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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림
작품등록일 :
2017.08.11 23:41
최근연재일 :
2020.01.0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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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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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파르마콘

DUMMY

윌리엄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사악한 이교도를 무찌르는 성전에 자진하여 참여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떠날 때 갖추었던 빛나는 무구는 모두 바래지고, 날랜 말은 쇠약해져 잡아먹은 지 오래. 의기를 나눈 동료들은 전장에서 죽거나 사라졌으며 그나마 남은 자들도 뿔뿔이 흩어져 머나먼 타국을 홀로 떠도는 처지였다. 그가 있는 곳이 어딘지,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뿐이며 아지랑이처럼 끓어오르는 열기의 흔적뿐이었다.


정처 없이 길을 걷다가 외로이 서있는 나무가 있으면 그 그늘에 가서 쉬었다. 숨을 고르며 윌리엄은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강철같았던 의지는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영광은 사막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구나. 허기에 지친 뱃가죽이 전쟁 나팔을 대신하다니.


그는 문득 허리춤에 차고있는 주머니에 사과 한 톨이 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힘없이 허리춤을 더듬는데 그나마도 주머니가 찢어져, 사과는커녕 먼지 한 톨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 부근의 상처만 잘못 긁어 아직 아물지 않은 곳이 다시 열려 피를 쏟아내었다.


이제 더 갈 힘도, 의지도 없어 윌리엄은 자신의 인생이 이곳에서 끝날 것임을 알았다. 이런 몰골로 고향을 돌아가 봐야 남는 것은 수치와 경멸 뿐. 어차피 한번 스러질 인생이 지금 닥쳐옴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이곳에는 신부님 한 분 계시지 않아, 종부성사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성호를 한번 긋고 몸을 단정히 한 뒤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고 있으면 고통도 잊혀질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의식이 멀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그의 투구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방해하지 말라는 투로 손을 휘저으며 몸을 돌렸다. 허나 갑옷을 입은 채로 몸을 돌리는 것은 굉장히 힘들어서 그의 움직임은 어정쩡하게 원래 상태대로 되돌아 올 수 없었다. 그의 몸이 되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예의 투구를 두들기기가 계속되는 것이다. 윌리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뜨자 누더기같은 후드를 뒤집어 쓴 영감 하나가 들어왔다.


“당신은 누구요? 누구기에 기사의 평온한 죽음을 방해하는 거요?”


“죽을 생각이었다면 미안하네만, 내가 자네라면 내 발치에 매달려 제발 내 목숨을 살려달라고 했을 걸세.” 노인이 말했다.


“나는 이미 틀렸소. 상처는 벌어져 닫히지 않고, 내 몸은 세계를 등에 진 것처럼 무겁게 땅으로 끌려 들어가오.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도 꺼져가는 나의 생명을 다시 불태울 수는 없을 거요.”


“의사가 자네 말에 뭐라고 할른지는 잘 모르겠네만 나는 자네를 고칠 수 있을 거야. 나는 으흠.” 노인은 과장되게 기침을 해 보이며 말했다. “연금술사거든.”


“이단적 지식을 가지고 나에게 무엇을 할 참이오?” 윌리엄은 당장에라도 일어나 칼로 노인의 목을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자신의 말마따나 몸이 땅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느낌이라 몸을 추스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노인은 그의 갑옷을 위로 조금 들어올려 상처를 본 뒤 그 곳에 무엇인가 바르기 시작했다.


“지금 보니 죽을 정도의 상처도 아니구먼. 자네는 그저 지쳤을 뿐이야.”


“하느님을 제외한다면 내 몸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알아요.”


“자네 말대로라면 내 몸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셈이구만. 나의 사고능력은 내 몸의 일부지 결코 고립된 무엇은 아닐걸세. 나의 생각에 자네는 죽을 만큼 큰 상처를 입지 않았어. 내 몸이 그것을 진실이라고 인식한다면, 나는 자네의 몸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지 않겠나?”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윌리엄의 옆구리를 툭툭 두들겼다. 윌리엄은 아픔에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간신히 억눌렀다. 눈에서 눈물이 찔끔 새어나왔다.


