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는 꼭두각시 - 1994[일반][미완]
부서지는 꼭두각시
3.화신 (化身)
하늘은 존재하지 않는다. 천문학적으로 볼 때에 하늘은 관측자의 시점에서 바라본 무한대이지만, 가상적인 존재에 불과한 천구이다. 물론 그 이유만으로 내가 하늘을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다. 하늘은 허구. 몽상. 추상. 환상. 공상. 망상.
정신없이 어지러워. 침대에서 일어나니 시야가 흐려지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누워있다가 갑자기 직립자세를 취하면 뇌의 혈액이 왈칵 목으로 떨어졌다가 심장의 밀어올리는 힘이 강해지면 도로 올라간다. 그 사이에 뇌는 일시적인 빈혈 상태를 경험한다. 그러나 건강한 상태라면 빈혈 상태가 워낙 짦아서 나의 자아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 한다. 지금 내가 이러는 것은 심장의 상태가 평소보다 나쁘기 때문이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것이다, 내 심장이 그토록 약해진 것은 아닐테니, 아직은. 젊어 난, 서른도 안 되었다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자 내 상반신이 거울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흰자위엔 핏발이 서고 눈가는 부르텃으며 입술에도 붓기가 있다. 눈꺼풀을 누군가가 몹시 두들기는 듯한 것이 컨디션이 최악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늘만은 이래서는 안 될터인데.
괘종 시계는 아직 울리지 않았다. 6시 50분에 맞춰놓았는데 지금은 5시 40분. 어쩌다가 이토록 일찍 깨어났단 말인가. 벨 소리가 나려면 멀었다. 더 자야겠어. 어저께 새벽 2시 10분쯤에 집에 들어와서 그냥 뻗어버린 육체다. 그러나 죽음같은 논램수면과 달콤할지도 모르는 램수면에 다시 나의 자아를 던지고 싶지는 않다.
창문에 눈보라가 다가와 탁탁 부딪치고 있다.
웅웅거리는 소리를 음미하며 나는 마우스를 조작하고 있다. 어저께 밤에 집에 돌아오며 구상해둔 오늘 스케줄을 되도록이면 시행하기 위해 즉 시간표에 시간을 맞추기위해 방금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질감을 크레파스로 해놓은 국민학교 저학년생이나 그릴법한 유치한 그림이다. 왼쪽에 숲과 집을 앙증맞게 그려넣은 다음 또 무엇을 그릴까 잠시 생각했다. 떠오르는 착상. 그래, 정말 멋져. 오른쪽 위 귀퉁이에 사각진 해를 거무튀튀하게 아로새긴 채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얼마 후, 나는 그 검은 해를 지우개 옵션으로 지워버리고는 허리가 젓혀지도록 웃었다.
화장실로 가기위해 내 방을 나서자 거실에 걸레가 보였다. 전번에 대충 빤 까닭인지 걸레에는 모래와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제대로 빨려다가 그만두기로 작정했다.
너무 흥분하지 마. 너는 지금 몸 상태가 최악이라고. 냉정하게 생각해야지 안 그러면 지금 상황을 극복해낼 수가 없을것이 틀림없어. 나를 너라고도 부르는 내 안의 존재도 나라고 불릴 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이 단지 나의 뇌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럴 수가 있는 것인가. 정신분열증이나 다중 인격의 초기 단계가 아닐까, 이미 깊이 들어서 있을지도 모른다.
하기야 정신분열증이나 다중 인격으로 나의 자아가 둘이 되면 그것이 도리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름은 구안찬. 안찬 이란 이름은 전혀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원래의 의미는 안이 꽉 찬 이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텅 빈 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름부터가 이중성을 포함하고 있으니 말이다.
글세, 단지 이름 만으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전화 벨이 울린다.
나는 달려가서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한 것도 인간 세계의 모든 사상과 가치관 그리고 제도의 총체인 미임 에 의거한 것이다. 미임은 어떤 한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존재여야만 한다. 사람들이 경멸하는 미신도 따지고보면 그 사회의 구성원 가운데 많은 지지자를 확보한 당당한 미임인 셈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길거리를 걷다가 아무 생각없이 듣는 가요마냥 느껴진다. 그 목소리가 현실이라는 별 다른 감이 잡히질않아 그쪽으로 전력을 집중시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네. 예. 네. 아, 예. 너무 걱정하실 필요없어요. 예.
전화를 끊었다.
내가 어떻게 그 많은 말들을 알아듣고 또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 입원하고 계신 병원에서 어제 사 보낸 음료수를 받으시고는 감격해서 통화한 것이었다. 숨기시려고 무척 노력하고 계셨으나 내 귀는 속이지 못 하는지 목소리의 떨림이 느껴졌다. 하긴 쇼크를 받지 않으신 것이 다행이다.
냉장고를 열고 건강을 위해 과일 한 조각을 먹기로 했다. 배, 귤, 참외, 바나나 그리고 사과. 부엌에서 과도를 꺼내서 사과를 깍기 시작했다. 사과라는 것은 일본에서 들여온 외국어이고 그것이 외국어인 이유는 능금이라는 우리말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과라는 말을 사용하다 못 해 남발해도 상관은 없다. 세계가 일일 생활권으로 변해가는 이 마당에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것을 따질 까닭이 지금 과연 있을지 의문이다.
식빵을 구운 다음 인스턴트 돈까스와 우유랑 같이 내 위 속에 집어넣었다.
식사를 마친 후 손목에 찬 전자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어있었으나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어 괘종 시계를 보니 겨우 7시 반 정도였다. 텔레비젼을 틀어보니 정확한 시간은 7시 31분 정도. 전자 시계에 새로운 시간을 기억시킨다. 현대 문명의 이기들이 편리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들이 없으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에 아울러 그것들을 가지고 싶다는 갈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는 그토록 열망에 가득차 머리 속에 갈무리해둔 스케줄이 오늘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일을 대신 해 줄 존재가 있다면 좋을 것을. 그것은 하나의 갈망이다. 현대 문명의 산물 중 하나인 SF에 등장하는, 기계 인간이 그 갈망의 유일한 형상화는 아니다. 이미 수천년 전에 -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인지도 모르지만 - 그 갈망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아 왔다. 문헌상 나타난 것으로는 그리스 신화의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낸 황금으로 만든 소녀가 최초로 그 갈망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스 신화는 나쁘게 말하면 유치하고 좋게 말하면 소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교리였다. 태양, 벼락, 땅 ,바다등의 자연물에서부터 인간 세상의 여러 관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이 있다는 즉 모든 것을 신으로만 설명하려는 미임이다. 그리스 신화는 신학 가운데서도 가장 소박한 형태에 속하며 콩트가 창시한 실증주의에 비춰 볼 때 자연을 설명하는 것들 중 가장 낮은 단계의 것이다. 콩트는 수학이 가장 쉽고 사회학이 가장 어렵다고 말했었다. 현실적으로 별로 그렇지 않은 것은 사회학이 자신이 도달 가능한 가장 높은 차원에 도달하지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사회학이 쉽지는 않다. 만약 사회학이 수월하다면 내가 사회학을 공부하려고 그토록 힘들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8시 24분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았다. 쓰러지기 전에 내가 먼저 몸을 침대 위로 던진다. 그리고 다시 잠에 정신없이 빠져든다.
[1994.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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