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퀘스트 보상
기나긴 8회 초가 지나고 8회 말이 찾아왔다.
위기를 넘겼기에 더그아웃 분위기가 좋을 만도 하건만 부는 것은 스산한 바람뿐이었다.
누가 선동을 해서 그런 분위기가 연출된 것이 아니었다.
투수가 던졌던 공 하나에 모두가 압도되었다.
땅바닥을 튕겨 오르던 안타를 맞을 때만 하더라도 두열이 아홉수 투수로 되돌아갔다고 생각을 하던 그들이었다.
좋은 공을 가지고 있고 열심히 하지만, 행운의 안타를 많이 맞고 수비와 타자의 도움을 못 받던 투수로 회귀하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투수는 기분 나쁠 안타를 맞고 외려 각성을 하였다.
한국 최고 구속을 찍어서 그가 위대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포수인 강만호와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는 저 어이없는 투수의 기백이 선수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좋은 공이 기분 나쁜 안타로 이어졌고 만루가 되었다. 다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이럴 때 가장 피하고 싶던 타점 기계.
그런 그를 향해 자신의 혼백을 담았다.
관중의 욕설이 난무하고 TV와 인터넷에선 ‘개 까이’듯 깨지고 있었지만, 투수와 포수만은 모든 것을 잊고 그들의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버렸다.
지금은 그 세상을 나와 모두가 함께 하는 이곳으로 옮겨 와 둥지를 틀었지만 왠지 범접할 수 없는 논외의 인물이 같은 공간 속에서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같이 웃으며 운동을 하고, 밥알을 튕기며 식사를 하고, 알몸으로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였건만, 왠지 지금의 그는 불과 몇십 분 전에 알고 있던 내 동료가 아닌 듯싶었다.
짝! 짝!
“왜들 그렇게 보세요? 공격하셔야죠.”
그가 박수를 치며 한마디를 외치자 선수들은 그제야 모두 현실의 세계로 정신을 돌렸다.
레드 썬!
마치 최면에 걸렸던 사람들이 술사의 신호에 맞춰 정신을 깨우는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래, 그래야지.”
“야! 모두 정신 차려. 두열이가 어렵사리 만든 기회다. 어제 시합처럼 또 경기 날려 버리고 싶지 않으면 모두 집중해라. 알았냐?”
“넵!”
“자, 자! 파이팅, 파이팅!”
그렇게 자극을 받고 일심동체가 된 선수들은 8회 말에만 무려 5점을 추가하며 사그라드는 마지막 불씨를 애지중지 지키던 잠실의 추격 의지에 찬물을 끼얹어,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는 표어처럼 마지막 하나의 불꽃까지 완전히 소각시켜 버렸다.
9회 초에는 몸이 받쳐 주지 못하는 공을 던졌던 두열이 미세한 어깨 통증을 느껴 마운드를 내려왔고, 방어율이 저조한 패전 마무리조가 긴급 투입됐지만, 워낙 점수차가 많이 나고 추격 의지까지 잃은 상대였기 때문에 무난하게 준플레이오프 티켓을 가져올 수 있었다.
******
스스로 자존심이 없는 선수라 생각했는데, 안타 하나에 아니 그를 피해 던졌던 공 하나에 모든 자존심이 뭉개져 버렸다.
손 위에 얹어진 내 여자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랐지만, 그 손을 누군가에게 뺏기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빼앗긴 손처럼 공 하나를 피한 것이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없는 줄 알았던 자존심은 무참히 깨어졌고, 마음 속에 살던 검은 눈의 내가 그것을 되살렸다.
어깨가 아픈지도 몰랐다.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기력을 뭉쳐 공에게 화풀이를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후에는 어깨가 으스러진 듯 아팠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일신의 기운이 모두 휘발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덕분에 잃었던 것을 다시 되찾은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땡. 스르륵.
“엇! 두열씨. 오늘 시합 멋지던데요? 축하해요.”
“잘 지내셨어요? 감사합니다. 쓰레기 버리러 가시나 봐요.”
“네. 그런데 생각 외로 일찍 퇴근하셨네요?”
“네.”
“어머 내가 주책이야. 피곤하실 텐데 어서 올라가세요.”
“네. 들어가세요.”
벌써 몇 번째 받는 축하 인사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기쁨을 담아 그것을 함께 나누고 격려를 하며 어울리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안면만 겨우 튼 이웃들이 볼 때마다 잡고 놔주질 않으니, 오늘처럼 기력이 쇠한 날은 순간 이동술이라도 배워서 집으로 빨리 귀가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합이 마무리 되고, 한국 최고 구속을 기록한 선수에게 헹가래를 할 때까진 이렇게 피곤하지 않았다.
