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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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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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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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18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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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34. 헛것이야(5)

DUMMY

바닥에 눌린 뺨이 아플만큼 머리가 무거웠다. 모래인지 흙인 속에 섞인 작은 돌맹이 하나가 한 군데를 꾹 찌르고 있는 것도 거슬렸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마 위에 올라가 있는 고기에게 생각과 감각이 있다면 지금의 나와 완전히 일치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무기력했고 그만큼 너덜너덜했다. 어디 심각하게 아픈 곳이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런 일을 겪었다면 어디 팔 다리 하나쯤 뒤집어졌대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발견해서 자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하기야 시큼달콤한 과일 쥬스가 한가득인 사막과 산보다도 더 큰 덩치에 맹수보다 이빨이 많은 레몬을 봤으니 이제 웬만한 건 놀랄 거리도 못 되었다.


목덜미에 뭔가 차갑고 날카로운 게 닿은 건 바로 그 때였다.


"으아악!"


방금 전까지의 무기력함이 무색하게 난 펄쩍 뛰어올라 발작했다. 암만 몸을 뒤틀고 흔들어도 목덜미의 그 축축함은 사라지지 않아서...


그래, 축축함이었다. 목덜미를 찌른 느낌의 정체를 알아챈 나는 문득 정신차리고 가만히 앉아 목 뒤를 만져보았다. 손가락 끝에 살짝 묻어나온 건 물이었다. 투명한 물. 쥬스 따위가 아니었다.


"허...! 물이다...!"


그리고 희끄므레한 형체가 흐물거렸다.


"으아! 사람이다!"


그건 사람이었다. 이젠 놀랄 거리도 없다는 건 건방진 착각에 불과했다. 이쯤되면 땅바닥의 돌이 우연히 네모난 것만으로도 펄쩍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애는 모자가 달린 밝은 색의 후드로브 입고 검은 단발 머리를 사과잎처럼 쫑긋 묶은 여자애였다.

어깨에 매고 있는 스태프까지 그건 완벽한...


"레샤?!"


그건 분명 레샤였다. 아는 사람의 등장에 나는 당장 모릎을 꿇고 레샤를 끌어안았다.


"레샤아아아! 내가 진짜 여기서 널 봐 다행이지! 이대로 혼자 죽는 줄 알았어...!"


통곡이 절로 나왔다. 정말 눈물이 나는 건 아니었

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그러지 않곤 못 배길 정도로 놀랍고 감동이었다. 낯선 곳에서 아는 이의 가슴이란 기댈 수 있는 벽이요 방황하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게다가 나름 여름용 옷이라고 소재가 얇고 부드러운게 느낌도 좋았다.


...


그렇게 무심결에 껴안고 있다가 문득 느낀 거였는데, 이상하게도 저항이 없었다. 평소의 레샤라면 놔달라거나 무슨 짓이냐며 떨어지려고 할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밀어내는 손도 없었고 아득바득 화내는 말도 없었다.

고요함의 불안을 느낀 난 슬쩍 고개를 들어 레샤의 얼굴을 보았다. 그 애는 화 내고 있지 않았다. 갈 곳 없이 눈동자를 굴리는 난처한 눈과 할 말 없이 오물거리는 입술만 새빨간 얼굴 위에서 분주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애의 눈동자가 깊고 맑은 물처럼 파란색이라는 건 그 때 알 수 있었다. 레샤의 눈동자는 새까만데.


"아니. 저기 너, 그... 누구니....?"


그렇게 말한 다음에야 나는 떨어져 주는 게 먼저라는 걸 깨닫고 그 애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레샤를 꼭 닮은 파란 눈의 여자애는 서너 걸음 물러나서는 고개를 푹숙였다. 이따금씩 손가락을 쭉편 체로 깍지를 끼거나 그 손을 모아쥐거나 할 뿐 그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레샤는 아닌거지...?"


내가 묻자 그 애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쑥쓰러움으로 가득 물든 얼굴은 조금 지난 후에야 끄덕거렸다.


"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내가 모르는 사람 막 붙잡고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 그럼! 그럼... 지금부터라도 알면 되지! 혹시, 이름을 알려줄 수 있을까?"


