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과 먼지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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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커피
작품등록일 :
2016.09.24 16:04
최근연재일 :
2022.01.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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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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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2-128. 상담하는 부인 (3)

DUMMY

마녀의 이야기가 즐거웠던 걸까?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주변은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일을 마친 노동자들은 집 아니면 매음굴로 향했고, 주점 겸 식당에는 하나둘 손님이 찾아오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가정집에는 불이 피워지며, 세공소나, 잡화점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유모가 율리아에게 물었다. 율리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어, 괜찮아... 곰팡내 나는 천막 안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


“혹시 괜찮으시다면 마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걱정하는 유모.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시시해 빠진 옛날이야기만 들었어. 난 그걸 무슨 생각으로 들은 건지.”


“아... 그렇군요.”


유모가 그렇게 넘어갔지만, 사실 율리아의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녀의 마지막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글쎄요? 그건 바로 부인의...’


아무리 생각을 해보려 해도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칼로 자른 듯 말이다.


떠오르는 건 마녀와 함께 나와 짤막한 대화를 나눈 것뿐이었다.


‘이제 떠나는 건가?’


‘예, 마님... 허나,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대가 절 필요로 할 때 전 다시 찾아올 겁니다.’


‘날 위해 그렇게 해주다니 고마워서 어쩌지. 마녀.’


‘송구한 말씀이지만, 마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찾아오는 것은 마님을 위해서가 아닌, 절 위해 그리고 그것이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음에 만나는 그날까지 몸조심하시옵소서.’


그리고 마녀는 마차 두 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사람을 심란하게 했는데, 참으로 신경 쓰였다. 마치, 구체적으로 어딘지 모를 가려움과 같이.


긁을 수도 없고, 안 긁자니 짜증이 나는... 돈 한 푼 쓰지 않았지만, 율리아는 소중한 하루를 허비했다는 불쾌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침울하게 집으로 돌아갔는데, 대문에 들어서니 웬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 율리아의 아들 니하미스가 우는 소리였다.


율리아는 또 뭔 일이 있나 싶어 뛰어갔는데, 아트리움(안뜰)에서 짐을 챙기는 코바로스와 마커스 그리고 니하미스를 품에 안은 채 달래주는 다레온을 볼 수 있었다.


니하미스는 작은 손으로 다레온의 옷을 꽉 쥐며 ‘바바! 바바!’라고 소리쳤는데, 다레온은 난감한 듯 쓴웃음을 지으며 니하미스를 열심히 달래주었다.


“괜찮다. 괜찮아.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 착하지 우리 아들?”


그럼에도 니하미스는 싫다는 듯 다레온의 옷깃을 꽉 잡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고 더 크게 울었는데,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다레온은 니하미스 뿐 아니라 애써 아쉬움을 참는 튜디까지 안아서 달래줬다.


칸, 쿤, 란이라 불리는 하이에나들이 다레온 곁에 모여 아이들을 같이 달래줬다.


도대체 이게 뭔 상황인지. 율리아는 다가가 물었다.


“저기 무슨 일인가요?”


“아, 부인.”


다레온이 반갑다는 듯 율리아를 바라보며, 니하미스를 부드럽게 내밀었다. 율리아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받았는데, 어미 품이 안심되는지 아이는 이내 안정을 되찾고 잠에 빠졌다.


“아, 지금 와서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겁니다.”


“그거 고마운 말씀이군요... 그런데, 지금 뭘 하는 건지?”


다레온이 튜디를 한번 꼭 안아주고는 땅 위에 세웠다. 칸, 쿤, 란이 흉악한 생김새와 달리 튜디의 얼굴에 자기들의 얼굴을 비비고, 혀로 핥아 위로해 줬다.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짧고, 명확한 대답. 율리아는 한순간... 아주 한순간이나마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붉은 방패 말씀인가요?”


“예.”


“.... 이해가 안 되는데요? 휴가 기간은 아직 끝이 아닌데.”


“기억해 주셔서 고맙군요... 부인 말씀대로 아직 시간은 남았죠.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요?”


“예.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녹색 땅에 무슨 일이 터진 것 같고, 그 탓에 페로스 각하께서 급히 녹색 땅으로 복귀하셨다고 합니다. 전 그분의 수행원. 별말씀은 없지만, 이 사실을 알았으니 저도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코바로스! 마커스! 준비는?”


“다 끝났어.”

“저도 준비 마쳤습니다. 다레온.”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한다. 말에 짐을 실어. 필요한 다른 물건은 가는 도중 구하면 되니까. 최대한 가볍게 한시가 급하다.”


다급히 움직이는 다레온을 붙잡으며, 율리아가 물었다.


