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타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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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차.
작품등록일 :
2017.06.08 23:03
최근연재일 :
2017.06.2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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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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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DUMMY

“생각보다 좀 늦었구나. 음? 애런, 무슨 일 있었니?”


에즈라는 발레르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넋이 나가 있는 애런을 보며 걱정되는 투로 말을 건넸다. 아무 말이 없는 그를 보며 발레르가 대신 대답했다.


“그게, 아까 어떤 사람을 만나서요.”


“누구를?”


“귀신...”


나지막하게 내뱉는 애런을 말을 무시하며 발레르는 손을 뻗어 움직이며 묘사를 도왔다.


“흑발의 단발머리인 여성분을요. 저희랑 나이가 비슷했던 것 같았어요.”


“아, 타라를 만났구나.”


단발머리의 또래가 없었던 건지 에즈라는 듣자마자 그녀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선생님과 아는 사이에요?”


“우리는 서로 다 알고 있단다. 그 아이는 타라 아일라라고 딱 너희랑 동갑이구나. 인사는 좀 나눴니?”


“아니요, 타라라는 그 아이도 저희를 쳐다보기만 해서 차마 말을 건네지는 못했어요.”


“좀... 뭐라고 해야 하나, 분위기가 날카롭다고 해야 하나. 엄청난 미인이긴 한데 나는 좀 무섭더라고.”


애런의 부연설명을 들으며 에즈라는 대충 어떤 느낌인지 이해한다는 듯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래, 그런 면이 있지. 괜찮아, 인사는 다음에 학교에 가면 그때 하면 돼. 자, 이제 너희도 그만 잘 준비하렴.”


“맞다, 아저씨 저기 뒤에 있는 거 바다 맞죠?”


들어가려던 애런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휙 뒤돌았다. 에즈라는 그 장관에 매료된 애런을 보며 수긍했다.


“이쁘지 않아? 낮에 보면 배는 더 아름다워. 이제 정말 자자.”


“주무세요.”


인사를 건네고 각자의 방에 들어가며 애런은 기운이 빠진 듯 축 쳐진 채로 걸어가며 발레르에게 하소연했다.


“언제쯤 사람대접 받을런지.”


************************************************


애런의 바람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고 일어난 그들은 에즈라도 학교에 나가고 딱히 집에서 할 게 없어져 바다를 한 번 다시 보러 나갔다. 일부러 사람이 없을 만한 구석진 길로 다녔지만, 어쩔 수 없이 몇몇 사람들을 마주치긴 했다.


어제와도 같이 그들은 발레르와 애런을 유심히 바라봤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경계가 아닌 호의적인 눈빛이라는 것이었다. 한두 명은 움찔하며 말을 걸어보려는 몸짓도 취하기도 했다. 발레르는 촌장이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잘 풀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만 경계가 사라진 대신 한 명이 호의적인 눈빛을 보이면, 다른 한 명은 언짢게 그들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반응은 이제 딱 둘로 나누어진 것이었다. 좋거나, 나쁘거나. 애런은 상관없다는 듯 한껏 여유로워진 발걸음으로 거리를 지나갔다.


“우리를 별로 달갑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


발레르가 애런의 팔을 툭툭 치며 방금 지나친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애런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모두가 좋아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들은 어젯밤 그들이 갔던 그 자리에 도착했다. 하얀색으로 곱게 칠해진 울타리와 그 너머 모래사장은 의도했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들의 눈을 더 사로잡은 건 어젯밤 봤던 보라색의 바다였다. 햇빛을 잔뜩 품은 지금은 바닷속이 보일 만큼 깨끗한 에메랄드 빛깔이었다.


타라를 만났던 곳을 지나치며 전날 보지 못한 곳을 전부 둘러봤다. 딱히 이제 갈 곳이 없어진 그들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발레르는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듯 탄식을 내뱉으며 애런을 바라봤다.


“먼저 들어가. 난 촌장님 댁 좀 들렸다 가야 될 것 같아.”


