뺨에 키스했다. 그녀의 행동 때문에 두려움을 한순간 잊을 수 있었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라며 타박을 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고 입가에 작게 미소가 지어지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성아가 지켜보고 있음을 깨닫자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면서 정색했다.
“어험, 슬슬 도착할 시간이다. 집중하자.”
눈을 감고 악신의 기운을 찾아보았더니 멀리서 무언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악신인지 명확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이곳으로 향할 존재가 달리 있지는 않다.
“멀리서 느껴져. 인지가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다가오고 있어.”
“놈도 우릴 발견한 모양인데 어떻게 할래? 선공할까?”
“일단은 기다려. 오랜만에 만나는데 잠깐 정도는 대화할 수 있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악신은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화시대에 잠깐 유행했던 히마티온 복장을 하고 한 손에는 빛나는 나무막대기를 들고 있었는데 얼굴이나 체형은 전체적으로 미형의 남성으로만 보였다.
“드디어 다시 만나 뵙습니다. 비천하고 지고한 자여.”
순식간에 나타난 악신이 예를 갖춰 격식 있게 인사하였고 성아는 잔뜩 경계하며 검을 뽑으려 했으나 시온이 손을 뻗어 제지한 후 앞장섰다.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위대했던 동료여. 이런 식의 만남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 만남은 당신이 우리를 떠났을 때부터 예정된 일입니다. 형제들은 이 순간을 예견했고 나에게 전언을 부탁했습니다.”
“전언입니까?”
가져온 전언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왠지 모르게 듣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악신은 그러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들었던 말을 그대로 목소리까지 똑같이 구현해서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지난날의 실수를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음을 우리 모두 인정한다.
비록 서로 다른 길을 가지만 당신은 여전히 우리의 수장이다. 훗날 세 번째 전쟁이 현실로 일어나 당신에게 우리의 힘이 필요해진다면, 그때는 설령 신계를 적으로 두게 될지라도 당신의 힘이 될 것을 맹세한다.
그러니 부디 우리를 위한다며 주신을 찾아다니지 않길 바란다. 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 다음에 만날 때는 우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것이니 언젠가 당신의 부름이 있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마음이 짓이기는 기분이었다. 슬프고 슬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투지가 꺾여서 전투에 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감정을 이겨내고 현실을 직시했다.
“······우리가 다시 함께할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우리가 갈라서게 된 원인은 아이들의 처분을 두고 뜻이 엇갈렸기 때문이죠.
파수꾼들이 숨긴 아이들이 있는 것을 압니다. 필시 저를 원망하고 두려워하겠죠. 그러니 저와 함께한다는 것은 곧 아이들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 아이들을 죽이려 들지 모르는 저와 진심으로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형제들은 믿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당신과 화해할 수 있을 거라고. 세 번째 전쟁이 그 계기가 될 것이라고.”
“당신도 세 번째 전쟁의 신탁을 들었군요.”
“정령신께서 모든 신족에게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예견한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전쟁은 일어나지만, 그것은 3차 신마대전이 아니라는 것을. 즉, 세 번째 전쟁이란 신족과 마족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중심이 되어 싸우는 것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세 번째 전쟁의 주역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왜 싸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 정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더는 혼돈을 퍼뜨리고 싶지 않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 생에 그리 생각하셨다면 다음 생에 다시 묻겠습니다.”
“그때도 제 답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니까요. 세 번째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곳에 저는 없을 겁니다.”
“인간의 왕이 될 자가 따로 있단 말입니까?”
악신의 질문에 시온은 말문이 막혔다. 혹시라도 생각을 읽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싶어 머릿속에 다른 것을 가득 채우려고 애썼다. 그렇게 무언의 시간이 흐르자 키리에가 다가와 손을 잡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시온도 무언가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기분을 그녀에게 전할 수 있었다.
마음을 진정할 수 있게 되자 닫혔던 입은 다시 열렸다. 악신의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으므로 새로이 질문을 던졌다.
