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불 꺼진 방의 천정을 올려보며 잘 보이지도 않는 얼룩을 찾아 세었다. 이러다 보면 잠이 들겠지.
그 때 옆에서 뒤척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형. 주무세요?”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꿈처럼 조용히 맴돌았다.
살짝 돌아보자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것 같은 라뮤의 눈이 보였다.
“아니. 아직 안 자.”
“아. 죄송해요. 잠이 안와서 그냥...”
부끄러운 듯 우물쭈물 거리는 모습이 짖게 깔린 어둠 너머로도 훤히 보이는 것 같아서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렇게 잠이 안 올 때만이 아니라 언제라도 말을 걸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 삶의 행복도가 단숨에 오를 텐데 말이지.
“괜찮아. 사실 나도 바닥이 딱딱해서 잠이 잘 안 왔거든.”
“에헤헤... 저는 이렇게 남자들끼리 나란히 자본 적이 없어서 왠지 두근거려요.”
“응?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같은 데 가면 다 같이 자지 않아?”“수학...여행이요?”
라뮤는 의문스런 표정으로 내가 한 말을 되뇌었다. 내가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건가?
“라뮤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잠든 줄 알았던 길이 불쑥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것보다도, 라뮤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니 무슨 말이지? 우리나라는 중학교까지 의무교육 아니었나? 어디 병이라도 걸렸던 걸까?
그런 내 의문에 길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던지듯이 말을 뱉었다.
“우리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동떨어진 삶을 산다. 용사로 선택받는 다는 건 그런 거다.”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어렴풋한 분노와도 같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전에도 느꼈었지만 길의 용사에 대한 생각은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아, 아우... 그, 그래서 저 지금 조금 즐거워요!”
분위기가 무거워지려고 하자 라뮤가 허둥대며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용사들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흥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억지로 들을 마음도 없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지금 현재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라뮤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해주고 싶다.
아니, 지금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도 불안해하지 않도록 평생 책임져 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렇게 된 이상 결혼할 수밖에 없겠는 걸.
“그래. 그건 다행이네.”
“네. 에헤헤.”
그건 그렇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기껏 이렇게 라뮤가 말을 꺼냈는데 벌써 화제가 떨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할 말이 없으니 이만 잠을 잡시다-하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평소에 누군가와 대화를 오래 이어가 본 적이 별로 없다보니 이럴 때 능숙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란 놈 못난 놈...
과열한 머리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생각을 해봤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찾지 못했다.
“저기... 용사님들?”
그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듯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부디 이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 아니길 바란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사람을 쳐다봤다.
지금까지 우리와 며칠간 같이 행동한 마부였다. 분명 이름이... 마부랑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존재감이 흐려서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 생각을 읽은 듯이 마부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저는 마빈입니다. 워낙 특징이 없다보니 다른 분들도 자주 잊어버리시더라구요.”
며칠간이지만 함께 한 사람들이 자신을 잊어버렸는데도 서운한 기색 한 점 내비치지 않고 자연스레 배려까지 해주었다.
분명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나 같으면 그대로 구석에 틀어박혀 없는 사람처럼 지냈을 텐데.
“그래서 무슨...?”
“뭐, 별 일은 아니고 그냥 용사님들이랑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요. 평소에는 잘 이야기하지 못하니까 말이죠.”
“아하. 그렇군요.”
하긴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대부분은 길을 제외하고는 마차(와 짐칸)에서 생활 했으니까. 얼굴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으니 이야기 할 기회 또한 없을 수밖에.
그래도 살았다. 나 혼자였으면 어쩔 줄 몰라하다가 거북한 분위기 속에 억지로 잠을 청해야 했을지도 몰랐으니까. 아니 분명히 그렇게 되었으리라.
“지금껏 변변찮은 기회가 없어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저희들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순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곧 라인할트령의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왜 바로 떠올리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다.
어쩌면 이렇게 편한 자세로 감사인사를 받아서 상황에 따라가지 못한 걸지도 모르지.
옆에서 보면 상당히 이상해 보일 광경이니까.
뭣보다 나는 그 라인할트령을 구한 용사라는 카테고리에서 빠져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다네.”
반대쪽에 있는 길과 라뮤에게 말해봤지만 길은 못들은 척 하는 건지 말이 없었다. 라뮤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내 소매를 꼭 잡고 허둥거렸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당사자에게 감사 인사를 받은 건 처음이라 그런 거겠지. 익숙하지 않은 것뿐이다.
앞으로도 여행을 계속하다보면 이렇게 사람들을 구하고 감사받을 일도 많아지겠지.
......반대로 원망 받고 적이 늘어나는 상황도 있겠지만 지금 신경 써봤자 소용없는 일이니까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그 땐 참 굉장했죠. 그렇게 많은 몬스터들은 처음 봤습니다.”
자연스럽게 몬스터 침공 당시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마빈의 이야기에 나와 라뮤는 귀를 기울였다.
“그런 일이 전에는 없었나요?”
“이번 정도는 아니지만... 꽤 오래 전에도 한 번 몬스터들이 성벽을 넘어 침입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피난에 늦으셨던 당시의 영주님과 가족 분들이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영지를 떠나있었던 지금의 영주님만 살아남으셨죠.”
지금의 영주라... 알렌은 이미 영주가 아니지만 일반 사람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른다. 국왕이 그 일이 공표되지 않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뻔한 사건의 범인이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던 영주라고 알려지면 큰 소란이 일어날 테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결국 밝혀질 텐데 어떻게 수습하려는 걸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닐 테지만 단순히 시간 끌기가 아니길 바란다. 어떤 형태로든 관련된 사건이 좋지 못하게 끝나서야 꿈자리가 사나워질 것 같으니까.
“그런데 그 일로 이상한 소문이 한동안 돌았었죠.”
“소문이요?”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마빈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봤자 조용한 방 안이라 끝에 있는 길에게 까지 들릴 정도였지만.
“네. 그날 영주님 가족이 제때 피난하지 못한 것이 국왕 폐하의 명령 때문이라는 소문이었죠.”
“국왕이...?”
잠자코 있던 길이 무심코 말을 흘렸다.
하지만 그 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파티가 열리던 회장에서 이상할 정도로 국왕에게 적개심을 보이던 알렌의 모습이었다.
국왕에게 말했던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이란 게 이 소문이랑 관련 있는 거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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