“볼일 있어?”


발레르가 자신의 등에 걸려 있는 검을 가리켰다.


“이거 얘기하는 걸 깜빡했어.”


낡은 검집으로 끼워져 있는 엑시투타스를 보며 애런은 자신도 생각 못했다는 듯 외쳤다.


“아, 그랬지. 그래서 돌려주려고?”


“일단 얘기 좀 나눠봐야 할 것 같아. 먼저 갈게, 이따 봐.”


대충 인사를 건네고는 발레르는 발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촌장의 집에 가면서 내내 돌려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나 위험하고 중요한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어쨌든 어머니에게 받은 선물이기에 돌려주는 것에 약간 부정적이었다.


“촌장님 안에 계세요?”


살며시 문을 두드리며 외치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여전히 바닥 널을 울리는 소리가 늦은 간격으로 들려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클레망의 얼굴이 보였다. 뜻밖의 인물에 클레망은 의아해했지만 그를 반겼다.


“발레르구나. 무슨 일인게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거라.”


천천히 문을 닫고 들어온 발레르는 곧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외출은 자주 안 하시나 봐요.”


클레망은 끌끌 웃으며 신음과 함께 무릎을 짚으며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이 나이가 되면 걷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란다. 너도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라.”


반대 편 의자에 앉은 발레르는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클레망은 그런 그를 느긋하게 바라보다 다시 일어서 주방 쪽으로 건너갔다.


“차라도 한 잔 마시겠느냐.”


“네, 감사합니다.”


여유있게 그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발레르는 일단 등에서 검을 풀어 탁자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발레르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것보다 그 이후에 클레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걱정하는 사이 클레망은 어느새 차를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검을 힐끗 쳐다봤지만 그는 굳이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단지 그는 차를 발레르의 앞에 내려놓고는 발레르가 말하길 기다렸다.


“이 검에 대해 말씀드리러 왔어요.”


“잘 가지고 있구나.”


“네?”


클레망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에스테르가 준 것이지 않느냐. 엑시투타스 말이다.”


“어떻게···?.”


발레르의 놀란 눈빛을 받으며 그는 멀리 어딘가에 시선을 던졌다. 마치 그곳에 과거가 보인다는 듯.


“얘기가 길어질 텐데 괜찮겠느냐.”


“저는 괜찮아요.”


클레망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최대한 편한 자세로 바꾸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마을 사람 중 몇은 밖에 나가 있단다. 일종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지. 세상의 정세라던가 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 발명되면 그걸 연구하는 것처럼. 여하튼 너의 어머니 에스테르는 그 일을 맡고 있었단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다만 유스터스와 눈이 맞았던 게지. 그리고 어느 날 금기를 저지르고 말았단다. 네 아버지를 마을에 데려온 거지.”


클레망은 잠시 말을 멈추고 목이 탄다는 듯 차를 홀짝였다.


“약초학에 능했던 에스테르는 그녀가 조합해서 만든 약초로 유스터스를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었단다. 처음 마을에 그를 데려왔을 땐 정말 놀랐단다. 나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뒤집어졌단다. 사람들은 유스터스의 기억을 없애고는 내쫓아야 한다고 원성이 자자했단다. 처음에 나도 그럴 생각이었지.”


다시 차를 홀짝이는 클레망을 바라보며 발레르는 처음 듣는 부모님의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입에 온 신경을 쏟았다. 탁, 하고 컵이 탁자에 닿는 소리와 함께 클레망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비판적인 사람들의 시선에도 그는 덤덤히 받아내며 오히려 그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단다. 일손을 돕고, 아이들에게 검을 알려주려고 노력도 하고 나에게 에스테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줬단다. 결국, 점점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도 조금씩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단다. 그렇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테르와 유스터스는 이곳에서 결혼식을 치렀지. 그리고 신혼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생기지 말아야 할 일이 터지고 말았단다.”


“더글라스...”


