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고려 출신 황제 이소영 일지 - 2002[징기스칸4 패러디][미완]
제가 플레이하고 있는 나라는 원과 폴란드입니다. 이소영을 원의 군주로 삼은 이유는 잘 생겼기 때문입니다-_- 이소영은 수성의 군주로 설정하고 일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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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년 초봄
1314년 1월 13일 아버님 쿠빌라이 칸께서 10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시다.
쿠빌라이 칸은 전설의 명장 바얀과 함께 남송으로 친히 출정해 남송을 멸망시키셨다. 그 뒤 천주, 양양, 함양 순으로 수도를 옮기시며 새로운 영토를 다스리는데 최선을 다하셨다. 인재를 널리 등용하셨고 정복 사업에 특히 큰 힘을 쏟으셨다. 그리하여 내가 즉위할 때엔 원은 화북과 몽고를 차지하고 있던 쿠빌라이 칸의 초창기 시대를 벗어나, 투르케스탄 중앙아시아 화북 화남 동남아시아 고려 일본 동서시베리아 페르시아를 완전히 장악하고 인도에도 두 거대한 도시를 소유한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이곳 원의 수도 함양은 의학의 도시, 학문의 도시로 키워지기 위해 특화된 도시로서 허허벌판 위에 새로 세워졌다. 병원, 대학이 굉장히 많으며 의학의 도시, 학문의 도시이기도 하다. 대단히 번창하는 대도시로서 세계 최강국의 수도로서 모자람이 없다. 나는 이곳 함양에서 나고 자랐고 지금껏 함양을 떠나 본 적이 없다.
내 기억에 아버님의 기억은 없다. 그저 멀리서 우러러보는 대상이었을 뿐이다. 어머님은 나에게 중국인 스승들을 붙여 주셨고 고려 문화를 배우게 하셨었다. 난 여러 스승들과 만나 인맥과 학식을 쌓았고 전투 기술도 많이 익혔다고 자부한다.
솔직히 내가 원의 황제로 지목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쿠빌라이 칸께서 돌아가시면서 유서로 남기신 문서가 공표되었고 거기에 내가 써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대원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내가 황제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겨우 9살 밖에 안되는데다 고려인의 피가 섞인 내게 불만이 많아 보이는 형들을 추방시킨 일이다. 대략 열댓명 정도 추방했나 보다. 그리고 나는 여러 뛰어난 형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황실을 위무하는 작업 또한 했다. 적잖은 황후들이 생겼지만 그들과 연회를 벌이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도 무방하다 싶다.
오늘날 세계에는 아직 3개의 나라가 있어 원과 맞서고 있다. 하나는 다마스커스에 군림하는 맘루크 왕조로서 5개의 도시를 갖고 있을 뿐이라 39개 도시의 원에 상대가 될 수 없다. 또 하나는 인도 남쪽 변방에서 3개의 도시를 갖고 있는 힌두 제왕조로서 여러 힌두 왕조들이 모인 연합 정권이라 한다. 내정도 부실하고 군사력도 적어 큰 어려움 없이 차지할 수 있으리라 본다. 문제는 또다른 하나의 나라이다.
폴란드라는 국가로서 유럽, 북아프리카를 통일한 강대국으로 27개의 도시를 갖고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다. 폴란드의 차르 무쪼는 유럽의 전통 방식대로 자신의 칭호를 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이 정복한 국가 체제를 크게 무너뜨리지 않은 체 그 국가의 군주 칭호를 원래 있던 칭호에 더하는 방식이라 한다.
덕분에 무쪼는 매우 긴 정식 칭호를 갖고 있다 한다. 들은 바에 따르면 폴란드의 차르 무쪼는 다음과 같은 직위를 겸하고 있다 했다. 폴란드 차르, 비잔틴 제국 황제, 신성로마제국 황제, 영국 국왕, 노르웨이 국왕, 헝가리 국왕, 카스티야 국왕, 하프스 왕조 술탄, 마린 왕조 술탄, 키에프 대공, 나폴리 대공, 베네치아 대공, 모스크바 대공, 팔레르모 대공... 그 밖에도 잡다한 칭호들을 많이 갖고 있다 하였다.
나 또한 그 것을 따르기로 했다. 쿠빌라이 칸은 몽골의 대칸과 중국의 황제만을 칭하시어 다른 민족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지 못하고 있다는 반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가차 없는 추방과 숙청을 통해 나는 이미 원에서 절대권력을 소유하고 있으니 두려움은 없다.