“자, 이제 잘 듣게나. 조금 있으면 인간의 몸에 새의 머리를 한 이가 자네에게 올 걸세. 정신차리고 그가 하는 말을 잘 들은 뒤에,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네. 그러면 자네도 다시 길을 떠날만한 기운을 차릴 거야.”


윌리엄은 대관절 무슨 소리냐고 물었으나 노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총총히 사라져갔다. 사막 길을 가는데 발자국조차 없었다. 노인답지 않은 기운이 그를 시야에서 멀리 밀어내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게 만들었다. 나중에는 그런 인물을 만났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건 필시 악마의 장난이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점 하나가 다가왔다. 그것은 가까이 올수록 점점 더 길어지고 사람의 형체를 갖추어 갔다. 마침내 모습이 정확히 보일 즈음엔, 기묘하게 휘적거리며 다가오는 한 마리 새 인간이 있었다. 윌리엄은 눈을 연신 껌뻑거렸으나, 그 모습은 환영이 아니라는 듯이 더욱 저 정확하고 세심하게 빛 속에서 다듬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이었으나 온전한 인간은 아니었다. 목 윗부분은 마치 이비스 새를 닮아서, 걸을 때마다 주억거렸다. 얼굴에는 인간의 모습 대신 작고 맑은 눈동자와 긴 부리가 나긋하게 흔들렸다. 간결한 옷차림이었지만 궁색해보이지 않고 지(知)의 품위가 온 몸에 넘쳐흘렀다. 그럼에도 어딘지 가볍고 유쾌한 기색이 있어 상대를 깔보는 듯한, 장난치는 듯한 기운이 손가락 끝에 새의 발톱처럼 갈그락거렸다.


“악마여, 주의 이름을 빌어 명하노니 당장 물러가거라!!” 윌리엄은 힘주어 외치고 맹렬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새 인간은 고개를 갸웃 하더니, 손가락으로 투구를 살짝 두들겨 댔다. 그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를 닮아 너무 거대한지라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기도소리는 그 소리에 묻혀 잡음인지 순음인지 모를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변이 정리가 되자 새 인간이 그 긴 부리를 뻐끔거리며 목소리를 냈다.


“네 옆구리에서 파르마콘 냄새가 나는군.”


“모른다, 이놈. 그런 것을 내가 알게 뭐냐!”


“무지가 자네를 용감하게 만들었군. 필경 이걸 만든 연금술사는, 자신의 작품에 자기자신이 확신을 가지지 못해 그 성과물을 타인에게 실험한 것이겠지. 아마 지금은 어딘가 숨어서 일이 어떻게 될 지 지켜보고 있을 거야.”


“이교도라면 이미 떠난 지 오래다. 나를 내버려두고 썩 꺼지거라.” 윌리엄은 노인이 사라졌던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새 인간은 팔짱을 끼고 목을 동그랗게 구부려 주억거렸다.


“그래서 소원은?”


“.....뭐?”


“나는 지혜를 돌보는 이 토트다. 네가 허리에 묻히고 있는 그 약은 파르마콘이라고 하는 것이고. 뭐, 사실 약이라고도 할 수 없지. 어떤 사람들에게는 독이 되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그냥 물이거든. 나는 파르마콘을 바른 녀석에게 뭔가 하나 소원을 들어주기로 되어있어. 오랜만에 파르마콘 냄새가 나기에 쫓아와 보니 네 녀석이잖는가 말이야.”


“소원은 무슨 소원이냐, 필경 네놈은 시덥지 않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그 대가로 나의 영혼을 가져가려는 것이겠지. 나는 속지 않는다.”


“오오.....영혼을 가져가 달라는 게 소원이로군. 그렇다면야 사양하지 않고.”


“잠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윌리엄의 일갈에 토트는 놀라 심장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었다.


“피곤한 놈일세. 그래, 심장에는 영혼이 없다는 말이지? 좋아, 그렇다면야 데카르트의 의견을 받아서 송과선(松果腺)을......” 토트는 손을 윌리엄의 머리로 가져갔다. 윌리엄은 그 손을 완강히 뿌리치며 저항했다.


