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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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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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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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12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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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2)

DUMMY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부스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와 있었다. 간밤에 그 난리를 쳐서인지 조금 늦게 일어났군.


“도 공자님.”


심하령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식사에 늦어서 깨우러 온 걸까? 무심코 문으로 다가가려던 순간, 문득 떠오른 바가 있어 방 한구석에 있는 동경을 바라보았다. 어제 얻어맞은 자리는 아직 벌건 자국이 남아 있었다. 별수 없겠군. 이제 와서 침상에서 떨어졌다는 변명을 할 수도 없으니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수밖에.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


“사죄드리외다 소문주!”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심하령 특유의 뾰루퉁한 얼굴도, 무뚝뚝한 표정도 아닌 구척 거한의 오체투지였다. 납작 엎드린 등이 무척 공손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왜 이러는지는 짐작이 간다만 하루만에 사과를 하러 올 줄은 몰랐군.


“죄송합니다 도 공자님. 저희 식솔이 간밤에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이는 모두 식솔을 단속하지 못한 제 잘못이니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심하령이 이리 저자세로 나오니 얼떨떨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별다를 일은 아니고 흑경의 처사도 이해못할 것은 아니어서, 생각 같아서는 어영부영 넘기고 싶었다. 그렇지만 단호하기까지 한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끝까지 벌을 내려달라고 물고 늘어질 것 같았다. 별 수 없지. 아무거나 말해두는 수밖에.


“지금은 달리 떠오르는 바가 없으니 나중에 제가 청을 하나 드리면 그걸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청이라 하심은?”


심하령이 되물었다. 어떤 것이라도 달게 감수하겠다는 느낌이 강해서 도리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장난삼아 만년설삼이 필요하다 해도 반나절 만에 그걸 들고 올 것 같다고 할까? 애당초 무슨 의미를 두고 한 말이 아니기에 그저 손사래를 칠 따름이었다.


“그걸 지금 밝히면 벌이라 할 수 없겠지요. 음, 슬슬 일어나시지요.”


흑경이 슬금슬금 심하령의 눈치를 살피다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고 공연히 헛기침만 연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심하령의 묘한 눈총에 그만두고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가, 감사하외다.”


흑경은 가까스로 그 말을 내뱉고 애먼 장식품 따위나 구경하기 시작했다. 호탕하기 그지없던 그가 대체 어떻게 이렇게 까지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심하령의 질책 때문만은 아닌 듯 싶은데.


“아, 헌데 한 대주와 문 소협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리고 어르신께서는 쾌차하신 겁니까? 우리를 습격했던 그자는...”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임에도 심하령이 용케 그것들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마침 준비하고 있던 것을 늘어놓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을 주었다.


“안 그래도 그 일과 관련하여 공자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방금 기침하셨을 터이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쪽으로.....”


세 개나 되는 물음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나름대로 추측을 이어가며 심하령의 뒤를 따라가려는 순간, 심하령이 멈칫하고 고개를 돌려 내 뒤를 따라오려는 흑경에게 말했다.


“아저씨께서는 같이 가시지 않으셔도 돼요. 대신 우 지단주를 도와주시겠어요?”


“아, 그, 그러냐? 허허허....”


흑경은 민망한 듯 웃으며 차츰 멀어져갔다. 매몰차게 내쳐지는 걸 보니 조금은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저건 단순한 심술이 아니다. 모르긴 해도 심하령은 흑경이란 자는 꽤 믿고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런 자에게 저렇게 말했다는 건, 분명 그들에게는 숨겨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어서인 게 분명하다.


심하령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지하 모처의 뇌옥이었다. 이렇게 깊숙이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건 역시 어두운 그늘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건 심상뿐만이 아니라 내가 겪었던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였다. 폰테일 공작가나 볼마르그 역시 방식은 다르지만 이런 곳이 없는 건 아니었지. 그렇게 보면 우리 천의검문이, 그러니까 아버지가 상당히 괴이한 경우였다. 지금 천의검문엔 뇌옥은 커녕 비밀통로조차 없으니 말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이곳 뇌옥에는 그 흔한 이야기에서처럼 악독한 마두가 고약한 웃음소리를 내뱉지도 않았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고문이 이어지는 곳도 아니었다. 한참이나 뇌옥 여기저기를 바라보던 나는 심하령에게 솔직한 감회를 털어놓았다.


“뇌옥치고는 아무도 없고 깨끗하군요.”


“가둘만한 자는 예전에 다 죽었거든요.”


