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기사대전(8)
*
로베암은 자리에서 벗어나는 남자를 곁눈질로 스쳐보았다.
온몸에 유리가루를 칠한 것처럼 남자의 모습은 반짝이면서도 투명했다. 물론 로베암의 눈에는 그의 본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다른 놈들은 보이지 않는 건가?’
부하(일행)들을 둘러봐도 알아차린 이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저 수상한 놈이 슬금슬금 이쪽 지역으로 넘어오더니, 계속해서 안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로베암의 뇌리에서 한 가지 가설이 번뜩였다.
빈집털이!
애초부터 엑스터의 노림수는 명예를 운운하며 대결로 시간을 끄는 사이, 뒤에서 상징물을 부수는 것일지도 몰랐다.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지.’
곧바로 로베암은 옆에 있는 폴리아의 어깨를 붙잡아 가슴팍까지 끌어안았다.
“서, 선배?”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뜬 폴리아. 손에서 전해지는 감각을 통해 그녀가 잔뜩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로베암은 폴리아의 귓가에 대고 나직한 말을 흘려보냈다.
“지금 당장 상징물로 돌아가서 보호결계를 쳐.”
“네? ······우리 상징물에 결계를 치라는 말씀이세요?”
“너의 이능으로 가능한 강력하게 죄다 깔아놔.”
갑작스런 요구에도 폴리아는 가타부타 묻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
“으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선배가 시킨 대로 할게요. 그래도 다 끝나고 말해 줘야 해요?”
“시킨 일이나 잘 해.”
로베암은 폴리아를 품에서 놓아 주었다.
그 즉시 폴리아는 상징물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이능을 발휘한 그녀의 움직임은 이곳이 빙판인 것 마냥, 지면 위로 미끄러지며 빠르게 나아갔다.
그렇게 멀리 사라져가는 폴리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로베암에게 디페니아가 붙어왔다.
“갑자기 폴리아는 왜요?”
“일거리를 하나 던져줬다.”
“비밀 작전 같은 건가요?”
“쥐새끼 한 마리가 있는 것 같아서, 그거 막으라고 보냈다. 재수 없게 뒤통수라도 맞으면 기분이 나쁘지 않겠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쯧, 둔하긴. 됐다, 너는 싸울 준비나 해라. 슬슬 저놈들도 움직일 모양이니.”
로베암의 말을 들은 것일까?
때마침 엑스터의 무리에서 중년 사내 한 명이 성큼 걸어 나왔다.
가죽갑옷처럼 만들어진 흰색 전투복을 껴입은 중년 사내. 부리부리한 눈매와 굳게 닫힌 입술은 매처럼 강한 인상을 주었다.
양손에는 도(刀)를 닮은 바이오소드가 각각 한 자루씩 들려 있었는데, 하나 같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거금을 들여 특수 제작한 최상품으로 보였다.
“나는 화이트 헌터, 멸절귀! 슈크루마다!”
우렁찬 목소리로 스스로를 밝힌 슈크루마는 로베암을 지목하며 말을 이었다.
“화이트 헌터 로베암! 나와라! 누구의 서열이 높은지 승부를 가르자!”
예상치 못한 도전.
그렇지 않아도 가급적 싸움 상대를 독차지하고 싶었던 로베암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화이트 헌터라······ 크란츠보다는 강하려나? 뭐, 마침 잘 됐군. 저놈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크란츠가 투정 부릴 건더기도 없겠어.’
로베암은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크란츠의 얼굴은 이미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사냥감’을 차지하지 못하고 구경하다 끝나게 생겼으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내 알 바는 아니지.’
로베암은 즐거운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슈크루마와 일정 거리에서 대치했다.
“시시하게 끝나지는 마라.”
“흥! 그건 내가 할 말이다!”
기대를 담은 로베암의 말에 슈크루마가 코웃음을 쳤다.
로베암은 사면의 바이오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럼 시작할까?”
“박살을 내주겠다! 냉혈귀!”
다음 순간, 두 종류의 바이오소드가 중간지점에서 거세게 부딪혔다.
한 번의 충돌은 금세 수십 개로 늘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랑카랑한 금속음이 그 소리를 드높였다.
슈크루마의 바이오소드가 번뜩일 때마다 화려한 궤적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에 비해 로베암의 칼놀림은 무척이나 수수해 보였다.
손목만 슬쩍슬쩍 움직이며 무미건조한 궤적을 남겨갔다.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이면은 완전히 달랐다.
로베암의 바이오소드는 간결했지만 언제나 상대보다 한 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날카롭게 들어오는 공격은 모두 힘으로 끊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바이오소드에 담긴 속도와 힘이 점점 증가시키면서 역으로 상대를 압박했다.
그렇다.
로베암은 지금 슈크루마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어제 느끼지 못한 손맛을 즐기는 중이었다.
하지만 장난질도 호응이 없으면 질리는 법.
슈크루마의 공격을 하나하나 쳐내던 로베암은 바이오소드를 강하게 휘둘렀다.
채챙!
엉거주춤 밀려난 슈크루마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탓이었다.
“크윽! 제기랄!”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슈크루마의 얼굴.
로베암은 쌀쌀한 태도로 평가를 내렸다.
“시시하군. 화이트 헌터라더니 형편없어. 넌 크란츠보다도 약하다.”
“이익! 건방진 놈!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벌떡 일어선 슈크루마는 돌격 자세를 취하며 바이오오라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슈크루마의 바이오오라가 기본 속성인 푸른색에서 폭발의 속성을 지닌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바이오에너지의 속성 변화.
그래도 화이트 헌터라고 약간의 재주는 지닌 모양이다.
잠시 후, 슈크루마의 바이오오라가 완연한 검붉은 색을 띄자, 로베암은 말했다.
“이제 준비 끝났으면 덤벼 봐.”
“흐흐! 건방진 놈! 왜 사람들이 나를 멸절귀라 부르는지 가르쳐주마! 하압!”
슈크루마가 힘차게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한달음에 10미터이상 떠오른 슈크루마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검붉은 바이오오라를 로베암을 향해 전력으로 내던졌다.
“토마호크 크레센도(Tomahawk Crescendo)!!”
바이오오라에 이능을 결합한 슈크루마의 필살기. 그 위력은 소형 미사일 수준에 준하며, 비행시간에 따라 가속하는 성질과 유도 기능이 있어 목표를 확실하게 저격한다.
그러나.
무섭게 날아간 검붉은 투창이 로베암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에 앞서, 사면의 바이오소드에서 흑색 오라가 뻗어 나왔다.
“규정대로 죽이지는 않겠다.”
로베암은 흑색 오라로 완전히 뒤덮인 바이오소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일섬.
낫처럼 기역자 형태를 이룬 흑색 오라가 허공으로 쏘아졌다.
검붉은 바이오오라를 가르며 일순간에 소멸시킨 흑색 오라. 이게 끝이 아니었다.
죽음의 낫은 로베암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목표를 추격했고, 결국 공중에서 내려오는 슈크루마의 한 쪽 팔을 거침없이 잘라 버리고서야 행동을 멈추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