"..."


그 애가 말했다. 그러나 나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입술만 움직일뿐 소리가 들리진 않았던 것이다. 암만 말을 해도 복화술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 저기... 안 들리는데...?"


"...."


그 애는 또 무언가를 말했다. 이번에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걸 낯빛으로 알아챈 것인지 그 애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건 말하기를 그만두겠다는 것 같았다.


몇 가지 더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말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나는 그 애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혹시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닌가 혼자 소리도 질러보고 박수를 쳐봐도 그것들은 똑바로 들렸다.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애한테 너 벙어리냐고 대놓고 묻기도 뭣해서 나는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혹시 네가 괜찮다면 그냥 레샤라고 불러도 될까?"


그 애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생김새도 똑같은 거 호칭도 통일하는 게 실수할 일 없이 편했다.


"아... 그래. 고마워. 그럼, 레샤. 어... 네가 날 여기로 데려왔니?"


나는 차근차근 새로운 레샤에게 물었다. 그 애는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하기야 그 놈의 쥬스 사막에서 떠밀려 왔다면 적어도 그 근처에 있어야했는데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쥬스 사막과는 완전 다른 별천지였다.

얼마나 오래 기절해 있던 건지 파랗던 하늘도 노을이지고 있는데다가 흙과 풀이 가득한, 약간이나마 고향에 좀 더 가까운 곳에 와 있었다. 미크로셀에도 아이힐데른에도 비슷하게 생긴 풀이 많았다. 크기가 한... 백 배 정도 차이가 나서 그렇지.


이야. 풀이 저만큼 자란다면 약초 걱정 같은 건 할 필요도 없이 늘 넘쳐날텐데. 그럼 다들 집에 풀 열포기씩은 가지고 있을거고, 없더라도 옆집에서 빌리면 되는 거고. 이런 일을 겪을 필요는 없었을 거고!


당연하게도 새로운 레샤는 내 질문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예상대로였다. 저런 애가 날 여기까지 끌고 왔을 리는 없을테지.


"그럼 여기가 어디... 아니. 아, 미안..."


별 생각없이 물었던 나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애를 놀리는 것도 아니고 둘이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누가 있으면 바늘같은 눈총을 받을 뻔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답을 기대하기는 힘들었으므로 난 대신 다른 걸 물어보기로 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정확히는 모르더라도 상대적으로 얼마나 더 떨어지게 된건지는 알고 싶었다. 말하자면.


"그럼 쥬스로 이루어진 사막이 어딘지 알아? 내가 거기있었거든..."


레샤는 푸른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그리고는 위로 천천히 굴리다가 다시 날 보고선 검지를 번쩍 높이 치들어 위를 가리켰다.


위라고? 나는 위를 보았다.

천정에선 하늘이 쏟아지고 있었다.


"왁! 뭐야!"


나는

아니 쏟아지지 않았다. 노을이 진 하늘은 호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그러나 쏟아지지는 않았다. 막상 하늘도 아니었다. 하늘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쥬스처럼 반짝 거리거나 가끔 기포가 끓어오르지도 않았다.


"설마... 저기서 떨어졌다고...?"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저기서 떨어졌으면 나는 소에게 밟힌 쥐처럼 되었겠지. 그런데 그것 말고는 딱히 짐작가는 것도 없었다. 정말 떨어진 건가.


내 말을 들은 것인지 레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손짓으로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저 위에서 뭔가가 휙 떨어져 양팔을 쭉 펴서 설명할 정도로큰 소리가 나서 와보니 당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거짓말처럼 들리는 얘기도 저토록 열심히 손을 흔들고 저어 설명하니 마냥 뻥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었다. 초거대 레몬을 봤을 때부터 인지능력이라는 것이 고장나서 분별력이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나는 내 볼을 잡아당겨보았다. 확실하게 만져지고 확실하게 꼬집히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살짝 덤덤한 감도 있고 아리송했다.

결국 나는 레샤에게 부탁해보기로 했다.


"저기, 나 좀 한 대 때려줘 볼래?"


