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제로(0)와 나인(9)과 텐(10).*
일년에 딱 한 번 꽃은 핀다.
“저- 애플티? 그러니까. 그게-. 죄송합니다만. 저어.”
무슨 이야기 하다가 정신 줄을 놓친 줄 모르고 있던 일순 어수룩해 보이기만 하던 림에게, 애플티가 자연스레 나선다.
“아. 응. 이데의 명령으로 침입자를 처리하는 게 우리 임무라고- 그랬어. 림. 그런 걸 모르고 있었다는 건 아니겠지?”
그 애플티 옆엔 그런 2인의 꼴이 몹시도 아니꼽다는 눈빛을 그리고 있는 투덜이 대장 애플진도 양쪽 팔짱을 낀 채 삐딱하니 서 있었다. 그런 껄렁해 보이는 애플진 보단 애플티 옆이 낫다 싶어 슬그머니 그쪽으로 이동해 가던 단풍은, 이제 림과 애플티 중간 쯤 근거리에 위치해서 그 둘의 모습을 눈치껏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단풍은 혹여나 림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조금은 안절부절 못하는 기세를 살금 내뿜고 있었다.
그 모습을 금방 알아챈 애플진은 단풍에게 후다닥 엄청난 속도로 접근과 등장!, 마치 그 모습이 땅 위로 순간적으로 사람이 솟구친 듯 보이기만 한 단풍이었다. 지금 놀란 눈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할 그녀의 귓가에 아주 작게 속닥이는 애플진이었다.
“어린애는 눈치껏 빠지라고. 여긴 어른들끼리 알아서 처리할거니까. 꺼지라고. 단풍.”
그러며 애플진의 그다지 썩 좋지 않은 눈빛이 단풍에게로 일직선으로 마치 레이저빔과도 같이 쏘아 들어왔기에 단풍의 아까 림을 향한 애정 어린 기세가 단숨에 수그러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뛰는 것이 단번에 두려움을 떠안았다.
어딘가 흙바닥에 낙서라도 긁적여야 하는 왕따의 쓸쓸한 심정을 느끼던 단풍이었다. 실은 그냥 대놓고 우엥~하며 울어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그랬다간 그 사실을 이데님을 좋아하는 화화 언니가 알기라도 하면 더욱 깨지니까 그러지 않기로 꾹 참았다.
단지, 지금 단풍의 바로 옆에 있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바로 둘 사이의 어떤 것들을 알 수 있었던 애플티가, 어느새 단풍에게서 벗어나 림의 정면에 위치한 채로 그를 향해 슬쩍 불쾌하고도 아니꼬운 눈빛을 뿌리던 애플진을 슬쩍 쳐다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곤 눈앞의 연약한 단풍을 달랜다.
“괜찮아. 걱정할 거 없어. 단풍. 조금 정도는 구경하게 해줄게.”
“고, 고마워요. 티 언니.”
“하지만 그 대신에 꼭 침묵을 지켜야 돼. 알겠지?”
“네. 네! 티 언니.”
가려진 천 자락 아래로 두 눈이 불쌍한 눈을 짓고 있는 것을 느낀 듯 애플티는 단풍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뭔가 이곳 ‘분위기’란 것이 이리저리 평온하기도 하고 살벌하기도 한 이 시점에서 림은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 응. 이데의 명령으로 침입자를 처리하는 게 우리 임무라고- 그랬어. 림. 그런 걸 모르고 있었다는 건 아니겠지?”
원래는 이런저런 연유로 ‘자신을 죽이기로 했다.’는 그 말을 그 끝맺음을 들으려고 림은 온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의외의 답변에 의아함을 담은 림의 눈빛이 조금 술렁이고 있었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허나, 그것에 ‘안도’라는 평화로움이 깃든 감정은 전혀 들지 않던 림이었다. 그 대신에 왜 인진 모르겠지만 애플티의 앞이라 그런 것인지 애플진 앞에선 절대로 그러지 않을게 분명하건만, 지금 이 순간 몹시 미안한 기분에 사로잡히던 림이었다.
자신은 이곳 ‘플루토의 창’에서 지키라고 정해둔 기본적인 룰(rule)을 어겼으니까 말이다. 그 룰이 ‘침입자는 반드시 죽인다.’는 것이었고, 이미 그것은 이데에게서 우선적으로 들어 알고 있는 사항이며 오늘 2차적으로 화화에게서 또 다시 강제적 학습되었다.
이제 와서 능글맞게 그런 것 따위 전혀 아는 바 없다고 할 수 있는 거짓을 표명할 자신 따윈 여기 없으니까. 순간 ‘이 모든 것이 나의 죄로다’와 같은 우울한 죄인의 심정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얼핏 림은 애플티의 시선을 관찰하듯 쫓아갔고, 어느덧 그녀의 시선은 늘 옵션처럼 깔려있던 상냥함마저 포기하고 서늘하게 빛나며 림을 날 선 눈빛으로 묵묵히 주시하고 있음을 보고 말았다.
“그런데. 림. 넌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렸어. 이거 내가 잘못 안 걸까?”