그것 참 소름 끼치는 일이군. 아무튼 뇌옥에 대해 더 생각하는 건 그만두는 게 좋겠어. 심하령의 뒤를 따라 뇌옥과 뇌옥을 지나쳐 간 곳은 뇌옥이라기 어려울 정도로 쾌적한 곳이었다. 천장이 훤히 뚫려 햇빛까지 들어오는 데다가 데다 작은 초옥까지 자리하고 있어 도무지 정체를 가늠할 수 가 없었다.


“늦었구나.”


“글쎄요. 딱 맞춰서 온 것 같은데요.”


심하령이 공동(空洞) 한가운데 자리한 초옥에 자리한 낯익은 얼굴에 그렇게 말했다. 모 낯익은 모습에 절로 미소가 배어나온다.


“어르신. 무사하셨군요.”


노구를 이끌고 수없이 우리를 지키고 철저히 무인의 자세를 견지했던 철혈의 의원. 심유환이 여전한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격전을 떠올린 나는 경의를 표하는 겸 포권을 쥐어 보였다. 이에 심유환이 짐짓 못마땅한 표정을 내보이며 말했다.


“흥, 네놈 때문에 죽을 뻔 하면서 수명이 10년을 줄었을 텐데 무사해 보이느냐?”


“정말로 그런 줄 아시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보다 다른 두 분께서는 조금 차도가 있으신가요?”


“그거라면 직접 보는 게 좋을 테니 일단 들어가자꾸나.”


심유환이 초옥으로 먼저 들어가 버리고 우리 역시 초옥으로 따라 들어갔다. 작은 방 한 칸을 절반 넘게 차지하고 있는 건 하얀 천으로 몸 여기저기를 싸맨 두 명의 사내였다. 둘 중 한 명은 말 그대로 몸을 거의 천으로 둘러싸매다시피 했고, 다른 한명은 조금 상태가 나은지 가슴팍을 둘둘 싸맸을 뿐 비스듬히 벽에 기대고 앉아서 우릴 보고 아는 체까지 해왔다.


“여어, 오랜만이네요.”


“문 소협. 몸은 어떠십니까?”


“뭐, 아팠죠. 지금은 멀쩡합니다.”


문영이 씩 웃으며 양 어깨를 빙빙 돌리다가 신음하며 몸을 웅크렸다. 이에 심유환이 한숨을 내쉬며 문영의 뒤통수를 갈기며 쏘아붙였다.


“이놈아! 쳐 자야 빨리 낫는다니까 왜 깨고 난리인 게야?”


“에이, 잠만 자면 그게 사람입니까? 아 진짜! 수혈 짚지 마요. 수혀얼.....”


번개같은 손놀림에 수혈을 짚인 문영은 이내 곯아떨어졌다. 심유환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내 평생 저렇게 시끄러운 종자는 처음 보았다. 아프기 전에도 저랬느냐?”


“비슷했던 것 같군요.”


문영은 괜찮은 모양이군. 이어서 나는 문영 옆에서 죽은 듯 잠들어있는 사내, 한상염의 상세를 살펴보았다. 여기저기를 싸매고 있었고 숨소리도 그리 크지 않아서 숨을 쉬는지 분간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이전보다는 혈색이 완연한 것이 상세는 크게 나아진 것 같았다.


“그래, 한 대주의 몸을 다스린 것이 네 솜씨라고?”


“그냥 내공만 불어넣었을 뿐입니다.”


“안다. 다른 무공과 충돌하지 않는 내공이더구나. 대체 어떻게..... 아니, 되었다. 묻는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겠지. 그보다 갑자기 그런 실력을 갖추게, 흐음.... 되찾은 게냐?”


“되찾은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찾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올바른 길을 찾고 간신히 문턱을 붙잡은 거지. 심유환은 대답이 영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되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꾸나. 네가 제압한 그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 흑마법사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와 령이가 나름대로 캐묻긴 했다만 통 입을 열지 않더구나. 그러니 아무래도 네가 심문해보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심유환은 그렇게 말하며 초옥 바닥에 설치된 비밀 문을 열었다. 비밀스러운 장소에 다시 비밀스러운 장소라. 어지간해선 들어가기도 어렵게 만들어 두었군. 비밀 문에 들어가서 오래지 않아 우리는 좁은 토굴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옷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야명주 불빛을 받으며 웅크리고 있는 그 사내는 발소리를 듣고 깨어나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금제는 해 두었네만 혹시나 싶어 한철 사슬로 묶어 두었다네.”


심유환이 말했다. 그 말대로 아인벨프는 파리한 안색으로 굵직한 사슬에 묶여 있었다. 어두침침한 가운데 차츰 내 얼굴을 알아본 아인벨프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멍한 눈이 한순간에 또렷하게 변하고 아인벨프가 사슬을 덜그럭거리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시끄럽다 이놈아! 자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이 난리를 치는 겐가?”


