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혈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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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에크낫
작품등록일 :
2017.06.2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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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0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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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9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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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고대의 길(9)

DUMMY

동부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해운왕국 이스의 수도인 솔은 오랜 세월 한 번도 당해 보지 않은 충격에서 서서히 회복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회복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이스 국왕 움베르토 라니에리는 수도에서 난동을 부린 외국인 세 명을 잡기 위해 근위대를 총동원했다. 그러나 얻은 것은 반파된 항구와 패퇴한 부대뿐이었다. '진은의 기사' 두 명과 찬황신풍대원 한 명은 도저히 개인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무용으로 근위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그 중에는 용혈의 세례자까지 있었다. 연금술사들까지 모조리 끌어내어 붙잡으려 시도했지만 그들은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스의 병사들은 타'페야라(물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라고밖에 할 수 없는 거대한 용이 제국인들을 매달고 사라진 것을 똑똑히 보았으며, 서로들 용혈의 세례자가 용을 부려 도망쳤다고 수군댔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들이 전의를 상실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관계자 모두에다 타'페야라, 덤으로 이스의 근위기사 칼로 게타니까지 같이 사라져 버렸기에 움베르토를 위시한 솔 사람들은 자신이 버려졌다는 기분 비슷한 것을 느껴야 했다. 그들은 서로를 멍청하게 쳐다본 후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솔 사람들은 꿈지럭거리며 부서진 항구를 보수하고, 난파된 배와 삭구를 건져 올렸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아마 적과 한 편인 것으로 보였던 드루카 호의 고용 선원 하나를 붙잡아 구속했다. 사람들은 무언가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고, 중요하지 않았다.

일견 회피로 보이는 그런 행동들은 확실히 방어 기제와 같은 효과가 있었다. 이스의 군민들은 항구가 파괴되거나 배가 침몰하는 사태-그러니까 바다가 주는 재앙에는 매우 익숙해 있었고, 비록 과정은 극명히 달랐을지언정 유신 일행이 남긴 결과 또한 비슷했다. 따라서 그 복구 또한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 때의 일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재앙에 의한 것이라기보단 마치 늘상 있었던 수해 이후인 것처럼 생각되게 했다.

그렇게 공포가 깎여나간 자리에서는 분노가 드러났다. 왕의 궁성에서는 제국이 근위기사를 파견해 '왕을 해하려 한' 행위가 '있을 수 없는 야만적 행위'이며 거기에 대한 '단호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공공연히 개진되었다. 평소에 분위기를 탈 줄 모른다는 말을 듣던 한 신하가 주저하며 아직 제국군 동부군단들이 위그홀 산맥 접경에 주둔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곧 고성이 쏟아졌다.


“제국은 이미 끝장났소. 보르셀라인이 제국의 20만 대군을 패퇴시켰소이다. 제국은 이미 전쟁을 수행할 역량을 상실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동부 군단이 아무리 건재하다 한들 그것은 껍데기 뿐. 지금 상황에서 보급이 제대로 되고 있을 리가 없소!”


“내 듣자하니 제국 곳곳에서 용이 나타나서 사람을 공격하고 있다 하던데, 처음엔 헛소문인 줄 알았지만 그 때 나타난 타'페야라를 봐서는 그 소문도 믿음이 가는구려. 주님께서 제국의 방자함에 질려 천벌을 내리신 게요!”


보르셀라인이 용을 부활시켰다는 것은 동맹국인 이스에서도 일급 기밀이었다. 이스 사람들도 어쨌거나 베르딕이고, 용을 부리는 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제국과 싸우기는커녕 내부의 반란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기에 그 사실은 국왕 움베르토와 그 측근 몇 명만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움베르토는 제국에 용이 날뛰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움베르토가 걱정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정보의 부족이었다. 첩보 업무는 그 대상국의 인프라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대사관 등의 공식적인 정보수집 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내부 협력자를 포섭하거나, 하다못해 편지를 전달하는 데에도 상대국에 어느 정도의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첩자들은 맨발로 뛰어가서 오로지 자기 눈으로만 정탐한 다음 다시 뛰어와서 보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제국 곳곳에 용이 날뛰기 시작하면서 이스가 제국 내에 보유하고 있던 첩보 자원 대부분이 증발되거나 단절되었다. 용케 유지한 간첩선들도 제국이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거의 전부 적발되어 사라지고 대사는 사실상 연금되었다.