역시, 이 말이 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말았다. 더욱 더 가라앉는 림의 기분이었다. 송구하기 그지없었다. 어른 앞에서 꾸중을 듣는 아주 작은 어린애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지만, 역시 뱃속이 순간적으로 뒤틀린다는 감각으로 뒤덮일 만큼 더욱 분함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순간 자신의 안에 있던 반역자가 눈을 반짝 빛내고 있음을 깨달았으니까.
“아니요. 잘못 안 게 아닙니다. 애플티. 내가 그랬어요. 침입자를 도왔다는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지? 림? 원래 아는 사이였나? 그 침입자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지?”
“아니요. 아닙니다. 뭐- 어쩌다보니 ‘아는 사이’가 되었지만, 더는 상관없겠지요. 이미 전 이곳의 룰을 어겼고 그 침입자를 도왔습니다. 맞아요. 모든 걸 다 알고서 당신들의 임무를 방해했습니다.”
이왕 ‘우린 적이 되었다.’라는 기세를 마구 노출해버린 상황에서 림과 애플티는 대체 무슨 연극을 저토록 평화적으로 하고 있는지 화딱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던 기분이 확 들고 있던 애플진이었다.
참으로 저 두 사람이 하는 모양새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굳이 ‘파’(派)를 나누자면, 애플진 자신은 애플티‘과’(림, 단풍: 굳이 말하면 림 편이다.)라기 보단 이데‘과’(화화, 마린: 상황에 따라 중립이거나 제멋대로 혼자 행동.)였다.
어쨌든 지금 애플진은 앞서 팔짱 낀 채 자신의 양쪽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도 이쯤에서 그만 관두고, 애플티에게로 슬쩍 눈길을 주며 이제 자신이 나서기로 한다.
“야. 림. 그러니까. 네가 잘못했다고 지금 시인하는 거지? 하기야 네가 그 침입자 놈을 살려보겠다고 아무리 발악했어도 결국 살리지도 못했다고. 그냥 개~쪽만 팔리고 이제 어쩌냐? 부끄러워서 하늘 아래 얼굴이나 들고 다니겠어? 하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침입자가 죽어야한다는 건 매한가지겠지만. 자-아. 잘 들었지? 애플티,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자.”
꾸역꾸역 다가오는 애플진의 시선에 살짝 머뭇대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애플티가 마지막으로 막 어떤 대답을 이으려하자, 그 순간을 림이 가져가며 애플진에게로 시선을 싸늘하게 고정시키며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입을 연다.
“글쎄.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내가 ‘잘못했다’는 그런 생각은 전혀 안 들어. 미안. 애플진. 아아~ 이런 거 기분 나빴으려나? 그래. 이런 거 싫어하지? 그럴 거 같은데 말야. 거기 있는 ‘진’씨는. 틀려?”
이미, 앞서 백토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림이니까, 앞의 인연 따위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허나 그 인연 중에 아주 조금 ‘애플티’가 걸려있어 아주 조금 헷갈릴 뿐이었던 거다. 그래서 그 사소한 것이 자신을 잠시 흔들었을 뿐이었다.
허나, 저 눈앞의 오만한 애플진을 바라보자니 전혀 헷갈릴 것도 그 어떤 걸림돌도 없다는 걸 인식한다. 그저 마음에 담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이 그저 속 시원하게 꾹꾹 밟아주어도 괜찮겠다고 그냥 생각해버린다.
처음으로 자신이 힘껏 상대해도 아무런 문제없다는 그런 허락을 받은 것만 같았다. 자신을 떠나버린 이데만큼이나 자신이 무지막지하게 대하더라도 상관없어 보인다고 그냥 편하게 생각하고 만다. 자신이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의 그 이유 따윈 모르겠다. 더는 상관없다.
감정을 갖지 못한 선녀들, 아니 단지 로봇일 뿐인 그저 무생물이나 물건들, 그러면서도 어쩌면 선녀들이 너무도 그 외모가 그 표정이 인간과 닮아서 그동안 꽤 많이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껏 약한 자신의 마음이 속삭여왔던 것이다.
그들을 다치게 하지 말자고. 그들도 공격당하면 몹시도 아플 것이라고. 어쨌거나 누군가를 그 누군가가 로봇이든 뭐든 부서 버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 상처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동안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백토와 나를 죽인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복수하고 싶은 거였다. 이기고 지고에 대해선 신경 안 쓴다. 그런 건 필요 없는 거다.
다시 부활한 나는 그 자체가 새까만 어둠이고 악이며 분노며 광기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미완성이고 나약하고 불안정해서 이렇게나 흔들리는 나는 역시 듀콜로이한 그 영감님의 말대로 ‘10’이란 완성에 이르지 못한 부족한 넘버나인(no. nine)에 불과했다. 이것을 넘어서게 된다면 반드시 흔들림 없는 자신이 될 터인데 말이다.
아. 더욱 더 강한 자신이 되고 싶다. 좀 더 강한 힘을 갖고 싶다. 다시는 자신을 죽게 만들고 싶지 않다. 덤으로 불쌍하게 죽은 백토의 복수도 해주고 싶다.
