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신전(4)

“기다리게 했네. 지난번에 못 한 싸움, 이어서 해볼까?”
“이번에는 네가 상대인가? 뭐, 좋다. 너도 일단은 인간이니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겠지.”
전투개시와 함께 키리에의 주변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듯이 공간이 일렁였다. 그것이 어떤 공격으로 이어질지 눈치챈 악신은 급히 방어를 취하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려고 할 때는 이미 타격이 들어온 상태였다.
“흠, 아프군.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증이다.”
후방으로 크게 밀려난 악신은 사방에서 공격이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더욱 강한 신성을 발산하며 몸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신성을 발현하면 할수록 저주도 강해지므로 본래보다 절반 이하의 성능을 보였다.
“단죄하라 나는 율법일지니.”
악신이 한 구절의 주문을 외자 그가 지닌 막대기에서 나오던 광선이 더욱 강렬해졌다. 광선의 크기가 커진 만큼 대검을 다루듯이 자세를 잡았고 키리에는 그에 따른 대응으로 양손에 마기를 집중하고 날카롭게 연마했더니 응축된 힘의 결정은 맹수의 발톱처럼 변했다.
공격할 준비가 끝나는 즉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며 일격을 가했다. 먼저 악신이 횡베기를 시도했고 키리에는 광선검의 칼날을 왼손으로 잡아 그대로 부러뜨렸는데 검을 이루고 있던 법칙이 파괴된 것이므로 나무막대기는 한순간에 빛을 잃고 평범한 막대기가 되었다.
무기가 파괴된 즉시 오른손을 뻗어 마기를 사출했다. 순간적으로 방출된 마기는 폭풍이 되어 악신을 덮쳤으며 악신은 신성을 방출해 방어했다. 거대한 힘의 충돌에 의한 여파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지면도 같이 깎여나갔고 커다란 크레이터를 남겼다.
“절대적인 힘조차 압도하는 방식. 한순간 마왕과 싸우는 느낌을 받았다.”
“악신이 되면 눈치도 없어지는 건가? 첫 번째 전쟁에 참전했을 정도로 오래된 신이라면 나와 똑같은 얼굴을 알고 있을 텐데?”
“그래, 기억한다. 하지만 너는 그녀가 아니다. 내가 알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인간일 뿐.”
“인간이라? 맞아. 나는 인간이야. 지금은 말이지.”
마지막 말에 무언가를 눈치챈 악신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뒤로 크게 물러났다. 그리고 나무막대기에 신성을 주입하며 파괴된 법칙을 재정립한 후 다시 광선을 내뿜게 했다. 키리에 또한 오른손의 손톱에 재차 마기를 주입하고 연마하여 한 자루의 검을 만들었다.
서로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자 검의 궤도를 따라 각각 신성과 마기로 구성된 참격이 사출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힘의 충돌.
먼 옛날 적은 수의 마왕이 다수의 신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마신의 순수한 피를 이어받으면서 생긴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된 현재 그 힘은 쓸 수 없지만 전생의 기억을 통해 구현한 힘은 격이 낮아진 신성을 한순간 압도할 만큼의 위력이 있었다.
“마왕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 따위 있을 수 없다. 형제들이 그런 법칙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권능을 잃은 신이라는 건 정말 볼품없구나. 이봐, 나는 아직 전력을 다한 게 아니라고?”
“윽···.”
힘에서 밀리게 된 악신은 빛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은 후 속도를 높여 달려들었다. 초광속도약을 단거리로 사용하여 키리에의 후방으로 이동했고 빛보다 빠르게 이동한 만큼 한순간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자칫하면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할 수도 있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악신을 멀리 날려버렸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 있던 것은 상처의 치료를 끝낸 성아였다. 회복력이 뛰어난 만큼 허벅지의 상처는 흉터조차 남기지 않았고 그녀의 손에 들린 필중의 활은 마기와 마나의 융합기술 흑화에 의해 검은 빛을 발했다.
신성보호를 꿰뚫고 들어온 화살을 보며 악신은 이대로 협공받으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상황을 뒤집기 위해서는 피의 저주를 해결해야 하는 걸 알지만 정작 저주를 유지하는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저주의 범위는 공간 전체, 공간의 끝은 관측되지 않는군. 그렇다는 건 무한의 세계, 아니면 관측하는 만큼 확장되는 세계인데 시전자가 인간임을 고려하면 후자겠군. 확장되는 범위에서 아무리 찾아봐야 근원지는 찾을 수 없을 테고··· 하지만 지하는 어떨까?’
거짓세계 공략법의 힌트를 떠올린 악신은 오른손에 신성을 집중하며 지면을 내리쳤다. 그 일격으로 거짓세계가 깨지지는 않았지만 크레이터가 무너져 내리며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싱크홀이 발생했다.
“하! 역시 예상대로군!”
악신이 싱크홀을 향해 달려들자 키리에는 그 앞을 막아섰고 성아는 다리를 조준해서 화살을 쏘았다. 악신은 화살은 몸으로 버텨가면서 키리에와 격돌 후 힘겨루기로 길을 뚫으려 시도했으나 힘에서는 압도당한 터라 전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악신은 초광속도약으로 이동할 수 있었고 그대로 싱크홀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공간도약으로 따라잡은 키리에가 악신을 걷어차며 진입을 방해했다.
“나를 앞에 두고 어딜 도망가?”
“후후, 거짓된 세계를 지탱하는 근원에 도달하고자 할 뿐인 것을.”
“그건 곤란한걸? 이대로 나랑 좀 더 어울려 줘야겠어.”