난데없는 요구라고 생각한 건지 레샤는 깜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한 부탁이라는 거 나도 안다. 허기사 그게 정상이었다. 이게 정상이지. 때려달라고 했다고 그걸 서슴없이 때리는 사람하곤 친구가 될지 말지 좀 깊이 생각해 봐야했다. 그래도 확실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몇 번더 부탁하자 레샤는 주먹을 꽉 쥐고선 뭔가 어색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잡더니 다리를 쭉 뻗었다.


아.


"아프네...! 이그윽..!"


그것도 엄청.

나는 걷어차인 정강이를 붙잡고 방방 뛰어다니다가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주먹으로 등이나 좀 때릴거라 생각했던 건 아주 큰 오산이었다. 사람을 도울 때는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 해 도와주는 아주 착한 애였다.


이래서 너무 착한 애들한텐 친구가 없다니까...


얼얼한 정강이는 금방 괜찮아졌다. 아프지않게 되고나서 보니 사람이란 게 얼마나 엄살이 심한지 알 수 있었다. 겨우 요만한 애한테 차였다고 부러진 것 같은 비명을 지르다니.

실수였다. 오늘 있었던 수 많은 실수들과 비교하면 티도 나지 않는, 아주, 티끌만한, 작은 실수.

가벼운 헛기침 한 번으로 남은 어색함을 마저 털어낸 나는 이어서 또 다른 부탁을 했다. 여기가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저기, 혹시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나 좀 데려다 줄 수 있겠니?"


날 빤히 보던 레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다. 세상에 내가 아는 누구하고는 완전히 다른 종류... 아니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였다.


레샤는 내게 따라오라고 손짓 하고선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호의에 기꺼이 응해 뒤를 따랐다. 걷는 걸음이 편안했다. 그제야 좀 안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여기가 어딘지 알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길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없었다. 풀줄기가 자라고 남은 자리를 따라 걷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가끔 무거워 늘어진 잎줄기가 앞을 막아 치워내야하는 것만 빼면 길도 평탄한 편이었고 오히려 그늘이 많아서 좋았다.


그 때까지는, 그 후로도 얼마까지는 괜찮았다. 그 뒤에도 나쁘진 않았고 그 뒤뒤에는 조금 벅찼지만 앞서 걷는 레샤를 보며 참았다. 그러나 곧 한계에 부딪쳤다.


"저기, 이제 얼마나 더 가면 돼?"


나는 그 애의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레샤는 날 보면서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는 저 앞을 가리킨 다음 검지와 엄지를 아주 약간 벌려 작은 틈새를 만들어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거 같았다.

그건 참 희소식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조금만 더 가도 된다면.


"그럼. 조금만 쉬었다 가자."


사람을 만나는 건 좋은데,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이면 서로에게도 좋을 것 없지 않은가.

내가 아무 땅바닥에나 대충 앉으려고 하자 레샤는 얼른 내 팔을 잡아당겨 그러지 못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고개를 엄청 저어대는 것이 그러지 말라는 것 같았다.


"아니. 저기... 사실 내가 오늘 너무 많은 걸 봐서 좀 힘들거든..."


나름대로 사정 설명을 해보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진짜 조금만 쉬었다가면 안 될까? 진짜 조금. 진짜, 정말로. 아니, 그러니까..."


계속 싫은 내색을 보이자 레샤는 아예 뒤돌아서서 날 잡아당기는데만 전념했다.

이 애, 사실은 착한 게 아닌 게 아닌 걸까? 남이사 힘들든 말든 밀어붙이는 걸 보니 잠깐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합의고 뭐고 간에 나는 바닥에 엉덩이부터 대고 봤다.


레샤가 암만 날 잡아당겨도 거기 붙은 바위치럼 꿈쩍도 않고 버텼다. 이젠 쬐깐한 애가 당기는 거 가지고는 꿈쩍도 하지 않을만큼 몸이 다부져졌다.


이러라고 단련하고 또 단련 시킨 건 아닐텐데.