발레르는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섞인 감정으로 중얼거렸다. 클레망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는 검술 선생이었단다. 가장 검을 잘 다루었던 그는 유스터스가 오자 두 번째가 돼버렸지.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끝내 유스터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단다. 일이 벌어지기 며칠 전에 더글라스는 내게 찾아왔단다. 그때도 지금처럼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였단다. 밖으로 나와 같이 걷던 와중 지나가는 주민들에게서 유스터스가 검술이 더 뛰어나니 선생 자리에 더 적합하지 않냐, 그런 이야기가 들려왔단다.”


클레망은 착잡한 마음에 잠시 멈추고는 눈두덩를 문질렀다. 다시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죄책감이 묻어나왔다.


“얼마간 걷던 그는 좋지 않은 표정으로 볼일이 생겼다며 돌아갔단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 몇과 함께 엑시투타스를 훔쳐 도망가 버렸지. 아침 동이 트자 마을은 큰 충격에 빠졌고 모두들 어찌해야 할지 몰랐단다. 그때 유스터스가 제안을 하더구나. 다시 회수해 오자고.”


클레망은 멀리 두었던 시선을 옮겨 발레르를 지긋이 바라봤다.


“어느 누구도 꺼내지 못한 말을 이방인이었던 그가 선뜻 나선 거란다. 마치 자기 집안일인 양 말이다. 어떻게 됐는지는 발레르 너도 알 테지. 마지막 맺음을 짓지 못했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 사람은 몇 없었고, 그마저도 상처 없이 돌아온 자가 없었단다. 끝이 그러했기에 몇몇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되지만, 유스터스를 욕하기 시작했단다. 실패의 원인을 책임자에게 화살을 돌린 것이지. 더 유감스러운 건 아직도 그렇다는 거란다.”


미안함에 클레망은 발레르를 외면했다. 발레르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싸 문질렀다. 그는 아버지라는 것에 대한 감정이 와닿지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신하게 되었다. 더글라스에 대한 반감. 늘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그를 괴롭히는 애나. 그녀의 죽음은 죄책감을 가지게 했고 평생 가슴에 못 박혀 남아 있을 장면이었다.


그의 눈앞에 애나와 에스테르의 잔상이 떠올랐다 다시 연기처럼 흩어졌다.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임을 알려주듯 그렇게 짧게 모습을 보이고는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는 손을 들어 잡아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보려 눈을 감지 않을 뿐이었다.


어느새 그의 눈가는 촉촉해졌고, 숨이 거칠어지려 하고 있었다. 발레르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던져버렸다. 클레망은 감정을 조절하는 발레르의 모습에 말라버린 입술을 핥고는 이제 다 식어버린 차를 전부 입에 넣어 삼켰다.


“이 검은 내가 받을 수 없단다. 그럴 권한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구나.”


클레망은 손잡이와 칼집을 잡아 들어 올리고는 발레르에게 건넸다.


“유스터스가 티보를 데려오고 검을 회수하려 에스테르가 같이 떠날 때, 그녀가 내게 그런 말을 하더구나. 죄송하다고.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배웅하고 나중에 알게 되었단다. 검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서 그녀도 가져간 게야. 검을 다룰 줄도 모르는데 말이다. 잘못된 일이지만, 에스테르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알기에 그냥 묵인했단다. 결국, 제 주인을 찾은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무릎 위에 검을 내려놓은 발레르는 컵 안에 가득 담겨있는 자신의 식은 차를 바라봤다. 늘 궁금했던 것이 긁혀져 시원해져야 했지만, 오히려 그는 답답했다. 기운이 빠지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관자놀이를 누르고는 차를 비워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대게 후회하기 마련이란다. 그래서 때론 모르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


발레르의 컵을 치우며 클레망은 말로써 그를 보듬어주었다. 공감과 이해함으로 그는 발레르의 얹힌 마음을 담아갔다. 발레르는 입으로만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감사해요.”


어떤 것에 감사한다고 발레르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알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딱 집어 정의할 수 없는 것들에 그는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클레망은 이제 다시 인자한 미소와 함께 끌끌 하고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언제든지 또 오고 조심해서 가거라. 아, 발레르.”