그래서 움베르토는 지금 제국군 동부 군단의 사단들이 건재한지, 아니면 보급 부족으로 괴멸 직전의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움베르토는 자신의 병사들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았다. 해룡에 의해 피해를 입은 제국 해군은 이스 왕국 해군으로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겠지만, 육군은 설사 약체화되었다고 해도 이스 육군이 쉽게 여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움베르토의 고민은 두 번째 문제에 있었다. 그 고민은 지금도 움베르토가 속으로 되뇌고 있는 한 마디 말로 축약해서 표현할 수 있다.


‘솔에까지 용이 나타나다니 보르셀라인이 우리를 배신한 것이 아닌가?’


이스에 여태껏 용이 날뛰지 않은 것은 보르셀라인이 그것을 제어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움베르토는 타'페야라에게 욕을 본 뒤로 이제 보르셀라인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입수한 얼마 안 되는 정보는 그 의심을 더욱 가속시켰다. 보르셀라인은 20만 제국군을 패퇴시킨 이후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어째서인가?

물론 제국군에게 입은 피해가 만만찮을 테니, 군사를 쉬게 하기 위한 휴식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움베르토가 보기에 후안 칼소는 승리 앞에서 주저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라면 이 기적 같은 승리를 낭비하는 헛짓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대를 더욱 몰아쳐서 서북 3주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나아가 릭서, 가능하면 리블란트까지 진출하여 베르디스를 엿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움베르토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 발언했다가 된서리를 맞은, 분위기를 못 읽는 신하가 다시 소신 있게 말을 꺼냈다.


“서부의 일도 신경써야 하오. 제국군을 패퇴시키고 진격을 멈춘 후안 칼소의 의중은, 제국과 협상에 돌입하려는 것일 수도 있소. 어차피 보르셀라인의 국력으로 제국을 완전 정복하는 장기전을 하기는 어렵소이다. 이 상황에서 뒤늦게 제국을 쳤다간 제국군의 남은 전력(全力)을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협상 결과에 따라선 최악의 경우 제국이 보르셀라인과 동맹을 맺을 수도 있소.”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에 신하들은 잠시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보르셀라인이 제국 점령지를 포기하고 서부 제후국군과 오셀 대공국에 만족하고 물러난다면, 제국은 체면을 차리고 협상에 임할 수 있다. 그렇게 강화가 타결될 경우 남은 증오의 대상은 이스 왕국뿐. 제국으로서는 와신상담하여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후방의 불안이었던 이스 왕국을 이 참에 완전히 정리해 버리자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움베르토의 의심은 단순히 신경쇠약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었다. 물론 움베르토는 설마 고대의 용 데인이 나타나서 후안 칼소를 사라진 자들의 평원으로 데려갔을 것이라는 생각 따윈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건 그의 사려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상식적인 인간이라는 방증일 것이다.

생각을 정한 움베르토가 소란스러운 어전을 정리했다.


“주 보르셀라인 대사를 통해 정보가 새로 들어오기 전까지 상황을 지켜보도록 한다.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제국 해군이나 어인족들의 도발을 대비해 해군은 더욱 경계하고, 위그홀 산맥 전체에서 산악 사단들의 대비 태세를 강화하도록 하라. 명심할 것은 보르셀라인 없이 제국을 상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하와 장군들은 상식 선의 명령에 만족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베르토 역시 자신이 주의 깊게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산산이 박살나는 데에는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고려할 수 있는 열강의 역학관계는 모두 고려했다고 여겼지만, 인생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이번에도 일은 움베르토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전하, 급보입니다!”


“무엇이냐?”


움베르토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어전 회의실의 문을 연 전령의 무례를 탓하지는 않았다. 전령이 전할 소식이 어전 회의를 방해해도 될 만한 것이라는 판단을 근위대에서 내렸기에 전령이 통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움베르토의 근위대는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전령의 입에서 나온 소식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솔 바로 20마일 바깥에서 최소 30척 이상의 대함대가 관측되었습니다!”


“뭐라! 제국 해군인가!”


베르딕 세계에서 그 정도의 군함을 일거에 동원할 수 있는 나라는 제국뿐이다. 따라서 움베르토의 판단은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전령은 부정했다.


