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 - 자매들은(2)

“아직도 고민해?”
“무얼 말인가요?”
“성녀의 기억 때문에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잖아.”
“!!!!”
“전생의 기억이 돌아온 탓에 정령연구도 멈춘 것 같고, 그렇다고 신의 축복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야. 어느 한쪽을 고르지 못해 고민하고 있지?”
“어떻게 아셨어요?”
그 물음에는 미소로 답하며 플로엘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 그러한 것들을 설명하다 보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바로 결론을 말한다.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돼. 네가 정령왕을 섬기더라도 신들이 너를 미워하지는 않을 테니까. 반대로 정령왕을 잊는다고 그분이 실망하는 일도 없을 거야.”
“저는 성녀가 아니에요. 그런데 신들의 사랑을 받은 증거가, 제 안에 남겨진 축복이, 정령왕과의 약속이 저를 고민에 빠뜨려요. 저는 어느 한쪽을 택하는 건 잘 못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혹시 기억하고 있을까? 신들의 연회에서 네가 이쪽으로 넘어오겠다고 선언한 일을, 그때 너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 기억해?”
“당시 이쪽의 신께서는 뭐랄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였다고 할까요? 눈빛에서 어두운 감정이 느껴지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그걸 어떻게든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 당시에는 인류애가 좀 부족했지. 인간보다는 신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네··· 네? 설마 소피아님이었나요? 저는 틀림없이 시온님과 융합했다는 신이···.”
“그건 네 생각이 맞아. 당시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는걸? 그래도 일심동체라고 해야 할지, 웬만한 일은 다 알고 있어. 아무튼, 그때 신들이 너에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지?”
“아···.”
“너의 빛이 우리에게 닿는 한, 네가 어느 세상이 있든지 우리는 너를 축복한다.”
“떠나라, 나아가 너의 빛으로 세상을 감싸라. 그것이 우리의 영광으로 이어지리라.”
“그래, 기억하면 됐어. 신화시대가 끝나면서 성녀로서의 힘과 지위는 잃었지만, 신들의 사랑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니까. 너는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향하면 돼.”
“정말 그거면 될까요? 저는 제 마음도 알지 못하는데···.”
“조금만 욕심을 내는 게 어때? 굳이 하나만 선택할 필요는 없잖아? 둘 다 고를 수 있는 길이 있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아?”
“그게 가능한가요?”
“그게 가능해진다면 기적이고 신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영웅을 좋아하지. 후훗, 열심히 고민하고 생각해 봐.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것은 곧 신들의 영광으로 이어질 테니.”
“이야기가 다 끝나셨으면 이제 초혼술을 시작하죠.”
어느 틈에 다가온 상아와 마석을 가지고 돌아온 성아가 자리에 합석했다. 소피아의 손길에 따라 찻잔이 나타났고 상아는 차를 조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조사결과는?”
“정령왕께서 손을 쓰셨는지 너무 쉽게 찾았습니다.”
조사내용이 적힌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살펴보니 영혼조각은 언제든지 초혼술에 응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였다.
“이건 빨리 찾아달라고 아우성이었네? 좋아, 뭔가 수상한 낌새지만 바로 시작하자.”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니 마석을 제단에 설치하고 초혼술로 영혼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제단에서 발생한 빛의 기둥은 하늘 끝까지 닿을 듯이 솟구쳤고 그대로 시공을 뛰어넘어 영혼이 지나올 길이 되었다.
‘나는 늘 기다리기만 했어. 언젠가 너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네가 나를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날이 오기를, 네 옆에 나란히 설 수 있는 때가 오기를. 하지만 너는 이번에도 날 기다리게 했어. 이제 그런 건 싫으니까.’
빛의 기둥이 한번 반짝이더니 흐름의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강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것으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빛의 길을 따라 영혼이 강림한다. 모두 각오를 단단히.”
그녀의 말대로 사람의 모습을 한 영혼이 나타났는데 형체가 흐릿하여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존재감은 보통의 영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것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저것에 대항해서는 안 되며 엮이는 것조차 위험하다. 소피아를 제외한 전원이 그러한 감정을 느끼며 원초적인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마치 악신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빛의 기둥이 사라지고 영향을 받지 않은 소피아는 조심스레 다가가 손을 뻗어 영혼에 접촉하려 했는데 영혼은 살짝 뒤로 물러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서 피하는 거야?”
영혼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공간의 균열이 잠깐 열리더니 그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이 떨어졌다. 흐릿한 영혼이 그것을 받아내고 모두에게 보였는데 영혼의 강에 숨겨져 있던 영혼석이었다.
“영혼석을 어떻게 회수할지 고민이었는데 전부 계획되었나 보구나.”
흐릿한 영혼은 고개를 끄덕였고 영혼석은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흐물흐물 움직이면서 부피가 점점 커지더니 사람의 형체가 되었다. 세 자매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그의 모습이었다.
흐릿한 영혼은 그것에 다가가 액체가 섞이듯이 융합되었고 주변에서는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융합이 끝나면서 강제적으로 느껴야 했던 두려움이 사라졌다.
압박감에서 해방된 상아와 성아는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었다. 플로엘은 가볍게 인사말을 건네려 했는데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고 성녀의 기억에서 보았던 신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기분인데, 아무래도 내가 오래 기다리게 한 모양이구나.”
“대홍수가 끝나고 오백 년이 지났어. 우리는 너의 부활을 준비하다 정령왕의 인도로 지금 상황에 이르렀지. 어서 와, 드디어 모든 조각이 다 모였구나.”
