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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라인할트와 만나고 며칠이 지났다. 그 이후로는 정말로 바빠진 것인지 성안에서 라인할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라인할트가 일을 잘 처리한 것인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염려하던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채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어쩌면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경각심을 갖고 생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트러블에 말려드는 건 사양하고 싶으니까.
나는 지금 성 한 편에 자리한 널찍한 연무장에 와 있다. 평소에는 다른 병사들이 훈련을 하는 곳이지만 용사들이 소환되고 나서부턴 중간에 시간을 비워서 용사들의 훈련장소로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덕분에 원래 훈련을 해야 될 병사들이 시내 순찰로 빠지게 되어 원성을 살줄 알았더니 반대로 감사를 받게 되었다.
성에 틀어박혀 검이나 휘두르는 것보단 마을을 돌아다니는 게 훨씬 낫다나 뭐라나.
네 명이서 쓰기엔 너무 넓은 연무장에 거리를 두고 선 용사들은 저마다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네 명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한순간 흘러나왔다가 사라졌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저마다 다른 무기들이 생겨나 있었다.
길은 은색으로 빛나는 화려한 검과 방패, 세라씨는 하프처럼 생긴 작은 활이었다.
나에는 여러 보석이 박힌 완드였고 라뮤는 자기 몸보다 큰 낫이었다.
여신에게서 받은 무구라고 하는데 아직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매일 시간을 내서 훈련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도 구석에서 끙끙거려 봤지만 무기는커녕 한숨만 나왔다. 여기서도 결국 난 잉여였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나는 저 네 명이 훈련하는 동안 한구석에서 따뜻한 눈길로 지켜보는 막중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참 날씨가 좋구나.
“춋!”
“끄악!”
갑자기 머리를 내달리는 격통에 비명을 질렀다. 이, 이 여자 정수리를 때렸어!
“제 수업 중에 한눈을 팔다니 이건 어떻게 된 걸까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돌리니 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든 채로 나를 흘겨보는 여자가 있었다.
만화에서나 보던 삼각 뿔테 안경을 낀 약간은 히스테릭해 보이는 여자였다. 얌전히 있으면 꽤나 미인일 것 같은데 참 안타깝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안경을 빛내며 가학적인 미소를 짓는 이 여자는 라인할트가 이 세계의 지식이 없는 나를 위해 붙여준 가정교사인 베티라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용사들이 훈련하는 동안 자유롭게 혼자서 빈둥거리려던 내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연상의 미인 가정교사는 남자들의 로망이지만 그것이 귀신같은 사디스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비스씬 하나 없는 어른들을 위한 비디오 같이 두근거림이 하나도 없다고.
“좋습니다. 그럼 수업을 재개하도록 하지요.”
빈틈없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베티가 책을 손에 들었다.
“이 세계 파시온드에는 7개의 왕국과 하나의 제국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모릅니, 끄악!”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회초리로 관자놀이를 얻어맞았다. 뭐야 이거 벌칙이 있는 퀴즈였던 건가?!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모른다는 사실에 당당해서는 안 됩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이 무슨 불합리한 처사인가.
한정된 사람의 수명으론 무슨 수를 써도 알지 못하는 게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평생 부끄러워하며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지식을 탐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고개를 똑바로 들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 것인가.
“대답은?”
“넵. 죄송합니다.”
제길. 예쁘지만 않았어도. 연상만 아니었어도. 저 회초리만 없었어도...!
내가 약한 세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베티는 내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라인할트는 도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런 사람을 보낸 건지 꼭 만나서 물어보고 싶어졌다.
“알았으면 됐습니다. 오늘은 당신의 두뇌 용량을 생각해서 저희들의 나라 렉시온에 대해서만 공부해 보도록 하죠.”
그것 참 친절하시, 크악!
이 여자가 또 때렸어! 이젠 아주 재미가 들린 모양이구나!
“대답은?”
“......네.”
언젠가 이자까지 쳐서 반드시 갚아줄 테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베티는 그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툭하면 막대기를 휘두르는 폭력교사인 주제에 수업은 꽤 이해하기 쉬워서 학창시절에 공부와는 연이 없던 나라도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예고도 없이 배속에 폭풍이 몰아쳤다. 또 다른 자아(페르소나)가 내 몸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려는 신호였다.
나는 지체 없이 손을 들었다.
“베티 선생님!”
“뭔가요?”
마침 설명이 일단락 된 참이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화장실 좀 다녀오, 크악!”
“다녀오도록 하세요!”
젠장, 일일이 때리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거냐! 이젠 조금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슬슬 배가 위험해지려해서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연무장에서 화장실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서 서두르지 않으면 이 나이에 차마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나아가고 있을 때 우연히 본 창밖으로 라인할트의 모습이 보였다.
나무와 수풀로 교묘하게 가려져 다른 위치에선 잘 보이지 않는 으슥한 곳에서 라인할트는 로브를 뒤집어 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선 베티를 보내준 인사라도 하러 당장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걷고 걸어 틀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쯤 간신히 화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변기에 앉아 모든 걸 내려놓는 순간 몸 안의 내 일부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여기에 오기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언제까지나 쏟아져 나올 것 같던 페르소나들을 모두 비우고 나서 산뜻한 마음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날아갈 것 같구나.
이대로 수업 따윈 잊고 어딘가로 놀러가고 싶어졌다. 격렬한 장 트러블 때문에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하면 봐주지 않으려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흠씬 얻어맞는 미래밖엔 보이지 않는군.
좋아. 돌아가자.
한순간의 일탈을 끝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갔다.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수업시간(이라 쓰고 맞는 시간이라 읽는다.)을 줄이려고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다.
아까 라인할트가 보였던 창가에서 그를 찾아보았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쉽지만 감사 인사는 다음으로 미뤄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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