“아닙니다. 함종이 전혀 다릅니다. 동방의 함대 같습니다!”


“동방?!”


그 자리에 있던 신하와 장군 모두가 경악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위협이 닥쳐 온 것이다. 움베르토 국왕이 간신히 정신을 다잡고 물었다.


“칼기아의 배란 말인가?”


“그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모든 신호를 무시하고 솔 군항을 향해 직진 중이며, 살바로테 경이 솔 주둔 함대를 지휘해 영격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명령을!”


이스 해군사령관 살바로테 파리나 제독이 영격, 즉 맞아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20마일 바깥까지 오도록 아무도 보고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스 왕국의 정찰선을 저들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침몰시켰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이미 적이었다. 저들의 식별은 이제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였다. 옆에 있던 해군성 장관이 진언했다.


“주력 함대는 모두 서쪽으로 파견되어 제국 해군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해안을 중심으로 방어하며 뇌조를 보내 함대를 소환하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전하. 일단 내실로 피하셔서 옥체를 보전하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근위대, 전하를 모셔라!”


움베르토는 장관에게 일임하겠다는 말을 중얼거린 후 근위대를 따라 대피했다. 그가 결코 강단이 없는 사람이 아니지만 예상 밖의 사태가 너무 연속적으로 발생하여 적응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상황은 움베르토의 생각보다 더 비관적이었다. 솔의 군항에서 기함 아스터의 갑판에 서 있던 해군 사령관, 살바로테는 망원경의 배율에 뭔가 이상이 생겼다고 믿고 싶었다. 배의 크기가 너무나 상식 바깥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처음 본 것은······ 선발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인가!”


전령이 보고했던 30여 척의 함대는 사각의 선수와 기이한 돛의 배치를 빼고 그 크기만으로 따지자면 제국 해군의 갤리온에 필적하는 대형 범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군에서 그것을 전함으로 판단한 것은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베르딕 세계 해군으로 치면 종선(從船)에 불과했다.

살바로테는 그 동방 함대의 본대 군함들을 바로 지금 망원경으로 직접 목격하고 사실상 전의를 상실했다. 중무장으로 유명한 자신들의 이스 갤리온이 무슨 어선처럼 보이는 크기였다. 자세히 보니 배 위에는 나무 같은 것도 있는 것 같았다. 배 위에서 농사를 지어 수병들을 먹일 수 있는 어마어마한 대선들이었다.

살바로테는 설사 이스 왕국의 대함대가 전부 갖춰졌더라도 저 괴물 같은 배들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함포 위주의 교리를 갖춘 현대 해전의 경우, 더 큰 배는 더 큰 함포를 실을 수 있고 그것은 더 장거리에서 교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수병의 숫자도 월등히 많아질 수 있다. 결국 함포전과 백병전 모두 상대보다 큰 배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말이다.

물론 용골의 길이 문제를 비롯한 조선 기술의 한계 때문에 무한정 큰 배는 만들 수 없다. 하지만 그 한계를 비웃듯이 출현한 저 동방의 군함들은 베르딕 세계의 조선 상식을 한참 뛰어넘고 있었다. 살바로테가 신호사관을 보고 말했다.


“다시 한 번 깃발신호와 발광신호. ‘당신들은 이스 왕국의 영해를 침범했다. 정체를 밝히고 그 자리에 멈춰라. 더 이상 다가오면 공격하겠다!’”


이미 몇 번이나 한 신호였기에, 신호사관은 복창도 하지 않고 급히 달려갔다. 곧 절박한 신호가 솔의 앞바다에서 정체불명의 해군을 향해 펼쳐졌다.



선두무상(船頭舞上)이 공손히 읍하고 고했다.


“대장군. 저 오랑캐들이 방금 했던 짓을 또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신호인 것 같습니다.”


티안 제국 대장군, 관내후(關內侯) 웨이 홍은 본선에 마련된 거대한 누각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사자 머리를 두드려 새긴 투구에 물고기 비늘 모양 갑옷은 대장군의 위엄을 한층 돋보였다. 그녀는 팔을 들어 옆에 놓인 보검을 잡았다. 황색의 용이 금으로 새겨진 붉은 칼집은 천자만이 내릴 수 있는 군권의 증표였다.


