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과 먼지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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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커피
작품등록일 :
2016.09.2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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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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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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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2-96. 미운 오리 새끼 (3)

DUMMY

가마를 타고 총독관을 향하던 일리시아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고 말았다.


이제 슬슬 추워지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기 때문인데, 흡사, 축제를 연상케 하였다.


노점상들이 모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었으며, 임시로 설치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유머와 색을 곁들인 유쾌한 연극을 펼쳤다.


관객들은 소시지나, 병아리콩 등을 먹으며 낄낄 웃었으며, 아이들은 광대나 마법사의 뒤를 쫓아다니며 더 재밌는 걸 보여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그때마다, 광대들은 재주넘기와 저글링을, 마법사들은 색색의 불꽃을 보여줘 아이들의 환호성을 자아냈다.


그 외에도 낄낄대는 웃음소리, 요란한 악기 소리가 뒤섞여 유쾌한 소음을 자아냈는데, 일리시아는 그러한 광경에 압도돼 혹시 자기가 무슨 기념일을 놓친 게 아닌가 싶었다.


“혹시 오늘 무슨 날인가요?”


일리시아가 경호원인 섹스투스에게 물었다. 그가 답했다.


“아뇨.... 각하께서 자기 때문에 고생한 붉은 방패의 시민들을 위해 사비로 베푼 축제입니다. 오늘만큼은 거리의 모든 음식과 술, 볼거리가 공짜입니다. 저기 춤추는 곰도 있군요.”


일리시아가 섹스투스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야만인 조련사의 북과 채찍에 맞춰 곰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는 게 보였다.


“대단하네요..... 여기에 얼마나 돈을 썼는지 생각하면 더 대단하고요.”


“비너스의 축복을 받으신 분인데, 이정도야 어렵지 않겠죠.”


섹스투스가 진지하게 답했다. 그는 아무래도 그 소문을 믿는 것 같았다.


일리시아는 저도 모르게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믿느냐고 물을 뻔했지만,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상기하며 간신히 말을 삼켰다.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보다 침묵이 더 중요했다.


잠시 더 이동하니 일리시아는 또 흥미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건물 귀퉁이나 길가에 노파나 여인, 피곤해 보이는 남성 등이 각각 무릎을 꿇고 어딘가를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일리시아의 착각이 아니라면 저들이 기도하는 방향은 바로 총독관이었다.


“저분들 모두 총독관에 기도하는 건가요?”


“예, 정확히는 총독관에 계신 펠소포티 각하께지만요.”


역시나.


“네, 그걸 물어본 거예요..... 대단하네요. 그런데, 뭘 기도하는 거죠?”

“건강, 자식, 사업번창 뭐 여느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혹시, 처음 각하가 돌아왔을 때 기억하십니까? 아가씨.”


일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무거워 나오지는 못했어도 노예들을 내보내 대충 상황은 알아보았다. 그는 수십 명이나 되는 라기아족을 이끌고 와 거의 하루 종일 거리를 행진하며, 도시민 절반과 인사를 나누었다고 했다.


“예, 그랬죠. 개중에 각하와 우연히 손이 닿은 자들이 있는데, 몇몇이 피부병이나, 치통, 관절염 등이 나았다고 합니다. 몇몇 술집에서 오가는 말로는 각하와 옷깃이 스치는 것만으로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데.....”


“정말요?”


“예, 정말요. 얼마 전에는 펠소포티 각하의 머리카락이라며 비싼 값에 팔려는 사기꾼이 잡히기도 했습니다. 거의 말 한 마리 값이라던가?”


“제 머리카락보다 비싸겠네요.”


농담으로 들렸는지 섹스투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일리시아는 놀랐다. 이 남자가 그렇게 웃을 줄 안다니. 여태까지 웃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 같았는데 말이다.


“뭔가 기뻐 보이시네요.”


“저 말씀입니까?”


“아,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하죠. 그냥 그렇게 웃는 걸 처음 보는 거 같아서요.”


섹스투스는 자기 얼굴을 매만졌다.


“아닙니다. 그저.... 기뻐서 웃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뭐가 그리 기쁜지 물어봐도 될까요?”


“들어도 딱히 재미는 없으실 텐데....”


평소 그답지 않게 쑥스럽게 말하자 일리시아는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재미있을 거 같은데요. 아, 물론, 비웃는다는 뜻은 아니고, 만약,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알려 주시겠어요?”


섹스투스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왠지 좋은 느낌이 왔기 때문입니다.”


“좋은 느낌?”