“네놈에게는 빌 소원도 없고 영혼을 내 줄 수도 없다. 썩 물러가거라.” 그 때, 그의 머리 속에 하나의 재치가 불꽃처럼 흐르다 사라졌다. 그는 즉각적으로 그것이 자신이 처한 곤경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토트를 손가락질하며 말한다.


“네놈이 물러가지 않으려 하니 좋다. 그렇다면 소원을 말해주마. 내 소원은 네가 무한히 많은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다. 들어줄 수 있겠느냐?” 그 말에 토트가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가 뭐가 어렵다고. 네가 아무리 많은 소원을 빌어도 인간의 생은 짧은 걸. 좋아.” 그 말에 윌리엄은 미소를 지었다. 악마가 그리 여유있게 나올 거라는 점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것이 두 번째 소원이렸다. 나에게 영생을 다오. 어떠냐? 네놈이 능히 할 수 있겠느냐?” 윌리엄은 이것만은 토트가 해내지 못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경전을 본 바에 따르면 이것은 악마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신의 능력에 달린 것이었다. 설령, 악마가 그를 속여 가짜 영생을 준다 하여도 그는 다른 소원을 통해 신에게 직접적으로 구원을 청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첫 번째 소원은 그것을 위한 포석이었으며 구원을 회복할 통로였다.


자, 이제 저 늘씬한 부리가 증오로 일그러지겠지. 나를 향해 알 수 없는 욕을 퍼부으며, 신을 저주하고 땅 속으로 무시무시한 비명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이 시험이 끝난다면 나의 영혼은 구제받으며, 내가 진정으로 신 앞에 용서를 빈다면 천상으로 올라가 천궁의 말미에나마 앉을 수 있게 되리라.


토트는 눈을 한번 꿈뻑하고는 말했다.


“그러지, 뭐.”


그는 그렇게 말하고 손가락으로 윌리엄의 몸을 톡톡 두들겼다. 그 순간 어떤 충만함이 그의 몸 전체에 흘러 넘쳤다. 윌리엄은 내심 놀라면서도 분명히 속임수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몸에 파도처럼 몰려오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아 가고, 절망 대신 희망과 끝없는 용기가 솟아남에도 이것은 속임수일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놀라움이 가시고 평온함이 찾아와 의심조차 사라져갈 때 쯤에는, 그도 더 이상 이것이 속임수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게 되었다. 토트는 마치 누군가를 흉내내듯 팔을 살짝 양옆으로 벌리고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믿으면 구원받으리라.” 거룩한 빛도 거룩한 음성도 아닌 초라한 흉내내기였다. 순간 윌리엄의 머리에 피가 솟구쳤다. 제깟 놈이 대체 무엇이기에 주님을 모독하는 흉내를 낸단 말인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윌리엄은 벌떡 일어나 자신이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녹슬지는 않았지만 전장을 여럿 거친 뒤로 그의 칼도 무뎌져 있었다.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고 윌리엄은 힘차게 토트의 목을 잘랐다. 토트의 이비스 새 머리가 툭 떨어지며 땅으로 굴렀다.


피는 솟구치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고 윌리엄이 토트의 잘린 부위를 올려보았을 때, 그 자리에는 비비를 닮은 개의 머리가 들어앉아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잘린 머리를 들어 머리 위에 붙였다. 머리는 탈바가지처럼 개의 머리를 감싸더니 곧 예전의 이비스 새로 되돌아왔다.


“자, 그래서.....세 번째 소원은?” 토트의 부리가 열렸다 닫혔다. 윌리엄은 그제야 몸이 전혀 무겁지 않음을 느꼈다.


명백한 적대 행위에도 불구하고 토트는 전혀 성을 내지 않았고, 거꾸로 기뻐하지도 않았다. 아무 일도 아닌 양 무덤덤하게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신뢰감과 그 속에 숨겨진 상상 못할 계책으로 느껴졌다. 중요한 것은 적의가 없다는 것이었다. 윌리엄도 이제는 토트가 무언가 그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여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시험삼아 다른 것을 요청해보기로 했다.


“나를 이교도들의 군대가 있는 곳으로 보내다오. 그들 모두를 무찌르고 성지를 탈환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다오.”


