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이름 없는 왕(3)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연이라도 있나 보지?”
“말 못 할 사연이 있긴 하죠. 언젠가 당신이 제 비밀을 알게 된다면 과연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참 궁금한걸요?”
“분명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이거 괜히 궁금증만 자극하는걸? 지금이라면 나도 비밀로 해줄 테니 들려줄 수 있을까?”
“가벼운 비밀이 아니라서 이게 누출되면 심각한 사태를 초래하고 당신도 결코 무사하지 못합니다.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아도 대규모의 기억조작이 시행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듣고 싶으신가요?”
“뭐 얼마나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그럴까? 나도 입은 무거운 편이니 들어주지.”
각오가 없는 대답이었지만 시온은 그래도 충분하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한 권의 낡은 책을 내밀었다. 펼쳐보니 쓰인 언어는 옛것이라 읽을 수 없었으나 글자들이 스스로 움직여 읽을 수 있게 고쳐지더니 페이지가 스스로 넘어가듯이 움직였다.
“여기에는 제가 태어난 비밀이 적혀 있습니다.”
가리킨 페이지에 적힌 것을 읽어보았으나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두서없이 적힌 것도 문제였지만 모르는 단어와 어려운 말이 너무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인데 그래도 전체적인 내용의 이해는 시온의 설명 덕분에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이건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네가 마법으로 태어난 생명체라고? 아니야, 나도 전에 골렘을 본 적은 있지만 그건 인간으로 볼 수도 없었다. 이건 너무···.”
“생명을 탐구하여 만들어진 골렘과는 다릅니다. 저는 환영을 기초로 태어난 인조인간. 세계의 법칙조차 속이는 힘이 원래라면 거짓이어야 할 저를 진짜로 존재하게 했을 뿐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당신이 상상하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 현실에 나타났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가짜라고 한 건가? 원래는 너를 만든 놈의 것이었으니까?”
“네, 저는 본체가 버리고 떠난 미련이니까요. 그녀도 만들어진 가짜가 아니라 진짜를 따라가는 게 당연합니다. 저는 그저 홀로 남아 마지막 명령을 수행할 뿐이죠.”
“점점 더 모르겠군. 너를 더욱 알 수 없게 되어버려서 답답한 기분이 든다. 너를 만든 놈은 지금 뭘 하고 있지?”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요. 그저 평생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났다는 것만 말해두죠.”
“설마 죽었다는건···.”
“죽지는 않았습니다만 살아있다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제 기억을 토대로 판단하건대 아마 그의 인격은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 묻히기 전에 저라는 미련을 남겨 인간으로 살게 한 거겠죠.”
“아!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이거 괜히 들었다는 기분만 들고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눈물 나는 러브스토리라도 기대했습니까? 바랄 걸 바라시죠? 저는 그런 재미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 너는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하지만 재미없지는 않아.”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시선이 오갔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으로 질긴 인연이 될 것 같은 기분만큼은 두 사람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슬슬 저를 따라갈 마음이 들었습니까?”
“글쎄?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버렸어. 여기서 농사나 짓고 있던 것도 엠마를 만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보다 나는 네가 날 필요로 하는 이유나 목적도 모르는데?”
“제 일을 도와주셨으면 한다고 처음부터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일이 뭔지를 모르니까 하는 말이잖아.”
“자세한 것은 정해지지 않았으니 우선 학교에 넣어두려고 했습니다.”
“학교? 카시미르의?”
이번에는 또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학교의 안내책자와 목걸이를 내밀었다. 책자의 언어는 카시미르의 것이라 읽을 수 없었으나 목걸이를 목에 거는 순간 낯선 문자가 익숙하게 느껴지면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오!? 이건 신기한걸?”
“지식의 목걸이. 착용자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물건이죠.”
“솔직히 이런 물건이 있으면 학교가 필요 없는 거 아닌가?”
“그렇죠. 그런데 이런 물건이 상용화되면 학교만 없어지는 거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을 빼앗는 물건인 데다 악용될 여지가 너무 커서 가끔 이런 식으로만 몰래 쓰고 있죠.”
“그거 아쉬운걸. 한순간에 모든 교육을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다 왜곡된 지식이 주입되고 기억이 조작당하면서 세뇌가 되더라도 말입니까?”
“······.”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시고 책자나 보시죠.”
책자에는 학교의 약도와 입학조건 및 교육과정이 설명되어 있었다.
학교는 전사과와 문학과로 구분되어있는데 전사과는 건장하기만 하다면 쉽게 입학할 수 있어서 응시자가 많았고 문학과는 입학이 어려우며 응시자가 적었다.
“흠, 혹시라도 날 전사과에 넣을 생각이라면 너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군.”