축하주를 마시자는 선수들의 의견이 있었지만 이틀 뒤 창원과의 준플레이오프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밧데리가 방전된 선수들이 재충전을 하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회식은 올해 성적표를 받은 후에나 열자고 합의를 보았다.
노곤하게 병든 닭처럼 마사지를 받고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차문을 여는 순간, 그냥 그 안에서 자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잠은 집에서 자라고 하지 않던가?
어릴 때야 밖이 편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머리를 어디에 누이던 상관이 없지만, 이십 대 중반만 되어도 집이 가장 편한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 피곤하네.”
땡!
띡 띡 띡 띡 띡.
집에 들어서자 밖에서 쌓았던, 보이지 않는 모든 긴장들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으흥~ 내 집. 아~ 빨리 자야··· 흐야이.”
으미. 깜짝이야.
긴장이 풀린 틈을 노리고, 미미한 현관 등불 저 편 거실에서 무언가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리고 뭘 그렇게 놀래요? 빨리 씻고 와요.”
“미쳐. 내가 진짜 미쳐.”
“미치지 말고 빨리요. 나 급해요.”
급하긴 개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긴급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두열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주무셨나 보네요. 죄송해요.”
[아니야. 그리고 오늘 대단하더라. 축하해.]
“감사합니다.”
[아까 시합 보면서 희정이도 좋아하더라. 바꿔줘? 자네 전화 받으면 희정이가 정말 좋아할 거야. 잠시만. 희정아! 희정아!]
“저 어머니.”
[응?]
“희정이 여기 있는데요?”
[뭐? 아니 이런 미친 년이 지금 몇 신데 거길 갔대?]
“그러게요. 근데··· 지금 희정이 팬티만 입고 새색시처럼 요염 떨고 있는데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기다려, 바로 내려갈게.]
후다다닥.
전화기도 끊지 않고 움직이는 위층의 소란스러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야, 빨리 옷 입어. 니네 엄마 내려오신다.”
“아니, 자기는 왜! 맨날 날 집에 못 보내서 난리야!”
“하! 이런 미친 대삐리. 나보다 가슴도 없는 게 웃통은 왜 까고 난리야. 빨리 옷 안 입어?”
금세 초인종이 울렸고 문을 열자 희정이 부모님께서 난감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셨다.
두 분은 광속으로 인사를 끄덕이고는 납치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져온 아기 담요로 희정이를 둘둘 말아 줄행랑을 치셨다.
“저, 여기 브래지어도··· 에휴···.”
다 큰 처자가 웃통을 까고 있으면 흥분을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전혀 전혀 전혀 그렇지 않다.
저 아이의 가슴이 절벽이라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흠 뭐,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도 맞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
나의 첫 팬사인회에서 대뜸 내 얼굴을 더듬어 무척이나 놀라게 했던 아이.
그때가 중학교 1학년 때였나?
그렇게 내 얼굴을 만진 작은 아이는 집으로 향하던 길에 제 엄마에게 ‘나 나중에 저 아저씨한테 시집 갈 거야.’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앞이 보지 않음에도 어떻게 우리 집을 찾아 수시로 침입을 하였고, 번호를 바꾸고 지문 인식 방식으로도 자물쇠를 바꿔 봤지만 무소용이었다.
그렇다. 사생팬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말려야 할 부모님께서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가 한길을 돌아다니면 위험하다고 윗집으로 이사를 오셨다.
그날부터 난입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이제는 지쳐 번호도 바꾸지 않는다.
반 포기 상태랄까?
그래도 어릴 때는 철없는 동생 같아서 귀엽기는 했는데, 이제는 좀 무섭다.
어릴 때 목욕탕에 가서 아빠 손을 붙잡고 욕실로 들어왔던 지연이가 생각난다. 그 녀석 잘 사나 모르겠네? 놀랐던 얼굴이 예술이었는데.
내게 희정이는 딱 그 정도의 느낌이다.
어릴 때 목욕탕에서 이성의 동창을 만나면 창피하긴 하지만, 다 큰 변태 어른처럼 흥분을 한다던가, 이상한 상상을 하지는 않지 않는가?
하~, 하여튼 저 녀석 때문에 남아 있던 모든 기력마저 소모가 된 느낌이다.
그런데 그때 피곤한 나를 정말 쉬지 못하게 하는 전화벨이 울렸다.
“응.”
[나와.]
“형 힘들다.”
[형님이 서울도 안 올라가고 응? 이렇게 전화를 주셨으면, ‘어르신 전화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나오라고 하지 않아도 버선발로 튀어나와 영접을···]
“아, 알았어, 알았어. 나갈게.”
아흐. 잠실 켈베로스에서 뛰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녀석이었다.
시합이 끝나고 바로 올라갈 만도 한데, 친구가 기록을 세웠다고 기특하게 이곳에 남아주셨던 모양이다.
