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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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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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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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0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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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3)

DUMMY

가령 기연을 취해 고수가 된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와 상반되게 처절한 수련과 실전을 거듭하며 끝내 고수가 된 사람이 있다면, 두 사람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검을 잡으며 생긴 굳은살과 수천 개의 상흔이 그 차이라고.

그 차이를 신앙처럼 믿고 살아온 나는 끝에 가서야 그 증거를 목도했다. 꺾이지 않고 정진해온 소렌의 검이 루베르크의 그림자를 찢어발기고 끝내 파천마제의 힘마저 짓눌렀을 때, 나는 일명 ‘진짜’란 저런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회를 얻은 지금 다시 고집을 부리며 고생길로 나아갔다. 그렇게 돌고 또 돌아서 천하제일의 둔재가 평생 깨달을 리 없는 간단한 이치를 깨달았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 당도해 보니, 명백해 보이던 차이는 온데간데 없고 지름길을 통해 지나간 이의 발자취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부웅!


가볍게 휘둘러 본 검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맹하다. 부족함 없는 그 일격과 비교해보는 건 우선 단약을 취했을 때의 나. 그러나 아무리 힘들여도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모르겠다. 분명 뭔가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 아무런 차이도 없었던 걸까?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조급함이 범벅된 심신을 다독이며 이번에는 조금 더 멀리 가 보기로 했다. 기회를 얻기 전 어리석은 내가 이룩했던 경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것과 무엇이 다르기를 바라며 몸을 움직였다.


후웅!


웅혼한 바람 소리가 연달아 밤공기를 울렸다. 혼란 속에서 휘두르는 검은 우아하진 않았어도 위력만은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아직도 원하는 답은, 어쩌면 없을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이야.”


아직 멀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머리를 쳐드는 답답함을 찍어누르고 머릿속으로 가상의 적을 그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두운 밤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무명의 검객. 실력은 필시 절정의 고수다. 흉터와 굳은살이 가득한 것이 분명한 그 고수는 분명 악전고투를 넘어 절정에 따른 진짜배기였다.


“하압!”


무명검객이 나를 지긋이 노려보다가 선공을 취해왔다. 나 역시 검을 휘둘러 그 소리없는 외침에 답한다. 그렇게 일격을 주고받는다. 양패구상이 눈앞에 보이는 정확한 동수. 답을 구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기는 싫었다. 아니, 그대가 정녕 정명하게 정진한 고수라면 내 천박한 검을 받아보라.


“간다.”


온 힘을 짜냈다. 늘 생사를 넘나들었던 덕이라면 덕이다. 생사투를 접한 것과 다름없이 몸과 마음이 찰칵 맞물리고 꽉 맞아들어갔다.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고 떠오르는 경험과 적수를 찾기 힘든 심후한 내공이 한데 모여 의식을 넘어선 무언가를 좇았다.


“그 정명(正明)한 검으로 날 넘어 보아라!”


바람에 무심하게 휘날리는 나뭇잎처럼, 나비의 가볍고 사뿐한 날갯짓 같은. 이런 수식을 일일이 붙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오만가지 이치가 검에 담겼다. 아니, 검이 이치를 그려냈다. 이것이 진천검결의 완성.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지고한 경지다.


“헙!”


내가 그리되도록 의식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무명검객이 진천을 펼쳐오니 절로 헛바람이 새나온다. 하지만 하늘을 공평한 법. 내 것이 아닌 것을 빼앗겼다 여길 필요는 없다. 지금뿐만이 아니다. 나는 언제든 검을 빼앗길 각오를 해야 한다. 근본이 천하제일의 둔재인 나는 얼마든지 나태해질 수 있고, 그만큼 이름과 검을 빼앗기기도 쉽다.


“얌전히 주진 않겠지만!”