“예, 공화국이 한 단계 황금기로 간다는 느낌말입니다. 신이.... 비너스가 은화장군을 살렸다지 않습니까? 이는 분명 신이 우리 공화국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다니. 이는 기적이죠. 불가능할 것 같은 녹색 땅을 정복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공화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나라가 되겠죠. 그리고 그곳에 저 역시 있는 거고요. 남자로, 시민으로, 군인으로....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평소 그답지 않은 장황설에 일리시아는 살짝 놀라면서도 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장군의 영광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라..... 노예 출신이자 사업가인 일리시아에게는 별 공감은 안 갔지만, 이해는 할 수는 있었다.


정말이지, 군인은 때때로 너무 순진한 거 같았다.


‘오히려 그래서 행복한 걸 수도.’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일리시아는 총독 저택에 다다르렀다.


총독 저택 주변으로 사람들이 더욱 많이 몰려 있었는데, 축배를 드는 이가 있는가 하면,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고, 더욱 열성적이게 기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흡사, 인간의 도가니였다.


섹스투스는 호위병에게 명령을 내려 일리시아가 지날 길을 트게 했다.


이런 인파 속에서 가마가 지날 길을 뚫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는데, 빈민들을 자극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때, 짓무른 양배추 반쪽이 일리시아의 얼굴 바로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 노리고 던진 것이었다.


일리시아가 고개를 휙 돌리자 거기에는 구불구불한 머리를 지저분하게 기른 노파가 서 있었다. 머리나, 옷차림으로 보아 빈민가 출신인 거 같았다.


“창녀! 창녀! 제 아비를 죽인 창녀!”


‘미친년인가?’ 일리시아는 생각했다. 동시에 수많은 시선이 화살처럼 자신에게 꽂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정신 나간-”


“-됐어요.”


화가 난 섹스투스를 일리시아가 말렸다. 성난 군중과 싸우는 것은 원로원 의원들조차 기피하는 미친 짓이었다.


“빨리 총독관으로 들어가죠. 괜히 더 사람들 흥분하기 전에요.”


대충 말뜻을 이해한 섹스투스는 일리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더욱 속도를 높여 총독관으로 향했다.


불쾌한 일을 겪긴 했지만, 일리시아는 그래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했다. 비록, 미친 노파에게 양배추로 맞을 뻔했지만, 사람들이 동조하지는 않았지 않은가?


그저 의심, 경멸, 성적인 눈으로 자신을 볼 뿐.


그래, 바투의 말대로 당당하게 군다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기적처럼 무사히 인파를 빠져나온 일리시아는 언덕을 올라 마침내 총독관의 내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벽 안에는 수많은 가마와 함께, 호위병, 수행원들이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수나 옷차림만 보도 얼마나 큰 연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붉은 방패의 세력가란 세력가는 싹다 참가한 거 같은데..... 아니지, 참석 안 한 게 더 이상한 건가?’


노예들이 흔들림 없이 가마를 땅에 내렸다. 호위병의 도움을 받아 가마에서 내린 일리시아는 인파와 언덕을 지나느라 땀에 푹 찌든 가마꾼들에게 보상의 의미로 은화를 약속한 뒤, 총독관 안으로 들어섰다.


총독관 소속 노예가 나타나 정중한 태도로 일리시아는 안내했다.


총독관이라.... 실로 오랜만에 방문한 기분이었다.


시리온 각하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방문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임시 총독인 렘두스는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묘하게 거리를 뒀다고 할까.


‘뭐, 그럴 수도 있지. 특히, 지금 같은 때엔.’


“여깁니다.”


노예가 우아하게 일리시아를 연회장에 안내했다.


연회장 내부는 거리 못지않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조금만 과장을 보태면 서로의 어깨가 닿을 것만 같았다.


허나 그럼에도 어수선하지 않고, 뭔가, 차분하면서도 품위라는 게 있었는데, 시리온이 있을 때와 그 분위기가 너무 달라 흡사,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다.


일리시아는 주인이 바뀐 것만으로 이리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그때, 일리시아의 귓가에 간지러운 소리가 들렸다. 연인의 속삭임처럼 간지러운 목소리가 아닌, 모기에 물린 듯한 불쾌한 간지러움 말이다.


“저기, 그 여자야.”


“정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 온 거지? 설마, 초대를 받았나?”


“설마!”


“아냐, 펠소포티 각하는 사랑과 생명의 여신인 비너스의 후손이시니, 저런 여자도 초대할 수도 있지.”


“그렇다 해도 그럼 자기가 알아서 안 나와야지. 어찌 저런 뻔뻔할 수가.”