(이소영의 수치 : 정치98, 전투97, 지모96, 수군만 A이고 나머지 병과적성 S, 문화 외교 등용에 내정 특기, 기동 돌격 화공 공성에 전투 특기, 열전엔 가공인물 불세출의 정치가 군인이며 뛰어난 재지의 소유자 보병의 통솔력이 뛰어나다고 되어 있네요. 순전히 잘 생겼다는 이유로 황제에 앉혔기 때문에 쿠빌라이의 아이들 중 최고의 수치는 아니군요)
나는 몽골의 대칸, 중국 황제에 이어 고려 국왕, 일본 국왕의 대관식을 올리는 강행군을 해보였다. 월남 국왕, 파간 왕조 국왕, 델리-술탄 왕조 술탄의 대관식도 성대하게 올렸다. 물론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은 중국 황제도 몽골 대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원의 절대군주가 바로 나 이소영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쿠빌라이 칸 말기 군부 최강의 실력자였고 사위였던 바얀에 의해 폐지되었던 과거 제도를 부활시켰다(바얀은 극단적인 몽골주의자로 중국에 큰 반감을 갖고 있었죠). 그러나 옛 중국의 제도처럼 시문이나 외우면 되는 것이 아닌 국가의 실무 위주로 꾸몄고 기술자 또한 뽑도록 하였다. 또 지금까지 몽골 출신 장군들은 가문으로 뽑혔으나 몽골인이더라도 과거 제도를 보게 했다. 또한 광활한 원의 영토 모두에서 실시하여 과거 제도의 덕을 독톡히 보게 했다.
또 한 것이 있다. 쿠빌라이 칸은 전국민을 네 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있었다. 몽골인, 색목인(아랍인, 유럽인), 한인(고려인, 일본인, 동남아시아인, 인도인, 화북인), 남인(화남인)의 네 계급으로 나누어 모든 것에 차별을 가하였다. 나는 이 제도를 폐지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아직은 몽골인의 세력이 너무나 컷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혼혈아기 때문에 가지는 신분적 한계를 최대한 극복해내야 했고 그려려면 이 제도의 폐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격렬한 토론 끝에 나는 전국민을 2개의 등급으로 나누는 새로운 법령을 시행하는데 성공하고 말았다. 몽골인, 평민의 두 등급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되고 각종 악습이 폐지되자 전국의 수많은 인민들은 내게 열렬한 지지를 보내주었다. 몽골 출신 대귀족들은 환영하지 않는 눈치여서 걱정이지만 이미 쿠빌라이 칸님은 두터운 한인 관료층을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 마침내 나는 화남에서도 과거를 시행해 널리 인재를 등용했다.
연호를 영락(英樂)이라 정했다.
1314년 봄.
폴란드의 무쪼가 사신을 보내 자신의 8살 난 딸 리리안을 나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제의해왔다. 황후들이 다들 나이가 10대 초중반이라 나 보다 나이가 많아 부담스러웠었는데 참으로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국가중대지사에 필요한 것은 대의명분인 법. 승상인 곽수경과 상의하였다. 유럽의 강대국인 폴란드와 맞서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으로 대신들을 설득하여 리리안과 결혼했다. 사실은 리리안이 나랑 나이가 가장 비슷하여 친해지기 쉽겠다는 생각에서다.
대도에서 유조학이라는 인재를 뽑아 대도 영주로 하여금 연회를 베풀어주게 했다. 22살인 유조학은 다른 수치들도 85가 넘지만 지모가 특히 95나 되는 뛰어난 인재이다. 병과 적성도 모두 A이며 농업에 특기가 있다 한다. 기동과 돌격에 능하다 들었다.
1314년 여름.
만물이 절정에 이르기 시작하는 좋은 계절이다.
난생 처음으로 연회란 것을 베풀었다. 연회에 초대된 8명의 황후들이 다들 매력적이어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 네 사람과만 겨우 겨우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2명의 황후가 야밤에 은밀히 찾아왔다. 둘 다 누나였는데 숯총각인 나를 잘 리드해주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좋겠다.
널리 인재를 등용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가 추방한 적잖은 수의 친척들이 언제 적으로 돌변할 지 모른다는 충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엔 뛰어난 장수들이 무척 많으니 무서운 상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1314년 성하.