심유환이 간단히 침 몇 개로 아인벨프의 심신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쓴웃음만 나오는군.


“아인벨프.”


한철사슬이 달그락거릴 정도로 벌벌 떨고 있는 흑마법사가 제 이름에 반응해서 천천히 나를 올라다 보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한 마디씩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누구.... 어떤..... 원하는....”


“누가 널 오리엔트로 보냈지?”


“그, 그건.....”


“말을 못하는 걸 보니 제피온인 모양이군. 흑마법사는 이제 엠펠로니아에만 남아 있을 테니까.”


아인벨프의 안색이 이젠 파랗다 못해 핏기가 완전히 빠져 녹색으로 물들어갔다. 찰랑하고 사슬 소리가 난 다음 떨림마저 멎어 뇌옥이 고요에 잠겼다. 저 머나먼 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엠펠로니아의 황제, 제피온이라는 자를 저렇게까지 두려워하다니. 불현듯 엠펠로니아에서 제피온이 어떤 존재일지 생각해보게 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던가? 그럼 나도 하나 묻지. 넌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왜 해치려 들었지? 아니, 작정하고 나를 죽일 준비를 했던 것군.. 사령술을 제대로 펼치려면 족히 사흘은 준비해야 하니까.”


아인벨프가 부르르 몸을 떨며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한다. 단순히 사실을 은폐하려는 몸짓이 아니라, 저건 궁지에 몰린 끝에 내보이는 초조함이다. 좀 더 파헤쳐볼까? 그렇게 생각하고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는 차에 아인벨프가 파들파들 떨리는 입을 열어 메마른 목소리를 냈다.


“혼자..... 저지른 일입니다. 그래서 웨스트 마운틴의 군주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웨스트 마운틴. 그러니까 서악의 의지대로 움직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서악은 육대종의 원한일 이용한 차도살인의 계로 나를 노린 거고, 거기에 뒤탈이 없을 존재를 이용해서 종적을 지우려 한 거군. 그 과정에서 육대종은 언제든 팽 당했을 것 같고.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여기서 매듭짓죠.”


말투가 서역의 귀족들처럼 부드러워지니 이인벨프가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걸 모르고 있군. 겉으로는 부드러운 척 이야기하면서 나는 차츰 내공을 끌어올려 줄기줄기 기운을 피워올렸다.


“아, 아니 무슨.......”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았지. 제피온이 왜 오리엔트에 관여하려는 거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엠펠로니아의 황제, 그리고 무림 최악의 공적인 파천마제다. 두 번재 기회를 통해 경험했던 실마리들이 이리저리 소용돌이치며, 그것들 사이의 어두컴컴한 무언가가 슬며시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거기에 지금 상황이 대입되며 나는 단숨에 한철로 포박된 아인벨프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크아악!”


“말해라. 목적이 뭐냐?”


서역에서 접했던 어마어마한 사실. 너무 거대해서 실감 나지도 않았던 무림의 멸망. 사방을 지배하는 제왕과 무수한 문파가 있음에도 소리 없이 무림이 멸망해버린 건 어째서일까? 그토록 큰 사건이 아무런 마찰 없이 벌어지고 무림에는 고작 무명소졸만 남게 되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마, 말한 것이 전부.....”


“흥, 그러시겠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나는 이미 팔에 힘을 주고 있었다. 단숨에 멱살을 쥔 아인벨프를 벽에 메다꽂았다. 쿵 소리가 나며 사방이 부르르 흔들리고 여기저기서 먼지와 파편이 흩날렸다.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아인벨프는 피를 토하며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도 공자님!”


소스라치게 놀라는 심하령의 목소리를 흘려 들으며 나는 죽어가는 아인벨프에게 내공을 퍼부었다. 흐려지던 동공이 다시 또렷해지고 토혈이 멎었다. 이제는 이런 어마어마한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공이 전보다 수월하게 수족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우습게 보였군. 가까이 있는 나보다 파천마제가 두렵다 이건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흥분한 목소리. 아니, 두려움에 사무쳐 크기만 커진 목소리다. 무림이 멸망한다는 사실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새로이 만들었던 인연들이 나를 보고 욕하고 있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한상염부터 문영. 종리혜나 다른 모든 이들이, 무림이 멸망하여 사라져갔을 이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분노하며 내 목을 조른다.

그렇다. 이건 정당한 분노다. 나는 무림이 멸망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젠 그런 일이 없도록 움직인다. 그래, 지금 당장 서역으로 떠나는 것도 방법이겠지. 그런 말도 안되는 방법을 떠올릴만큼 큰 고통과 죄책감에 착각의 늪에 빠져, 아인벨프를 향해 한 발을 떼었을 때였다.