그래, 영접을 하마.
******
“야! 너는 왜 맨날 여기냐?”
“여기 좋잖아. 닭도 맛있고. 그리고 만호 형도 여기 좋아하고.”
“둘이 사귀냐?”
“만호 형 오면 고대로 전해주마.”
“에히, 그건 아니지.”
탁!
“아니긴 뭐가 아냐, 임마. 다 들었어.”
“킥킥킥. 형 빨리 앉아요.”
“요놈은 꼭 매를 벌어요.”
“아! 형! 머리 좀 치지 마요. 맨날 머리만 때려.”
“임마, 니 머리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데, 때릴 때가 거기밖에 더 보이냐? 내 손이 더 아프구만.”
“머리 가지고 놀리지 좀 마요. 안 그래도 슬픈데···.”
우리나라 최고의 머리 둘레를 가진 친구.
훈련소에서 헬멧이 맞지 않아 제대를 당할 뻔했다지?
타자가 아닌 게 참 다행인 친구였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지는 걸?
저 머리로 투구할 때 어떻게 균형을 잡지?
KBO 최고의 대두였던 윤상민 선배도 쟤한텐 안 되던데···.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자 빨리 마셔!”
“그래, 괜히 생각하는 척하지 말고 빨리 좀 먹자. 그리고 오늘 정말 축하한다.”
“나도!”
“꽘솨, 꽘솨~.”
역시 가족 같은 사람들과 술 한 잔을 기울이니 우와 온몸에 녹아있던 피로가 싹 씻겨나가는 느낌이다.
좋은데?
“근데 어깨는 좀 어때?”
“아이스 마사지 받고 났더니 괜찮은 거 같아요.”
“그래? 이제 어깨 관리 좀 꼼꼼히 해야겠다. 곧 몇 천 만불짜리 어깨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거 벌면 나도 좀 나눠 주나?”
“얼마면 되는데?”
“오~ 마사장.”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 받으며 술을 마실 때 어디선가 ‘땡!’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던 퀘스트가 떠올랐다.
<퀘스트 보상이 도착했습니다.>
부랴부랴 주위의 눈치를 보며 살며시 카드를 쪼아봤다.
음, 이 맛에 사람들이 도박에 중독이 되는구나.
잉? 그런데 아무리 살펴 봐도 상단에 별이 하나 생긴 것 말고는 큰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약물에 의해서 보정을 받던 수치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갔는지 하락이 되어 있었다.
뭐야? 이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별표를 클릭해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왔다.
【선수 정보】 ★x00 ☆x01
☆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하셨습니다. 완료 보상으로 미사용 별 하나가 충전되었습니다.
아주 간략한 설명이었다.
저 별을 어떻게 쓰라는 건지. 설마 장식용으로 준 건 아니겠지? 그렇지? 에이, 설마···.
별표에 번쩍번쩍거리는 이펙트 효과 때문에 확실히 있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나 하나 보는 건데,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설명을 다시 클릭해 보았다.
그랗취~!
☆는 일시적인 능력 상승에 도움을 주는 징표입니다.
☆ 하나를 원하시는 항목에 사용하실 경우, 해당 항목이 일주일간 한 등급 상승합니다. 단, ‘S+ (2500 point–)’가 MAX입니다.
☆ 10개를 모으시면 ★ 하나를 드립니다.
★ 하나를 사용하실 경우, 해당 항목의 수치를 영구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 10개를 사용하실 경우, 해당 항목의 수치를 최소 한 단계 이상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 100개를 모으시면 알 수 없는 힘이 몸에 스며듭니다.
오오! 퀘스트가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보상이 장난이 아니다.
하얀 별을 사용했을 때는 일주일 간 한 등급을 올려주니 만약에 한 시합에서 하나의 퀘스트가 나올 경우 매 등판마다 퀘스트를 완료하기만 하면, 하나의 등급을 계속해서 높여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검은 별은 모으기는 어렵지만 영구적으로 스텟을 올릴 수 있으니 이것 또한 대박이다.
응? 근데 검은 별 10개를 사용하면 한 단계를 올려준다고?
등급? 수치? 단계?
끄응,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수치는 아마도 저기 보이는 숫자일 것이다.
그간 숫자를 살펴본 바에 의하며 숫자 ‘100point’를 기준으로 기호가 변한다. 혹시 그게 단계일까?
그럼, 어렵게 별 열 개, 백 개를 모아 스텟을 올릴 필요가 있나?
음. 아직 사용해 본 경험이 없어 어떤 게 더 좋은 선택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퀘스트 발생 빈도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별을 모아서 어떻게 사용해야 가장 효율적일지도 알 수가 없었다.
우선 모아서 하나씩 사용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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