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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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7.08.21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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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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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7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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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DUMMY

방금 전까지 미소를 띠고 있던 그녀는 번개처럼 엽총을 집어들고 일어나 창가에 착 달라붙었다. 봄이도 한 발 뒤늦게 잽싸게 일어났다. 어찌나 정신없이 일어났는지 하마터면 팔로 탁자에 놓인 양초들을 쳐서 엎어버릴 뻔했다.


중년 여성이 총구멍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나직이 말했다.


“상훈이 깨워.”


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워 있는 상훈을 깨우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나도 들었어.”


상훈이 벌떡 일어나 재킷을 챙겨 입었다. 봄이도 조용히 권총을 꺼내고 중년 여성에게 달라붙었다. 봄이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창문을 열려고 했지만 중년 여성이 가로막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의 한 줄기 빛은 표적이 될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상훈이 말했다.


“이번이 네 번째인가?”


중년 여성이 바로잡아 주었다.


“아니, 다섯 번째야.”


봄이에게는 그들의 대화가 예전부터 총소리가 가끔 들려왔다는 말처럼 들렸다. 봄이는 어떻게 총소리가 들릴 수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봄이가 지금 당장 오른손에 힘을 주기만 해도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닌가.


그들은 조용히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총소리가 잦아들었다가 다시 울려퍼졌다. 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가 딱딱딱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상당히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봄이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사격했을 때가 떠올랐다.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공기가 진동하는 소리....... 지금 창 밖에서부터 울려퍼지는 소리가 그런 소리일까?


총구멍 속에 눈을 집어넣고 있던 중년 여성이 말했다.


“이번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아무리 못해도 최소 500미터는 떨어진 것 같아. 저번에는 바로 코앞에서 들렸던 적도 있었어. 그때에 비하면 새발의 피야. ”


그 말을 들은 봄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중년 여성이 안도시키기는 했지만 심장이 요동치고 혓바닥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괜찮아 보였다. 마음을 추스른 봄이는 천천히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 명이 부족하지 않나?


“그런데 상민이는 어디 있죠?”


봄이가 묻자 중년 여성이 아차하며 말을 비틀었다.


“맞아, 그 녀석. 아까 전에 먹을 걸 구해 온다면서 밖으로 나갔어. 나간 지 적어도 한 시간은 되었을 텐데...... 찾으러 가야 해.”


중년 여성이 뛰쳐나가려 하자 상훈이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 중년 여성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뭐 하는 거야?”


“안 돼. 너무 위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년 여성이 상훈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그 광경을 지켜본 봄이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입조차 다물지 못했다.


“너 이 새끼야,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말해 봐.”


얼음처럼 차가운 실내 공기를 타고 정적이 흘렀다. 그 와중 바깥에서는 총소리가 다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봄이는 어쩔 줄 모르고 식은땀만 흘렸다.


상훈이 침착한 어조로 덧붙였다.


“녀석은 무사할 거야. 우리가 전부 다 몰려나가면 놈들의 주의만 잔뜩 끌게 되는데다 집을 지킬 사람도 없어져. 지금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밖은 온통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야. 우린 무기도 부족하고 인원도 부족해.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어.”


중년 여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었어? 네가 사람이야? 형이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눈앞에서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르는 가족을 두고 방금 뭐라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씨발 지금 장난해? 왜, 그때로는 부족했어? 또다시 잃고 싶어? 좆까는 소리 하지 마. 두 번 다시 두 눈 멀쩡히 치켜뜬 채로 당하지는 않을 거야. 난 찾으러 갈 거야.”


중년 여성이 소리치자 상훈도 맞섰다.


“나도 마찬가지야. 가족을 잃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지금 나가면 우리 모두가 위험해져. 한 명을 위해 나갔다가 한 명만이 돌아오게 될지도 몰라. 어쩌면 아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을 지키라고 가르쳤잖아? 그렇기 때문에 이러는 거야. 모두를 끌어들여서 더 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가족을 잃고 싶지는 않아.”


중년 여성이 이를 빠득 갈며 상훈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상훈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총소리는 계속 울렸다.


봄이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도저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수소로 가득 찬 풍선처럼 금방이라도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봄이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하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봄이는 두 사람의 의견 충돌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봄이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상훈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던 봄이를 데려다 돌봐주었고, 중년 여성은 갈 곳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을지도 모르는 봄이를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서로 갈등을 빚는다면 봄이는 도무지 누구의 편에 서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기에 봄이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더욱 더 초조하게만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총소리의 간격은 더욱 좁혀졌다. 봄이의 눈앞에 선 두 사람마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뇌가 쪼그라들 정도로 고민하던 봄이는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동일한 목적이 있었다. 동일한 신념도 있었다. 가족을 절대로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는 굳은 신념이었다.