내심 흥에 겨웠는지 생각에 일일이 혼잣말로 이루어진 추임새를 쑤셔 넣으며 그에 맞추어 검을 찔러넣었다. 거침없는 전진에 진천과 진천이 충돌했다. 정말로 기운을 담았다면 주위가 초토화되었을 테지만 사실 이건 내공을 한 줌도 쓰지 않는 비무다. 당연히 주위는 검풍만 요란할 뿐 변변히 부서지거나 한 곳은 없다.

하지만 내겐 이것이 더욱 힘겨웠다. 단순무식하게 내공을 때려 박는 싸움은 제법 익숙했지만 이렇게 심력을 쏟아붓는 대결은 극히 드물어서 당장이라도 마음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다시 말해서 이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며, 또한 자신과의 싸움을 그만두려는 또 다른 자신과 싸우는 괴상한 짓이었다.


“하압!”


결국, 승부는 났다. 웃기는 일이지만 나는 내게서 이겼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조용히 숨을 고르며 부옇게 흐려지는 무명검객을 응시했다. 무명검객은 그 이름에 어울리게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하아.....”


무명검객의 검은 마지막에 가선 약해지고 말았다. 당연히 이건 무명검객의 내공이 다하거나 뭔가 다른 사정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대결을 끝내고자 했기에 이렇게 된 것이다. 나는 또 다른 나에게 져 버린 것이다.


“무슨 한숨을 그리 쉬시나요?”


등 뒤에서 들려온 건 심하령의 목소리다. 검무를 추기 전부터 기척을 알아채고 있던 터라 놀랄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담담하게 그녀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이래저래 생각이 복잡해서 말입니다.”


“이래저래 생각이 복잡하시다면 소녀에게 귀띔해 주시지요. 부족하나마 소녀도 짧은 생각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서슴없이 내 고민을 들어주려는 재녀는 내게 줄 요량으로 가져온 수건을 슥 건네주며 그렇게 말했다. 땀이 날 정도는 아니었고 최근 땀이 흐른 적도 거의 없었지만, 그 성의를 보아 나는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인적이 거의 없는 숲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팔산 어딘가에 있는 이 작은 수련장을 쓰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그냥 무인이라면 당연히 생길 화두 같은 겁니다. 별로 재미는 없겠지만 들어 주시겠습니까?”


내 무공의 화두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섞이기 마련이라 달리 이야기를 털어놓을 자리가 없었다. 심하령은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심하령을 나를 나란히 따라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신호로 나는 얼토당토않은 화두를 줄줄이 읊어댔다.


“지금 제 실력이 단약을 취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서 말입니다. 솔직히 편법을 취했을 때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별 차이가 없더군요.”


“그건 필시......아니요. 감히 대붕의 뜻을 짐작하려 한 소녀를 용서하시어요.”


무언가 생각을 늘어놓으려던 심하령이 멈칫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일지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저 말은 사실 비꼬는 걸지 몰라 조심스레 심하령의 얼굴 표정이며 몸짓을 살폈지만, 어째서인지 심하령은 이전과는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손해 보였다.


“대붕이 다 죽었겠습니다. 농이 지나치시군요.”


“소녀가 짐작도 못 하는 일을 꾸미고 계신 분께서 대붕이 아니시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잠룡 정도면 좋겠군요. 아직 완성된 건 아니니 말입니다.”


기가 찼는지 심하령이 입을 꾹 다물고 저벅저벅 걸음만 옮긴다. 아무래도 난 농담이란 것에도 소질이 없는 것 같았다. 멋쩍음을 이기지 못하고 농지거리를 던진 다음이었지만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공기는 여전히 새 가죽옷처럼 뻣뻣하기만 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 느낌을 빌어 표현해 보자면 심하령이 억지로 한걸음 물러나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약했을 땐 사근사근했고 조금 나아졌을 땐 쌀쌀해졌으며 이제는 멀어지려 한다? 그 반대인 경우는 무수히 많이 보았지만 심하령은 어째서인지 반대로 행동하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단지 무료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굳이 사족을 덧붙여 심하령에게 말을 붙였다.


“앞으로의 일을 소저께 비밀로 하는 건 소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소저가 위험해질 수 있기에 아직 말씀드리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시군요.”