“진정하세요!”


날카롭지만 그 안에 걱정과 이런저런 감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단숨에 주위가 분간되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제피온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자각했다. 아인벨프에게서 지린내며 독한 악취가 진동한다. 조금만 더했어도 이지를 상실한 백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러나 아직 흥분이 완전히 가라앉은 건 아니다. 다시 그를 바라보면 이성을 잃고 모든 걸 망쳐버릴까 봐 나는 뒤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심유환에게 슬쩍 눈인사만을 남기고 뇌옥을 나섰다.


“도 공자님!”


얼마간 어두컴컴한 통로를 걸어나가다 보니 차츰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등 뒤에서 심하령의 부름이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목소리를 이내 바로 옆까지 가까워졌다. 타닥하고 가뿐한 착지음이 일었다. 심하령이라는 존재가 내 옆에 와 있다는 것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그래, 내가 아는 모든 것을 털어놓은 그녀가 있었다.


“왜 그러신지는 알 것 같지만...... 잘 참으셨어요.”


내가 떠안은 것들을 알고 있는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소리. 그 한마디가 아직 실현되지도 않은 과거에 파묻힌 나를 끄집어냈다.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침착해라. 아직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괜찮아요. 누구라도 그랬을 걸요.”


과연 그럴까? 하는 자괴감이 찾아들고, 더불어 강대한 내공이 꿈틀대는 내 모습을 의식하니 그게 더없이 우스워 보였다. 멀었구나, 멀었어. 이 힘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한참이나 남았다.


“나중에 제가 또 자제하지 못하고 이런 실수를 저지르려 한다면..... 그땐 소저께서 좀 말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필요도 없이 앞으로 잘 해내실 거예요.”


심하령이 조금 뜸을 들이다가 그렇게 말했다. 어째서 그녀는 나를 보고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심하령이 한 말이기에 믿음이 간다. 내가 혼자 잘 될 거라고 지껄이는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보증이었다.


“이제 슬슬 본문으로 돌아갈 때군요.”


심란한 마음으로 뇌옥을 나와 한동안 하염없이 지단 여기저기를 거닐던 중 그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떠나왔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많은 고민을 털어놓고 싶었다. 이에 조용히 내 옆을 따라 걷던 심하령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헀다.


“그 전에 하나 들어주셨으면 하는 청이 있는데 괜찮으신가요?”


아까 내가 아인벨프를 심하게 겁박한 탓일까? 심하령이 보다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아직 기분이 나쁠까 조심스럽게 의사를 묻는 걸 보니 영 마음이 편치 못하다. 역시 괜히 화를 낸 게 맞았다. 심하령이나 다른 이들까지 겁박한 꼴이 되었군. 그런 자책감 때문일지, 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쩌면 힘을 되찾은 영향일지도 모르겠군 이건.


“알겠습니다.”


“아직 무슨 일인지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요?”


“설마 소저께서 제가 감당 못 할 일을 안겨주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


그 말에 조금 딱딱했던 분위기가 풀린다. 심하령이 왠지 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뭔가 말실수를 한 걸까? 다행히도 심하형은 별말 없이 슬쩍 오른편에 난 길로 방향을 틀었다. 나 역시 그 걸음에 맞추어 움직였고 심하령은 저 멀리 보이는 전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 지단주가 도 공자님이 주화입마에서 회복된 걸 축하하는 조그마한 축하연을 연다고 하셨어요. 지금 어지간한 이들은 다 참석해 있을 시간이니 공자께서도 참석해 주셨으면 해서요.”


연회같은 걸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건 내가 힘이 없을 때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지금은 연회를 즐길 정도가 된 건 아니고, 단지 없는 핑계까지 대면서 심하령의 체면을 깎지 않아도 될 정도는 된다.


“천의검문의 소문주께서 입장하십니다.”


전각의 한 층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방은 묘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시비의 말에 따라 문이 열린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만치에 둘러앉은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포권을 쥐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천검대를 대표해 참석한 것이 분명한 표표검이다.


“오셨습니까, 소문주님.”


“네. 제가 조금 늦은 모양이군요.”


“아, 아하하! 아닙니다. 소문주. 오실 시간에 딱 맞추어서 잘 오셨습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빈 자리 옆에 멀뚱멀뚱 앉아있던 심상의 지단주는 벌떡 일어나 나와 심하령의 자리를 안내해 주며 넉살을 떨었다. 조금 과해 보이는 게 조금 이상하다. 착각이겠지만 지단주인 우진형의 눈에서 간절함이 엿보였다.


