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기사, 디페니아(5)
눈에 힘을 주고 디페니아를 주시하던 로베암은 질문을 던졌다.
“공간이동 같은 건가?”
“직접 확인해 보시죠!”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한 듯 순간적으로 디페니아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속으로 이동하며 바람을 일으키는 모습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았다.
눈 깜박할 사이, 디페니아가 로베암의 측면으로 다가왔고 그 가속도를 담아 고속으로 찔러오는 레이피어.
그러나 그녀의 움직임은, 이번에는 로베암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뭐야, 그냥 가속 능력이잖아.”
로베암은 레이피어를 튕겨 내지 않고 그 끄트머리를 왼손으로 잡아 버렸다. 전투용 금속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그리고 무척 놀란 사람처럼 어리둥절해 보이는 디페니아를 검으로 후려쳤다.
쇳소리를 남기고 허공에 붕 떠버린 디페니아의 몸은 몇 초간의 체공 시간을 거치면서 저 멀리에 떨어졌다.
몇 바퀴를 구르다가 일어난 디페니아의 손에는 레이피어가 보이지 않았다. 로베암의 힘에 못 이겨 놓쳐 버린 상황.
로베암은 들고 있던 레이피어를 디페니아의 발치에 내던졌다.
“이런 시시한 거 말고 새로운 것을 보여줘 봐. 이게 전부라면 여기서 몸성히 나가긴 힘들 거다.”
디페니아는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똑바로 했다.
방금 바닥을 구른 데다가 신속을 사용한 작은 후유증이 덮쳐 조금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신속이라고 부르는 디페니아의 네 가지 이능 중 하나. 일시적으로 신체를 자극해서 그저 빠르게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지속시간은 1분, 그러나 5분만 쉬어도 재사용이 가능하다.
간단한 능력이지만 이런 신속이 있기에 디페니아의 찌르기 공격은 하나의 필살기와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그동안 해왔던 수백 회가 넘는 대련을 이겨낸 바탕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허무하게 맨손으로 잡아 버릴 줄이야.
게다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깔보고 업신여겨?’
디페니아는 떨어져 있는 레이피어 형태의 바이오소드, 로루스를 소중하게 주워들었다.
로베암은 어떤 인사도 없이 기습으로 대련을 시작하더니 시종일관 무시하는 언행을 일삼았다. 그리고 이제는 로루스를 내던지며 선심 쓰듯 비꼬다니!
특히 대련에서 상대의 무기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은 디페니아로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무례한 행위였다.
디페니아는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반드시 되갚아 주고 싶었다.
이제 저 남자에게 만큼은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신속은 통하지 않고 하나 남은 공격이능도 위력 면에서는 신속보다도 못하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이능강화뿐인데.
‘사람한테 쓰는 것도 처음이고.’
하지만 디페니아는 이 상태로는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로베암도 강화시술을 받았는지 그 신체 능력이 상당히 뛰어났다. 아니, 지금까지 보여준 것만 봐도 최소한 디페니아에게는 압도적이었다.
또한 로베암의 공격은 단조롭지만 그 하나하나가 위력적이었다. 특히 마지막 공격을 방패, 바이버로 받아낸 순간 디페니아의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그래도 나에게 남은 방법이 이것뿐이라면!’
마음을 굳힌 디페니아는 로베암을 노려보았다.
어깨에 바이오소드를 걸치고 덤덤한 기색으로 서 있는 로베암. 디페니아는 저 여유를 무너뜨리고 싶다는 욕구가 마음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디페니아는 왼손에 낀 바이버로 로루스의 밑을 받치고 어깨선에 맞춰 수평이 되도록 로루스를 눕혀 들었다. 무릎은 살짝 구부리고 두 발을 넓게 벌려 중심을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루스를 작동시키자 아주 빠른 속도로 바이오코어에서 푸른빛이 뿜어 나왔다. 그 푸른빛은 로루스의 칼날을 감싸며 나선형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때 디페니아는 능숙하게 동화를 사용했다.
동화라고 불리는 특수이능. 바이오코어와 동조를 이루어 그 안에 있는 바이오에너지를 촉매제로 삼아 다른 이능을 강화시킬 수 있다.
단, 사용자의 뇌파에 맞춘 전용 바이오코어가 있어야만 동조되며 장비를 이용해서 발현할 수 있는 이능만이 강화가 가능하다. 즉, 신속 같이 도구가 필요 없는 이능은 제외된다.
디페니아의 의지가 바이오코어와 동조를 이루자 푸른빛은 순식간에 보랏빛으로 바뀌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로루스를 통해 이능을 사용할 차례다. 목표는 로베암의 복부. 폴리아가 옆방에 회복실이 있다고 했으니 바로 치료한다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습 때와 같은 연사는 필요 없어. 모든 에너지를 단 일격에!’
점점 진해져 가던 보랏빛이 정점을 찍었을 때, 디페니아는 세 번째 이능을 사용했다.
이것은 방출 계열의 공격이능으로 기다란 물건을 통해 충격파를 쏘아내는 능력.
위력은 소형 바이오건 정도다. 그러나 이능강화가 되면 수치상으로는 부대장 등급의 괴수를 일격에 쓰러트릴 정도로 그 위력이 강해진다.
물론 그것은 전용장비의 초대형 바이오캡슐에 있는 모든 바이오에너지를 사용할 경우의 이야기다.
바로 지금처럼.
로루스를 벗어난 진한 보랏빛 소용돌이. 막대한 에너지를 응축한 나선의 빛줄기가 레이저 광선처럼 단숨에 날아가 로베암을 강타했다.