공손한 대답. 그러나 지극히 피상적인 그런 반응에 나 역시 침묵에 잠겼다. 잠깐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넘치는 내공이 사지백해를 가득 채우고 한달음에 언덕을 넘거나 바위를 가를 수도 있다. 그렇게나 강해졌음에도 나는 차마 심하령에게 대놓고 그 사실을 물을 수 없었다. 아니, 심하령이 절대 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 그보다 제가 여기 온 까닭을 깜빡하고 있었군요. 팔산을 떠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반 시진 안에 길을 타고 출발하셔야 해요. 혹시 몸을 좀 씻으셔야 한다면 가까운 곳이 있습니다만.....”


심하령이 화제를 돌리고 있다. 그 사실을 굳이 집어낼 정도로 치기가 넘치지 않는 나는 짧은 심호흡으로 잠깐 떠올랐던 상념을 덮어 두었다. 내가 다시 강해진 것처럼, 그 사실 역시 자연스럽게 다시 흘러가리라 생각하며.


“그냥 산보 정도만 한 셈이라 그럴 필요까진 없겠군요. 그런데 시일이 생각보다 빠르군요. 그럼 어르신께서는 역시 못 가시는 겁니까?”


“네. 한 대주님과 문 소협의 상세가 아직 좋지 못하다고 하셨으니까요. 그 대신 그 사악한 술사는 저희가 데려가기로 했어요.”


아인벨프 말이군. 확실히 가두더라도 서악이나 서역과 가까운 이곳보다는 남해에 두는 편이 낫겠지. 게다가 아직 자세한 내막도 듣지 못했으니 앞으로 알아낼 것 투성이다. 과연 아인벨프의 목적. 그리고 파천마제의 목적이 무엇일지 궁리해 보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건 도통 풀리지 않는 의문을 완전히 추스른 때였다.


“조금도 기척이 없었는데 다들 저기 있었군요.”


길이란 걸 이용하기 위해 팔산 외곽에 자리한 대나무 숲에 다다르니 눅눅한 밤안개 사이로 일련의 무리가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감각이 제법 날카로워졌다고 자부했건만 그런 생각이 부끄러울 정도로 나는 저들이 지척에 다다를 때까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긴 진법이 설치된 금지(禁地)니까요. 그나마 오늘처럼 시기가 맞지 않으면 진법이 열리지 않아서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요.”


흥미진진한 곳이다. 어떤 식으로 눈을 속이고 어떻게 사람을 천 리 밖으로 옮겨주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그 원리를 탐구하고 그걸 무공에 적용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우선 그런 잡상을 접었다.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모르는 일에 힘을 쏟는 것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날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숲 속에는 생각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건 천검대와 짐꾼들이었다. 허리가 휘청일 정도로 엄청난 짐을 지고 있는 짐꾼들은 우리가 가는 김에 함께 따라가는 상행(常行)같아 보였다. 과연 작은 일에서도 이문을 남기겠다는 의지가 남다르군.


“야호! 언니, 여기! 여기!”


웅성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소녀가 신나게 펄쩍대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조금도 불안한 기색 없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그 소녀는 역시 종리혜였다. 잔뜩 흥분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달려온 그녀는 심하령의 손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언니, 언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어머머, 두 분께서 나란히 숲에서 나오셨다는 건 역시 밀회라도 즐긴 건가요? 그런 거죠?”


“어, 어흠!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가씨 이리 오시지요.”


“아이 씨! 잠깐만 있어봐요. 한마디만 듣고요 한마디만...”


정신없이 재잘대던 종리혜는 급기야 장위가 나서며 우리에게서 멀어져갔다. 이젠 호위인지 보모인지 알 수가 없군. 종리혜에 이어 우리에게 다가온 이는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차라리 종리혜가 낫다는 생각이 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천검대는 떠날 준비를 마쳤습니다만, 상행 쪽이 아직 정리가 덜 되었더군요.”


“흥, 생전 우물 속에서만 지내니 뭐가 어려운 일인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상행도 곧 준비가 끝나니 걱정마라, 하령아.”


