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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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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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05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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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DUMMY

봄이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어떤 세계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자랐고, 새싹이 자라났다. 그녀만의 세계는 평화롭고 고요했다. 봄이만의 세계에서는 그 어떤 방해물도 갈림길도 없었다. 봄이만의 세상은 철저하게 질서정연되어 있었고, 그녀 외에는 그 누구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누구도 발을 들여놓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질서를 어기고 다른 인간들이 봄이만의 세계에 들어왔다. 그들의 수는 순식간에 불어났다. 처음에 그들은 조용히 지내는가 싶더니, 이내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들은 다툼 끝에 다른 인간을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봄이만의 세계에는 질서가 사라져버렸다. 신뢰도 사라졌다. 평화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봄이는 황폐해져 버린 자신만의 세계를 바라보며 평화로웠던 예전의 세계를 그리워했다. 다른 인간들에 의해 짓밟히고 만 꽃들과 새싹은 더 이상 그 황폐한 땅에서 자라나지 못했다. 봄이는 자신만의 세계에 주저앉아 흐느끼며 절망했다. 그리고 원망했다. 이미 무너져내린 세계의 잿더미 속에서는 오직 원망만이 피어올랐다. 원망밖에 남지 않았다.


봄이는 원망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아니었다면 이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 인간들이 아니었다면, 이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


인간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원망하던 봄이는 피 묻은 권총을 손에 쥔 어떤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봄아, 내 말 들려? 젠장, 일어나 봐. 뭔가가 잘못됐어.”


노인이 누워있는 봄이의 양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천막에는 옅은 비상등을 제외하고는 빛이 없어서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봄이는 노인의 심상치 않은 행동에 본능적으로 담요에서 몸을 일으켰다. 상훈은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서 열심히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봄이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바쁘게 움직이던 두 남자에게 물었다.


“저기, 무슨 일이에요? 잘못됐다니요?”


봄이는 의문에 차고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막 바깥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건물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니, 더 멀리서 들렸다. 귀를 기울여 보니 그것은 천막 안에서 늘 듣던 바람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녀석들이 이상해. 해가 뜰 생각도 하지 않는 꼭두새벽부터 온 천막들을 샅샅이 뒤지고 있어. 뭔가 목적이 있는 게 틀림없어. 내가 무슨 일인지 나가서 확인해볼 테니 너희 둘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노인이 가죽 코트의 단추를 채우며 천막 입구로 향하자 상훈이 그를 멈춰세웠다.


“어르신, 제가 갔다 올 테니까 쉬고 계세요.”


상훈이 그렇게 말하며 노인의 팔을 붙잡자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뿌리치듯 떼어 놓았다. 평소와는 다른 노인의 반응에 상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노인이 밖을 나서려다가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이 거슬렸는지 고개를 돌려 천막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미안하네.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말이야. 그것만 확인하고 나면 금방 돌아올 거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게.”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들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입구를 열어젖히고 나가 버렸다. 천막 안에서는 급하게 어디론가로 달려가는 노인의 발소리만이 울리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봄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노인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공포감마저 느껴졌다. 봄이는 애써 별 일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그럼에도 천막 안으로 스며드는 바람처럼 조여오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별 일 없겠죠?”


봄이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듣자 한결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상훈이 별 일 없을 거라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상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딘가 불안했는지 천막 내부의 붉은 비상등을 껐다. 그러고는 천막 입구 옆에 기댄 채로 쥐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봄이도 그 행동의 의미를 눈치채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나고 빠른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누군가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봄이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어깨를 움찔했다. 비상등을 꺼 놓아서인지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봄이는 곧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서둘러 들어온 노인은 어딘가 추긍하는 듯한 말투로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혹시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봄이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상훈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미 노인의 말뜻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녀석들이 한 젊은 남성과 소녀를 찾고 있어. 너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혹시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시간이 흐를 때마다 노인의 어둠에 가린 표정이 점차 추긍에서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상훈의 표정 역시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봄이의 머릿속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노인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사람을 죽였니?”


그 말을 들은 봄이의 머릿속은 정지해 버렸다. 머리를 띵하고 울리는 현기증이 갑작스레 그녀를 찾아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어깨가 경련했다. 관자놀이가 두근거리고, 다리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상훈이 봄이에게로 달려가 다짜고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제서야 봄이는 지면에 꼼짝 않고 얼어붙은 다리를 움직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훈에게 끌려가듯 따라가면서도 자신이 왜 그 자리에서 도망쳐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노인은 그들이 천막 입구 반대편을 비집고 나가려는 동안에도 그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훈이 먼저 천막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다음으로 봄이가 빠져나가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놀란 봄이는 상훈이 바깥에서 잡고 있던 손을 놓쳐버렸다. 봄이가 뒤돌아보자 노인이 그녀의 눈 앞에 서 있었다.


봄이는 노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팔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노인은 봄이의 팔을 굳게 붙잡은 채로 놔주지 않았다. 봄이는 애걸하듯 소리쳤다.


“할아버지, 숨겨서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전부 다 후회하고 있지만 결국엔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여기서 끝낼 수는 없어요. 부탁이에요. 절 놔주세요......”


봄이는 차마 노인을 주먹으로 때리지는 못했다. 대신 노인의 두 팔을 붙잡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애걸복걸할 뿐이었다. 바깥에서 상훈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노인의 굳은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노인은 봄이의 팔을 놔주지 않은 채로 가죽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꺼내 봄이의 손아귀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봄이는 발을 구르면서도 자신의 손에 쥐어진 물건이 무엇인지 확인해보았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자동차 열쇠였다.


“통제소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가장자리에 내 차가 있어. 거기서 네 짐들을 챙겨서 떠나.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 그리고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마.”


“할아버지.”


“네가 어떤 일을 저질렀더라도, 설사 네가 사람을 죽였다는 게 사실이더라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 그렇지?”


봄이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노인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봄이가 저질렀던 일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다시금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봄이의 팔을 붙잡고 있던 노인의 손에서는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넌 나쁜 아이가 아니니까.”


봄이는 손바닥에 쥐고 있던 자동차 열쇠를 꽉 움켜잡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한순간이었지만 봄이는 이 곳을 빠져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보자꾸나, 봄아.”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막 바깥에서 상훈이 봄이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봄이는 노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노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작가의말

캬캬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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