넘버나인을 넘어서면 과연 자신은 무엇이 될까. 완성인 10(ten=텐)? 그럼 나는 이곳 플루토의 창에서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될까? 내가 반역자인데다 위험인자라서? 그것도 아니면 이데 친구인 니켈라우스 그 아저씨의 말처럼 0(zero=제로)? 그럼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걸까? 어쩌면 새로운 뭔가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말일까?
아니지. 아니야. 결국 내가 향한 모든 것은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거겠지. 그래. 그랬어. 이 내가. 이 넘버나인이 모든 걸 망가뜨릴 테니까. 원래부터 내 본질은 그런 위험인자였잖아? 알고 있었잖아? 이미.
“야. 임마. 너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냐? 아- 진짜. 애플티. 나 이데 놈 전혀 신경 안 써. 그냥 저거 실컷 갖고 놀다 버려도 괜.찮.지? 응? 난 얼른 그.러.고.싶.거.든. 시간이 없다. 이.거.야.”
온 전신이 화륵 시뻘건 화염에라도 휩싸인 것처럼 흥분의 정점으로 치닫는 자는 다름 아닌 애플진이었다. 림의 도발에 금세 이끌리던 애플진, 그럼에도 그 앞에선 림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심드렁한 반응으로 더욱 약을 살살 올리는 중이었다.
“하-! 여어. 진씨. 괜히 국어책 읽듯이 말 하지 마. 악당 역할들은 매번 그런 발음법으로 대사 치더라. 정말 창의성이 부족해. 그냥 열 받아서 머리가 빡 돈다고 말해. 얼른 싸우자고. 응? 이딴 결계로 날 묶어두지 말란 말이야. 이러니까 내 그 좋~던 성격이 완전히 이상해져버린 거잖아? 그냥 댐벼! 왜? 용기가 없어?”
왠지 애플진이 림 자신의 말에 반응하고 흥분하고 발악하려는 그런 감정들이 실려 있다는 것이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꽤 흥미로운 광경이라도 보고 있는 듯 한껏 즐거워지는 림이었다. 더욱 더 도발하고 싶어졌다.
원래 여성형 로봇치곤 난폭한 성향인 애플진이 저러는 모습이 꽤나 신기했던 것일까? 원래 이런 걸 자신이 좋아했던가? 타인을 괴롭히고 그것에서 즐거움을 얻는, 그런 자신이라니, 새로운 자신이라도 발견한 듯 싶어 참으로 묘했다.
한편, 이미 애플진의 머릿속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단어와 문장은 ‘죽인다!’가 수십 수백 단어가 들썩이고 있었던 셈으로, 허나 마지막 온전한 브레이크처럼 딱 하나 자신의 ‘무기’를 지금 당장 개방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오직 ‘애플티’정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몇 퍼센트는 기타 선녀들이 이데와 함께 만든 자잘한 계획과 림과의 아주 사소하고 손톱 때만큼의 정나미 정도였다.
아마도 림은 이데가 벌인 어떤 짓으로 인해 현재 ‘기억’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 애플진이 평소 림을 어떻게 대해왔었는지 둘 사이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 과거를 되새겨보자면 지금 림은 하여튼 사가지는 밥 말아 드셨고 버릇없고 괘씸하기 짝이 없다고 봐지던 애플진이었다. 까마득하게 한참은 어린놈의 자식이었다. 림은. 자신에게!
“아~ 애플티. 정말. 저거 죽일까? 공을 들여서 자근자근 밟아줘? 아니. 그냥 죽여 버릴까?”
애플진이 몸소 자신의 어금니를 살근 베어 물고는 말하는 기세는 정말 이 상황을 끝내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해보일 정도였다. 바로 옆에 있던 애플티에게 묻는 자세치고는, 이미 애플진은 자신의 옷을 점검하며 불필요한 것을 뜯어내고 있는 모습이 막 싸우려고 준비하는 자세처럼 보였다.
거추장스런 긴 선녀의 치마는 진의 손길에 무릎만치 단번에 찌익 잘려나가 떨어졌고 그 아래로 얼음장처럼 새하얀 허벅지와 긴 다리와 검은 발목부츠가 드러났고, 일찌감치 양손의 긴 천 자락 따윈 손 털듯 털어내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고 가죽장갑이 진의 양손을 덮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림을 패대기치고 일을 끝낼 것만 같이 보이는 애플진의 모습을 보며 살풋 한숨을 내뱉던 애플티는, 이것저것 ‘보고서 작성’할 것도 있고 하니 이쯤에서 진이 참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며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느릿하게 꺼낸 말이지만 효과는 매우 강력했다.
“진. 그럼, 어제 ‘약속’한 건 없어. 그래도 돼?”
그 말에 대해 가만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애플진의 분노란 것은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한 줌도 없이 온데간데없이 단숨에 사라져버렸다.
“아-. 그건 싫어. 애플티. 그 ‘약속’은 꼭 지키라고.”
듀콜로이한 영감.
니켈라우스 초기스케치.
니켈라우스. 완성스케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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