능력 중 하나가 90 이상이 되는 이만을 등용하도록 지시했기에 그리 많은 장수들이 뽑히지는 않는다.
어의가 천주에서 태어난 황후 광란비와, 샤안에서 태어난 황후 서루크나가 아이를 뱃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9살짜리 주제에 아버지가 된다니 참으로 난 복도 많다. 한동안 황후들과 연회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렇지만 황후들과 노는 건 많이 한다. 특히 리리안하고는 많이 친해졌다. 둘이서만 있을 때엔 리리안이 나를 오빠라고 불러주는데 정말로 귀엽다. 리리안은 페스트 태생이라고 했다. 만리 타향인 함양에서 적적할 것이다. 궁전 교외에 폴란드식으로 건물 하나를 지어주고 그곳에서 살게 하면서 색목인 하녀들을 거느리게 하니 좋아한다. 진작에 그럴 것을 그랬나 보다. 다른 황후들은 다들 자기 고향식으로 건물을 꾸며놓고 사는데 리리안만 워낙에 먼 나라의 것이라 건물이 없었었다.
각 나라의 문헌들과, 각 시대의 역사 기록들을 검토한 다음 현재 실정에 맞는 것으로 추리고 수정하여 백성들을 위한 시책 수십 가지를 고안하여 발표하였다. 점점 인기가 많아진다는 느낌이다. 이렇게 하여 평판이 좋아지면 나에게 호감을 가지는 인재가 뽑힐 것이고 그들에 의해 나의 조정 장악력이 늘어날 것이다. 곽수경은 아버님에 이어 나에게도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고 있다. 믿음직스런 신하이고 뛰어난 대학자가 아닐 수 없다.
이슬람 상인들이 와서 대전 출신인 권영환이라는 장수를 천거하면서 금 2000을 달라고 하였다. 함양의 금이 49800이어서 내주었다. 황후 3명, 권영환을 불러 연회를 베풀어 주었으나 어느 황후도 오지 않았다. 화가 나서 권영환의 능력을 비밀 경찰로 하여금 추적하게 했다. 그 결과 시원찮음이 밝혀져 권영환을 해고하였다. 지금까지 있던 신하들은 대체로 유지할 생각이지만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뽑을 예정이다. 현재 원의 장수는 147명이다.
참, 앞으로 연회는 자제하기로 했다. 나이가 적을 때 너무 연회를 많이 하면 수명이 줄어들 수 있다는 어의의 충고를 들었다. 20살 이상이 될테까지 금욕할 생각이다. 저번에 연회할 때 느낀 바로는 나는 아직 성욕이 적은 듯 싶다. 황후들이나 나나 성욕이 강하게 일어날 나이가 되려면 멀었다는 것이 어의들과 학자들의 충고였다.
신하들의 충고를 귀담아 듣고 언로를 개방하며 논공행상을 후하게 하고 신상필벌로 엄격히 다스리며 근검절약하며 민심은 천심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황제의 본분이다.
몽골 출신 대귀족들은 내게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도 불만이 많았는데 내가 자꾸만 개혁을 실시하고 중국 문화권 출신 관료들로 관료 기구를 채워나가자 내심 불만이 많은 듯 보인다. 나는 원을 살찌우고 정의를 실천하며 태평성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1314년 가을
전국적으로 삼포농업, 사포농업을 실시하고 있을 뿐더러 화북 화남 일본 동남아시아 인도에서는 참파미를 재배하고 있어 농경 수확은 언제나 풍족하니 설령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더라도 걱정할 이유가 없다고 하니 가을이 되어도 안심이다.
멀리 델리로부터 파발마가 도착해 새로운 소식을 알려왔다. 내 형님들 중 한 분인 투퍼다이님이 몽고기병을 이끌고 델리 교외에서 힌두 제왕조의 두 군대를 격멸시켜 두 총대장을 참수시켰다는 소식이었다. 기쁜 일이기에 후한 포상을 내렸다.