“네.”


“웬만하면 여기서 그 검을 뽑지 말거라. 그걸 가지고 있는 건 너만 알고 있는 거란다. 알겠니?”


어떤 이유 때문인지 대충 짐작한 발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에즈라의 집으로 걸어가며 그는 전보다 더 마음이 무거웠다. 더 가까워질 거라 예상했던 그의 생각과는 반대로 많은 이야기가 그를 짓누르기라도 하듯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고 집까지의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평소에 잘 신경 쓰지 않았던 검도 왜인지 그는 가끔 무의식적으로 손을 뒤로 가져가 괜히 검을 만져보고는 했다. 클레망의 집을 나오며 그가 얻은 것은 누군가에 대한 증오와, 다른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그것뿐이었다.


발레르가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식탁에 앉아 있는 에즈라가 보였다. 그는 발레르를 보고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집 안 가득 음식 냄새가 나는 걸 느끼고 발레르는 그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한 마음에 발레르는 서둘러 손을 씻고 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바람 때문에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그는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곳임에도 제집인 양 편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가벼운 콧방귀와 함께 살짝 웃던 그는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쿡쿡 찔러오다가 심장을 말아쥐는 느낌에 그는 가볍게 자신의 심장 쪽에 손을 얹었다. 과연 웃을 권한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그의 얼굴엔 어느새 그늘이 져 있었다. 좋아하면 안 돼, 행복을 느끼면 안 돼.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몇 번이고 다짐하며 거실로 나가 식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잘 다녀왔니?”


의자를 끌어 앉는 발레르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에즈라가 질문했다. 애런은 이미 발레르가 다가왔을 때 식기를 들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발레르는 애런이 말했겠거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모님에 대해서 이야기도 듣고 좋았어요.”


“그렇구나... 아, 그래 너희 아마 모레쯤부터 학교 다닐 수 있을 것 같구나. 사실 어젯밤에도 그 이야기가 나왔었고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되고 있어.”


먹는 것에 집중하던 애런은 잡고 있던 식기를 입으로 빨며 그에게 물었다.


“가면 뭐 배워요?”


“딱히 뭐가 있는 건 아니란다. 혹시 모를 침입을 대비해 검술과 궁술을 배우고 약초에 대해서도 배우지. 그리고 하나는 종합적으로 삶에 대해 알려주는 수업을 해. 예를 들면 배를 조종하는 법이라던가, 목공이나 농사를 짓는 법 같은 기초적이면서 중요한 걸 말이야.”


“배우고 싶은 게 없네.”


애런은 김샌다는 듯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에즈라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과 함께 애런의 방을 가리켰다.


“궁술을 배우면 되잖아. 애런 너도 활을 다루지 않아?”


“예, 뭐 그렇긴 한데 이제 더 배울게 없을 텐데요.”


에즈라는 그의 당연하다며 말하는 자존심 높은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말을 삼켜버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에즈라는 눈앞에 있는 아이가 티보의 아들이라는 걸 떠올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티보만큼 능력을 갖췄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그는 잠자코 있었다. 수업시간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이야기를 일단 접어두었다.


“그러면 친구를 사귄다고 생각하고 다니렴. 그리고 실생활에 유용한 것도 배워두면 좋지 않겠어?”


“안 간다고는 안 했어요. 저도 학교 다녀보고 싶었거든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발레르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수프를 휘저었다.


“너무 걱정 말거라, 발레르. 차별 같은 건 없을 거야.”


먼저 식탁을 물리며 에즈라는 일어서서는 기지개를 피며 하품을 했다. 접시를 가져다 놓으며 그는 뒷목을 문지르면서 방에 들어갔다.


“피곤해서 먼저 자야겠구나. 다 먹은 거 대충 저기 내 접시 옆에 놓고 방에 들어가 쉬거라.”


“예, 쉬세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애런이 식기를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발레르를 보았다.