들릴 듯 말 듯 한 수군거림, 그리고 뒷골목의 칼날과 송곳 같은 시선이 일리시아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갑자기 오늘 꿨던 꿈이 떠올랐다. 어린 노예 소녀였던 꿈을 말이다. 그때는 어찌나 약하고 여렸는지. 그때, 바투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 당당한 만큼 아가씨가 강하다는 걸 알 테니까요. 선량한 약자보다 강인한 악당이 더 깨끗한 법이랍니다.’


일리시아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깡패 놈 조언이 도움이 될 날이 올 줄이야. 세상 참....


일리시아는 등을 쫙 펴 부풀어오는 가슴과 배를 감추지 않고 당당히 연회장을 걸었다. 그리고 뒤에서 자신을 흘깃 보는 시선과 하나둘 시선을 맞췄는데, 놀랍게도 눈을 마주치자 그들은 이내 시선을 거두며 딴청을 피웠다.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회장에 섞여든 일리시아는 연회장을 거닐며 누구 대화할만한 상대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허나,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 일리시아를 외면하기 급급했다. 돈이 급할 때는 그리 잘 찾아오더니..... 하긴, 공화국이 다 그렇지.


‘어떻게 한다. 계속 혼자 있어야 하나? 견딜 수는 있지만, 약해 보일 텐데..... 그렇다고 다짜고짜 펠소포티 각하를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때, 일리시아의 눈에 구원자가 보였다. 바로, 기다란 주황빛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한 다레온이었다.


그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만나니 꽤 반가웠는데, 일리시아는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그에게 바로 다가갔다.


“다레온 경.”


“..... 일리시아 아가씨?”


“예, 경께서는...... 못 본 지 좀 되긴 했지만, 모습이 꽤나 변하셨네요.”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주황빛 머리는 기름을 발라 정돈되었고, 수염은 짧게 턱을 덮고 있었다.


“수염과 머리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좀 많이 이상한가요?”


일리시아가 입을 샐쭉 내밀곤 대답했다.


“음..... 아뇨. 그렇게 이상하진 않아요. 오히려 이국적이면서도 친숙하네요.”


빈말이 아니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분명 유행이 지난 야만인 스타일이었지만, 지저분하면서도 정돈된 탓에 그리 이상해 보이진 않았다.


더욱이 주름 하나하나 신경 쓴 토가와 곧은 자세는 공화국 예법의 표본이라 해도 될 것 같았는데, 이 두 개가 합치자 다레온은 이국적이면서도, 친숙한 뭐라 설명 못 할 분위기를 풍겼다.


“오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쩌다 여기 오신 건가요?”


다레온이 대답하려던 찰나, 짐승의 울음과 주문이 뒤섞인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가만 보니 그의 등 뒤로 라기아족이 있는 것이었다.


족히 수십 명은 될 거 같았는데, 그들은 다레온과 같이 기름을 발라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토가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만, 다레온이 자연스럽다면, 그들은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저분들은......”


“라기아족의 유력자이자, 펠소포티 각하의 손님입니다. 잠시만요. 아가씨.”


다레온은 그렇게 일리시아를 떠나, 한 라기아족과 공화국 지방 귀족을 인사시켜줬다. 처음에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 탓인지, 뭔가 부자연스럽고 긴장감을 유발했으나, 다레온이 이내 통역하자 돼지 지방처럼 부드러워졌다.


매우 익숙해 보였다.


이후로, 다레온은 혼자서 수십 명이나 되는 라기아족을 통역해주었다. 그는 억양까지 그대로 구사해 각 언어를 능통이 소화하는 가하면, 약간의 손짓으로 유머를 섞어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을 동시에 웃게 해주었다.


그렇게 그가 한참을 일한 끝에 다시 일리시아에게 다가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다리게 해드리다니 용서하시죠. 아가씨.”


일리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왜 왔는지 몰랐는데, 이제 알 거 같네요. 차라리 전쟁터에 있는 게 나았겠어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절 필요해 주신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아, 이런 정신머리 좀 보게. 늦었지만, 진심으로 임신을 축하드립니다.”


“예, 고마워요.”


“시리온 경께서도 기뻐하십니다.”


“그분도 알고 계시나요?”


“예, 그분은 뭐든지 알고 계시죠..... 그래서 여쭙는 건데, 어찌 이 사실을 알리시지 않으셨습니까? 아가씨께 직접 들으셨다면 더 기뻐하셨을 텐데?”


과연 그럴까? 일리시아는 의문이 들었다. 뭐... 기뻤 했을 수도 있겠지, 아닐 수도 있고.