봄이는 드디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드디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기 시작했다. 봄이는 더 이상 어린애처럼 그들에게 도움만을 받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그들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봄이의 가슴을 녹여 준 상훈에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곧바로 내쫓아 버렸을 꾀죄죄한 봄이를 당연하다는 듯이 따뜻하게 식구로 대해 준 중년 여성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봄이가 말했다.


“상민이를 찾아서 데려오기만 하면 되는 거죠?”


서로의 팔을 움켜쥐고 있던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봄이에게로 쏠렸다. 그 모습을 본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서로를 노려보는 꼴이라니.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위해 저리도 핏줄을 세우는 꼴이라니. 봄이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이 왠지 조금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봄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것은 봄이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봄이는 그들의 가족이 아니었으니까.


“금방 다녀올게요.”


* * *


차마 누군가가 말릴 새도 없이 봄이는 회중전등과 권총을 집어들고 계단 밑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상훈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숨에 몇 계단을 뛰어 내려간 봄이는 현관문을 벌컥 열고 삭막한 바깥 세상의 향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봄이는 대문으로 나가려다가 이들 가족의 구식 경보장치가 떠올라 방향을 틀었다. 재빨리 담 너머로 권총과 회중전등을 집어던진 다음 온 힘을 다해 담벽을 기어올랐다.


얼어붙은 죽음의 땅 위에는 이미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둠이 감싼 밤공기는 매섭고 날카로웠다. 멀리서는 조용해졌다 싶으면 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로 방향을 예측할 수는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의 시각적 감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봄이는 조용히 땅바닥에 떨어진 권총과 회중전등을 주워들고 자신의 눈앞을 비췄다.


회중전등이 깜빡거리다 켜졌다. 봄이는 예상보다 훨씬 밝은 회중전등 빛 때문에 난데없이 지레 겁이 났다. 하지만 그렇게 큰소리를 쳐 놓고 꼬리를 말고 다시 돌아간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봄이는 내심 그런 소리를 했던 게 조금은 후회되었다.


봄이는 천천히 한 발짝씩 나아갔다. 처음에는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땅만을 비췄지만 곧 용기를 내어 저 멀리까지 회중전등을 비출 수 있었다.


봄이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도둑고양이처럼 옮겨다녔다. 빛이 켜진 건물은 없었다. 질퍽하게 녹은 눈과 휘날리는 천쪼가리만 다리에 자꾸 걸렸다. 인기척도 없었다. 가끔 봄이가 앙상한 나무줄기를 사람으로 착각하고 흠칫흠칫 놀란 게 다였다. 몇 분 동안이나 어둠 속을 방황하던 그 때, 짙은 안개 속에서 울려퍼지던 총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낮췄다. 총소리가 가끔 진동할 때는 들리지 않았던 먼지 흩날리는 소리까지도 들리기 시작했다. 봄이는 낮게 웅크린 채로 건물 모퉁이를 돌아 마지막 총소리가 울려퍼졌던 장소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회중전등 빛이 계속 깜빡거렸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봄이는 조용히 권총을 집어넣고 계속 깜빡거리는 회중전등 빛을 손바닥으로 반쯤 가렸다. 이대로라면 빛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봄이는 앞뒤 안 보고 급하게 나온답시고 회중전등 배터리를 교체하지 않은 것을 일생일대의 실수로 여겼다. 여기서 빛이 나가버리면 다시 작은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데.......


봄이는 배터리를 아껴야겠다고 생각하고 회중전등을 끄려 했다. 하지만 버튼을 아무리 눌러대도 이 멍청한 회중전등은 정신없이 깜빡이기만 할 뿐 꺼지지도 않고 제대로 켜지지도 않았다. 이미 틀린 모양이었다.


이윽고 봄이마저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허탈함과 함께 몸을 감싸는 불길한 기운마저 느껴지기 시작했다. 화가 치민 봄이는 욕을 하며 회중전등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두 눈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봄이는 마치 장님처럼 건물 벽에 손바닥을 짚고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벽을 더듬던 손바닥에 무언가 끈적끈적한 것이 느껴졌다. 힘겹게 옮기던 발밑에서도 물컹거리는 기분나쁜 느낌이 전해졌다. 봄이는 지하실에서 썩은 쥐 시체를 밟았다는 상민의 말이 생각났다. 봄이는 더 이상 자신이 밟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봄이는 지금 스스로가 처한 처지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미 이곳에 나와있는 이유 따위는 모조리 잊어버리고 난 후였다. 애초부터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봄이는 상민이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고, 이 주변의 지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빛이 사라지자 돌아가기도 어려웠다. 봄이는 영영 이 어둠 속을 헤쳐나가지 못하고 혼자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돌아가야 했지만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껏 봄이는 발을 한 발 내딛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봄이의 무너져가는 의지는 점점 얼토당토않은 변명으로 변해갔다. 가볍게는 상민이 이미 자신 몰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심하게는 그가 이미 아까 전 짤막하게 벌어졌던 총격전에 휘말려 죽어버렸을 것이라는 별의 별 생각까지 다 떠올랐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봄이에게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바로 그 순간 딜레마에 빠진 봄이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짚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봄이가 뒤늦게 권총을 빼들고 뒤의 누군가를 겨누었지만 총구는 그의 이마에 닿지 못하고 가로막혔다. 당황한 봄이가 왼손으로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앞에서 들렸다.