“정령왕, 내 윤회가 멈춘 건 그의 계략이야. 신이 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혼돈의 왕을 만들려 했어.”
“혼돈의 왕이라니?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천천히 설명해 주고 싶지만, 순환이 날 부르고 있어. 곧 떠나야 해.”
“필요하다면 새 몸을 만들어 줄게.”
“아니야, 분명 다른 목적을 위해 준비했을 것 같은데 나는 서두를 필요 없으니 자원낭비는 그만두자. 그보다 짧게 말할 테니 잘 들어. 우선 키리에를 기억하고 있어?”
“그야 당연히···”
질문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살며시 고개를 돌려 동생들에게 시선을 보내 무언의 질문을 보냈다. 그러자 동생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플로엘에게도 시선을 보내 물었으나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며 말했다.
“어떻게··· 지금까지 잊고 있었을까요? 마치 생각하는 것 자체를 금지당한···.”
“그동안 아무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이거였구나. 세계가 존재를 지우기라도 했어?”
“영혼의 계약 때문이야. 진작 깨달았어야 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어째서 키리에가 계약자고 나는 피계약자였는가? 조금만 생각하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을. 이건 정령왕과 키리에가 맺은 계약이었다는 걸.”
“계약의 강제력?”
“맞아.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내가 혼돈으로 회귀하면서 계약에 차질이 생긴 것 같아.”
“키리에는 어떻게 됐어?”
“계약을 완수할 수 없게 된 키리에는··· 아마도 계약불이행으로 소멸처분 되었다고 생각해. 그래도 영혼까지 소멸시키진 않았을 테니 분명 마계에 있는 본체가 깨어났겠지. 봉인된 문을 열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세 번째 전쟁이 점점 다가오고 있구나.”
“먼 훗날의 이야기야. 아직 모든 조건이 충족되지는 않았어. 우리는 그 전에 되도록 강한 카드를 준비하면 되고.”
둘의 시선이 상아와 성아를 향했다. 둘에게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남은 시간이 부족했다.
“이번 내 여정은 여기까지야. 너희의 주인 시온은 이제 정말로 없어. 다음에 만날 때는 기억을 잇는 다른 사람이겠지. 그러나 너희를 다음 무대로 보낼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무거운 짐을 떠넘긴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부탁할게. 인간을 지켜보고 인간의 편에 있어줘.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과 함께 살아갔으면 해.
합리적이지 않고 이익을 보는 일도 아니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어.
희생을 강요당하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고 가진 것을 빼앗길 수도 있겠지.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는 고독한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줘.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말아줘.
그것이 내가 너희를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 만든 이유니까.”
자매는 한 번 더 예를 갖추며 동시에 같은 대답을 했다.
“당신의 가르침대로.”
몸이 점점 흐릿해지며 윤회의 고리로 되돌아가는 중, 끝으로 플로엘에게 시선을 향하고는 그녀의 앞에 섰다.
“정령왕을 너무 맹신하지 마. 그가 악의를 품고 행동하지는 않겠지만 신이 보기에 좋은 세상과 인간이 보기에 좋은 세상은 다르니까.”
“그건···.”
“그날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윤회를 정체시킨 자가 바로 정령왕이야. 생존확률이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균열을 닫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살아있었어. 그런데 정령왕은 내 앞을 가로막았고 키리에가 사라지면서 탈출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지.”
“정말로 정령왕께서 그러셨나요?”
플로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눈앞에 희미했던 모습조차 사라져 공허한 바람이 불었다.
“어째서···.”
혼란에 빠진 플로엘에게 소피아가 격려하듯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눈을 흐려서는 안 돼. 정령왕께서도 깊은 뜻이 있기에 그리하셨을 거야.”
“대체 무슨 뜻이 있어야 그럴 수 있는 거죠?”
“그건··· 정령왕에게 있어 우리의 생명은 가치가 없어. 오직 영혼만 보고 판단하시니 육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고 죽음은 영혼의 해방이라고 보시지.”
“···관점이 다르군요.”
“그래. 우리와 달라서 우리가 살인이라 말하는 것을 그분은 구원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이 세계의 신이 아니라 하셨고.”
“두 분의 관계는 영영 어긋나버리는 걸까요?”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았어.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사이랄까? 확실한 건 철천지원수가 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실 둘의 관계는 알고 보면 많이 유치한 면이 많거든.”
“어··· 음, 듣고 보니 옛날에도 두 분이 티격태격하시던 기억이 나네요. 크게 싸우거나 하지 않는다면 다행인데, 그래도 마음이 무겁네요.”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겠지. 혼돈은 나에게도 아직 미지의 영역이라 혼돈의 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이상 우리는 그분의 뜻을 가늠할 수 없어.”
당장은 혼란스럽겠지만 부디 지금의 고민을 소중히 해줘. 머나먼 미래에 다시 성녀로 돌아갈 기회가 찾아올 테니 그때가 오면 너의 믿음과 신념에 따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해. 그것이 신들의,”
“영광으로 이어지니까요.”
“응. 언젠가 너의 역할이 중요해질 때가 올 테니 잊지 마. 신들이 너를 사랑하고 축복하고 있음을 기억해. 절망에 굴할 이유가 없고 망설임에 방황할 필요가 없어. 너는 너 자신을 믿고 나아가 사람들을 이끌어줘. 최후의 한 사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구원의 성녀가 바로 너니까.”
“고마워요.”
플로엘은 소피아의 품에 안겨서 지금의 말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전생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떠올랐던 맹세가 다시금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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