“이해가 안 되는데, 그걸 어떻게 아신 거죠?”


“바투 녀석이 편지로 알려줬습니다.”


다레온이 품 안에서 파피루스 하나를 꺼내 말했다. 밀랍 도장에는 천박한 쥐와 개 인장이 박혀 있었다.


“참, 충실한 친구군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제 할 일은 제대로 하는 녀석이죠.”


율리아의 비아냥을 눈치채지 못한 듯 다레온이 대답했다. 율리아가 계속해 그에게 따 붙어 말을 걸었다.


“녹색 땅 전쟁이 다시 요동치는 건가요?”


“글쎄요? 부인.... 제가 아는 바가 없어 섣불리 대답할 수 없군요. 페로스 각하를 믿는 저로서는 아무 걱정 말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그분이 그리 서둘러 움직이니 걱정이 아주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커스 미안한데, 짐 다 실었으면 나 갑옷 좀 입게 도와줘.”


다레온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가벼운 튜닉 차림이 되며 말했다.


그와 함께 다닥다닥 잔근육 잡힌 팔과 허벅지가 보였는데, 그 피부 위에는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크고 작은 흉터가 보였다. 마치 그의 거친 삶을 대변하듯.


율리아는 자신이 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걸 깨달았다.


‘하긴, 각방을 썼으니....’


마커스란 거구의 사내는 어느새 다가와 다레온의 쇠사슬 갑옷을 씌워주며 필요한 부분의 벨트를 꽉 조여 고정해 줬다.


그런 다음 팔찌를 채워주고, 군화도 신겨주며, 철가면이 붙은 투구까지 가져다줬다. 매우 능숙하고 그 일을 기쁘게 하였는데, 꼭 왕을 모시는 종자처럼 보였다.


너무나 빠른 준비 속도. 율리아는 순간 묻고 싶었다. 라기아족을 죽이는 전쟁터가 그리 좋은지. 아니면 이 집을 떠나는 게 그리 기쁜지.... 문득 자신이 그가 떠난다는 사실에 아쉬워한다는 걸 깨달았다.


‘맙소사.’


그때, 말에 짐을 싣고 온 아키아족 코바로스가 나타나 물었다.


“다레온! 준비 끝났어. 이대로 바로 출발하면 돼. 어떻게 할까?”


“좋아, 그럼-”


“-잠깐만요!”


율리아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왜 그런 것인지 본인도 몰랐다. 다레온을 비롯한 마커스와 코바로스 심지어 칸, 쿤, 란이란 이국의 짐승조차 고개를 갸웃하며 율리아를 바라봤다.


“무슨 일입니까? 부인.”


다레온이 투구를 벗으며 말했다. 차가운 철가면 아래의 얼굴은 무척이나 따듯해 보였다.


“그... 그게..... 내일 가시면 안 되나요?”


“내일요?”


“예... 지금은 저녁 시간 때, 곧 있으면 날이 더 어두워질 텐데 위험하잖아요? 특히, 겨울밤은 더욱 그렇고요?”


“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허나,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코바로스는 타고난 아키아족의 전사이자 사냥꾼.... 어둠 속에도 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달린 적 있습니다.”


허리에 곡도와 활을 든 코바로스가 걱정말라는 듯 손을 들었다.


“그래도 내일 가시죠.... 갑작스럽게 아이들을 떠나면 불쌍하잖아요?”


율리아는 마치 필살의 무기처럼 자신의 품 안에 안긴 니하미스와 튜디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튜디는 자신은 괜찮다고 웃어 보였는데, 역시 아이인지 그 미소는 어색하고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저 티 내는 게 아닌 진심으로. 율리아가 쐐기를 박았다.


“저녁과 아침을 같이하고, 내일 모두가 일어났을 때 정식으로 인사하고 가시죠. ”


그러자 방금 전까지 다급히 준비하던 다레온은 혼란스러운 듯 수염이 난 턱을 긁적였다. 매우 진지하게 고민해 섣불리 말을 붙이기도 힘들었는데,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코바로스, 마커스. 미안하지만, 내일 아침에 출발하자. 서두르라 해놓고 미안.”


다행히 길스인과 아키아족은 별 불만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각기 어깨를 으쓱이고는 적당히 짐을 풀러 가거나 갑옷을 벗었다.


율리아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해 머리를 갸웃댔다. 왜 구태여 그를 말렸을까? 튜디를 위해? 니하미스를 위해? 아니면....


“부인.”


다레온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율리아가 그를 봤다.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조언 감사하오. 덕분에 실수를 면했소. 아무리 급해도 순서라는 게 있느네.... 그럼, 이왕 이리됐으니, 같이 식사로도 하는 게 어떻게습니까? 가족끼리.”


