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머거리 포커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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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리
그림/삽화
토마리
작품등록일 :
2026.03.30 16:50
최근연재일 :
2026.05.09 00:00
연재수 :
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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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
추천수 :
7
글자수 :
291,612

작성
26.03.3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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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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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1쪽

양아치와 수첩

DUMMY

새벽 세 시였다.


편의점은 조용했다. 이 시간에는 대체로 그랬다. 술 취한 사람들이 한두 시에 한 번 몰아서 오고, 그 다음은 다섯 시 택시 기사들이 올 때까지 비었다. 노청에게는 좋은 시간이었다. 카운터 아래에 수첩을 펼치고 아이디어를 적을 수 있었다.


'던전 2층 랜덤 이벤트 — 선택지 3개, 각각 리스크/리턴 다르게. 안전한 선택이 항상 좋은 건 아니게.'


적다 보면 시간이 갔다. 코드는 집에 가서 짜야 하지만 설계는 여기서 했다. 머릿속에서 게임의 구조가 돌아가고 있었다. 플레이어가 던전 2층에 도착하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안전하다. 적이 약하고 보상이 적다. 오른쪽은 위험하다. 적이 강하고 보상이 크다. 가운데는 — 아직 안 정했다. 가운데 길이 제일 어려웠다. 리스크도 리턴도 중간인 길은 재미가 없었다. 중간이 아닌 뭔가가 필요했다.


노청은 그런 사람이었다. 뭔가에 집중하면 주변이 사라졌다. 소리가 들려도 안 들리는 것처럼 되는 순간이 있었다. 편의점 냉장고 윙 하는 소리도, 자동문 띵 하는 소리도 사라졌다. 수첩과 머릿속 게임만 남았다.


그 순간이 문제가 됐다.


---


자동문이 열렸다.


두 명이었다. 남자 둘. 술 냄새가 2미터 밖에서부터 났다. 한 명이 카운터 앞에 서서 말했다.


"야 담배."


노청은 수첩을 적고 있었다. 입이 움직이는 건 봤다. 근데 수첩에 적고 있던 문장이 끊기면 까먹을 것 같았다. 1초만 더.


"야."


"네. 어떤 거요?"


"메비우스."


노청이 뒤를 돌아 담배 선반을 봤다. 메비우스. 종류가 많았다. 오리지널, 스카이블루, 윈드블루. 전부 메비우스인데 전부 파란색 계열이었다.


"어떤 메비우스요?"


"그냥 메비우스."


"종류가 여러 개 있어서요. 색깔이 어떤 거였어요?"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그냥 메비우스라니까. 파란 거."


파란 거. 메비우스는 거의 다 파란색이었다. 스카이블루가 연한 파랑, 오리지널이 진한 파랑, 윈드블루가 하늘색. 노청이 스카이블루를 꺼내서 카운터에 올렸다. 가장 많이 팔리는 거였다.


"이거 아닌데."


"그럼 어떤 건지 한 번만 더."


"야 씨발 내가 맨날 피우는 건데 이것도 모르냐? 븅신 새끼가."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야 알바가 좀 느리다? 아까도 우리 말 안 듣잖아."


노청이 다시 선반을 돌아봤다. 오리지널을 꺼냈다. 진한 파란색.


"이거요?"


"그것도 아니야. 답답하네 씨발."


남자가 직접 카운터 뒤쪽을 가리켰다. "야 저거 저거. 저 연한 파란 거."


윈드블루였다. 연한 하늘색. 노청이 꺼내서 내밀었다. 남자가 받아 들고 말했다.


"이걸 한 번에 못 줘?"


노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메비우스만 열 종류가 넘었다. "파란 거"라고 말한 사람이 어떤 메비우스를 원하는지는 신이 아닌 이상 알 수 없었다. 근데 그 말을 해봤자 달라질 게 없었다. 노청은 그런 판단이 빨랐다.


대신 바코드를 찍었다.


"사천오백원이요."


남자가 카드를 던지듯이 카운터에 올렸다. 노청이 카드를 긁는 동안 남자가 카운터 아래를 내려다봤다.


"야 이거 뭐야."


수첩이었다.


"알바 중에 뭐 적어."


노청이 대답하지 않았다. 카드를 돌려줬다. "여기요."


남자가 카드를 안 받고 카운터 위로 손을 뻗었다. 수첩을 집었다.


"돌려주세요."


"뭔데 이렇게 아까워해 ㅋㅋ. 야 이거 표지에 뭐라 적혀있어. 데스... 데스노트? ㅋㅋㅋ 이 새끼 뭐야? 중2병이야?"


수첩을 펼쳤다. 노청의 글씨가 빼곡했다. 읽을 수 있을 리 없었다 — 반은 코드 조각이고 반은 게임 설계 메모였다. 영어와 한국어가 섞여 있었다. C# 함수 이름, 변수명, 주석. 그 사이에 '보스 3페이즈 패턴 간격 0.48초 → 0.5초 변경 검토'같은 메모.