뭐 아무렴 어떤가, 써먹을 데가 있다는 건 부질없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내 오른팔하고 씨름을 하던 레샤는 안되겠다 싶은 것인지 내 뒤로 돌아가서 등을 밀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갈리가 없었다. 내가 등만 살짝 구부릴뿐 여전히 꿈적않자 레샤는 어깨와 등을 대고 밀어대었다.


"저기, 이쯤되면 쉬라고 할 법도 하지 않냐? 좀 너무 하지 않아? 너 평소에도 내가 무슨... 아... 아니지..."


그러고보면 얘는 레샤가 아니었지. 깜빡 잊고 진짜 레샤에게 하던 것처럼 말하려던 나는 슬쩍 입을 다물어버렸다.


스르륵 사르륵 하는 바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 그때부터였다. 저만한 풀이 흔들릴 정도라면 꽤 센 바람이었다. 쉬기에는 안성맞춤인 시기라는 것. 나는 앉은 내 자리를 더 완고하게 지켰다.

이상한 건 시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때까지도 바람소리가 아니었던 바람소리는 계속 들리고 있었다. 어쩐지 레샤가 밀다 못해 내 등을 때리듯이 치고 있더라.


"저게 무슨 소리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겁을 먹은 표정이 역력한 레샤가 날 뒤에서 밀어댔다. 자연히 우리는 달리게 되었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인데 그래?"


따라가면서도 나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대꾸는 당연히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새로운 단서가 나타났다.


"씨에에에엑...!"


바람소리가 아니라는 것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풀은 더 크게 흔들렸다. 그건 부분적이었고 불규칙했다. 뭔가가 수풀 사이에 숨어 우릴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씨이이이야악...!"


앞에서 들리는 소리.

나는 땅에 발을 크게 찍어 멈추었다. 뒤따르던 레샤의 손도 놓치지 않고 반대로 당겼다. 그 위로 칼날이 내려쳐졌다.


칼날? 아냐 그건 칼날이 아니었다. 오히려 낫에 가까웠다. 날등에 가시가 틈틈이 솟고 풀의 색과 비슷하게 더 연한색을 띈 낫. 하지만 그건 도구가 아니었다. 생물의 앞발이었다.


커다란 눈과 빈약한 턱 껍데기로 이루어진 삼각형 꼴의 혐오스러운 얼굴이 뒤이어 수풀을 헤치고 튀어나왔다. 족히 내 두 배는 될 크기의 사마귀였다.


"카라라라랅...! 클륵클륵클륵크리리릵...!"


울음소리라기보단 점액질이 묻은 단단한 껍데기가 서로 부딪치며 나는 끈적하고 거친 소리였다.

사마귀는 머리는 날 보고 있었지만 눈은 허공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 기이하게 생긴 눈엔 내가 비춰지고 있을 것이다. 그 시선이 얼마나 섬뜩하게 보였던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런 게 있음 말을 했어야지!"


그리고 얼마나 억울했는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물론 그럴 것도 없이 내 잘못이었다.


"아잇! 미안해!"


억울하기로는 나보다 훨씬 더 억울할 레샤를 옆으로 밀쳐낸 나는 무릎이 부서져라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날카로운 사마귀의 앞다리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접었던 앞다리를 길게 뻗으면 거의 자기 몸만큼 늘어났다.


"꿈이지! 이거 꿈이라고 말해! 얼른!"


나는 사마귀에게 소리쳤다.

내 말을 듣기는 하는 건지 녀석은 턱뼈를 벌리며 침만 질질 흘려댔다.


한 녀석이 모습을 드러내자 뒤쫓아오던 다른 사마귀들도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두 마리, 처음에 나타났던 녀석까지 하면 세마리였다.


그래. 팔다리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 먹은 다음 머리랑 몸통은 가위바위보 하면 되겠네. 가위밖에 못내겠지만!


앞에 있던 녀석이 내게 더 저돌적으로 다가왔다. 제 가늘지만 커다란 몸을 과시하며 앞다리를 높이 들었다.

그 때, 발치에 무언가 닿았다. 고개를 숙이자 검은 봉이 보였다. 스태프. 레샤가 던진거였다.