“자, 자아. 그럼 이제 의가제일께서만 오시면 되는군요.”


우진형이 손수 따라 준 찻잔을 밀어주며 빈자리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굳이 내게 말을 걸며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건가? 이에 심하령이 뇌옥에서 심유환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해 주었다.


“종조부님께서는 환자를 돌보고 계셔서 여기 오시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리고 한동안 여기 머무르신다고 하시는데 지단주께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


“하......하하, 물론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른 분들께서도 얼마든지 머무셔도 좋습니다.”


둥근 탁자에는 나까지 도합 여섯의 남녀가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 중 우 지단주의 말에 반응한 건 심하령이 오기 전까진 홍일점이었을 한 소녀뿐이었다.


“오, 정말로요? 그렇다는데요, 소천검 나으리? 우리 여기서 며칠 놀다 가요! 그렇게 도와줬는데 설마 며칠 동안 같이 어울려 주지도 못하는 야박한 분은 아니시겠죠?”


종리혜가 진담이 아닌 게 분명한 농지거리를 던지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르면 혼인까지 했을 나이의 소녀가 할 말은 아니기에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내 시선이 닿은 곳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심하령이었다.


“왜 대답 못하시나요?”


심하령이 차를 마시며 툭 던진 말에 조금 정신이 든다. 그녀의 말대로다. 지금은 놀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 말에 마음을 다잡고 최대한 공손하게 종리혜의 청을 에둘러 거절하려 한 순간, 종리혜가 쿡쿡대며 심하령에게 손사래를 쳐 보였다.


“에이, 질투하지 말아요. 설마 제가 정혼자를 빼앗아 가겠어요? 정 그러면 다음에 함께 어울리기로 해요 우리.”


나름 분위기를 일신하려고 노력했겠지만 종리혜의 노력은 오히려 허사가 되었다. 도리어 심하령에게서 풀풀 차가운 기운이 느껴져 분위기는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음식이 나온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더는 안 되겠군. 이대로 먹다간 체할 것 같아 보다 못한 내가 어렵사리 운을 띄웠다.


“잠시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입 한번 대지 않은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천천히 여기 모인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여러분께 인사 한번 드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많은 도움을 받아 이렇게 조악한 무공이나마 회복하여 여러분께 축하까지 받고 있습니다. 하여 지금에서야 여러분께 다시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후끈한 기운이 배를 훑고 지나갔지만 막대한 내공에 휩쓸려 이내 취기가 가신다. 익숙한 느낌이다. 서역에서 오크들을 상대할 때 마셨던 술이 이런 느낌이었지. 그때를 떠올리고 잠시 회한에 잠겼다가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포권지례를 취했다.


“천의검문의 도군입니다. 부족하나마 천의검문의 후계자라 불리고 있습니다.”


별것 아닌 한마디에 박수소리가 쏟아진다. 이어서 나는 내 잔에 술을 채워주는 심하령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여기 저를 백방으로 도와주신 아리따운 소저께서는 제 분에 넘치는 정혼자인.......”


“아, 넘쳤다.”


종리혜가 날카롭게 심하령의 실책을 포착하고 키득거렸다. 심하령답지 않은 실수다. 심하령이 허둥지둥 넘쳐버린 잔 주위를 소매로 닦아내며 왠지 나를 사나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모르긴 해도 아직 정혼자라고 소개하는 게 껄끄러웠던 모양이다. 심하령이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선 섬섬옥수를 말아쥐고 포권을 취했다.


“부족하게나마 심가장의 후계자를 자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께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지만 모쪼록 잘 부탁 드립니다.”


기분이 묘하다. 이런 허례허식을 반기지 않던 나지만 정작 앞장서서 이런 짓을 하는 걸 자각한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역시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을까? 하지만 그 덕에 무겁기 짝이 없던 분위기가 한결 밝아진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하, 금실 좋으신 두 분을 뵈니 저도 젊은 날이 떠오르는군요. 소문주께서 정식으로 인사를 해주셨는데 이 우가(家)놈이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먼저 지단주가 파르르 수염을 떨며 내 말에 동조해서 포권을 쥐어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심상의 팔산지단을 맡은, 성은 우가에 이름은 진형을 쓰는 무명서생입니다. 무림의 협사들께서 저희를 백방을 도와주신 점, 깊이 새겨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으응? 갑자기 인사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래도 다들 하는데 저도 빠지면 안 되겠죠? 저는 종리혜에요. 모르시는 분께서는 해주제일화라고 들어 보셨나 모르겠네요. 무림에 이름난 미인이라고 알고 계시면 된답니다.”