남자가 수첩을 넘기면서 웃었다. "야 이게 뭐야 ㅋㅋ 암호문이야?"


옆에 있던 남자도 기대어 봤다. "뭐 적어놓은 거야 이게."


"몰라 ㅋㅋ 이상한 거."


노청의 3년이 거기 적혀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몰랐다. 그 수첩 한 페이지가 코드 수백 줄의 씨앗이라는 걸. 밤새 적은 아이디어가 아침에 모니터 앞에 앉으면 코드가 된다는 걸. 그게 노청의 게임이 되고, 그 게임이 노청의 전부라는 걸.


"돌려주세요."


노청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평소보다 낮았다. 노청 자신도 몰랐다. 그 수첩이 남의 손에 있는 게 싫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싫었다. 판교에서 잘렸을 때도, 보증금이 모자랐을 때도 이런 느낌은 안 들었다. 물건을 남한테 빼앗기는 건 처음이었다. 근데 수첩은 물건이 아니었다. 노청의 머리가 거기 있었다.


남자가 노청의 명찰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야? 청이 씨, 서비스도 느리고 태도도 개판이야."


남자가 수첩을 던졌다. 가볍게. 근데 가죽 수첩이라 무거웠다. 바닥을 치고 미끄러져서 자동문 앞까지 갔다. 속지가 펼쳐졌다.


노청이 카운터를 돌아 나가려는 순간.


자동문이 열렸다.


---


사람 네 명이 들어왔다.


앞에 선 사람이 쎄오였다. 반팔. 시계. 운동화. 뒤에 세 명이 더 있었다. 쎄오가 나중에 설명한 바로는, 핸디가 없어서 테이블이 안 돌아가길래 일찍 접었다고 했다. 그래서 담배 사러 내려온 건데 — 들어오자마자 상황을 봤다.


바닥에 수첩. 속지가 펼쳐져서 모서리가 접혀 있었다. 카운터 앞에 남자 둘. 노청이 카운터를 돌아 나오다 만 자세. 얼굴이 평소와 달랐다. 무표정이 아니었다.


쎄오의 걸음이 멈췄다. 1초도 안 됐다. 바닥의 수첩을 봤다. 표지의 빨간 글씨가 보였을 것이다. 자기가 쓴 글씨.


쎄오가 수첩을 주웠다. 속지를 접어서 닫았다. 모서리를 손으로 한 번 쓸었다. 그리고 양아치 두 명을 봤다.


"뭐야."


한 마디였다. 조용한 한 마디였다. 근데 뒤에 세 명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키가 쎄오보다 컸고 어깨가 넓었다. 선글라스를 새벽에도 쓰고 있었다. 시계가 카운터 형광등에 반짝였다. 선글라스 너머로 양아치 두 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없었다. 표정이 없는 게 더 무서웠다.


양아치 하나가 말했다. "뭔데 ㅋㅋ."


웃고 있었지만 뒤를 보고 있었다. 네 명. 셈이 안 맞았다.


쎄오가 말했다. "야 이 동생 귀 안 들려. 무시한 거 아니야."


노청이 쎄오를 봤다. 귀는 들렸다. 들리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쎄오는 노청이 수첩에 집중하면 주변 소리에 반응이 느린 걸 알고 있었다. 매번 담배 사러 올 때마다 봤으니까. 첫 마디에 반응이 없고, 두 번째에 고개를 들고. 그걸 이렇게 말한 거였다.


귀 안 들려.


노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아치가 쎄오를 봤다. 뒤에 세 명을 봤다. 계산이 빨랐다. 술 취했어도 숫자는 셌다.


"야 됐다. 가자."


두 명이 나갔다. 자동문이 닫혔다.


편의점이 다시 조용해졌다.


---


쎄오가 수첩을 내밀었다.


"이거."


노청이 받았다. 표지를 확인했다. 빨간 글씨. 데스노트. 안쪽을 펼쳤다. 속지가 접힌 데가 있었지만 찢어지지는 않았다. 바닥에 떨어지면서 모서리가 좀 더 닳았다. 가죽이라 찢어지는 게 아니라 닳는 거였다. 3년 동안 조금씩 닳아온 모서리에 오늘 하나가 더 추가됐다.


아까 적다 만 페이지를 찾았다. 있었다. '던전 2층 랜덤 이벤트 —' 까지 적혀 있었다. 양아치가 넘겨볼 때 구겨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고마워요 형."


처음으로 '형'이라고 불렀다. 전에 이름을 교환할 때 "형이네" "네" 하고 넘어갔었는데, 실제로 부른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노청은 그걸 의식하지 않았다. 그냥 나왔다. 수첩을 돌려받았을 때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다. '고마워요'가 아니라 '고마워요 형'이었다. 한 글자가 추가된 건데 그 한 글자가 3주치 거리를 줄였다.


