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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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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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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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01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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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등하불명(燈下不明) (1)

DUMMY

두 사람은 변변한 인사 하나 없이 조용히 떠나갔다. 한상염을 업은 설초아는 가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오래전부터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우리로부터 멀어져갔다.

무정한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중 문득 두 사람이 빠지면 그 부담이 자연히 남은 사람에게 돌아감을 떠올렸다. 정작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데.

그렇지만 미안하다는 마음을 드러낼 여유마저도 없었다. 두 사람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곧장 습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설초아 일행이 시선을 끌기를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적도 눈이 형편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소천검보다 먼저 저 늙은이를 묶어라!”


새로이 등장한 무리는 온몸에 두툼한 철갑을 두른 권각술의 고수들이었다. 심하령은 한눈에 그들의 정체를 떠올리고는 목청을 높여 그들의 약점을 낱낱이 파고들었다.


“철갑문의 귀갑대(龜鉀隊). 단단하지만 움직임이 느리고, 내가중수법에 약하죠.”


처음에는 심유환이 압도적으로 저들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웬걸 심유환의 손이 어지러워진다. 지금까지 습격자들이 나를 노렸지만, 이제는 아예 심유환을 본격적으로 노리기 시작한 탓이다. 더불어 설초아의 조력이 없는 것도 꽤 타격이 컸다.


“큰일이네요.”


심하려이 심유환을 포위하고 정적인 차륜전을 감행하는 귀갑대를 바라보며 조바심을 드러냈다. 그녀가 눈에 띄게 동요하는 것을 보니 나 역시 절로 조바심이 일어서 낮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위험한 자들입니까?‘


“본래는 외문에 치우친 이들이라 변변찮은 상대지만, 지친 지금은 꽤 골치 아픈 상대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적이 명백한 하수를 굳이 투입하는 것 자체가 더 문제고요.”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전력이 줄어도 경거망동하지 않고 고수를 아끼고 있다는 의미죠. 천천히 진을 빼다가 마지막에 끝장을 볼 셈이겠죠.”


“혹시 적의 힘이 다 소진된 건 아닐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기왕이면 안 좋은 상황에 대비하는 게 낫겠지요.”


만일 심하령의 말대로라면 지금이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다. 적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음험한 자로군. 자칫 잘못하다가는 여기서 힘을 다 쓰고 나중에 진짜 고수에게 당할 수도 있겠어. 심유환도 그래서인지 아니면 지쳐서인지 움직임이 영 좋지 못했다.


스르릉.


이심전심이라 했던가. 심하령이 숨을 내쉬며 기수식을 취함과 함께 나 역시 검을 뽑아들고 긴장의 끈을 다잡았다. 내가 검을 뽑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심하령이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공자께서 당하시면 지금까지 해온 게 모두 허사가 돼요.”


“알겠습니다.”


말은 쉬웠지만, 솔직히 두려움도 없잖아 있었다. 간간이 공격을 받아내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로 난전 속에 몸을 들이밀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막상 몸을 들이미니 두려움 따위가 일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두려움이 사무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차갑고 거칠며 또한 날카롭게 산란하는 전장의 공기를 들이마신 순간 익숙함을 넘어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두꺼운 철갑을 두른 상대를 마주한 순간 친숙함은 능숙함으로 거듭났다.


“크윽!”


수천 번이나 이런 싸움을 해온 것처럼 움직이는 검과 육신이 한데서 춤을 춘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느릿한 적

의 움직임에 빨려 들어가듯 검극이 파고들었다. 우리와 심유환을 갈라놓으려 만들어낸 방진(防陣)이, 연이은 검격에 조금씩 흔들렸다.


“으악!‘


“소천검! 소천검이다!”


“버텨! 버티라고 멍청한 새끼들아! 지금 소천검은 허수아비다!”


철갑을 두른 이들이 더욱 경계를 표하며 방어를 굳건히 다졌다. 저 방식은 낯이 익었다. 갑주를 활용하는 건 무림에서는 흔치 않은 수법인데도 맨몸의 상대보다 저것들이 더 익숙하고 쉽게만 느껴진다.

상처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 방식은 분명 마나 드레인으로 생명력을 극대화한 오크나, 갑옷을 패용하는 서역의 방식을 닮아 있었다. 그랬다. 나는 저런 것들과 비슷한, 혹은 더욱 지독한 도륙했던 검사였다. 자신의 단단함을 과신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머리로 세지 못할 만큼 잔뜩 알고 있었다.