“민감한 질문이네요. 제가 그 대답을 회피해도 될까요?”“물론입니다. 만약, 불쾌하셨다면 제 뺨을 때리셔도 됩니다. 옛날처럼요.”


1년 전 추억이 떠오르자 일리시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바투와 다른 의미로 감당이 안 됐다. 흐름이 먹힌다고 해야 하나?


“연회장만 아니었으면 그랬을 거예요..... 그분은 잘 계시나요?”


“그분은 늘 잘 계시죠. 혹시 전할 말씀이 있으시다면-”


“- 아뇨, 없어요. 그런 거.”


일리시아의 대답에 눈치 빠른 다레온이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제가 또 주제넘었군요. 현재 각하께서 바쁘셔서 그러는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지금 라기아족의 유력가 분들과 아가씨를 소개해 드릴 수 있을까요?”


“아, 그거 좋죠.... 아, 바투가 다레온에게 안부를 전하더군요.”


“바투가요? 그 녀석 잘 지냅니까?”


“너무 잘 지내서 문제죠. 설명해 드리고 싶긴 하지만, 혀가 더러워질 것 같아 직접 찾아가 보라고 말씀드리죠.”


다레온은 말없이 웃고는 일리시아를 라기아족 유력가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여태까지 라기아족이라곤 노예밖에 못 본 일리시아로서는 이 순간이 제법 신선했는데, 확실히 숲에 사는 야만인이라 그런지, 키나 골격이 더 커 보였다.


그들은 급하게 배운 공화국 예법으로 인사했는데, 솔직히 말해 곰이나 늑대, 사자가 사람 흉내를 내는 것 같아 매우 어색했다.


뭐라고 할까? 파격적이고 놀랍다고 할까?


“이분의 엄니 멧돼지 부족의 귀족인 하르하온입니다. 용맹하기로 아주 유명한 분인데, 목에건 멧돼지 어금니를 맨손으로 부러뜨렸다고 하죠.”


하르하온이란 라기아족 사내는 멧돼지 엄니 목걸이가 걸린 목을 자랑스레 들어 보였다. 핏줄과 근육이 솟은 게 사람보다는 짐승의 목 같았다.


그 사내가 짐승과 같은 언어로 뭐라 말했다.


다레온은 통역하는 대신 뭐라고 답했는데, 하르하온이라는 사내는 코를 한번 실룩이더니, 곧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다레온이 일리시아를 대신해 난감한 질문을 대신 쳐준 거 같았다.


‘은화장군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사람을 제대로 보고 쓸 줄 아시는 분 같네.’


이후, 다레온은 매 깃털을 토가에 꽂은 라기아족 귀족과 얼굴에 푸른색 문신을 한 귀족 등을 차례차례 소개시켜 주었다.


그의 통역 솜씨는 훌륭해 직접 대화를 나누는 기분마저 들었는데, 이미 한참 동안 일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다레온은 전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실로, 훌륭한 집중력이라 할 수 있겠다. 왜, 바투 그 미친개가 따르는지 약간이나마 알 거 같았다.


“왜 그러시죠?”


거의 소개가 끝날 때쯤 다레온이 말했다. 일리시아가 속마음 숨긴 채 대답했다.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제가 알기로 다레온은 아키아족 출신이라던데-”


“-정확히는 길스 태생 아키아족 출신입니다. 그리고 현재 공화국의 시민이자 귀족이죠. 아마 제가 이 시대 최고의 잡종이 아닐까 합니다.”


그의 농담에 일리시아가 웃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공화국 예법을 잘 익히신 거죠? 물론, 저도 노예 출신 사생아라 그런 쪽에 배움이 깊진 않지만, 저보다 능숙하신 것 같아서요.”


“아, 그건 펠소포티 각하의 배려 덕분입니다. 라기아족 유력자분들에게 급하게 붙여준 가정교사를 도와주면 저도 겸사겸사 공부했죠. 공짜로 배운 셈이죠.”


“긍정적이시네요.”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이런 슬슬 각하께서 여유가 생기신 것 같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제가 한번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아뇨, 아직 괜찮으니 너무 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그..... 신의 선택을 받은 분을 예의 없이 재촉하긴 좀....”


다레온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사람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그런 미소였다.


“아뇨, 각하께서도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하실 겁니다.”


“그럼..... 부탁 좀 드리죠.”


다레온이 바로 움직이려는 찰나, 그때, 익숙하면서도, 싫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꿈에서 들은 그 목소리였다.


“신들이시오. 맙소사.....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 거나이까?”