증조할아버님인 징기스칸께서는 전국에 역전제를 실시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말 200마리 정도가 상주하는 역을 적국 가도 근처에 만들고 그것을 통해 소식을 빠르게 전하게 하셨다. 이를 위해 징기스칸 당시에만 5만 4천 마리의 말이 필요했다 한다. 현재 이 제도에 투입되어 있는 말의 숫자만 33만 8천 마리에 이르고 있어 몽고엔 거대한 규모의 목장들이 끝없이 많이 있는 형편이다. 나는 징기스칸 이래 몽골의 대귀족들이 상습적으로 행하던 문명 파괴 행위를 근절시키라는 령을 내렸다. 앞으로는 나의 허락 없이는 농장이나 도시를 허물고 목장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으로 몽고, 투르케스탄, 중앙아시아에 목장을 지을 수 있는 땅을 크게 개간하게 하였다. 또 한 편으로는 각지에 꾸준한 개간 정책을 실시토록 하여 개간하는 이에게는 각종 혜택을 누리게 해주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 방법을 하면 일시적으로는 세금 수입이 줄어들 지 모르나 나중엔 세금이 크게 늘게 될 것이며 또한 백성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제도와 더불어 봉화 제도를 강화하고 전략적 요충지에는 전서구 제도도 활용하게 하여 기동성을 증진시키도록 조취하였다.
나는 농업과 문관에 신경을 쓰는 중국 전래의 제도들을 속속 복권시키는 중이다. 그렇지만 나는 또한 남송이 농업과 문관에만 신경을 쓰다가 망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런 방법으로는 패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징기스칸 이래의 중상주의 및 무치주의를 강화시키는 정책들도 속속 발표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신도시 빛고을의 영주로 호건광을 임명하였다.
파말마가 또 도착했다. 타브리즈 중심가에서 진흥도가 맘루크 왕조의 군대와 싸고 이를 격멸하고 총대장을 참수했다는 소식이다. 진흥도는 진조의 장군이었던 사람으로 여러 차례 몽고군을 격파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에 하노이가 함락되자 각지를 떠돌다가 결국 대도에서 등용되었다 한다.
홍해에서 지진이 일어났으나 근처엔 아무 도시도 없다.
1314년 겨울
별다른 일은 없었다.
1315년 초봄
이제 나도 10살이다.
행정기구의 개편 작업을 하기 위한 초안을 짜느라고 바쁘다. 현재의 관료제도는 승상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주고 있어 문제가 크다는 생각이다. 또한 각지의 대장군에게도 권한이 지나쳐 당말 절도사의 화가 재현될까 두렵다. 곽수경은 언제나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준다. 격무에 시달리다 보면 체력이 약해지기 쉽기에 가까운 훈련소에 나가 군사 훈련을 시키면서 체력을 단련했다.
타브리즈가 맘루크 왕조 군대에게 공격당했다고 했다.
내 형님인 한고은 장군이 맞서싸우러 나섰다. 맘루크 왕조의 9천 병력을 격멸했으며 또한 내가 일전에 추방했던 내 형님 철존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철존명을 등용하게 하였다. 철존명 형님은 내가 황제가 된 데에 불만이 많아 추방했던 것이나 지금은 별다른 불만이 없다 하니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1315년 봄
광란비가 예쁜 딸을 낳았다. 영흥공주라 이름 붙여 주었다.
서루크나도 예쁜 딸을 낳았다. 마야리츄라 이름 붙여 주었다.
델리에서 방랑 생활을 하던 아밀 호슬로를 등용했다. 그다지 능력은 없는 사람이나 이제는 원이 멸망시킨 델리-술탄 왕조의 대시인이자 대음악가로서 명망이 높았던 사람이니 델리의 주민들을 위무하고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데 좋을 것이라 여겨 등용하였다. 델리 영주 임현훈이 아밀 호슬로에게 연회를 베풀어주었다는 소식이다.
1315년 여름
타브리즈의 변화가가 맘루크 왕조에게 약탈당했다고 한다. 폴란드와 맺은 밀조에 맘루크 왕조를 폴란드에게 넘기겠다는 것만 없었으면 옛날에 맘루크를 쓸어 버렸을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다. 밀조는 밀조니까. 폴란드는 아직 내정에 힘쓰는 모양이다.
일단 관료기구의 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승상을 2명에서 3명으로 늘렸다. 좌승, 우승에 정승을 두어 정승의 지위를 좌승과 우승 보다 높게 하였다. 각 행성도 이와 같이 했다. 정승엔 몽골인만을 앉히도록 했으나 좌승과 우승엔 민족을 가리지 않도록 하였다. 3승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부 판서를 재편하여 이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이들을 황제 직속에 두었다. 화남 행성, 고려 행성, 일본 행성을 없에고 이들 세 지역을 내가 이끄는 내각의 직할령으로 만들었다. 에미르와 샤안을 빼고는 모두 직할이긴 하나 이렇게 함으로서 내가 이끄는 내각의 권력이 크게 강화되는 효과가 있다.