은근슬쩍 불꽃 튀는 시선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옥천평과 흑경이다. 지금까지 일면식도 없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해 있었다. 골치 아프군. 두 사람을 어떻게 화해시킬까 고민하던 나는 결국 두 손들고 두 사람을 돌려보낸 데 그쳤다.


“자, 출발한다!”


흑경의 우렁찬 고함과 함께 대나무 숲이 우르릉 울리고 상행이 먼저 출발하고 이어서 우리가 뒤를 따랐다. 천검대는 선두와 후미를 맡아 사방을 경계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흑경은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투덜거렸지만, 다행히도 옥천평도 경계에 투입된 처지라 두 사람이 다시 투닥대는 일은 없었다.


“헌데 길이란 것은 상행에 자주 이용하지는 않는 모양이군요. 다들 불안해 보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은 짐꾼들도 어둠에 잠긴 숲 속을 가로질러 가는 건 불안한지 연신 허연 입김을 내뱉으며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대고 있었다. 그나마 저들이 잠자코 있는 건 주위를 에워싼 천검대 덕분인 듯했다.


“길을 여는 건 꽤 제약이 많고 비용이 많이 드니까요. 지맥의 흐름을 예측해서 길일을 잡고 진법을 구축하고 나면, 다른 날에는 그 진법을 쓸 수가 없어서 버려야 하거든요.”


서역의 것에 비해 꽤 복잡하군. 마법진이란 건 차치해도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공간을 넘나들던 제임스를 떠올리면 꽤 번거롭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진법도 좀 더 개선하면 그 정도로 발전할 수 있을까? 동평에서 진법에 대한 조예를 보여주었던 심하령이라면 서역의 마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진다.


“서역에서는 공간을 쉽게 넘나들던데 진법으로는 그렇게 되긴 어려운 겁니까?”


“서역이라..... 마법이라는 것에 대한 말씀이시군요.”


“우와, 언니 마법사 진짜 본 적 있어요?”


무료하게 걷기만 하던 종리혜는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휙 달려와 심하령의 목을 감싸 안으며 등 뒤에 바싹 붙었다. 심하령이 조금 불편하다는 듯 눈치를 주었지만 종리혜는 아랑곳하지 않고 등 뒤에서 머리만 내민 채 볼을 심하령의 뺨에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


“언니, 심심한데 오늘은 서역 얘기 좀 해주세요~ 만날 별 것 없다고 하지 말고요. 근데 서역에는 정말로 다들 갑옷 입고 다녀요?”


“전부는 아닙니다. 유력한 무가의 후계들은 저희와 별반 다를 게 없지요”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종리혜는 물론이고 그 옆에 있던 장위나 짐꾼들의 시선까지 내게 집중된다. 이어서 주위를 경계하는 천검대도 이쪽을 의식하는 게 느껴진다. 이런, 실수다. 검문에 칩거하고 있던 내가 할 소리는 아닌데.


“에이, 뭐야. 언닌 소문주님한텐 다 말했던 거예요? 그럼 소문주니임, 서역 얘기 해주세요오~”


종리혜가 날다람쥐처럼 펄쩍 뛰어 내 쪽에 다가온다. 이러다 바싹 붙기라도 할까 봐, 나는 왠지 바짝 긴장하며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종리혜 덕에 의심의 눈초리도 가셨으니 이야기 정도는 상관없겠지.


“흠, 그러지요. 뭔가 궁금하신 게 있습니까?”


“네! 그러니까...... 우리처럼 갑옷 안 입는 사람들이 정말 있어요? 제가 듣기론 다들 싸움만 벌어지면 철갑옷에 자라처럼 숨기만 한다던데요?”