“하압!”


검면을 이용해 힘껏 철갑을 후려쳤다. 부족하다. 내공을 가하지 않은 일격에 당할 만큼 무른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연달아 공격을 가한다면 어떨까?

한 번 두드려서 약한 부분을 찾고, 두 번 두드려서 더 나약한 이를 찾는다. 아주 작은 차이였지만 몬스터의 강건한 육신에서 약점을 찾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아무래도 제각기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방진이어서일까?


푸욱!


이내 한 군데 아주 작은 빈틈이 생기고, 가까스로 만든 틈에 검을 찔러 넣었다. 피가 튀고 비명이 터졌다. 하나가 무너진 틈에 재차 일격을 가해 조금 덜 약했던 부분이 더욱 약해진다. 새로이 생긴 틈을 집요하리만치 파고들어 두 번째 검이 철갑으로 이루어진 방진을 허물었다.

이런 식으로 적을 몰아붙여 방진이 구축되는 족족 흐트리니, 점점 단단한 유대가 무너지고 방진이 좀처럼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주, 죽어라!”


기어코 한 사내가 연달아 터져 나온 검격을 견디다 못해 반격을 취했다. 터무니없는 악수(惡手)다. 느리기 짝이 없는 공격을 피하고 그로 인해 생긴 틈에 거침없이 검을 박아 넣었다. 수천, 수만 번의 연습보다 훨씬 강렬하게 연마된 극적인 일검과 일검이 일순간에 상황을 뒤집었다.


“크흠, 내 꼴이 말이 아니구나. 도와주서 고맙다.”


엉망이 된 몰골로 심유환이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 얼굴에 수치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손쉽게 귀갑대를 처리했다는 사실에 더 놀란 것 같다. 허나 그것도 잠시뿐. 저절로 사방으로 시선이 움직여 순식간에 활로를 찾아내고, 나는 목소리를 높여 의사를 전했다.


“시간을 끌 필요 없이 바로 빠져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어르신.”


“크흠, 내가 길을 열 테니 잘 따라 오거라.”


귀갑대가 다시 포위망을 구성하기 전에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다. 이 자리를 피하는 게 싸우는 것보다 힘을 덜 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심유환도 곧장 그 사실을 깨닫고 이번에는 힘을 아끼지 않고 일직선으로 달려나갔다.


“비켜라!”


의원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호쾌함으로 적을 날려버리는 심유환은 무인이라는 측면에서도 꽤 믿음직한 존재였다. 전설 속의 무장(武將)처럼 심유환이 단신으로 길을 여는 사이, 심하령과 함께 그 뒤를 따랐다.


“어르신! 앞에 적이....”


어느 정도 방진을 구축한 이들이 다시 우리를 가로막아 급히 숨을 들이마셔 외쳐 보았지만 심유환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기는커녕 달려가는 기세 그대로 방진에 뛰어들어 순식간에 그들을 날려버리는 게 아닌가? 의원답지 않은 것을 떠나서 저건 심유환답지 못한 저돌적인 모습이다.


“어, 어르신?”


“걱정하지 마라. 늙은이도 이 정도는 거뜬하다.”


지금 한마디를 통해 심유환도 한 사람의 무인임이 절실히 느껴졌다. 내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호승심이 불타올라 보이는 건 착각일까? 어쩌면 저게 심유환의 본성일지도 모르지. 세월이라는 먼지에 가려져 있던 진짜 모습을 보니, 오래전 한상염이 처참하게 당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깊이 와 닿았다.



적을 격파하고 빠져나가고를 반복하기를 수차례. 새로운 적은 귀갑대만큼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숫자만 많았지 제대로 된 실력자는 거의 없었다.


“허억, 허억...”


그러나 걱정은 두 가지나 있다. 우리의 체력은 점점 떨어진다는 점. 그리고 언제 강력한 상대가 우리를 가로막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기습이라도 당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달리는 한편, 심유환은 종종 명문혈을 통해 내게 기운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저력이다. 같은 절정의 고수라도 심유환만한 자는 흔치 않으리라.


“저기 노창성이 보이네요.”


심하령이 드물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겨운 싸움도 슬슬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어서 심유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끝났다. 서두른 덕에 쫓아오는 녀석들도 거의 없고 포위망도 돌파한 것 같구나.”