율리아가 뜸을 들이다 말했다.


“네, 그러죠.”



율리아는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그렇게 식사를 하러 갔다. 다레온은 오랜만에 친구들이 아닌 율리아와 튜디, 니하미스와 식사를 했는데, 식사 자리는 차분하면서도 소란스러웠다.


율리아는 가만히 앉아 음식을 먹는데, 반해, 다레온은 튜디와 니하미스의 음식을 챙겨주고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


가끔씩 요란한 성대모사나 말 울음소리도 흉내 냈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자지러지며 율리아 때는 보기 힘든 순수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고 과하지는 또 않아 예의는 벗어나지 않았는데,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기묘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여러 가면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그 순간 율리아는 마녀가 했던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영웅을 피해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그 틈바구니에 숨어든 괴물을...


문득, 왜 하필 그런 이야기를 율리아에게 했을까? 설마.....


“...인? 부인? 괜찮으십니까?”


율리아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다레온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튜디에게 말했다.


“예, 괜찮아요.... 오늘 좀 피곤하네요.”


“그런 거라면 괜찮지만...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율리아가 피식 웃었다. 곧 전쟁터로 갈 사람이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비꼬는 걸까?


“친절한 말씀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무리할 게 뭐가 있나요?”


그가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부인이 어찌 무리하는 게 없습니까? 며칠 전 우즈리스 부인께 들었는데. 그분 곁에서 열심히 일을 배운다고.... 실로 대단합니다.”


“그저 작은 호기심을 뿐이죠... 어쨌건 그리 봐주시니 고마워요.”


“... 부인께선 판도라 이야기 아시오?”


“호기심 때문에 이 세상에 온갖 재앙을 퍼트린 여자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 역시 세상에 나왔지요. 그 어떠한 재앙이 와도 인간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작지만, 위대한 힘.... 호기심은 그처럼 대단한 것이고, 그 호기심으로 움직인 것 역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일에 자랑스러워하면 좋겠습니다. 부인 덕분에 우즈리스 경과 식사도 해보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고마워요.”


다레온의 목소리는 적절한 높낮이와 힘이 있어 생기와 함께 듣는 이를 따뜻한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율리아는 정말 이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뭐 하나 질문드려도 될까요?”


“부인께서요? 기쁘군요. 말하세요.”


“우즈리스 경의 식탁에 초대받은 날 단둘이 대화를 나눠 셨는데, 어떤 대화를 나눴죠? 그냥... 궁금해서요.”


그가 가볍게 웃었다.


“별 이야기 안 했습니다. 녹색 땅의 전황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뭐... 그분 입장상 많이 궁금하시겠죠. 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친절히 대답했고요.”


“그렇군요.”


“어쨌건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음식도 맛이 좋았고, 포도주 역시 맛이 좋았죠. 높으신 분과 대화도 해보고요... 전부 부인의 덕입니다.”


율리아는 이 남자가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애당초 율리아가 안토니아와 친구가 된 것 역시, 다레온 이 남자 때문이었는데.


그런데, 그는 마치 모든 일을 율리아의 힘이란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치 아이를 다루듯. 율리아는 이 사실이 불쾌하면서도, 그의 특유의 분위기에 섣불리 단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율리아를 빤히 바라보던 다레온이 튜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빙긋 웃으며 물었다.


“튜디. 음식은 맛있니?”


“아, 예... 맛있어요. 아저씨.”


“따뜻한 잠자리, 맛있는 음식, 함께할 가족. 그것만으로 삶은 축복이니... 혹시 다 먹었으면 잠시 방으로 돌아가 줄래? 잠들기 전에 내가 찾아갈게. 혹시 가지고 싶은 조각이나 그런 거 없어?”


“아, 아뇨. 괜찮아요. 아저씨.”


다레온은 튜디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줬고, 튜디는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니하미스도 유모의 손에 의해 침실로 돌아갔고. 갑자기 단둘이 남게 된 다레온과 율리아. 그가 입을 열었다.


“부인.... 이제 편히 말해보세요. 뭔가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물어보라뇨?”


“아, 제가 착각한 거면 사과드리죠. 뭔가 계속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서요... 정말 물어볼 게 없나요?”


율리아는 고민했다. 솔직히 말할지 말지.


“그냥.... 신기해서요.”


“뭐가요?”


다레온이 미소지으며 물었다.


“그냥 다요.... 일단, 고맙다고 인사부터 할게요. 휴가를 왔는데,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만 했잖아요?”


“일이라니요? 전 괭이질하거나, 걸레질한 기억이 없는데.”