“어쩌다 악신이 되셨습니까? 제가 그토록 인간을 멀리하라 했건만,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시던 분이 어째서 자신의 권능을 부정하고 파멸을 갈망합니까?”
“우리의 실패로 대홍수가 일어났고 함께 이루었던 세계는 정화되었습니다. 그 후 당신께서 우리 앞에 마지막으로 나타나기 전, 저는 살아남은 인간을 지켜보았습니다. 비록 남은 것이 없는 세계지만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고 약동하는 작은 생명들의 모습이 제게는 너무나 아름답게만 보였습니다. 거기서 생명의 따스함을 느꼈습니다. 문명을 잃은 세계에서 다시 시작하는 인간들을 보며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악신의 목소리가 고양되면서 듣는 이들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신이 타락하면서 흘러나오는 부정한 기운이 보호막을 뚫고 스믈스물 들어오자 역겨운 냄새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아! 신들 못지않게 빛나던 작은 생명이여, 나에게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해주면 좋으련만 세상은 새로운 질서가 자리를 잡고 멸망의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니···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는 과거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결국 바라고야 만 것입니다. 인류가 한 번 더 멸망을 겪었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번 그 생명의 빛을 보여주었으면 한다고.”
“당신이 아직 빛나기에 조금은 희망을 품었지만, 이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군요.”
“비록 권능은 잃었어도 저는 신성합니다. 과거 당신께서 그랬던 것처럼 저 또한 세상을 위해 파멸을 내리려 하니 형제들은 저를 질책하고 가두었습니다.”
“불경한 타락을 제 실패와 동일시 하지 마십시오. 저는 자신의 희열을 위해 멸망을 바란 적이 없습니다. 제가 없애고 싶었던 건 우리가 낳은 죄일 뿐이었지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부디 자신의 어긋남을 깨닫고 얌전히 봉인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하는 일은 인간을 위함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련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자손을 죽음으로 인도했던 당신이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되면서 저는 안 된다고 하는 건 비겁합니다.”
“그따위 헛소리를··· 우리의 실패 이후, 신이 인간세상에 간섭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어찌하여 대놓고 죄를 지으려 하십니까?”
“이미 더럽혀진 몸인데 무얼 마다하겠습니까? 사실 이렇게 되어버린 제 모습을 보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저도 그들과 함께이고 싶은데 아무리 신격을 낮춰도 순수한 신족으로 태어난 저는 당신처럼 인간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이 한 몸 인간을 위해 희생하도록 하죠.”
“그렇다고 느닷없이 최종시련을 부여합니까!? 정말 이 정도로 뒤틀렸을 줄이야···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성아! 시작해!”
전투개시를 알리는 외침과 함께 성아는 악신을 향해 달려가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무기타입을 흑건, 백아로 변경하여 급소를 노렸으나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칼날을 잡아 방어한 악신은 성아와 무기를 지긋이 바라보며 신의 통찰력을 발휘했다.
“신의 합금으로 만든 무기, 다른 법칙으로 태어난 인간이라? 과거 수많은 영웅 중에서 이정도로 강한 자는 거의 없었지만 저를 상대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습니까?”
초신속의 일격이 간단히 막혀버리자 성아는 본능적으로 자신과의 격차를 깨달았다. 키리에와 훈련하면서 보았던 그녀의 강함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악신이 더 강해 보였다. 그렇다고 주인이 보는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고 지금 혼자 악신을 상대하지 못하면 이어지는 작전이 어렵게 된다.
“나를 앞에 두고 한눈팔지 말라고!”
악신이 잡은 칼날은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즉시 단검을 손에서 놓고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빛나는 나무막대기가 스스로 움직이며 주먹을 막았다.
‘흑화 2식 검은태양.’
성아를 중심으로 사방팔방에 검은 불꽃이 타오르며 거대한 구체를 이루었고 주변 일대가 화염에 휩싸이면서 시온과 키리에는 후방으로 물러났다.
한창 불꽃이 타오르고 있을 때 구체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빛이 거세게 뿜어져 나오더니 불이 흩어지며 소멸했다. 그리고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악신이 옷에 그을린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고서 말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