“시간끌기는 여기까지다!”
이번에는 전력으로 신성을 발산하며 주변 일대를 빛으로 뒤덮었다. 그 눈부심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는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악신의 몸은 빛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이후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악신의 기척이 함께 사라졌고 키리에는 바닥의 싱크홀을 내려다보며 바깥에 연락을 취했다.
「악신이 지하 어둠으로 뛰어들었어. 이대로라면 근원에 도달할 텐데 어떻게 할까? 쫓아가는 편이 좋을까?」
「아니, 괜히 너까지 헤매게 될 필요는 없어. 어차피 근원에 도달하는 건 시간문제였으니, 마침 이쪽 준비도 거의 끝났고 지금 꺼내줄 테니 잠깐 기다려.」
통신이 끝나고 얼마 후 키리에와 성아는 현실세계로 불려 갔고 홀로 남은 악신은 무저갱 같은 어둠 속을 끝없이 내려갔다. 그리고 어둠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이성을 구현한 상부와 달리 하부는 감성을 구현했기 때문에 제대로 관측할 수 없는 어둠이군. 이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 그래야 비로소 본질에 다다를 수 있을지니.’
어둠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 그의 앞에는 악신과 똑같은 모습의 환영이 나타났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은 행동을 취하는데 악신이 손을 뻗자 환영도 손을 뻗었고 둘의 손끝이 닿자 악신은 거짓세계의 구성원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군, 여기는 나의 정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세계. 그렇기에 이 세계를 파괴한다는 것은 내 정신을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공략법은 간단하지.’
방법을 알았다면 남은 것은 행동뿐. 악신은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양손을 머리로 가져간 후 힘을 사용해 의식의 끈을 놓았다.
불과 15초 남짓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거짓세계는 빠르게 붕괴했다. 현실과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자연스럽게 거짓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주문을 외우는 시온과 주변을 가득 채운 마법진이 발동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영원의 불꽃, 시작의 불꽃일지어다.
불타라 영겁의 불꽃이여
모든 것을 불태우는 지옥의 화염이여
천지를 뒤덮는 재의 평원을 펼쳐라.
무형의 태양은 내 손안에 있을지니
그려라, 화염의 세계를
종언의 끝자락까지 타오를 멸절의 세계를 펼쳐라.”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사방팔방에서 일제히 발동된 화염마법은 한 곳을 향해 모여들었다.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전방위에 가득 찬 화염은 빠르게 거리를 좁혀왔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한 마리의 붉은 새였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붉은 새에 비하면 전방위의 화염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 새는 신성을 연소하여 작렬하는 성스러운 불꽃이며 불의 신을 잡아먹은 죄악의 불꽃이다.
피의 저주가 깨진 지금이라면 불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을 시도할 수 있지만 퇴로에는 키리에가 버티고 있었고 새의 후방에서는 성아가 필살의 일격을 준비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여, 천지를 관통하는 한줄기 섬광이 되어 내 손에 오라.”
강대한 마기가 한 가닥의 화살에 모여들었고 회피불가의 저주가 깃든 칠흑의 화살이 불길한 빛을 내뿜으며 악신을 향해 발사되었다. 표적은 정확히 머리를 노리고 있었으며 회피라는 행동을 취하면 저주가 발동하여 회피하지 못하는 미래가 강제된다. 그렇다고 피하지 않으면 정상궤도에 따라 머리에 적중할 뿐. 이것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운명의 신 정도일 것이다.
싸움에 있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악신은 지금 상황이 몹시 안타깝게 여겨졌다. 피의 저주를 걸었던 것이나 지금의 공격을 보면 깊은 원한을 품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것이 진심은 아닐지라도 위력에 용서가 없었으니 그저 어떤 결단으로 지금 같은 싸움을 하는지 이해할 뿐이었다.
‘나는 또다시 당신을 슬프게 만들었군요.’
육체가 타오르는 고통보다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느끼며 이윽고 성스러운 불꽃을 위한 장작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한다.
‘당신이 걷는 길에 고통밖에 없다면, 그렇게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 영원한 안식으로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좋으련만.’
신성을 불태우는 성스러운 불꽃은 계속 타올랐고 조금씩 팽창하는 불꽃 속에서 성아가 뛰쳐나왔다. 초자연적인 힘에 강한 저항력을 지닌 몸이고 신성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래도 신성하지 않은 자에게는 평범하게 뜨거운 불꽃이므로 탈출 즉시 벨라가 날아가 그녀에게 달라붙은 불꽃을 흡입했다.
이후 세 사람과 한 마리는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한자리에 모였고 경과를 지켜보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악신이 속수무책이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으로 여기고 몇 가지 대응책을 준비했는데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을 보니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졌다.
「소피아, 네 관측결과는 어때? 그의 상태를 알 수 있겠어?」
「아무래도 불꽃에 저항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야. 내가 보기에 육체는 거의 소멸했고 이대로라면 몇 분 내로 실체가 드러날 거야.」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 없나 보네? 일단 알았어. 전원 전투속행! 페이즈2 준비!」
명령이 전달되는 즉시 엠브라이오스가 이끄는 드래곤들이 출동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싸우던 인원은 신속히 자리에서 물러나며 악신과 거리를 벌렸다.
「소피아, 전투구역 설정하고 결계발동을 시작해.」
「이미 하고 있어. 탈레오스! 연산보조를 부탁해!」
「악신의 실제크기와 간섭차원을 계산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결계 발동은 실체가 완전히 드러난 후에 가능합니다.」
「그러면 늦어. 어떻게든 근사치로 맞춰봐!」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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