쎄오도 의식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의식하고도 넘어간 건지.


"다음에 저런 놈 오면 나한테 문자해. 맞은편이잖아."


"네."


"야 근데 진짜 괜찮아? 자주 이래?"


"가끔요. 새벽에는 좀."


쎄오가 혀를 찼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쭈니 형 담배 뭐 피워."


선글라스 쓴 남자가 대답했다. "말보로 골드." 영어 발음이 살짝 섞여 있었다. 한국어인데 어딘가 다른 느낌.


쎄오가 노청을 봤다. "말보로 골드 하나."


노청이 꺼내서 건넸다. 쭈니라고 불린 남자가 카운터 위에 만원을 놓았다. 거스름돈을 주려는데 손을 저었다. "됐어."


그리고 노청을 한 번 봤다. 위아래로. 별 말 없이. 그냥 보는 거였다. 사람을 평가하는 눈은 아니었다. 확인하는 눈이었다. 누군가를 기억해두는 눈. 노청은 그런 시선에 익숙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3년을 일했지만 알바를 기억하려는 손님은 없었다.


"야 이 동생 누구야."


"편의점 알바. 게임 만들어."


"아." 쭈니라는 사람은 잠깐 노청을 봤다. 게임 만든다는 말에 뭔가 생각하는 눈이었는데, 더 묻지 않았다.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머지 두 명도 따라 나갔다.


쎄오가 마지막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야 칠 시에 편의점 앞이야."


"아까 일곱 시 오 분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양아치 때문에 오 분 당겼어. 밥 사줘야 하니까."


자동문이 닫혔다.


---


노청은 카운터 뒤로 돌아가서 수첩을 내려놓았다. 펼쳤다. 아까 적다 만 문장이 있었다.


'던전 2층 랜덤 이벤트 — 선택지 3개, 각각 리스크/리턴 다르게.'


그 밑에 한 줄을 추가했다.


'안전한 선택이 항상 좋은 건 아니게.'


이건 게임 설계 메모였다. 방금 일어난 일과는 관계가 없었다. 원래 적으려던 문장이었다. 수첩에 집중하다가 양아치 말을 못 들은 게 시작이었고, 수첩을 빼앗겨서 문제가 됐고, 수첩을 돌려받으면서 끝났다. 전부 수첩 때문이었다.


근데 묘하게 맞았다. 안전한 선택이 항상 좋은 건 아니라는 거. 가만히 있는 게 안전했는데, 가만히 있지 않은 사람이 와서 수첩을 돌려줬다.


한 줄 더 적었다.


'가운데 길 — 예상 못 한 사람이 나타나는 길.'


던전 2층 갈림길. 왼쪽은 안전. 오른쪽은 위험. 가운데는 — 아까까지 못 정했다. 지금은 뭔가 보이는 것 같았다.


---


새벽 네 시. 편의점은 다시 조용했다.


노청은 수첩을 덮었다. 표지의 빨간 글씨를 봤다.


데스노트.


형광등 아래서는 희미했다. 빛을 비춰야만 선명해지는 글씨. 아까 바닥에 떨어졌을 때 모서리가 좀 더 닳았다. 근데 글씨는 지워지지 않았다. 매직이니까.


수첩을 카운터 아래에 넣었다. 맞은편 오피스텔 3층에 불이 꺼져 있었다. 오늘은 일찍 끝났나 보다. 쎄오라는 사람이 저기서 포커를 하고, 끝나면 담배를 사러 내려오고, 아침이면 밥을 먹자고 한다.


그게 3주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별 거 아니었다. 근데 3년 동안 없던 일이었다.


노청은 다음 손님이 올 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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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측정 불가 26.05.08 6 0 18쪽
44 트레이서 26.05.07 5 0 16쪽
43 쎄오의 화요일 26.05.06 4 0 15쪽
42 안 들리는 아침 26.05.05 7 0 13쪽
41 고릴라와 향수 26.05.04 5 0 13쪽
40 형 얼마 따셨어요 26.05.03 6 0 16쪽
39 운좋은 피쉬 26.05.02 7 0 18쪽
38 평일 26.05.01 7 0 16쪽
37 사칠 26.04.30 8 0 21쪽
36 첫 토너 26.04.29 8 0 15쪽
35 르비엔 첫날 26.04.28 9 0 11쪽
34 여기선 더 못 큰다 26.04.27 10 0 13쪽
33 둘만의 언어 26.04.26 9 0 12쪽
32 시드는 남는다 26.04.25 10 0 11쪽
31 이게 내 게임 구조잖아 26.04.24 11 0 12쪽
30 레벨업 26.04.23 13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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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블러프를 읽는 밤 26.04.21 12 0 12쪽
27 칩 실수 2호 26.04.20 11 0 17쪽
26 리셋 26.04.19 12 0 22쪽
25 첫 판 26.04.19 1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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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입원 26.04.13 12 0 15쪽
17 53층 26.04.12 12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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