나는 바닥을 구르듯 스태프를 집어들며 동시에 내려찍히는 사마귀의 앞다리를 피했다. 그건 피했다기보다 막힌 거였다. 뒤엣 녀석 역시 날 노렸던 것이다. 두 사마귀가 사이좋게 악수를 하는 동안 나는 비교적 간단하게 그 사이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몸을 일으켜 곧장 대비할 태세를 갖추는데 사마귀는 나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시비가 붙어서 동료에게 앞발을 휘둘렀다.


애초에 동료가 아니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살던 곳의 사마귀는 항상 혼자 다녔다.


"씨이이이엑!"


먼저 한 대 맞아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사마귀가 괴상한 소릴내며 앞다리를 휘두르자 상대적으로 무방비 했던 처음 녀석의 몸통에 그대로 적중했다. 두 녀석은 본격적으로 싸움에 들어갔다.

그렇대도 한 마리가 남아있다는 걸 나는 잊지 않았다. 녀석또한 동족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날 잊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그 애매한 시선으로 날 보며 턱을 깨작거렸다.


우선, 그러니까 일단은...

도망쳐보기로 했다.


"뛰어뛰어뛰어!"


나는 멍하니 굳어있던 레샤를 일으켜 등을 떠밀었다. 어부지리를 하게 된 사마귀는 거슬리는 풀줄기는 앞다리로 짓이기고 잘라가며 무자비한 속도로 쫓아왔다.

따라잡힐 건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예측한 바였다. 내가 해야할 일은 적절한 시기에... 그러니까 녀석의 앞다리가 다을랑말랑하는 바로 지금!


팍!


나는 황급히 뒤돌아 넓게 잡은 스태프로 사마귀의 앞다리를 막아냈다.

막아졌다.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 이까짓 나무 막대기가 저 커다란 사마귀의 일격을 버텨낸 것이다.

레샤의 스태프에선 어떤 작은 푸른색 빛이 전신에서 튀기고 있었다. 방어 마법... 같은 건가?


몰라. 알게뭐야.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녀석의 일격을 버텨냈다는 것이다.

나는 사마귀가 남은 한 개의 앞다리를 휘두르기 전에 먼저 가시에 걸린 스태프를 빼내 자리에서 벗어났다. 한 발 늦게 녀석의 앞다리가 빈 흙바닥을 푹 파고들었다. 나는 그 다리를 힘껏 쳤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건 손바닥이 얼얼해지고나서야 깨달았다.


하긴 내가 저 녀석 앞다리를 막을 수 있었으니 그 반대도 똑같겠지.


사마귀는 커다란 앞다리를 접고 들어 다시 쭉 폈다. 어마무시한 높이에서 떨어지는 힘에 다리를 접는 힘까지 더 한다면... 글쎄.


저런 걸 맞서 막으려고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나는 실전으로 배웠다.


녀석이 앞다리를 내려찍는 순간 나는 역으로 녀석의 앞으로 파고들었다. 몸이 막대기처럼 얇은 탓에 피해 들어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거대하고 튼튼해 검과 방패의 역할을 모두 할 수 있는 앞다리에 비해 녀석의 뒷다리는 한눈에 보기에도 부실해보였다.

나는 스태프를 길게 잡고 검을 휘두르듯 첫번째 뒷다리를 내려쳤다.


손의 감각은 확실했다. 파각! 하는 소리는 더 확실했고 녀석의 뒷다리가 부러졌다. 완전히 부서져 잘려나가지는 않았지만 껍데기에 금이 갔고 반투명한 초록색 액체가 세어나왔다.


"키익...! 키익...! 킉...!"


곤충에게도 고통이란 있는지 사마귀가 턱을 부르르 떨며 몸을 비틀었다. 그건 동시에 날 공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어설프게 휘둘러지는 앞다리를 또 피했다.

날 보기 위해 몸을 돌리던 녀석은 금이간 다리가 기형적으로 몸을 비틀며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그 녀석이 나보다 빠르다는 것이었다. 그 만큼의 덩치 차이였다. 나는 몸을 비트는 녀석의 배에 부딪쳐 나가떨어졌다.