“문학과에 보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 추천서 한 장이면 입학할 수 있습니다.”
“호오, 그건 다행이··· 아니라 내가 널 따라가는 건 이미 확정이냐!?”
“설마 지금까지의 대화를 무의미하게 만드실 생각은 아니겠죠? 제 비밀도 알아버렸으니 손이 닿는 곳에 두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크흠···.”
“어차피 거절할 생각은 없으신 것 같은데 무의미한 논쟁은 그만둡시다. 저도 준비를 좀 하고 나흘 뒤에 다시 올 테니 그때까지 정리할 일은 정리해두고 지인들과 작별의 인사 정도는 해두세요. 아마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할 테니.”
그렇게 말을 마친 시온은 테이블 위에 작은 돈주머니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는 작지만 묵직한 소리가 나는 것이 꽤 많은 돈이 들어있는 것 같아서 살짝 열어보았는데 주머니에 가득 찬 백금화를 보고 있으려니 이번 이야기를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큰돈이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럽게 이민을 떠나게 된 상황이고 지주와의 계약파기 문제로 비용이 발생하거나 엠마가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것을 대비하여 건네준 선금이었는데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평소의 인덕이었는지 카인은 엠마에게 접근하지 않는 조건으로 별 탈 없이 계약을 해지했다.
나흘 후, 약속대로 준비를 끝마친 시온이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입학추천서와 함께 순간이동 두루마리가 있었으며 학교생활에 필요한 필수품이 들어있는 가방도 있었다.
건네받을 물건을 건네받은 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을 들던 카인은 불안한 마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온, 너 진심이야?”
“뭐가 말이죠?”
“아니, 보통학교도 중퇴했던 내가 이 나이에 다시 입학한다는 게 좀···.”
“가비아 마법학교는 중장년의 신입생도 자주 있다고 합니다. 카시미르의 학생은 비교적 어리지만, 또래의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것 때문만이 아니라···”
“성적이라면 별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낙제라도 했다간 당신의 머릿속에 뇌가 안 들어있고 뭐가 들어있나 직접 열어보고 싶어질 것 같군요.”
농담이라고 믿고 싶지만 농담처럼 들리지 않아서 식은땀이 흐를 것 같은 살벌함을 느꼈다. 앞으로 다니게 될 학교가 얼마나 수준 높은 곳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너무 불성실한 모습은 보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서운 소릴 하는걸? 나는 그저 여학생에게 관심을 가지면 어떻게 될까 싶었을 뿐인데.”
“흠, 아직 그럴 나이기는 하지만 학업을 게을리하면 별로 인기가 없을 겁니다?”
“나는 한 명이면 족한 사람이니까 인기는 관심 없어. 그보다 사랑이란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군. 너의 사랑이 어떻게 될지가 가장 궁금하지만.”
“저는 정략결혼밖에 없는 사람이니 그 기대에는 응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바빠질 것이니 서둘러 떠날 것을 재촉하듯이 대화를 끊고 순간이동 두루마리를 펼치게 했다. 처음 써보는 물건이라 긴장했던 카인은 시온이 함께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카시미르로 전송되었다.
빛에 휩싸이면서 홀로 목적지에 도착한 후 주변을 두리번거렸더니 갑자기 순간이동으로 나타난 자신을 향해 수많은 시선이 집중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복장의 학생들이 잔뜩 있는 것으로 보아 학교에 무사히 도착한 것은 알았고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시온에게 들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왠지 내버려 둘 수 없어졌단 말이지.’
찝찝한 기분으로 길을 걷고 있으려니 교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제서야 자기가 학교에 온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후 교장에게 보내는 추천장을 꺼내 보이며 간략히 사정을 설명하고는 문학과의 건물로 안내받았다.
카인이 교장과 면담을 하고 입학수속까지 빠르게 마쳤을 무렵, 왕궁에서는 시온의 귀환을 맞이하여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폐하! 그간 대체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각 부서의 책임자들로 구성된 집단이 한꺼번에 몰려와 집무실이 미어터지는 광경을 연출했다. 거기에 걱정하는 목소리가 아닌 화를 내는 목소리였으니 시온은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고 책임져야 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과인이 아무도 모르게 놀러간 것도 아니고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글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그 일이란 무엇인지 들려주시겠습니까?”
“전에 논의했던 재생의 숲 도로개통 문제로 남부에 상인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곳 상단과 이야기가 잘 끝난 덕분에 도로건설에 협조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미리 준비해둔 계약서를 꺼내 보이며 자신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일전에 상아에게 받은 정보를 참고하여 카인이 입학을 준비할 동안 맺은 계약이었다.