“마물로부터 조금이라도 몸을 지키려면 갑옷을 입는 게 현명하지요. 무림에도 마물이 있긴 하지만 서역의 마물. 그러니까 몬스터는 이지를 가지고 있어서 상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림을 횡행하던 마물은 대부분 이지가 없는 괴물이 많았다. 하지만 서역의 마물은 반수 이상이 이지를 가진 존재였다. 거기에 나아가서는 마나를 다루는 이들까지 존재했다. 그렇다고 무림 어딘가에 그런 마물이 없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서역은 그런 마물이 하나로 결집되어 적이 되었다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와, 그럼 말이 통해요? 전 지금까지 마물들은 다 크에에 하면서 말하는 줄 알았는데...”


종히례가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한다. 소란스럽지만 짐꾼들도 그녀 덕에 긴장을 풀고 제작기 서역에 대한 풍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내 기분은 더없이 가라앉기만 했다. 말이 통한다 해서 상종하고 싶은 존재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직도 나는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나는 그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면요. 갑옷을 안 입을 수 있는 사람들은 어때요? 아, 맞다맞다. 거기에는 용살자들이 있다면서요? 그 사람들이 정말 용을 죽일 정도로 강한가요?”


“강합니다.”


잠시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렸다가 번쩍 눈을 뜨고 그렇게 단언했다. 그들은 강하다. 천둥벌거숭이처럼 힘을 휘둘렀을 때보다 지금 그들의 실력을 보다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볼마르그. 그는 가히 신화적인 영역에 도달한 괴물 같은 자다. 단신으로 창 한 자루로 마물의 바다를 꿰뚫었던 그 순간이 떠오르고 무인으로서의 본능에 가깝게 나 역시 그 순간을 흉내 내는 상상을 했다. 그 상상만으로 온몸의 솜털이 곤두선다. 머리카락이 모조리 꼿꼿하게 서는 것 같았다.


“흥, 색목인들이 강해 봤자지. 나한테 걸리기만 해도......”


흑경이 콧방귀를 뀌며 으름장을 놓는다. 일부러 면박을 줄 생각은 없었지만, 흑경이 급기야 자신과 드래곤 슬레이어를 비교해 보라고 윽박지르는 통에 결국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 중에 그나마 겨루기라도 가능할 상대는 잘해야 둘 정도겠군요. 죄송합니다. 거짓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군요.”


흑경이 그 말에 얼굴이 완전히 구겨지며 울그락 불그락 해서 숨을 몰아쉬었다. 잘못 들었겠지만 옥천평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흑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무림의 자존심을 건 대결에 나선 것처럼 얌전히 있던 장위를 끌어당기며 언성을 높였다.


“자, 그럼 해풍도는 어떠냐? 이 녀석이 얼마나 엄청난 녀석이냐면 남해의 악룡을 일도양단한......”


“그, 그건 절대 용이 아닙니다. 섬사람들이 괜한 소리를 하는 거라고요..”


장위가 흑경 못지않게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한편 의외로 흥미가 생긴 나는 장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양측의 실력을 가늠해 보았다. 장위가 도망치려 하지만 종리혜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붙잡는 통에 소심하게 거부의사를 표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자가 싸울 때는 완전히 달라진단 말이지. 재미있는 일이다.


“해풍도 대협이시라면 확실히 드래곤 슬레이어에 비견될 수 있지요. 적어도 둘과 동수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누군데?”


자기 일도 아니건만 흑경은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며 볼멘소리를 뱉었다. 누가 더 위냐는 원초적인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인 법. 거기에 사내가 대다수인 행렬에서 가장 뜨거운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열기를 무시하기에는 나도 너무 달아올라 있었다.


“공국의 제왕인 벨스터 공왕 각하와 로베른 왕국의 폰테일 공작 각하 정도겠군요. 승리를 장담하긴 어렵지만 쉽게 지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냉정히 말해서 벨스터 공왕은 드래곤 슬레이어 중 가장 덜 위협적인 상대다. 그다음은 정말로 안타깝지만 폰테일 공작이다. 물론 롤랜드 폰테일을 의미하는 거고. 하지만 이건 이 두 사람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드래곤 슬레이어가 천외천의 실력을 가졌을 뿐이다.


“여, 영광이군요!”