“광룽.”


대장군은 그녀의 옆에 시립한 무관의 이름을 불렀다. 광룽은 물 흐르듯 말했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허나 대국의 칙유(勅諭)를 알현할 때는 백기를 꽂은 배를 직접 보내도 예의에 족하다 하기 힘들 것인데, 저런 천조각을 흔들어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할까요? 군관을 보내 볼까요?”


웨이 홍은 눈을 내리깔고 보검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눈앞을 가로막은 이스 왕국 함대, 메시스 해 동부를 제패한 막강한 해군 전력에 어떤 관심도 없는 태도로 말했다.


“흥미 없다. 오랑캐 추장 따위와 대화할 마음도 없고. 비키지 않으면 쓸어버려라.”


광룽이 군례를 올렸다.


“복명! 여봐라. 화포를 준비하라! 준비되는 대로 방포!”


“방포하랍신다!”


선두무상이 따라서 복창하고, 함대의 수군 병사들은 부지런히 장약을 재었다. 베르딕 세계의 함포는 닿지 않는 거리지만 이 정도 접근했으면 티안 제국 수군에게는 이미 교전 거리 이내였다. 그 모습을 보던 광룽이 말했다.


“정말 여기 있을까요, 대장군?”


“뭐가.”


웨이 홍은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광룽은 그녀에게 느껴지는 위압감에 움츠러들었지만 곧 말을 보충했다.


“황룡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으러 이 서방 야만족의 땅까지 온 것 아닙니까?”


웨이 홍은 보검을 잠깐 보다가 그것을 별 미련 없이 의자에 던졌다. 티안진의 관리들이 보았으면 기겁을 할 일이겠지만 그녀와 광룽 모두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지. 멍청한 놈.”


“네?”


“네가 그렇게 숨은 이치를 찾지 못하고 일의 경중을 알지 못하니 아직도 총병總兵 정도밖에 안 되는 것 아니겠느냐? 너의 능력에 의문을 품은 군관들이 네가 원정에 따라온 것을 두고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는지 알기나 하느냐?”


광룽은 갑작스러운 질책에 멍해졌다가 곧 우물거렸다.


“저, 그 입 밖에 내기도 황송스럽지만 제가 대장군의 첩질을 한다는 그 소문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건 반쯤 사실이지 않습니······ 우악!”


광룽의 머리에서 땅 하고 청명한 소리가 울려펴졌다. 내공까지 약간 실린 검집이 그의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광룽은 징처럼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처, 천자의 보검을 그렇게······”


“웃기지 마.”


“예?”


“천자, 황룡. 보검. 그런 것들은 모두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소인들을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총병 광룽이 대장군과 연인 사이인 것도 사실이고, 그것이 대장군의 원정에 그가 보좌하는 데에 있어 어느 정도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역시 약관의 나이에 총병의 지위까지 오른 인재이다. 그 일신의 무예는 가볍지 않으며 병사들을 지휘한 경험도 나이치곤 충실하다. 그래서 광룽은 머리가 빙빙 도는 와중에도 웨이 홍의 말을 이해했다.


“그, 그렇다면...... 찬황신풍대 서조장이 이미 왔는데도 불구하고 천자께서 원정군을 편성하신 이유가.....”


“그래. 황룡?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전대 천자와 금상 폐하를 섬기는 이유는 그분들이 그럴 만한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이지 그 따위 조잡한 미신 때문이 아니니라.”


사오 웬지는 러셀과 유신에게 티안진이 혼란에 빠진 것처럼 이야기했다. 황룡이 없어져서 천자가 천명을 잃었다고 생각한 제후들이 역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오 웬지가 티안진을 떠나오던 시점에서는 그 말이 과히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티안 제국의 72세 천자는 나이 어리긴 해도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 증거는 대장군인 웨이 홍이 막대한 규모의 원정군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로 대변된다. 대규모 원정은 권력 구조가 확립된 평화시에도 하기 어려운 사업이다. 내부가 혼란스럽다면 원정 따윈 논할 가치도 없다. 군 조직 자체를 통제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72세 천자는 황룡 없이도 찬황신풍대와 자신을 지지하는 제후들의 도움으로 반란 세력을 숙청한 뒤였다.

