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음. 이정도면 된 것 같구나.”
이자벨이 또 다른 가게에서 산 짐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내 양손에는 이미 허용량을 초과할 만큼의 짐이 그득히 들려 있었다.
이자벨이 말한 에스코트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고 있는 중인 것이다.
짐들의 대부분은 먹을 것들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핫도그 같은 것부터 조리가 필요한 고기나 야채 빵들이 그만큼의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컨트롤러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는 내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발작이라도 일어난 듯 거세게 떨리는 팔과 다리가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아우성 치고 있었다.
“저기, 이자벨.”
“음? 무어냐?”
“이렇게나 먹을 게 필요할까? 성에 가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간접적으로 짐을 포기하자고 어필해 보았지만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성에 있는 것들은 가지고 나올 수가 없지 않느냐. 그래선 소용이 없느니라.”
“그러면 이걸로 뭘 할 건데?”
내 질문에 이자벨은 어린아이다운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여줬다.
“친구를 만나러 갈 것이니라!”
친구. 친구라. 그러고 보니 그런 말도 있었지.
쳐져있던 팔에 힘을 넣어 흘러내리던 짐들을 추슬러 올렸다.
“그럼 얼른 가자.”
“응!”
정말로 기쁜 듯이 대답하곤 이자벨은 뛰듯이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그 뒤를 묵묵히 따라 걸으며 오래전 잊어버렸던 친구라는 개념을 되새겼다.
기세 좋게 출발했던 아까 전의 나를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싶어졌던 건 이자벨을 따라 걷기 시작한지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정신력으로 버티려 해도 몸뚱이가 따라주지 않아서야 말짱 도루묵인 것이다.
“조금만 더 힘 내거라. 얼마 안 남았느니라.”
앞서가던 이자벨이 17번째 같은 말을 되풀이 했을 때 우리는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땐 이미 내 팔이 팔인지 석고인지 분간이 가지 않게 됐을 때였다.
“드렉은 남자인 주제에 허약하구나.”
“헤엑... 헤엑...”
뭐라고 받아쳐 주고 싶었지만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나를 방치한 채 이자벨은 작고 허름한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이리 오너라!”
이자벨이 문을 두드리고 잠시 후 안쪽에서 작은 발소리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낡은 나무문이 열리며 안에서 이자벨 또래의 여자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 이자벨이다!”
“놀러왔느니라 파오.”
“응! 어서 들어와!”
파오라고 불린 소녀가 문을 활짝 열며 이자벨을 안으로 들였다.
“오늘은 짐꾼도 같이 왔느니라. 드렉. 어서 가져온 걸 안으로 들이거라.”
나를 짐꾼이라 불렀겠다. 저 건방진...!
“와~ 먹을 게 잔뜩 있어!”
내가 들고 온 봉투 안을 들여다 본 파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환호성을 질렀다.
“있잖아, 이거 정말 받아도 돼?”
“물론이다. 그러려고 일부로 사온 것이니라. 사양 말고 받으면 되느니라.”
“고마워 이자벨!”
기뻐하며 방방 뛰는 파오를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게 미소짓는 이자벨을 보니 평범한 10살짜리 여자애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파린은 어딨느냐?”
“언니는 아침에 일하러 나갔어. 곧 돌아올 거야.”
“그런가. 그렇다면 우리끼리 놀고 있자꾸나.”
“오늘은 뭐하고 놀 거야?”
“으음... 글쎄 술래잡기는 둘이서는 못하고... 음?”
파오와 이자벨이 동시에 나를 보았다. 뭐냐 그 눈빛은.
“저기, 드렉. 술래잡기는 둘이서는 하지 못하는 놀이라는 것 같구나.”
“으,응 그렇지.”
“아저씨. 파오랑 놀아주지 않을래? 그러면 파오가 좋은 것 해줄게!”
“좋아. 내가 술래니까 다들 얼른 숨어!”
““와아!””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위해서 이 한 몸 바쳐 술래의 의무를 다하리라 다짐했다. 결코 좋은 일에 혹한 것이 아니다.
문을 등지고 서서 숫자를 셌다. 룰은 간단하게 집안에서만 숨을 것, 그리고 술래를 따돌리고 문 밖으로 나가면 승리.
눈을 감고 열까지 카운트를 마친 후 뒤로 돌아 섰다.
어차피 좁은 집안이라 숨을 곳은 한정 돼 있다. 이 정도라면 나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지.
옛날 명절 때 놀러온 사촌 동생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던 술래잡기 실력을 보여주마.
우선 숨어 있을 만한 장소를 트레이스 해서 후보를 추린다.
그리고 그 장소를 중심으로 해서 조금씩 범위를 넓혀간다. 만약 찾게 되더라도 바로 붙잡지 않는 것이 포인트다.
서서히 조여 가며 기다렸다가 방심하는 순간 최대의 서프라이즈를 선사해 주는 것이 나의 방식이다.
아직 어렸을 적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을 때 이 방식으로 귀신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었다. 그리고 점점 나에게 술래잡기를 권해 오는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그때부터였을까요. 친구가 하나둘 사라지게 된 것이.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니 너무나도 간단하게 찾을 수 있었다.
테이블 밑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민 이자벨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저 애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오늘 처음 봤을 때도 훤히 보이는 곳에 숨어 있었고. 조금 더 숨으려는 노력을 해줬으면 좋겠다.
이대로 끝내는 것은 간단하지만 안쓰러워서 일단 눈감아 주기로 했다.
다음으로 옷장 문틈 사이로 파오의 옷자락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짐짓 모른척하며 빙 둘러서 옷장에 바싹 접근했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죽인 채 먹이가 제 발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조심스럽게 옷장 문이 열리고 파오가 나왔다.
나는 파오의 뒤에 서서 놀래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파오가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가고 나도 그 뒤를 발소리를 죽인 채 따라갔다.
이윽고 문 앞까지 도착한 파오가 희희낙락하며 문손잡이를 잡으려 한 순간.
“파오 언니 왔...”
“왁!”
“꺄아아아!”
파오가 문을 여는 것보다 한 박자 빠르게 문이 열리고 그 뒤에서 젊은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화분을 던지는 모습을 본 다음 순간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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