그리고 보니 아까부터 적이 영 나타나지를 않고 있었다. 정말로 끝이 다가오는 건가? 노창성은 가도에서도 손꼽히는 요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며 무엇보다 심상의 손이 닿는 곳이었다. 길을 따라가는 대신 산을 넘고 강을 건넌 보람이 있군.


“아무래 끝이 보이더라도 방심해선 안 된다.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답게 심유환이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주위를 살핀다. 나 역시 그 말대로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움직였다. 일행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배는 느려졌지만 서두르지는 않았다.


“휴우, 아무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 같네요.”


간간이 짐을 가득 얹은 수레며 평범한 마차가 오가는 가도에 오르자, 심하령이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다는 말에 맥이 탁 풀려서 나도 어깨를 늘어트리고 조용히 후끈한 숨을 뱉어냈다. 온몸의 탁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심신이 한결 개운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찜찜한 구석이 남아서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가도에서 습격을 당할 일은 없는 겁니까?”


산통을 다 깨는 말에 심하령은 한결 상쾌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기분이 좋아지긴 좋아졌나 보군.


“아무리 적이 무모해도 사람들이 다 보는 가도에서 습격하지는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 가도의 안전을 보장하는 건 가도로 이어진 여러 성의 성주에요. 가도에 조금이라도 위협을 가하면 성의 사정이 나빠질 테니 성주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아요.”


“설령 서악이라도 중도를 지키던 성주들이 등을 돌리면 꽤 어려울 게다. 허어, 내 돌아가면 정천검에게 거하게 받아내야겠구나.”


“아무렴요.”


심하령이 생긋 웃으며 끄덕였다.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충격적이었다.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미소던가.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웃음이 정말로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다. 잔뜩 술에 취하기라도 웃는 것 같달까?


“생각보다 머네요.”


“흐음, 경공을 써서 달려가고는 싶지만 소문주를 옆구리에 끼고 달릴 수야 없으니 조금 참자꾸나.”


심유환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에 쓴웃음을 지어 보았다. 헌데 정말로 멀긴 멀군. 지척인 것처럼 보였는데 아무리 걸어가도 노창성이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안전하다니 믿고 걸어가 볼까?


“아아, 우선 한 시진 정도 따뜻한 물로 씻을래요. 그리고 맛있는 식사를 하는 거예요.”


“허허, 오냐. 거기에 술이라도 조금 해야겠지. 네 녀석은 어떠냐?”


다 끝났다는 건 알지만, 점점 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정말로 어색하다. 아니, 하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적이 많아서 내가 긴장을 풀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지. 한동안 못 본 동안 저 두 사람이 저렇게 변해버렸을지도 모르잖아. 설초아만 해도 꽤 많이 변했고.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노창성은 어떤 곳입니까? 전에는 들러보지 못한 곳 같은데...”


“음, 노창성은 원래는 별로 크지 않은 성이었어요. 황도에 인접해서 오래전에는 두 번째 수도로 이름난 곳이었는데 황도가 무너지면서 많이 쇠락했죠. 하지만 지금은 황도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그 혜택을 많이 받은 성이죠.”


“그런 것치고는 꽤 작은 성이군요.”


“작다니요? 안에 들어가 보시면 전혀 다를걸요?”


작다는 말에 조금 심통이 났는지 심하령이 가볍게 볼을 부풀렸다가 노창성의 문을 가리켰다. 잠깐만, 문이라고? 언제 문 앞까지 도달한 거지? 생각보다 멀다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문이 웬일로 닫혀 있구나.”


“제가 열게요.”


심하령이 저벅저벅 문으로 가까워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언가 찝찝하다. 심하령의 말대로라면 노창성은 한중성에 버금가는 성세가 있어야 하는데 어째 폐허가 된 동평과 같은 느낌이 물씬한 걸까? 게다가 주위에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문을 지키는 이들마저 없다는 건....


“심 소저 잠깐만...”


혹시나 싶어 심하령을 불러세운 순간, 심하령이 문에 손을 댔다. 제법 커다란 문이 심하령의 손이 닿자마자 흔들 하며 요동쳤다. 문이 열리나? 아니다. 문이 아니라 문이 있는 공간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 이건 뭐..... 까악!”