레샤가 달려와 날 부축했다.

그 다음 계획. 만약 이렇게 된 후의 계획이 내겐 필요했다.

잠깐 궁리하고 알아챈 건 내가 그다지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거였다.


녀석은 날 향해 다가왔다. 사마귀가 먹이를 어떻게 먹더라.

앞다리로 잘게 잘라서 먹던가, 아니면 그냥 턱으로 씹어먹었던가. 어느 쪽이든 곱게 죽는 느낌은 아니었다.


녀석은 앞다리를 들었다. 그러나 내려찍지는 못했다. 녀석이 다리를 휘두르기 전에 더 큰 다리가 놈을 낚아챘다. 거대한 사마귀. 그 사마귀보다도 더 큰 사마귀의 앞다리에 날 공격했던 녀석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아이들이 사마귀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흉폭하게 생긴 생김새도 한 몫하지만 무엇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건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을 때였다.


나는 녀석의 마지막을 보지 않았다. 대신 레샤를 거의 안듯이 데리고 수풀을 빠져나갔다.


작가의말

하하. 컴퓨터가 정말 죽었습니다. 전에 하드가 고장났다고 한 적있는데 그래서 집에서 안 쓰는 하드를 받아다가 바꿔서 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봐요. 그거 고쳐보겠다고 며칠 해보다가 결국 아예 새로 사기로 했습니다. 학교 자료고 과제고 뭐고... 음. 그래도 좋네요. 와! 새컴퓨터다. 고사양으로 새로사면 정말 재밌겠는걸? 와 ㅋㅋ 정말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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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 54. 조각조각 사각사각(2) +2 21.10.05 202 2 12쪽
307 54. 조각조각 사각사각(1) +1 21.10.02 122 3 17쪽
306 드리는 말씀 21.10.02 144 4 2쪽
305 53. 파편의 편파(5) +2 21.01.26 163 3 20쪽
304 53. 파편의 편파(4) +2 21.01.07 134 2 13쪽
303 53. 파편의 편파(3) +2 20.12.31 137 4 27쪽
302 53. 파편의 편파(2) +2 20.12.21 151 4 19쪽
301 53. 파편의 편파(1) +2 20.12.15 133 3 20쪽
300 52. 편파의 파편(6) +2 20.09.19 174 6 24쪽
299 52. 편파의 파편(5) +2 20.09.09 168 3 16쪽
298 52. 편파의 파편(4) +2 20.09.05 137 5 19쪽
297 52. 편파의 파편(3) 20.08.20 136 4 19쪽
296 52. 편파의 파편(2) 20.08.13 140 3 20쪽
295 52. 편파의 파편(1) +8 20.08.07 166 5 17쪽
294 51. 찰박찰박 해(5) +3 20.04.24 184 2 17쪽
293 51. 찰박찰박 해(4) +2 20.04.21 149 2 19쪽
292 51. 찰박찰박 해(3) +4 20.04.13 151 3 20쪽
291 51. 찰박찰박 해(2) +3 20.04.07 152 3 16쪽
290 51. 찰박찰박 해(1) 20.04.07 143 3 12쪽
289 P.S 푹 익혔어 +4 20.04.02 157 3 10쪽
288 50. 삼월의 토끼(5) 20.04.01 148 2 12쪽
287 50. 삼월의 토끼(4) 20.03.27 137 3 14쪽
286 50. 삼월의 토끼(3) +4 20.03.25 144 3 20쪽
285 50. 삼월의 토끼(2) +2 20.03.22 177 3 22쪽
284 50. 삼월의 토끼(1) +2 20.03.17 139 2 15쪽
283 49. 오목과 오목(5) 20.03.13 148 2 16쪽
282 49. 오목과 오목(4) +2 20.03.01 171 2 18쪽
281 49. 오목과 오목(3) +6 20.02.27 154 2 22쪽
280 49. 오목과 오목(2) +4 20.02.21 157 3 23쪽
279 49. 오목과 오목(1) 20.02.19 164 2 26쪽
278 48. 볼록과 볼록(5) 20.02.13 153 2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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