“제 가족을 만나고, 시니아의 집을 방문해 그녀를 기쁘게 해 주며, 우즈리스 일가와 식사하고, 하루 종일 집에서 애들을 돌봐줬잖아요.”


사실이었다. 그는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고 주변 이들과 만나 그들을 챙겨줬다. 특히, 니하미스를 각별히 챙겨줘 아빠(바바)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그 말씀은 솔직히 좀 그렇군요.”


예상과 다른 다레온의 반응. 그가 이어 말했다.


“뭐가 됐건 전 이 집안의 가장이고, 부인의 가족과도 가족입니다. 아이들 역시 제가 아버지고요. 마땅히 제 역할을 했는데,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건 좀 그렇군요. 마치,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 것처럼 들리잖습니까?... 아까 전 부인의 말이 옳았습니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너무 서둘렀어요. 내일 아침 식사 정도는 하고 떠났어야 했는데.”


너무나도 진지해 율리아는 뭐라 말해야 할지도 감이 안 왔다.


“.... 가족을 아끼시는군요.”


“남자로서 당연한 건 아닌가 싶군요.”


“.... 아버님에게 배운 건가요?”


다레온은 침묵한 채 율리아를 말없이 바라봤다. 미세하게 굳은 표정이 몹시도 신경 쓰였다. 율리아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인가? 한참 후 다레온이 대답했다.


“예, 그분께 배운 겁니다.... 배우는 게 너무 늦었지만요.”


“배우는 게 너무 늦다뇨.... 아, 혹시 말하기 어려운 거면-”


“-아뇨,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제 어리석음이 다시 떠올라 그런 겁니다. 부인을 불편하게 했다면 사과드리죠.”


다레온의 목소리와 눈에는 희미하게 슬픔이 섞여 있었다. 어떠한 사연이 있는 건가? 하긴, 사연 없는 인생이 그 누가 있으랴?


“아버님께선 어떤 분이셨지요?”


“내 아버지 말입니까?”


“네... 궁금하군요.”


거절할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음... 뭐라 말해야 할지... 역시, 전형적인 농부라는 말씀밖에 못 드리겠군요.”


“농부요?”


“예, 성실함과 선량함 밖에 없는 농부요. 한평생 땅을 일궈 생계를 이었죠. 전 그런 분에게 거둬졌고요.”


“좋은 아버지셨나요?”


“예, 위대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제겐 위대한 아버지였죠... 저 같은 걸 가슴으로 품으며 키웠으니까요.”


“저 같은 거라뇨?”


“아. 죄송.... 지금은 나름대로 철이 들었다 생각하지만, 어렸을 때는 정말 건방진 천방지축이어서.... 왜 있잖습니까? 조금의 지식과 지혜를 얻어도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어린 시절 제가 딱 그런 아이였습니다.”


“믿기지가 않네요.”


“저도 그럽니다. 조금 영리하다는 것 외에는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주제 세상이 제 것인냥 굴었죠. 아버지께 무슨 은혜를 입었는지도 모르고요... 가끔씩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그 시절도 떠올라 수치스러워진답니다.”


다레온은 그날의 기억을 잊기라도 하듯 포도주를 벌컥 마셨다.


“언젠가 그분의 묘에 가 용서를 빌고 싶군요.”


율리아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 어쩌다 그분은 돌아가셨지요?”


아차 싶었다. 이런 질문을 하다니. 분위기에 취한 것인가? 허나, 화를 낼 거란 예상과 달리 다레온은 슬픈...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그 모습은 율리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선량하셨는데.”


다레온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떠날 채비를 한다고 힘을 써 그런지 슬슬 피곤하군요.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부인. 괜찮은가요.”


“예.”


그렇게 떠나는 다레온. 웃기게도 그의 등은 무척이나 안타까워 보였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율리아가 보기에도.


“다레온....”


“예?”


“.... 미안해요.”


“미안할 것 없습니다. 그리 비밀도 아니니. 다만 과거에 말했다시피, 비밀로 해주시면 좋겠군요.”


“...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잠시만요.”


“더 할 말 있나요?”


분위기에 취한 듯 율리아가 말했다.


“제가 함부로 말할 건 아니지만, 아버님께선 지금 다레온을 몹시 자랑스러워할 거예요. 좋은 아버지이자, 가장이니까요.”


다레온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진심으로 말했다.


“그 말이 절 기쁘게 하는군요... 고마워요. 부인께서도 좋은 밤 보내세요.”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담하는 부인’ 편은 여기가 끝이고 다음 편은 녹색 땅이 배경이 될 듯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젓가락 님. 매주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에 보답하도록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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