흐르는 물처럼 흔들리는 문에 손을 대고 있던 심하령이 돌연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져 나왔다. 심유환이 번개같이 움직여 심하령을 받아냈다. 심하령이 문에 댔던 손을 들어 보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격전으로 더러워졌지만, 여전히 섬섬옥수였던 손은 지금 먹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령아!”


심유환이 황급히 심하령의 팔쪽 혈을 짚는다. 제길, 미친 듯이 흔들리는 노창성의 모습을 보며 불안한 느낌이 무엇인지 떠올랐다. 이상할 정도로 두 사람이 들떴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후하하하하!!”


노창성 꼭대기에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둥그스름한 그림자가 박장대소했다. 그 목소리는 어딘가에서 들어 보았던 비열한 목소리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가 아는 목소리다. 내가 아는사람은 많지 않았고 한순간에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네놈.....”


검을 뽑아들기가 무섭게 노창성의 모습이 씻겨 내려간다. 점점 안개 같은 것이 주위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아니, 안개가 끼기 시작한 게 아니라 이제야 안개가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소천검. 네놈을 죽이러 지옥에서 돌아왔다!”


노창성은 사라지고 야트막한 언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창성의 누각으로 보였던 것들은 전부 병장기를 앞세우고 언덕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무인들이다. 그리고 노창성의 문이었던 자리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파란 붓을 내밀고 있는 검객. 아니, 검노(劍奴)가 있었다.


“크크, 나 육대종을 우습게 보고 그런 수모를 주었겠다?”


검노라는 검객의 비호를 받던 뚱뚱한 청년. 육대종이라 자신을 밝힌 청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만면에 드러난 득의양양함에 치를 떨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육대종의 주위를 차지한 이들은 모두 만만치 않은 고수들이었고, 무엇보다 한가운데서 파란 물을 머금은 붓을 쥐고 있는 검노는 놀랍게도 절정에 올라있던 이전보다 훨씬 강해 보였다.


“최악의 상황이군.”


암담한 심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첫 함정도 진법이었고, 마지막 함정도 진법이라니. 알아차릴 만하면서도 알아챌 수 없는 함정이다. 진이 빠질 대로 빠진 탓에 진법에 빠진 것도 알아채지 못한 게 패착이다.


“이 찢어 죽일 놈이!”


그때 심유환이 노호성을 터트리며 육대종에게 달려들었다. 아예 이성을 놓아버린 절정고수는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또 빨랐다. 그 주위에 있던 누구도 심유환을 막지 못하고 방해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심유환의 주먹이 육대종의 코앞에 다다른 순간, 심유환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검노가 어느새 기다란 세검을 심유환의 목에 가져대고 있었다. 멈추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심유환의 목이 저 날카로운 물건에 꿰뚫렸으리라.


“흐, 흐윽! 크흐하하하하! 깜짝 놀랐잖아, 이 새끼야!”


육대종이 있는 힘껏 심유환을 걷어찼지만, 심유환은 그대로 굳어서 살기등등한 얼굴로 육대종을 노려볼 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이에 질린 육대종이 멈칫했다가 곧 그 특유의 유들유들함을 과시하며 비아냥거렸다.


“크크, 의가제일은 벌써 저 계집이 무슨 독에 당했는지 알아챘나 봐? 그래, 절독문의 독이야. 알겠지만 해약이 아니면 손을 쓸 수 없는 최고의 독이지.”


“이.... 이 육시랄 놈. 당장 해약을 내놓지 않으면....”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해약을 달라는 태도가 영 아니꼬운데?”


육대종이 비열하게 웃으며 심유환의 코를 쿡쿡 눌렀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코를 누르고서는 육대종은 불쾌하다는 투로 손가락을 심유환의 가슴팍에 슥슥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일단 앉지그래?”


“크윽!”


육대종이 말함과 동시에 검노가 힘껏 심유환의 다리에 세검을 휘둘렀다. 옷이 베어져 나간 것이 먼저고, 피가 솟구치는 건 두 번째. 그리고 심유환이 털썩 쓰러진 것이 세 번째다. 억지로 자리에 앉게 된 심유환이 부들부들 떨며 육대종을 노려보았다.


“마지막이다. 해약을 당장 내놓지 않는다면....”


“오, 그래 해약 없이 반 다경이면 저 계집은 죽어. 시체도 녹아내려서 무덤도 만들 수 없겠지. 그런데도 왜 그렇게 눈이 무서운 거야 영감?”