고작 여섯뿐인 회합에서 그녀를 모를만한 이는 없었지만 종리혜는 뻔뻔하리만치 자신의 별호를 자칭하며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얄밉다기보다는 자신만만한 태도가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쿨럭, 쿨럭! 해주제일화니 그런 걸 직접 말하시면.... 어흠, 저는 성은 장에 이름은 위를 쓰는 칼잡이입니다. 아가씨의 호위를 맡고 있습니다.”


종리혜의 돌발행동에 장위가 한참을 콜록대다가 가까스로 자신을 소개해나갔다. 해풍도. 그가 없었다면 검노를 상대하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지. 다시 되새겨보니 어쩌면 장위야말로 나를 구한 일등공신이었다.


“해풍도라는 별호는 익히 들어 보았습니다. 남해의 해적을 소탕한 호협이라 남해에서 이름이 높다지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리 추켜세웠지만, 천성이 그러한지 장위를 애꿎은 탁상만 바라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행적에 대해 토로했다.


“하하.... 무림을 잘 모르는 이들이 가져다 붙인 이름일 뿐입니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지요. 오히려 저보다는 저기 옥 소협이 훨씬 공이 크십니다.”


쥐구멍에 숨어 들어가기라도 할 듯 몸을 웅크리고 꾸물대기 시작하는 장위의 말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듣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에 열이 뻗친 것은 다름 아닌 흑경이었다.


“크으, 이 녀석아! 내가 잘못했다고 왜 네가 죄 지은 것처럼 움츠러드는 거야? 네 녀석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내가 대신 말해줘야 하냐?”


이제보니 두 사람은 일면식이 있는 사이인 듯 하다. 하기야 종리세가도 심상의 본단도 남해에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 흑경은 거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이 팽팽하게 당겨질 정도로 탄탄하게 힘이 오른 가슴을 탕탕 치며, 괄괄한 목소리로 말했다.


“늘상 말했지만 이렇게 하란 말이다. 나는 흑경이외다. 본래 어부였는데 배가 부서진 것을 상주께서 도와주셔서 지금은 심상에서 밥깨나 얻어먹고 있다오.”


흑경. 확실히 흥미로운 자였다. 흔치 않은 외문의 고수인데다가 사문조차 없는 그야말로 기인(奇人)이었다. 무엇보다 거침없는 행동거지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할 정도로 무지막지하다.


“자자, 진정하십시오. 그럼 이제 남은 건......”


다들 자신을 소개한 셈이 되었으니 남은 건 옥천평 뿐이었다. 옥천평은 슬쩍 내 쪽을 바라보고는 딱딱하게 한마디를 남겼다.


“옥천평입니다. 천검대주를 대행하고 있습니다.”


“흥, 저런 자가 표표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니, 술꾼들이 비웃을 일이군.”


지나가듯 중얼거린 한마디에 다시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흑경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마침 소문주도 왔으니 잘잘못을 따져 보자고. 소문주, 그대가 보기엔 어떠시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니, 글쎄 저 치가 내가 소문주한테 졌다고 핍박하지 뭡니까?”


“웃기는군. 그걸 핍박이라 하는가? 함부로 남을 업신여기는 소인배와 합석할 수 없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그게 어떻게 핍박이 되는가?”


“사과한 일이다! 그런데 계속 그걸 가지고 늘어지는데......”


이제 알겠군. 어째서 분위기가 엉망진창이었는지 알 것 같다. 가까스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던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정도다. 심지어 어느새 두 사람은 금방이라도 서로 치고받을 것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재밌겠죠?”


“아니, 저..... 그런 걸 응원하시면 곤란합니다.”


종리혜처럼 낄낄대며 상황을 즐기는 이도 있었고 장위처럼 쩔쩔매며 내 눈치를 살피는 이도 지단주를 합쳐 둘이나 있었다. 이 작은 모임에 이토록 다양한 군상이 보일 줄이야 어찌 알았을까?


“킁, 내 비록 소천검에게 깨지긴 했지만 너희들한테 무시당할 정도로 약하진 않다. 아까도 우가놈이 말리지만 않았어도 네 이빨을 죄다 깨버렸을 거다.”


“그대는 정녕 입이 방정이라는 말을 아는가? 더 설치고 싶으면 내 검을 받아내는 게 좋을 터.”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심하령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으음, 조금은 도와줘도 되겠지?“


“제발 좀....”


“조용!”


묵직한 사자후가 은은히 울려 퍼지자 으르렁대던 둘은 물론이고 심하령까지 흠칫 놀라서 나를 바라본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 다시 무공을 뽐낸 모습이 된 것 같아 나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일은 불문에 붙이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존명.”


