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 - 능력자들

대륙 남부의 어느 술집. 손님은 없고 주인장은 팔리지 않는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원래라면 적자만 봐야 할 가게지만 가끔 팔리는 특별상품 덕분에 적자만 면하고 있다.깊은 밤이 되어서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자 손님 하나 없던 술집에 오랜만의 손님이 찾아왔다. 익숙한 인기척에 주인장은 술에 취한 몰골을 재빨리 정돈하고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 알페온 오빠? 아니, 아니지. 알페온 오빠도 죽었는걸. 잠깐 착각했네, 미안.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손님의 정체를 파악한 주인장 세린은 기운이 빠진 듯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술잔에 다시 술을 따른 뒤 한 번에 들이켰다.
“아줌마는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여전히 술에 빠져 사나 보네? 아직도 시온 씨가 죽은 걸 자기 탓으로 돌리는 거야?”
“······.”
“전생의 내가 죽은 것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
“어휴, 시온 씨가 죽은 건 스스로 선택한 결과고 내가 죽었던 것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지 아줌마 때문이 아니야. 아줌마는 그냥 메르엘 살리는 김에 같이 살려준 거라니까? 그만큼 풍파를 겪었으면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나이를 안 먹어서 성장을 못 하는 건가?”
“한잔할래?”
“가장 비싼 거로 하나.”
왕가에만 납품하는 특별상품이지만 오랜 친구의 방문인 만큼 창고에서 특별히 하나 꺼내왔다.
“499년산 상투스. 시온 오빠의 레퀴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비슷한 느낌이야.”
“오!? 설마 성공한 거야?”
“성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흉내는 낼 수 있었지. 아무리 노력해도 옛날의 그 맛은 안 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나는 거머리전쟁 이후로 비슷한 맛도 못 봤는데.”
손님은 기쁜 마음으로 술을 받았다. 그리고 맛을 음미한 후 살짝 미소 지었다.
“아, 그러네. 옛날의 그 맛이 아니네. 비슷하긴 한데···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 이 정도만 돼도 영생이 심하게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아.”
“성분은 분명 똑같을 텐데, 영혼의 환희가 도대체 어떻게 구현되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다음에는 완성도를 더 높여 놓을 테니 기다려봐.”
“그보다는 진품을 마시는 게 더 빠를지도?”
“진품?”
“얼마 전에 플로엘 누나를 만났어. 누나 말로는 시온 씨가 드디어 환생했대.”
그 말을 들은 세린의 표정이 굳었다. 눈을 보면 심하게 동요하고 있는 것이 보였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내 그녀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플로엘 언니는 누나면서 나는 왜 아줌마야?”
“어··· 누나는 이쁘니까?”
그 순간 빈 병이 손님의 머리 위에 작렬했으나 손님은 바람이 흩어지듯이 사라졌다가 옆자리에 나타났다.
“이 나쁜 자식! 메르엘한테 다 이를 거야!”
“솔직히 플로엘 누나가 가장 이쁜 건 맞잖아?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이게 자꾸 건방지게 그럴래?”
“화제 돌리는 건 그만하고, 만나러 갈 거야? 아니면 계속 이대로 지낼 거야?”
“······.”
“피하면 서운해할 텐데?”
세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술잔에 술을 따랐다.
“만나야지. 만나야 하는데, 그날 내가 오빠의 결단을 부추겼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후회에 미칠 것 같아. 대체 어떤 얼굴로 만나러 가야 할까?”
“우리가 알던 시온 씨는 이제 없다는 걸 확인하기가 두려워?”
“···그럴지도 몰라.”
“그걸 고민하려면 처음 달에 가기 전에 했어야지.”
“머리로는 나도 알아. 그래도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해.”
“······나는 말이지, 전생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전사였잖아? 지금도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닌데 그때랑 의미가 달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죽음에 의미를 두지 못하게 된 거야.”
“뒤늦게 사춘기라도 왔어?”
“아니, 좀 들어봐.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능력자도 마찬가지인 이야기니까.
우리는 오랜 세월을 살면서 수많은 죽음을 봤어. 죽음을 경험하기도 했고 환생하면 전생의 기억을 이어받아. 남들은 한 번뿐인 인생이 소중하지만 우리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점점 사라지는 거야.
나만 해도 그래, 아이는 나보다 먼저 죽으니 갖지 않게 됐고 친구도 나보다 일찍 죽으니 사귀지 않게 됐어. 그러다 보니 결국 메르엘이랑 다시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조금이나마 내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거든.
메르엘이나 아줌마나 참 대단하다고 느끼는 게 인간의 마음을 조금도 잃지 않았잖아? 나는 점점 인간에서 멀어지는 걸 느껴. 이대로 괴물이 되어버리면 어떡할지 걱정스러워.
그러니까 지금의 감정을 소중히 하고 만나보면 좋겠어. 계속 외면하다가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고. 아줌마가 인간의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이유에는 분명 시온 씨가 있을 테니까.”
“너도 고민이 많구나?”
“당연하지. 아직은 인간인걸?”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넘칠 것 같던 술잔을 비우고는 다시 술을 따랐다.
“시온 씨는 이제 없지만 그래도 같은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돌아오는 거잖아? 시온 씨 성격상 전생이랑 차이점 찾기는 어려울 것 같고, 아니지? 어린 버전의 시온 씨라니? 이건 궁금해서라도 꼭 봐야겠는데?”
“오? 생각해 보니 나도 궁금해지네? 기억 되찾기 전에 만나야 할 것 같지 않아? 얼마나 귀여울까? 보면 막 뽀뽀해주고 싶어질 것 같은데?”
“아줌마, 열쇠 아직 가지고 있어?”
“아··· 그게··· 미안. 잃어버렸어.”
“티나는?”
“티나는 모험가길드장이 됐어. 매번 바쁘다고 만나러 오지도 않지만, 걔도 나름대로 잊으려 노력하는 거겠지. 어디에 있는지는 아니까 내일이라도 만나러 갈까?”
“바쁜 사람이니 약속부터 잡아야지. 그나저나 열쇠 없이 갈 수 있으려나? 송신탑도 망가진 마당에 티나가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안 되면 다 같이 방법을 찾아야지. 오랜만에 능력자 회의 소집할까? 다들 어디 있는지 잘 모르는데 찾으러 다녀야 하나?”
“어느 세월에 찾아. 내가 몇 사람은 아니까 일단 연락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시작하자.”
술기운에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주고받는 시선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수의사로 전직한 힐리스, 단우의 환생이자 유명한 모험가로 이름을 날린 라이언, 브리크의 환생이자 수상한 잡화점의 주인 스미스, 일국의 왕이 되었다가 지금은 수호신으로 추앙받는 제프, 세상을 복원하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잦은 수면기에 빠져 지금은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우로스.
머지않은 미래에 그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다. 겉으로는 옛 친구의 귀환을 맞이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사실 능력자들의 몸에 환희를 가득 채워주는 술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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