“잠깐, 봄이야. 너 봄이 맞지?”


그 말을 들은 봄이의 손이 멈췄다.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찾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봄이가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 말했다.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 얼른 돌아가자. 여기에 더 이상 남아있으면 위험해.”


봄이는 자신을 놀라게 한 데다 그러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하는 상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갔었어?”


“젠장, 목소리 낮춰.”


상민이 쉰 목소리로 말하고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먹을 것을 조금 구해 왔어.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너도 총소리를 들었지? 점점 더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어봐야 좋을 게 없는 건 확실해. 급하게 그 자리를 벗어나느라 회중전등도 잃어버렸어.....젠장, 하마터면 나까지 휘말릴 뻔했어.”


봄이는 아까 전에 떠올랐던 상상들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망상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봄이가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냐니, 네가 신호를 보냈었잖아. 회중전등을 빠르게 껐다가 켜면서 말이야. 나는 전등을 잃어버려서 앞이 하나도 안 보였거든. 놈들과 꽤 떨어져 있는데다 혼자인 것 같아서 놈들이라고는 생각 안 했어.”


그의 말을 들은 봄이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우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게 되었다. 봄이는 이걸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너도 느꼈겠지만 더 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어. 놈들이 더 이상 총을 쏠 이유가 없어진 건지, 아니면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져버린 건지는 모르지만 조심해야 해. 후자라면 마음 놓아도 되겠지만 전자일 경우에는.......”


상민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단 한 번의 천둥같은 총성이 다시 울렸다. 그러나 이번 총성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봄이는 총성의 크기만을 듣고 해당 총성의 진원지를 파악해보려고 했다. 이 정도 총성이라면.......바로 코앞에서 들린 총성이었다.


봄이와 상민은 재빠르게 자리에 엎드렸다. 봄이의 심장이 쿵쾅거리고 목젖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목구멍에서는 자꾸만 마른 침이 넘어갔고, 이마에서는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면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부터 가까운 곳으로...... 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봄이는 조용히 권총의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걸었다. 이대로라면 접촉을 피해갈 방법은 없었다.


봄이가 마음의 준비를 끝마친 순간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봄이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 그들의 정황을 살폈다.


언뜻 보기에도 일곱 명은 되어 보이는 패거리들이 도로 한복판을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들 중 서너 명은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있었다. 나머지는 다양한 무기를 한 개씩 들고 있었다. 그들의 분위기는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위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직접 그들에게 다가가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다지 내키는 방법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도로 구석에는 한 남자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조금 전 울린 총성과 무엇인가 연관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횃불을 든 패거리가 거리에 쓰러져 있던 남자에게 다가가 뭐라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봄이와 상민은 근처에 있던 건물 벽 모퉁이로 기어가 몸을 숨긴 채 그 광경을 꼼짝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상민이 봄이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슬슬 피하자는 뜻임이 분명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봄이도 조심스럽게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 순간 봄이의 발밑에서 난데없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봄이도 처음에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발 밑을 내려다보고 나서야 봄이는 알 수 있었다. 배터리가 다 된 줄 알고 내팽개쳤던 회중전등이 깜빡거리며 눈 앞의 패거리들을 비추고 있었다. 패거리들의 모든 시선이 봄이에게로 향했다. 봄이에게는 몇 초도 되지 않았던 이 찰나의 시간이 마치 몇 시간에 걸쳐 자신의 운명을 필름 영사기로 비춰 주는 한 편의 비극 영화처럼 느껴졌다.


봄이의 몸 속에 흐르던 모든 피가 얼어붙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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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105화 21.01.05 32 1 12쪽
107 104화 21.01.03 65 1 13쪽
106 103화 20.12.21 46 0 9쪽
105 102화 20.12.20 27 0 16쪽
104 101화 20.12.16 63 1 12쪽
103 100화 20.12.11 29 0 13쪽
102 99화 20.12.08 37 0 12쪽
101 10. 종착점 20.12.07 37 0 11쪽
100 97화 20.12.02 58 0 13쪽
99 96화 20.11.29 67 0 11쪽
98 95화 20.11.28 30 0 14쪽
97 95화 20.11.23 41 0 13쪽
96 94화 20.11.20 40 1 9쪽
95 94화 20.11.19 62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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