“원한다면야.”


토트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역시 손가락으로 그의 몸을 두들겼다. 그가 어리둥절하는 사이 이미 성지가 눈앞에 있었으며, 술탄의 군대가 기사들을 압도하는 모습이 그의 앞에 놓였다. 윌리엄은 망설임 없이 술탄의 군대 안으로 뛰어들었다. 술탄의 병사들은 단신으로 돌격해 오는 기사를 알아채고 화살을 쏘아 보냈지만 이상하게도 화살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기사는 검을 뽑아 들었는데 그 찬연함이 어떤 명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로 적의 목을 베니, 마치 양피지 하나를 베어내듯 수월하였다.


술탄의 군대는 칼로 윌리엄을 내리쳤으나 칼은 윌리엄을 베지 못하고, 창으로 찔러도 바늘 하나 깊이도 들어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윌리엄이 베어낸 수급이 셀 수도 없으니 술탄의 군대가 두려워하며 모두 흩어졌다. 성지를 지키는 방벽은 윌리엄이 고함을 지르자 무너져 내렸다. 수세에 몰렸던 아군은 환성을 지르고, 성지 안에서 벌벌 떨던 주민들이 나와 그를 연호하니 모든 것이 그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유일하게 그의 마음만이 이 모든 상황에 아파했다. 사실 따져본다면 이것은, 윌리엄 자신의 능력으로 해낸 일이 아닌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기이한, 소원을 이루어주는 새 인간의 덕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영웅 대접을 받아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물리치고 토트를 찾았다. 그러나 그가 토트를 찾고자 생각한 그 때에, 토트는 이미 잘 보이는 곳에서 팔짱을 끼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음 소원은 뭐지?”


윌리엄은 일단 토트에게 이러한 일을 해내게 해주어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실토했다.


“어쩌란 말인가?” 토트가 말했다.


“소원을 빌어 이 상황을 헤쳐나온 것도 모두 나의 재능이라고 나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는가?” 윌리엄의 물음에 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은 일도 아니라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윌리엄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를 바보같이 여기기 시작했다. 기실 이러한 인연이 자신에게 닿은 것도, 따지고 본다면 그의 신실한 영성에 신이 축복을 내렸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그것을 씀이 좋은 방패와 좋은 칼을 자유자재로 놀리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소원을 말한다는 것을 단순히 악마의 유혹으로만 가볍게 치부한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실수인 것 같았다. 만약, 그 때에 저 요정이 화를 내고 가버렸다면 어떠했을까. 지금과 같은 영광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군을 지휘하던 높으신 귀족들이 그에게로 왔다. 윌리엄은 공손히 그들 앞에 무릎꿇고 자신의 공적을 겸손하게 드러내었다. 귀족들은 그에게 여러 치하의 말을 남긴 뒤 공적을 기리기 위한 여러 포상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된 윌리엄에게는 지나치게 빈한한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그는 크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무례를 용서해달라고 한 뒤, 토트를 불러 그의 귀에 즐거이 무언가를 소근거렸다. 토트는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고 윌리엄과 귀족들을 그리 멀지 않은 공터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누가 모았는지 모를 산더미같은 보화와, 이국적 풍모를 간직한 미녀들이 공손히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윌리엄은 호방하게 웃으며 귀족들에게 원하는 만큼 가져가라 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며 가지고 싶은 만큼 가졌다. 그럼에도 보물은 전혀 줄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미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족들은 그들의 넘치는 부를 그들의 장병들에게 일부나마 베풀었으며, 그것이 모두 윌리엄의 덕분임을 살짝 이야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장병들 사이에서 윌리엄을 칭송하는 소리가 높아졌는데도 윌리엄은 겸손하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제가 싸운 것은 모두 주님과 조국을 위해서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의 재물도 가지지 않았다. 단지, 사과 한 톨만이 먹음직스러워 보여 나중에 취하고자 주머니에 넣었을 뿐이었다. 토트는 그것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다음 소원은?”