1315년 성하
여름이 무르익고 있다.
함양 교외엔 황하 상류가 있다. 그곳에 건설되어 있는 행궁에 나가 유람선을 타고 놀았다. 나는 황하와 양지강을 연결하는 대운하의 건설을 명했다. 현재 국고 수입의 40%는 화남에서 나오고 있으니 이를 보다 충실히 함양에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게임 상으로는 안 그렇지만, 실제로 저만치 영토를 가졌다면 이럴 거라고 생각됩니다. 원 당시 국고 수입의 90%가 화남에서 나왔다고 하죠). 또한 대운하 근처와 황하 상류 일부에 50리 간격으로 행궁을 만들어 유람하며 놀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사를 벌이도록 했다. 좌승(원의 제도는 좌승이 우승 보다 높아요) 곽수경은 이는 수양제의 전철을 밟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나는 백성을 위무하고 태평성대의 본을 뜨며 이 나라가 모두의 나라임을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물론 실은 나중에 놀 때를 대비한 것이지만.
그러나 나는 역사를 두루 읽어 수양제에 대해 웬만큼 알므로 그의 전철을 밟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쿠빌라이 칸은 비록 영토를 크게 넓히셨으나 너무나도 잦은 원정으로 국가 재정을 바닥나게 만드셨다. 이슬람 상인, 개성 상인, 베네치아 상인, 임안 상인 등등 각지의 대상인들에게 진 빚만 해도 엄청났다. 물론 파산할 우려 따윈 없다는 것 쯤은 안다. 일개 상인 조직 따위가 원의 힘에 대항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신용이며 이를 원의 조정이 어긴다면 그것은 큰 실책이다. 나는 군주가 되자마자 개간을 독려하여 농업 생산량을 올리도록 하고 선진적인 여러 농사법 보급에 더욱 박차를 가했으며 농가 보조금을 늘리는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사농공상이라는 옛 중국의 악습을 나쁜 제도라 질타하고 앞으로는 사생이라고만 칭하도록 지시했으며 실질적인 정책들도 시행하였다. 즉 관리자인 사(士)와 생산자인 생(生), 이 둘만 것이다. 이를 통해 상인과 장인들의 지위가 신장되었다. 잔치도 줄였고 쿠빌라이 칸 때 있던 3500여 명의 궁녀들 중 500명만 남기고 모두 시집보내거나 집으로 돌려보내는 정책도 실시했다. 사치를 일삼는 라마교단에도 개혁을 할 예정이었지만 몽골 출신 관료들의 반발이 심해 조정 회의 차원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런 이상 행궁 정도 짓는다고 국가 재정이 어떻게 될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게다가 나는 수양제와는 달리 일반 백성이 아닌 목수들만으로 공사를 할 작정이고 봉급도 제 때 제 때 줄 작정인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세금을 새로 걷어야 한다고 걱정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쿠빌라이 칸 때 건설된 동남아시아의 세 도시, 브레이끼 빛고을 서라벌에서만 나오는 향신료와 향료를 작년 말부터 전매 사업으로 만들어 엄청난 이익을 보고 있으니 거기서 나오는 이익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재정관의 보고를 들은 후에 결정한 일이다. 또한 행궁들은 평소엔 일부 지역을 싼 값에 개방하여 백성들이 오락을 즐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폴란드에서 받은 로마제국 관련 서적들을 탐독한 후 내린 결정이다.
이에 곽수경도 수긍하는 눈치다.
전국에서 목수를 널리 뽑는 한편 높은 봉급을 약속했다. 일꾼들에게도 봉급을 약속하니 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했다. 농번기 때는 현상유지만 하고 주로 농한기인 초봄, 겨울에 공사를 진척시킬 작정이다. 목수들이야 항상 일하겠지만 일꾼들은 농사 일도 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그리 조치하였다. 아직 내 나이 어리고 건강하니 죽기 전에 완공을 볼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 향신료와 향료를 폴란드에 파는 무역로를 개척하라고 지시했다(그렇다고 동남아시아에서 유럽까지 대상을 보낸 건 아닙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
각지에 더욱 건설에 박차를 가하라는 령을 내렸다. 널리 인재를 뽑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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