일리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껏 차려입은 일리시아의 유일한 혈육이 있었다.


일리시아의 큰 언니이자, 큰 아가씨, 끔찍했던 작은 폭군.


바로, 바르무톤 가문의 장녀 미안나였다. 그녀는 진홍빛 스톨라를 입었는데, 장신구 역시 적잖게 걸치고 있었다. 그 덕분에 가뜩이나 강한 인상이 더욱 강해져, 흡사 한 마리의 암사자를 연상케 하였다.


그로 인한 부작용일까? 미안나의 옆에선 남편 안피오는 늙은 수소처럼 보였다.


일리시아는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매와 형제를 잃은 여자가 어찌 저렇게 화려한 복장을 하는 건지 말이다.


일리시아조차 어두운 색상에 장신구는 하나도 안 걸쳤는데, 설마, 벌써부터 여왕 기분을 즐기려는 건가?


“안녕하세요. 큰 언니.”


“날 그리 부르지 마.”


미안나가 노예에게 말하듯 말했다. 더 이상 거칠 게 없다는 태도였다.


“도대체 네가 여기 왜 있지?”


일리시아가 대답하려는 찰나, 다레온이 끼어들었다.


“초대받았기에 오신 겁니다.”


갑자기 난입한 남자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누구시죠?”


“아피투스 가문의 다레온이라고 합니다. 현재 펠소포티 각하의 수행원이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인.”


펠소포티 각하의 수행원.... 그 이름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거리낄 게 없던 미안나조차 한순간 주춤거렸다.


“... 왜 남의 일에 끼어드시는 거죠?”


“아,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아 그랬습니다. 더욱이 이분은 현재 생명을 밴 임산부이기도 하고 말이죠.”


가시 박힌 미안나의 말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받아넘긴 다레온. 실로 효과적이었는데, 미안나의 얼굴은 일리시아를 상대할 때보다 더욱 구겨져 있었다.


“저년은 임산부가 아니라 악마예요. 내 가족을 죽인 악마.... 저 악마 같은 아이가 정당한 벌을 받아야지만, 내 가족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끼어들지 마세요.”


“그 복장으로 장례식을 치른다고요? 아주....... 눈부시겠네요.”


일리시아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솔직히 이제 한계였다. 저런 헛소리를 듣고 참아주는걸.


일리시아의 한마디에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꽂히며, 수면 위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웅성임이 일었다. 일리시아는 순간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적밖에 없는 곳에서 이렇게 지껄이다니. 다레온이 서둘러 개입해 이야기를 끊으려고 했다.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펠소포티 각하께서 조사 중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장소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자 미안나가 작정한 듯 눈에 독기를 품고 말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얼마나 원통하고, 고통스러운지 말하려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맞지 않다는 거죠? 내 가족이 무참히 살해당했어요! 아랫도리가 찢어 발겨지고, 젖가슴을 도려냈죠! 도대체 누가 감히 내게 그따위 말을 할 수 있죠! 대답해 봐요? 수행원 양반?!”


그때, 이질적으로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없소. 아무도.”


바로, 은화장군이었다.


작가의말

아마, 다음 편으로 ‘미운 오리 새끼’ 편이 끝날듯 싶습니다.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주말 잘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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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2-152. 증명하는 자 (2) +12 21.08.15 832 55 14쪽
166 2-151. 증명하는 자 (1) +10 21.08.08 785 59 12쪽
165 2-150. 대비하는 자 (4) +13 21.08.01 757 51 19쪽
164 2-149. 대비하는 자 (3) +13 21.07.25 770 59 12쪽
163 2-148. 대비하는 자 (2) +21 21.07.18 804 68 12쪽
162 2-147. 대비하는 자 (1) +10 21.07.11 905 65 12쪽
161 2-146. 성공한 사업가 (4) +10 21.07.04 905 68 19쪽
160 2-145. 성공한 사업가 (3) +10 21.06.27 904 60 14쪽
159 2-144. 성공한 사업가 (2) +14 21.06.20 852 61 19쪽
158 2-143. 성공한 사업가 (1) +11 21.06.13 914 62 16쪽
157 2-142. 올라서는 자 (3) +14 21.06.06 814 64 15쪽
156 2-141. 올라서는 자 (2) +6 21.05.30 799 49 13쪽
155 2-140. 올라서는 자 (1) +6 21.05.23 906 56 14쪽
154 2-139. 여인 (4) +28 21.05.16 969 73 16쪽
153 2-138. 여인 (3) +9 21.05.09 907 55 16쪽
152 2-137. 여인 (2) +11 21.05.02 943 6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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