거꾸로, 황룡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역심이 있으면서도 숨죽여 왔던 불안 분자를 모두 뿌리뽑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천자의 권위는 역설적으로 어느 때보다 공고했다. 웨이 홍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황룡 따윈 필요 없어. 잘 알지 않느냐? 주위를 둘러보아라. 이 함대와 그것을 지탱할 국고를 황룡이 이루어 주었는가? 아니다. 모두 사람. 사람이 이루어 낸 거야. 천명 같은 것은 자신의 힘을 모르는 자들이 기댈 곳일 뿐. 거꾸로 말하자면, 이제 천명이 정했다는 천하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는 거지. 우리가 가는 곳이 곧 천하다.”


광룽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티안 제국의 대외 확장. 이것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티안 제국은 천명에 따라 임명받은 천자의 제국을 철저히 지켰을 뿐 그 외의 땅은 탐내지 않았다. 그 천하 안에 모든 것이 있으니 야만족의 문물 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72세 천자는 황룡을 핑계 삼아 서방을 정복하려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벌군이라는......”


“너만 빼고 다 알고 있을 거다. 설마 용을 찾아오라는 황당한 일로 이런 막대한 전비를 들여 원정군을 구성했다고 믿고 있는 멍청이는 너뿐일걸?”


광룽은 입을 다물었다. 웨이 홍은 느긋하게 몸을 눕히고 기지개를 켰다.


“서조장..... 사오 웬지. 그녀가 어릴 때 나도 본 적이 있지. 무예의 자질이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녀라면 자기 한 몸은 지킬 테니 이 야만인의 땅에서 잠시 유람이나 하게 두자고. 뭐, 황룡을 정말 찾아오면 그것도 좋은 일이고.”


웨이 홍이 말을 끝낸 그 순간, 티안 제국의 거함들에서 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작가의말

전 편이 짧은 대신 이번 편은 길군요.

다음 편부터는 다시 카드로스 일행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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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Epilogue Chapter . 그 가을날의 낙일 +2 20.02.10 232 2 9쪽
196 16. 회심(回心) (10) +2 20.02.10 131 2 17쪽
195 16. 회심(回心) (9) 20.02.10 102 2 15쪽
194 16. 회심(回心) (8) +4 20.02.10 86 2 16쪽
193 16. 회심(回心) (7) +2 20.02.10 81 2 14쪽
192 16. 회심(回心) (6) +2 20.02.10 82 2 14쪽
191 16. 회심(回心) (5) +1 20.02.10 77 2 14쪽
190 16. 회심(回心) (4) +2 20.02.10 124 2 14쪽
189 16. 회심(回心) (3) +2 20.02.10 73 2 15쪽
188 16. 회심(回心) (2) +2 20.02.09 85 2 15쪽
187 16. 회심(回心) (1) +2 20.02.08 85 2 15쪽
186 15. 신의 선물(14) +2 20.02.04 92 3 15쪽
185 15. 신의 선물(13) +2 20.02.04 85 3 15쪽
184 15. 신의 선물(12) +2 20.01.29 115 3 15쪽
183 15. 신의 선물(11) +2 20.01.26 96 3 14쪽
182 15. 신의 선물(10) +2 20.01.25 93 3 15쪽
181 15. 신의 선물(9) +2 20.01.22 88 3 13쪽
180 15. 신의 선물(8) +2 20.01.18 91 3 16쪽
179 15. 신의 선물(7) +2 20.01.15 96 3 11쪽
178 15. 신의 선물(6) +2 19.12.31 140 3 18쪽
177 15. 신의 선물(5) 19.12.30 104 3 13쪽
176 15. 신의 선물(4) 19.12.22 108 3 14쪽
175 15. 신의 선물(3) +2 19.12.17 111 3 15쪽
174 15. 신의 선물(2) +2 19.12.06 105 3 14쪽
173 15. 신의 선물(1) +2 19.11.29 123 5 14쪽
172 14. 고대의 길(14) +2 19.11.24 125 5 17쪽
171 14. 고대의 길(13) +2 19.11.18 128 4 13쪽
170 14. 고대의 길(12) +4 19.11.14 130 4 14쪽
169 14. 고대의 길(11) +2 19.11.11 99 5 12쪽
168 14. 고대의 길(10) +2 19.11.05 133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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