눈을 부릅뜨고 육대종을 노려보는 심유환. 그리고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는 무인들, 그리고 나. 그 가운데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심유환의 목에 다시 세검을 가져대는 검노.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만들어낸 고요 속에서 심유환의 눈이 흔들렸다. 먼저 저 멀리서 낡은 옷가지처럼 쓰러져 있는 심하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검을 뽑은 채 아무것도 못 하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의식한 순간 절로 몸이 떨려왔다. 애석하게도 나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숱한 도움을 받은 주제에!


“부탁.....한다. 해약을 다오.”


마침내 절정의 고수가 고개를 숙였다. 심유환이 벌겋게 물드는 상처를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육대종은 심유환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톱을 매만지며 딴청을 피웠다. 이에 심유환이 다시금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있는 힘껏 땅에 머리를 찢었다.


쿠웅!


내공까지 실린 움직임에 언덕이 들썩인다. 머리가 깨져 낭자한 피가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것은 단순히 심유환의 자존심이 꺾인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나팔 소리와도 같았다.


“해약....을.... 주십시오 대인.”


심유환이 음울한 목소리로 간청하자 그제야 육대종이 반응을 보였다. 육대종이 휘파람을 불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가락을 튕겼다. 반짝하고 무언가가 내 앞으로 날아와 툭 떨어졌다. 그것은 은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작고 길쭉한 주머니였다.


“뭘 보고만 있나 소천검? 네 정혼자가 죽어간다고?”


육대종이 이죽거렸다. 정신이 번쩍 든다. 저것이 해약인가? 두말할 것 없이 해약을 집어들었다. 해약을 취하는 데 거추장스러운 검은 팽개치고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던 장침을 꺼냈다. 침에서 알싸한 향이 난다. 아마 이 침에 해약이 묻어 있으리라 여기고, 나는 단번에 심하령에게 달려가 그 침을 새까맣게 변한 팔에 꽂아넣었다.


“허억!”


힘없이 늘어져 있던 심하령의 몸이 들썩였다. 그와 함께 새까맣던 손이 조금은 본래의 색은 찾았다. 그러나 손은 아직도 사람의 살 색깔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묵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해약을 주긴 하되, 완벽한 것을 준 건 아닌 듯 하다.


“자아, 그럼 시작해보자고. 너희는 이 늙은이를 묶어라.”


육대종의 말에 따라 주위에 시립해 있던 무인들이 심유환에게 접근해왔다. 심유환이 천천히 고개를 든 순간 물씬 살기가 퍼져 나오며 육대종이 흠칫 놀라는 한편 무인들이 다시금 병장기를 빼 들었다. 일순간에 주위가 무거운 공기로 휩싸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심유환의 살기가 잦아들고, 무인들이 다시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갔다.


“아, 그리고 소천검. 너 말이야.”


육대종을 데리고 가볍게 언덕에서 도약한 검노는 먼지 하나 날라지 않고 가볍게 내 앞에 착지했다. 육대종의 말이 끊기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펼친 경공은 문외한이 보더라도 상당한 경지였다.


“혹시라도 너도 살려준다고 생각하진 마.”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잠을 포기하고 글을 쓴다!

오랜만에 해 보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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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10. 운칠기삼(運七技三) (1) +6 17.01.15 743 10 17쪽
213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5) +3 16.12.18 871 14 20쪽
212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4) +6 16.12.03 682 13 25쪽
211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3) +5 16.11.02 1,007 10 25쪽
210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2) +7 16.09.12 831 11 36쪽
209 9. 넘고 넘어서, 돌고 돌아서 (1) +5 16.06.13 923 10 22쪽
208 8. 등하불명(燈下不明) (9) +2 16.06.14 871 10 21쪽
207 8. 등하불명(燈下不明) (8) +8 16.05.11 918 17 31쪽
206 8. 등하불명(燈下不明) (7) +6 16.03.29 785 10 24쪽
205 8. 등하불명(燈下不明) (6) +4 16.02.14 836 14 28쪽
204 8. 등하불명(燈下不明) (5) +3 16.02.10 916 14 18쪽
203 8. 등하불명(燈下不明) (4) +7 15.12.13 1,072 14 21쪽
202 8. 등하불명(燈下不明) (3) +11 15.10.12 867 2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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