“이제 내가 이루고자 한 것은 모두 이루었다.” 윌리엄은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제 소원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어오는 토트가 귀찮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소원을 이루는 힘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윌리엄은 이것이 주님이 주신 선물이고, 이것을 가치 있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만족하고 있지만 또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생기면 어찌할 것인가. 그 때, 최초의 소원을 말했을 때처럼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는 것이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토트에게 말했다.


“토트. 이제는 네가 소원이 무엇인지 묻는 것에 지치고 말았다. 그러니 일일이 나의 소원을 묻지 말고 내가 생각하는 것,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해주게나.”


키득키득. 하고 토트가 웃었다. 그는 유쾌하게 부리를 열었다 닫았다.


“이제야 파르마콘의 의미에 근접한 소원이 하나 나왔구먼.”


그 순간 윌리엄은 파르마콘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그의 머리 속으로 파르마콘에 대한 지식들이 흘러 들어왔다. 파르마콘은 병을 치료하는 주술적인 약이었지만 언제나 발광이나 쾌락에의 심취 등에 빠지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마셨던 약이 바로 파르마콘이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이끌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를 육체에서 벗어나 이데아의 진리로 도달하게 하는 축복의 매개체였다.


윌리엄의 머리 속에 혼란이 생겼다. 그렇다면 파르마콘은 약인가 독인가? 그것은 살인자였으며 또한 구원자였으나 결코 동시에 될 수는 없었고,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닐 수는 없었다. 의미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지식의 갈퀴를 빠져나갔다.


그는 확실한 답을 얻고 싶어했으며, 그러자 진리가 그의 귀에 다가와 부드럽게 속삭였다. 신의 세계가 꽁꽁 숨겨두고 있던 놀라운 진리의 빛이 그에게로 들어와 이해되기 시작했으며 그를 환희의 전율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토트는 즐거움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진리는 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해 세계 전체를 통해 이해하고자 했고, 그것이 그의 육신을 세계 속으로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윌리엄은 당황하여 그의 육신을 잡고자 버둥거렸다. 그러자 그는 진리의 세계에서 내려와 다시 몸을 가질 수 있었다. 동시에 진리에의 희열은 사라지고 보잘 것 없는 무지(無知)의 인간만이 남아 자신이 못 견딜 정도로 미워지는 것이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다시 진리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진리의 세계에 발을 담구며 육체를 유지하고자 하니 육체는 진리에 맞추지 못하고 인형처럼 삐그덕댔다. 그는 괴리를 이기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아아, 차라리 진리가 진리가 아니라면. 아니 존재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런 것들을 몰랐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구차한 육신을 유지하고자 애를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을.


한편으로는 여전히 진리의 세계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뒤따랐으나, 소원은 단지 모든 생각을 순차적으로 처리할 뿐이었다. 윌리엄이 진리를 갈구하기 전에 이미 진리가 진리가 아니게 되었으며,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그는 무지로 떨어지게 되고 말았다. 무지로 떨어진 이후에는 그가 그러한 소원을 빌 수 있다는 사실조차 희미하게 망각되었고 지혜가 그에게 찾아오지 않았던, 토트가 오기 이전의 자신의 삶만이 레테를 거슬러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나무 그늘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그 윌리엄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소원을 이루기 전 상태의 인식이 무력감이었으므로 소원의 능력은 사라졌고, 마침내 파르마콘도 그 효력을 다하고 말았다. 그것은 단지 물이었을 뿐이었다. 윌리엄은 자신의 옆구리가 약간 젖어있는 것을 느꼈지만 피가 흘러나와 그런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그는 나무 그늘에서 힘없이 늘어져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내가 왜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강철같았던 의지는 어느 새 자취를 감추고, 영광은 사막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구나. 허기에 지친 뱃가죽이 전쟁 나팔을 대신하다니.


그는 문득 허리춤에 차고있는 주머니에 사과 한 톨이 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힘없이 허리춤을 더듬는데 그나마도 주머니가 찢어져, 사과는커녕 먼지 한 톨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 부근의 상처만 잘못 긁어 아직 아물지 않은 곳이 다시 열려 피를 쏟아내었다.


작가의말

2003년 정도에 쓴 글이네요. 이걸 썼을 때는 회귀가 별로 없었는데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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