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3)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진 다음 날,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본의 불법 기습공격이 진주만에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연설 이후 곧바로 ‘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하원에서는 388:1로 가결되면서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하게 되었다.
실제로 공습 전까지 미국은 무의미한 전쟁참여는 안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의견이 대다수였다. 히틀러의 위험성을 인지한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 정부 고위관료들이 전쟁의 불가피성을 주장했지만, 대다수의 미국 국민은 전쟁에 회의적이었다.
이런 경향은 1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컸는데, 1차 세계대전의 참전한 여파로 미국은 약 36여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장병들은 그 이후로도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로 인해서 꽤 오랜 시간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던 경험을 미국 사회가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미국 국민의 대다수는 미국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경우가 아닌 이상 직접적인 전쟁의 참여를 꺼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로 상황은 급변하였다.
선전포고 없이 이루어진 일본의 공격은 미국인들에게 충격과 함께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일본의 공격을 받은 이상 이 전쟁은 더 이상 남의 전쟁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실제로 진주만 공습이 알려진 이후 공화당의 대표적인 고립주의자 의원들은 곧바로 백악관에 찾아와서 루스벨트에게 전쟁에 대한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했을 정도였다.
오히려 고립주의자들이 일본과의 전쟁을 독려하는 최전선에 나설 정도였다.
아무튼, 진주만 공습이 이루어진 지 3일째 되는 날.
미국을 필두로 영국, 캐나다, 그리고 네덜란드가 연달아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중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12월 9일에 그 뒤를 이었다.
실제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치욕의 날’ 이후 분노한 미국 국민은 계층을 총망라한 대대적인 자원입대가 이루어졌는데 지원율이 90%에 달할 정도였다.
이런 본국의 분위기와는 달리 사실 태평양에서 미국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진주만의 공습과 동시에 일본군은 서태평양상의 미국령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공격계획을 세웠고 그 첫 번째 대상이 필리핀과 괌이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 이후 곧바로 괌에 맹폭을 가한 뒤에 3개 방면으로 괌을 침공하였다.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미국이 괌을 요새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미한 반격은 있었지만, 곧바로 괌을 점령할 수 있었다.
변수는 웨이크섬이었다.
사실 웨이크섬은 주된 공격목표는 아니었다. 일본으로서는 중부 태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섬으로 향후 이 섬을 중심으로 미국 항공기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있었기에 겸사겸사 공격할 목표에 넣은 곳이었다.
문제는 웨이크섬은 괌과는 달리 일본의 팽창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1939년부터 섬의 요새화가 진행 중이었다는 점이었다.
규모가 적고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미군은 일본군에 맞서 활주로를 지키면서 결사적으로 항전을 벌였다.
특히, 전함에서 떼어온 해안포의 활약이 눈부셨다. 공격을 위해 접근하던 상륙함대를 대상으로 수송선 한 대를 좌초시키고 카미카제급 구축함 하야테를 격침시켰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하야테는 전쟁에서 침몰한 최소한 일본 군함이었다.
웨이크섬의 상륙작전은 일본의 참패였다. 일본군이 300여 명의 전사자와 구축함과 수송선을 잃는 데 반해서 미국군의 전사는 0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패배는 일본군에게도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대책회의를 연 일본군은 반드시 웨이크섬의 점령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일본군의 명예와 사기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도 열광하였다. 치욕적인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로 전해진 첫 번째 승전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대대적인 일본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지원병력의 충원이 시급하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12월 15일경 증원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고 웨이크섬 동쪽 680km까지 접근하기도 하였지만, 상륙공격을 준비하는 일본군의 규모를 발견하고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해군 함대를 사지로 몰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사실 지원 포기 명령은 많은 반발을 부르며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어쩔 수 없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이번 웨이크섬 상륙작전에 임하는 일본은 명예회복을 위해 전력을 기울인 상태로 해군육전대의 수만 해도 1,500명에 달하는 대규모였기 때문이었다.
대규모의 2차 상륙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반격은 치열했다. 하지만, 소소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전력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일본군의 공세에 몰린 웨이크섬의 미군은 항복하고 말았다.
웨이크섬을 두고 벌어진 전투로 인해서 일본군은 미군의 격렬한 저항에 놀란 상태였다. 더구나 자신들의 타임 테이블대로 진행된 점령 작전에서 이 작은 섬을 점령하는데 10여 일을 넘게 소모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런 지체는 잠시였다.
동시에 이루어진 필리핀 침공과 말레이 해전, 싱가포르 전투에서도 모두 서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하면서 이후 일본군은 동남아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거의 장악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기나긴 태평양 전쟁에 서전은 모두 일본군의 승리로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모두 일본의 뜻대로 전쟁이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필리핀의 경우는 한 달 여 만에 마닐라를 잃었지만, 이는 전략적인 후퇴에 가까웠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미군을 바탄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결사적으로 방어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경우 지속해서 전력의 증강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미군의 경우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었는데, 바탄에 고립되어 보급이 끊기면서 병사들의 배식을 1/3로 줄여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였고 일부 신경쇠약과 정신착란에 자살하는 이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4월에 들어 조직적인 일본군의 공세가 지속되면서 미군은 더 이상 전선을 지켜내지 못하면서 바탄을 내어주게 되었고, 바탄에 있던 미-필리핀군 약 54,000명은 투항하고 말았다.
루손 부대의 지휘자였던 웨인라이트 중장은 코레히도르섬을 철수, 배수진을 치면서 한 달여를 더 저항했지만, 결국 일본군이 코레히도르섬에 상륙하면서 5개월간의 필리핀 전쟁이 종결되었다.
일본군은 마침내 필리핀을 수중에 넣게 되면서 차기 작전을 위한 전진 기지를 획득하였으나, 필리핀 점령하는 과정에서 입은 인적 및 물적, 시간적 손실로 인해서 이후 진행될 뉴기니와 솔로몬 방면에 대한 일본의 침공 계획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필리핀에 있던 미군의 격렬한 저항은 미군에서는 소중한 5개월이라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으며 미군은 이렇게 얻어진 시간을 모두 반격을 위한 준비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이렇게 태평양에서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와중에 전쟁의 여파는 미국 내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이번 전쟁은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재임도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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