장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포권을 쥐어 보였다. 한편 흑경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굵직한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소천검은 드래곤 슬레이어 몇을 뛰어넘는 거냐? 날 이긴 사내라면 당연히 색목인 따위는 가뿐하겠지?!”


색목인 따위라는 말에 쓴웃음이 나온다. 과연 단절된 세상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만약 흑경이 아직 언급되지 않은 드래곤 슬레이어 중 하나라도 접한다면 저렇게 도매금으로 괄시하진 못할 텐데.


“저는......”


어차피 이미 드래곤 슬레이어에 대한 평가는 끝난 상태다. 개중에는 진짜 치고받은 이들도 있으니 망설일 것도 없다. 드래곤 슬레이어를 하나 둘 떠올려 본 나는 색다른 감회를 느끼며 대답을 이어갔다.


“넷. 그 이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니, 필패할 겁니다.”


앞서 언급한 둘 외에 술식이라는 약점이 명백한 샬라메 콘트리오와 싸움보다는 다른 것에 더 강점이 있는 성녀는 상대할 수 있다. 싸워본 경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단언컨대 이길 수 없으리라.


“그게..... 사실인가요?”


심하령도 어느새 내 이야기에 빠져든 걸까?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심하령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어째서 심하령이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지 알 것 같다. 그녀는 누구보다 내 실력에 대해 정확히 안다. 그런 내가 당해낼 수 없는 드래곤 슬레이어가 태반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모여도 상대할 수 없는 재앙을, 우리는 물리치려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심하령이 저리 경악하고 있는 것이리라.


“왜, 왜 그렇게 놀라요 언니. 언니가 놀라니까 다 놀랐잖아요. 훠이 훠이, 이제 끝! 다음 이야기는 유료에요! 다들 돌아가요!”


종리혜가 어설프게 웃으며 새를 쫓아내듯 팔을 휘저어 몰려들어 있는 사람들을 쫓아냈다. 짐꾼들이 하나둘 제 대열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 장위도 꾸벅 인사를 한 다음 종리혜와 함께 멀어져갔다. 흑경이 헛기침하며 심하령의 눈치를 살피곤 짐꾼들에게도 돌아가고, 다시 이 자리에는 심하령과 나만이 남게 되었다.


“심 소저. 괜찮으십니까?”


“네......... 아뇨. 사실을 말씀해 주세요. 그게 정말이신가요?”


내가 강해진 만큼 재앙을 막기 위한 길도 성큼 가까워진 셈이다. 그렇기에 더욱 명확하게 위험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심하령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는 도 공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일기당천을 쓰러트린 도 공자도 그들 중에서 중간 정도에 불과했다는 건가요? 우리는 그런 이들도 어쩌지 못한 적을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 건가요?”


“쉬잇. 목소리.”


너무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진 심하령을 제지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심하령이 혼란스러워한다. 이제 와서 농담이었다고 말할 심산은 아니다. 단지 심하령의 말에서 어폐를 짚어내려는 것이다.


“일기당천을 쓰러트린 건..... 운이 좋았던 겁니다. 그녀가 자멸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일기당천은 운이 좋아서 양패구상한 상대다. 그걸 가장 크게 실감한 건 검기도 그 무엇도 통하지 않는 절대적인 방패를 마주했을 때였다. 그것은 말 그대로 벽. 절정의 경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나는 그 이상의 경지를 맛본 적 있었기에 그 벽을 깨트릴 수 있는 게 바로 그 경지임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평생 날뛰어도 깨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


“네. 안심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일기당천같은 이는 드래곤 슬레이어 중에서도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가 서역의 최강자도 아니고요. 파천마제만 해도 엄청난 괴물이지요.]


“그게 안심하라고 하신 말씀 맞으신가요?”


주위를 의식해 전음을 펼쳐 그렇게 말해 주었다. 이에 하얗게 질려 있던 심하령의 표정이 조금 돌아온 걸 보니 조금은 안심한 모양이지만 샐쭉한 표정을 보아하니 심기가 편치는 않아 보인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슬슬 그녀에게 내가 생각해 두었던 것에 대해 조금 털어놓을 때가 되었다. 그때 서역과 교역하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번뜩였던 생각을.