한창 싸우다 말고 옥천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권을 쥐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못마땅한 기색이 보이는 게 완전히 납득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연회가 끝난 다음 심하령과 차를 마시며 그 사실에 대해 물어보니, 심하령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러겠지요.”


“그럼 제가 잘못한 거군요.”


“아뇨. 잘하신 거에요.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잖아요.”


“에이, 언니네 편 들었다고 너무하신다.”


어찌 된 일인지 자연스레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채 다향을 음미하던 종리혜가 묘하게 웃으며 한편으로는 냉정하게까지 보이는 사실을 짚어냈다. 이에 심하령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다, 당연히 흑경 아저씨 편을 들어주셔서 드리는 말씀은 아니고요. 원래 사람을 다루는 일이란 그런 거에요.”


“그렇습니까?”


“네. 사실 지금까지 도 공자님을 보필한 대주님이..... 어흠, 꽤 특이한 경우죠. 그렇게 명령에 쉽게 수긍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어요. 이제 무공에 대한 걱정은 없으니 도 공자께서도 윗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보시는 것도 좋겠죠.”


어렵다. 무공과는 또다른 화두에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는, 피해서는 안 될 문제였다. 종리혜도 심하령의 그 말에는 장난기를 한 줌 덜어내고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죠. 저도 어리다는 이유로 얼마나 무시를 받는데요. 다들 절 은근히 우습게 보는 걸 모르는 줄 안다니까요. 흥, 다들 오빠한테 일러버릴까 보다.”


“음, 오라버니가 계셨군요.”


종리혜가 은연중에 내보인 우울함을 지워버리려 애써 다른 화제를 끌어왔다. 이에 화답해서 종리혜도 다시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와 곤란한 질문을 연발했다.


“네. 남해 제일의 검객으로 칭송이 자자한데 어떻게 보세요? 소문주님에 비해선 좀 손색이 있죠? 나중에 한번 붙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쓸데없는 소리니까 무시하세요.”


“어머머, 벌써 관리하시는 것 봐. 소문주님 표정 봐봐요. 엄청 솔깃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랬나? 나도 모르게 흥미진진한 것을 접한 사람처럼 얼굴이 풀어진 걸 뒤늦게 의식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기왕 속내를 드러낸 김에 조금 욕심을 부려 볼까?


“혹시 종리소저께서 비무라도 주선해주실 생각이신가요?”


“어, 진짜요? 그럼 우리 남해로 가요. 오빠가 소문주님이 온다는 걸 알고 좋아서 기절해버리게요.”


“음, 그러시죠. 그럼 잘 부탁 드립니다.”


종리혜가 신이 나서 오라비 이야기를 실컷 하고 돌아간 다음 심하령이 심란한 기색으로 나를 불렀다. 무슨 말을 할지는 분명해 보였다.


“설마 아무 생각 없이 남해로 가실 생각은 아니시죠?”


“뭔가 생각이 있다면 어떠십니까?”


되찾은 무공은 이미 삶에 녹아 있는 것 같아서 이전처럼 미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생각을 먼저 하게 되었다. 강대한 무공이 가져온 의외의 효과였다.


“어떤 생각이신지 들어 보고요. 설마 그 상태에서 더 강해지기 위해 비무행이라도 떠나겠다는 건 아니시겠죠?”


“그럴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본문에 돌아가서 할 일이 있으니 그러기도 어렵겠군요. 우선 본문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릴 생각입니다.”


“그리고요?”


심하령이 궁금해하는 건 정말로 처음 보는 것 같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를 흐뭇함이 느껴져 나는 지금까지 궁리한 것들을 술술 털어놓았다.


“지금 가장 큰 위협은 다른 무엇보다도 황도에 잠든 빙룡입니다. 그렇기에 일단 빙룡에 접근하는 걸 막아야 하지요.”


“설마 그걸 타개할 방도를 생각해내신 건가요?”


“아직은 아닙니다. 일단은 남해로 가서 심상주를 뵙고 청을 드리려 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무 대가 없이 수락하실 리 없다는 건 아시죠?”


어째 심하령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무 준비도 없이 심상주를 만나려는 걸 탓하려는 것 같다. 다른 누구보다 심상주를 잘 아는 사람이 말이니 어림없겠지. 무작정 찾아가서 내 말에 감화되어 준다면 좋겠지만 그건 이야기 속에서도 나오지 않을 얼토당토않을 소리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공이란 게 대체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고요.”