"잘 해결됐나 보다?"


"응, 그렇게 됐어."


"괜찮냐?"


"뭐가?"


"부모님 얘기 듣고 왔다며. 괜찮냐고."


수프를 젓고만 있던 그는 결국 손을 떼 식탁 위에 올려놨다.


"잘 모르겠어. 몰랐던 걸 들어서 분명 좋은데, 그만큼 답답하고 무거워진 느낌이야."


애런의 표정은 전에 발레르에게 위로를 건네던, 웃음기를 뺀 진지한 얼굴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겠지. 그만큼 한 번에 듣기도 했고.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갈무리해. 괜히 붙잡고 악써봐야 너만 힘들다 그거."


"고마워."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발레르는 진심이 담긴 감사를 보냈다. 피식 웃으며 애런은 접시를 들며 일어섰다.


"할 것도 없는데 나도 그냥 자야겠다."


방으로 들어가는 애런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넨 후에도 발레르는 식탁 의자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맞은 편에 애나가 앉아 있었다. 아니, 발레르는 그렇게 봤지만, 그것은 그가 만든 간절함이 빚은 환영이었다. 그녀는 흐르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며시 넘기며 수프를 떠먹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발레르를 쳐다봤다. 생긋 웃는 그녀의 미소에 발레르는 다시 심장이 저릿해졌지만, 같이 미소를 지어주었다.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좋아한다고? 아니면 미안하다고? 생각을 지우며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둘 다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입술을 깨문 채로 볼을 간지럽히고 바지를 적시는, 터져 나오는 감정을 모른 체하며 그녀만을 바라봤다.


한 번의 깜박임마다 그녀는 서서히 옅어졌다. 그의 시야가 문득 흐려졌다. 손등으로 대충 비벼 남아있는 감정의 찌꺼기를 떼어버렸을 때, 그녀는 이제 그 자리에 없었다. 흔적도 없이 아주 멀리 떠나버린 그녀를 향해 발레르는 입술만을 움직여 소리 없이 안녕을 말했다.


장례도 채 치러주지 못했던 것이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아직도 땅에 쓰러져 차가운 피 웅덩이 위에 쓸쓸히 혼자 누워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발레르는 당장에라도 소리 내 울고 싶어졌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 잊으려 하면 다시 붙잡아 잊히지 않게 해야 하는 기억. 그는 평생 자신이 짊고 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발레르는 혹시 누가 볼까 눈물 자국을 손으로 지워버리며 대충 식탁을 정리하고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남아 있는 건 아직 남아 있는 음식 냄새와 세 자리에 옅게 남아있는 온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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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마지막화. 17.06.24 222 1 17쪽
34 34화. 17.06.24 231 0 15쪽
33 33화. 17.06.23 167 0 15쪽
32 32화. 17.06.22 297 0 15쪽
31 31화. 17.06.21 179 0 13쪽
30 30화. 17.06.20 193 0 13쪽
29 29화. 17.06.20 225 0 17쪽
28 28화. 17.06.19 191 0 13쪽
27 27화. 17.06.19 178 0 15쪽
26 26화. 17.06.19 176 1 12쪽
25 25화. 17.06.18 213 1 15쪽
24 24화. 17.06.18 178 1 17쪽
» 23화. 17.06.18 195 1 19쪽
22 22화. 17.06.17 221 2 14쪽
21 21화. 17.06.17 232 0 12쪽
20 20화. 17.06.16 246 2 13쪽
19 19화. 17.06.16 262 1 14쪽
18 18화. 17.06.15 251 1 15쪽
17 17화. 17.06.15 234 1 13쪽
16 16화. 17.06.15 229 1 14쪽
15 15화. 17.06.14 212 2 14쪽
14 14화. 17.06.14 247 2 14쪽
13 13화. 17.06.14 244 2 14쪽
12 12화. 17.06.13 277 2 13쪽
11 11화. 17.06.13 307 3 15쪽
10 10화. 17.06.13 385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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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화. 17.06.12 332 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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