[드래곤 슬레이어나 다른 강자가 우리를 돕는다면 어떠십니까?]


“[우릴 돕는다고요?]”


뜬금없는 소리에 심하령의 전음과 목소리가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다행히도 심하령의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아 이쪽에 시선을 주는 이는 없었다. 천검대나 다른 고수들은 알아챘겠지만 모른 체 해줄 수 있는 자들이니 안심이다.


[무슨 근거로요? 설마 그들에게 또 저한테 한 것처럼 정신나간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실 테고.....]


[오래전 무림에서 의기 하나만으로 서역에 간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처럼 전 그들을 도울 겁니다. 그 대신 또 다른 위협을 막는 걸 도와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그들이 따라 줄까요?]


심하령이 궁금해하면서 질문하는 건 왠지 기분이 묘하다. 늘 내 머리 위에 있던 그녀가 아닌가. 아무튼 나는 터무니없을지도 모르는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부디 그녀가 나도 모르는 이후 계획에 대해 좋은 생각을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도 겸해서.


[막대한 교역품을 제시하면 실마리 정도는 생길 겁니다. 우선 서역에 안전하게 도착하는 게 우선이겠지만요.]


[영 허술하네요. 제일 중요한 그걸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가장 먼저 심하령에게 내 생각을 말하고 수긍을 받는 일. 심하령은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말하겠지만 이미 우린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것을 이루려면 불가능한 방법을 써야 한다.


[새로운 상로를 개척할 겁니다. 그리고 심상이 그 차선책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만들 겁니다.]


“설마.......”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다. 역시 영특한 여장부답군.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전례 없는 파격을 논했다. 남해를 통해 서역과 직접 교역한다. 그것이 황도 발굴을 대신할 차선책이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안 그래도 곤장감인 글쟁이가 능지처참을 받아도 쌀 정도로 늦게 돌아왔습니다.

요즘은 메인에 있는 소설들에 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 ㅋㅋㅋ 그 영향인지 제 글이 최근들어 꽤 물렁하게 변한 것 같습니다. 왠지 막장 먼치킨물도 도전해보고 싶어지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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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11. 남해(南海) (2) +5 19.11.26 370 11 11쪽
224 11. 남해(南海) (1) +6 19.01.30 336 11 11쪽
223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0) +5 18.10.30 362 9 17쪽
222 10. 운칠기삼(運七技三) (9) +4 18.05.25 425 5 17쪽
221 10. 운칠기삼(運七技三) (8) +3 18.01.17 400 10 15쪽
220 10. 운칠기삼(運七技三) (7) +4 17.12.31 410 5 14쪽
219 10. 운칠기삼(運七技三) (6) +2 17.12.05 349 6 40쪽
218 10. 운칠기삼(運七技三) (5) +2 17.10.17 395 6 17쪽
217 10. 운칠기삼(運七技三) (4) +5 17.06.13 565 7 11쪽
216 10. 운칠기삼(運七技三) (3) +1 17.06.13 473 5 15쪽
215 10. 운칠기삼(運七技三) (2) +5 17.03.20 588 10 19쪽
214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 +6 17.01.15 742 10 17쪽
213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3 16.12.18 871 14 20쪽
212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4) +6 16.12.03 682 13 25쪽
»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3) +5 16.11.02 1,007 10 25쪽
210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2) +7 16.09.12 831 11 36쪽
209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1) +5 16.06.13 923 10 22쪽
208 8. 등하불명(燈下不明) (9) +2 16.06.14 871 10 21쪽
207 8. 등하불명(燈下不明) (8) +8 16.05.11 918 17 31쪽
206 8. 등하불명(燈下不明) (7) +6 16.03.29 785 10 24쪽
205 8. 등하불명(燈下不明) (6) +4 16.02.14 836 14 28쪽
204 8. 등하불명(燈下不明) (5) +3 16.02.10 916 14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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