상리를 초월한 그런 힘이 아니라면 사람 하나 지키기도 쉽지 않다. 나는 고작 이런 알량한 힘을 위해 매달려 왔던 것인가. 눈앞에 있는 식은 차만큼이나 쌉싸름한 웃음이 배어 나왔다. 이에 심하령이 고개를 흔들며 나를 위로해왔다.


“그런 말 마세요. 그 힘 덕분에 우린 살아남은 거니까요. 그런 우울한 생각보다 다른 걸 생각해보는 게 좋겠어요. 사실 간단한 이야기에요. 최선이 아닌 차선책일 제시하기만 해도 아버지는 수락하실 거예요.”


“황도를 발굴하는 것 이상의 수익을 가져올 일이 필요하다는 말이군요.”


“네. 하지만 그런 일은 흔치 않죠.”


“흔치 않다면 있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좋습니다. 그럼 따져보죠. 황도 발굴에서 나는 수익과 비견될만한 일이 무엇무엇이 있습니까?”


심하령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겻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심하령은 내가 물은 것보다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여가며 물음에 답해 주었다.


“우선 황도발굴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수익은 어마어마해요. 매번 편차는 있지만, 황실에 귀속된 창고라도 입수하면 그간이 손해를 모두 메꿀만한 수익이 생겨요. 거기에 비견될만한 일이라면 무선 광맥을 발견하는 일이 있겠네요. 한철이 다량 매장된 광맥이 발견되면 황도발굴에 비견될 수익을 만들 수 있어요.”


지금 와서 광맥을 찾는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만약 그게 됐으면 심가장부터가 광맥에 목을 매지 위험하게 황도를 발굴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슷한 다른 건 없습니까?”


“글쎄요. 사실 어지간한 이권은 저희가 가지고 있거나 경쟁상대가 가지고 있어서요. 그나마 동평의 산물을 매입해서 적절하게 판매하는 게 그나마 비슷할까요? 하지만 이건 황도발굴을 취소할 만큼 어려운 일은 아녜요. 도 공자님 덕에 동평에서 저희 입지가 상당하거든요.”


마냥 좋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래야 영 쉽지 않게 되었다. 어딘지 다른 교역처는 없을까? 이에 심하령은 생각보다 심상의 규모가 거대하다는 것을 알만한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해는 이미 활발한 교역이 진행중이고 서악과도 여기 팔산에 지단을 두어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최소한의 교역일 뿐이지 수익이 날 정도는 아니죠.”


서악. 어째서인지 나는 사고가 그 말에 딱 멈추어 서는 걸 느꼈다. 서악. 서악만이 아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머리에 무림이라는 땅의 지로가 펼쳐지고, 점점 지도가 서쪽으로 길어진다. 그 지도 위에 떠오른 여러 세력을 의식하던 나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서악 너머! 그래, 서역과 교역하는 겁니다.”


자카이야를 필두로 서역에 존재하는 무수한 숫자의 국가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엠펠로니아와의 전쟁을 계속해서 별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전쟁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이 바로 서역이다. 무엇보다 교역을 통해 우리가 서역을 도와 엠펠로니아를 압박하는 일에 기여할 수도 있다. 팽팽도는 머리를 진정시키며 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갔다.


“서역과 교역하면서 파천마제의 동향을 살피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빙룡도 빙룡이지만 파천마제라는 문제도....”


“죄송하지만 도 공자님, 서역과의 교역은 사실 서악이 독점하고 있어요. 더군다나 대막에서 매기는 막대한 수수료까지 생각하면 사실상 교역 자체가 성립되지 않죠.


낭패다. 자카이야는 교역의 수수료를 통해 유지되는 곳이다. 이래서야 교역으로는 방도가 없다. 차선책을 찾아야 하나? 아니, 남해에 의존한다는 게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천의결 같은 방법이 있다면 최선의 방법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체념한 순간이었다. 문득 홀린 것처럼 무언가가 떠오른다. 서역, 남해, 대막, 서악. 이 모든 것들이 뒤엉키며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나는 웃었다. 심하령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잘 됐군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는 아직도 눈에 선한 그 사내를 떠올렸다. 천의결 못지않은 직감과 통찰력을 가진 그 사내를. 별로 호감이 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는 무엇이 옳고 바른 일인지 알 수밖에 없는 자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하죠.”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다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아 우선 올렸습니다.

아직까지 이 글을 가딜고 읽어 주시는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도 얼른 진도를 빼야 할 텐데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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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10. 운칠기삼(運七技三) (9) +4 18.05.25 425 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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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 +6 17.01.15 742 10 17쪽
213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3 16.12.18 871 14 20쪽
212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4) +6 16.12.03 682 13 25쪽
211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3) +5 16.11.02 1,006 10 25쪽
»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2) +7 16.09.12 830 11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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