“그래도 일국의 왕이 호위조차 없이 혼자 잠행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호위 말인가요? 대체 누가 누구를 호위하게 될까요? 걸리적거리는 호위라면 필요 없습니다. 호위는 과인보다 강한 자로 구성하십시오. 그리하면 호위를 받을 테니.”
그런 존재라면 모두 달로 떠나고 없으니 사실상 시온의 호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카시미르의 내놓으라 하는 전사들을 집단으로 물리치고 왕좌에 오른 것이기 때문에 신료들도 이렇다 할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다고 할 말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폐하, 적당히 하십시오. 그렇게 혼자 제멋대로 행동하실 거라면 저희가 있을 이유가 뭡니까? 이 나라가 정녕 폐하만의 것입니까?”
누군가의 일침에 집무실의 모두가 동의하는 분위기였고 시온은 놀란 표정으로 잠시 입을 다물더니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실소하며 비웃듯이 말했다.
“이 나라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뭐, 이런 대답이라도 기대했습니까? 아니면 경들은 그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런 대답을 기대했습니까?”
화가 난듯한 목소리에 신료들의 일그러질 것만 같던 얼굴에는 두려움과 의문이 동시에 드러났다. 카시미르에서는 시온을 언변으로 당해낼 자가 없다고 여겨지는 만큼 화났을 때의 시온이 무슨 말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을지 걱정부터 하는 이가 많았다.
“하루 이틀 함께한 것도 아닌데 설마 이렇게까지 이해받지 못할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긴 했습니다만. 좋습니다, 굳이 과인의 입으로 진의를 듣고자 한다면 알려드릴 수밖에요.
경들은 왕의 폭거를 막기 위해 존재합니다. 왕이 나라에 해가 되는 일을 하려고 할때 아무도 막을 사람이 없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경들은 그저 제가 하는 일에 불만을 품고 행동을 억제하면서 다음 왕이 되기 적합한 인재를 준비하면 됩니다. 훗날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부덕한 왕을 끌어내리면 끝입니다. 그러기 위한 명분도 조금씩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성군이 되길 바라는 분이 있다면 힘만 쓸 줄 아는 멍청한 놈이라고 말해주고 싶군요. 그런 건 다음 세대에서나 찾아보십시오.”
“폐, 폐하?”
“그리고 방금 질문한 사람, 산카샤의 후예 신드라였죠? 좋은 지적을 하셨으니 되묻겠는데 그럼 이 나라가 누구의 것입니까? 설마 모두의 것이라고 말할 생각이라면 왕은 왜 있는지 묻고 싶군요. 모두의 것이라면 모두가 통치할 것이지 왕은 왜 선출합니까?”
“사람이 원하는 것은 제각각이니 모두가 통치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당신 제가 쓴 계획서 읽어보기는 했습니까? 마법도구 보편화 계획편에서 국민의 총의를 하루안에 모을 수 있다고 적시했습니다만 기억에 없나 보군요?”
“그, 그것은 분량이 너무 많은지라···.”
“책 한 권 분량의 계획서조차 못 읽어서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나태한 걸 자랑이라고 하실 거면 차라리 사직하는 게 낫겠습니다.”
“읏···.”
“그리고 이 나라는 공화제가 아닌 군주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군주제 국가의 왕 앞에서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이해하고 있긴 합니까? 모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자칫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아둔한 자들과 일하는 만큼 이 정도는 용서해야겠죠.”
시온의 말이 길어질수록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은 두려움과 거북함에 입을 열지 못했다. 이 기분의 정체는 사실 강한 마력에 의한 위압감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곳에 그것을 저항할 만큼 항마력이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선왕 우로스와는 달리 시온은 사람을 정신적으로 압박하여 조종하려고 했던 일이 예전부터 간혹 있었다. 과거 재상으로 일하던 시절에도 이것을 문제삼아 표적이 되었던 일이 있는데 그때 시온은 “제 마력에 공포를 느끼는 여러분이 문제지 왜 제가 문제입니까? 제가 문제라면 같은 이치로 당신들은 더러운 면상으로 문관들을 겁주고 있으니 그것도 문제 아닙니까? 여러분이 공포를 느끼지 않을 만큼 강해지면 될 것을 저에게 책임을 떠넘기니 이건 강해지기 싫어서 억지 부리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라며 상황을 빠져나갔다.
전사문화가 강해서 무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언쟁을 경시하는 성향이 있다 보니 시온과 대등하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는데 한 번은 불만이 폭발한 전사들이 결투를 신청했으나 무더기로 패배하고 물러났다. 이후로 시온에게 덤비는 자가 없었지만 평판은 바닥까지 떨어졌고 훗날 우로스가 회고하기를 “샤르나가 살아있었다면 좋은 승부가 되었을 텐데.”라며 공허히 하늘만 바라보았다고 한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