후폭풍과 함께 강렬한 보랏빛이 수련실을 가득 메우고.
방패로 시야를 가린 디페니아는 빛을 잃은 로루스를 늘어뜨렸다.
디페니아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 차올랐다.
‘됐다! 적중했어!’
이능강화의 출력을 최대까지 올리느라 조금 시간이 걸려서 걱정했는데 로베암은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 끝이다! 성벽도 뚫을 수 있는 이 일격에 맞고 멀쩡할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
디페니아는 쓰려졌을 로베암의 모습을 상상하자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현재 그녀의 감정은 격해진 상태였다.
이윽고 빛이 잠잠해졌을 무렵, 디페니아는 선물상자를 여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방패를 내렸다.
그런데.
“마, 말도 안 돼!”
그곳에는 여전히 로베암이 서 있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로베암은 디페니아의 일격을 막아낸 왼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들거리는 떨림이 좀처럼 가시지 않은 손바닥. 피는 나지 않았으나 손목도 뻐근했고 살갗도 벗겨졌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들어온 디페니아의 공격은 충분히 일격이라고 부를 만 했다.
위력도 상당했지만 그보다 속도가 위력적이었다. 로베암이 바이오소드로 쳐내는 것이 늦어 손을 내밀어야 했을 정도였다.
다만 발동시간까지 느린 것이 흠이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를 해줘야겠지.
로베암은 바이오소드를 작동시키고 곧바로 바이오오라를 만들었다. 그 직후 남청색의 바이오오라가 금색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로베암이 한 것은 속성변화. 그는 딱딱한 성질을 부여한 금색의 바이오에너지로 기존의 날카로운 성질을 변환시켰다.
로베암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속성강화를 시행했다. 그 결과 점점 짙어지던 금색의 바이오오라는 황금색이 돼서야 멈추었다.
로베암은 디페니아를 보았다.
몸에 기운이 없어 양팔은 축 늘어지고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모양새. 무언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면 디페니아의 방어 능력을 구경할 수가 없다.
“만약 이번 공격을 막아 낸다면 조금은 인정해 주겠어!”
움찔거리며 로베암을 바라보는 디페니아. 그 반응을 확인한 로베암은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못한다면 너는 여기까지 인거다.”
로베암의 말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었다. 최대로 속성강화한 황금의 일격은 사령관 괴수에게도 통하는 위력이 담겨 있었다.
‘막아 내지 못하면 여기저기 부러지는 거지.’
뒷말을 삼킨 로베암은 디페니아에게 다가갔다.
그 앞에 도달하면 곧바로 황금색 바이오오라를 내려칠 생각으로.
로베암이 다가오는 모습에 디페니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바이오소드에 감도는 빛기둥은 틀림없는 바이오오라. 이능이나 같은 바이오오라가 아니라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막을 수도 없는 기술이다.
비록 청색이 아닌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로루스를 충전할 시간은 없어. 그렇다고 이대로 저자에게 등을 보일 수는 없지!’
다시금 투지의 끌어올린 디페니아는 방패 형태의 바이오웨펀, 바이버를 작동시켰다.
빠르게 바이오코어와 동조를 이루고 이능강화를 시작한다.
디페니아가 선택한 것은 네 번째, 방어이능.
바이버를 중심으로 거대한 보랏빛 방벽이 나타났다. 여섯 명은 충분히 감쌀 만한 크기였다.
그때, 로베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마지막 이능이겠지?”
낮고 차가운 음성.
그 즉시 디페니아는 바이버를 머리 위로 치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떨어지는 황금색 바이오오라.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연거푸 내려치는 바이오오라. 그때마다 쾅쾅 거리는 소음이 무섭게 울려 퍼졌다.
이능강화한 바이버로 막고 있음에도 부딪힐 때마다 닥쳐오는 맹렬한 충격이 디페니아의 온몸을 짓눌렀다.
디페니아는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문 채로 버티고 또 버텼다. 오로지 질 수 없다는 일념하나로, 바이버를 꽉 붙들고 폭풍이 그치기를 기다리며 최선을 다해 견뎠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끝난 걸까. 막아낸 횟수는 적어도 백 번은 넘긴 것 같았다.
‘막아 낸 건가? 내가 이겨낸 거야?’
그러나 그것이 틀린 생각이었음을 디페니아는 고개를 든 순간 알 수 있었다.
눈앞에서 로베암의 바이오오라는 여전히 황금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에 디페니아의 바이버는 빛을 완전히 잃었고 보랏빛 방벽 또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졌구나.
처음부터 상대도 안 됐어.
디페니아는 힘없이 바이버를 내렸다.
아마도 폴리아의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이능강화한 바이버는 스헬터 공작이라고 해도 이렇게 쉽게 뚫지는 못한다.
디페니아는 로베암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덤덤한 표정. 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놀이’에 불과했던 것일까.
허탈했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시원한 느낌도 있었다.
로베암과 함께라면 탈환임무도 기사 경쟁도 모두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때 다시 로베암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임무를 시작하지. 나머지는 계약대로 하겠지만 너는 내 부하라는 것을 잊지 마라. 다시 까불면 그때는 흠씬 두들겨 패주겠어.”
디페니아는 조금, 아주 조금이었지만 싹트려던 호감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 역시 너무나도 무례한 사람이야······.’
디페니아는 그 상념을 끝으로 수련실의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 작가의말
쉬어가는 듯한 짧은 2장이 끝났습니다.
다음 화는 3장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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