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문제자
항응은 누군가 객잔에 들어오는 것을 알았지만 생각에 집중하느라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그제야 경계심을 가지고 상대를 관찰했다.
항응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한 아이는 덩치가 작았다. 여덟살 정도의 덩치로 보였는데 눈빛이나 표정은 아이가 지을수 있는 눈빛과 표정이 아니었다. 항응은 거절할까 하다가 이것도 어쩌면 인연일 수 있다는 생각에 계산을 마치고 아이를 데리고 객방으로 들어갔다.
객방에 들어가자 아이는 무릎을 꿇고 항응이 묻지도 않았는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아이는 열세살로 항응과 두살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덩치가 작은 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하루에 한끼밖에 먹지 못해 그런 것이다.
집안의 둘째로 태어난 아이는 형이 하나 있었다. 여섯살 차이가 나는 형은 부모가 세상을 뜨자 어린 나이에 고기도 잡고 나무도 베면서 동생을 먹여살렸다. 단순히 먹여 살린게 아니라 돈을 모아 동생을 공부시켰다.
둘은 하루에 한끼씩 먹으면서 서당에 낼 돈을 모았다. 하지만 부모가 없는 두 아이가 서당에 낼 돈을 꼬박꼬박 마련하자 주변사람들은 두 아이를 도둑이라 모함했고 결국 형은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도둑질했다고 자백하고 감옥에 갇혔다.
태형 스무대만 맞고 나올 죄였는데 재수없게도 맹수와의 결투에 끌려가게 되었다. 일반감옥에 죄수가 너무 많아 아이의 형이 사형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배치된 것이다. 형은 살아보려고 맹수에게 죽기살기로 덤볐으나 맹수의 이빨과 발톱에 갈가리 찢어졌다.
아이는 형의 복수를 다짐하고 흥왕부에 환관으로 들어갔다. 글을 읽을줄 알고 영리하게 군 덕분에 계추의 환심을 샀다. 일반 환관으로는 왕세자에게 접근하기 힘들기에 계추의 심복이 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일년여동안 필사의 노력으로 계추의 심복이 되었다. 꾀가 많고 눈치까지 빠른 아이를 계추는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러다 오늘 항응에게 혼이 난 계추는 위왕부로 돌아간 후 오한을 느껴서 왕세자에게 술을 올리는 일을 아이에게 맡겼다.
아이가 영리하고 말도 잘하기 때문에 잘 둘러대리라 믿은 것이다. 아이는 왕세자에게 올리는 술에 웅황석(雄黃石 - 비상이 포함되어 있음) 가루를 탔다. 술병이 왕세자의 앞에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곧바로 위왕부를 탈출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아이는 계추의 말이 생각났다. 객잔의 흑가면이 필히 절세의 무공을 가진 귀한 신분의 사람이라던 말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흑의는 귀한 검은비단이고 머리에 쓴 죽립은 흑철죽이라는 진귀한 물건으로 만든 것이라 했다.
거기에 마구간에 있던 두필의 말은 하나하나가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천하의 명마라고 했다. 아이는 왕세자의 술에 독을 탄 자신을 구할 사람은 흑가면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객잔을 찾았다.
아이의 말이 끝나자 항응은 급히 소월을 깨웠다. 마구간의 말들을 끌어내고 안장을 얹은 후 가까운 성문을 향해 달렸다. 항응은 아이를 뒤에 앉히고 말을 달리면서 말했다.
"성문에서 막거든 나를 왕세자의 심복이라 하고 급한 심부름을 간다고 하거라."
아이는 낮은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만약 왕세자가 독으로 죽거나 혹은 왕세자의 술에 독이 든것이 발견되면 가면을 쓰고 오늘 흥왕부에 도착한 항응이 가장 큰 의심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는 머리가 영민하여 자신의 행동이 흑가면에게 해가 되었음을 짐작했다.
왕족들과 관리들이 사치를 즐기기 때문에 성문은 늦게까지 닫히지 않았다. 성밖으로 놀러갔던 왕족이나 관리가 돌아왔는데 성문이 닫혀있으면 불호령을 내릴게 분명하고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날벼락을 맞을 것이다.
아이가 아직도 환관의 옷을 입고 있고 성문을 지키던 병사중 몇몇은 아이가 계추의 심복인 것을 알고 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아이에게 굽신거리면서 배웅했다. 말이 멀어지자 병사들은 말이 사라진 방향으로 침을 뱉으면서 이 짓거리 그만둬야지 하고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쉽게 성을 나오자 항응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꼴인데도 나라가 유지되는 것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추적대가 쫓아올 것을 염려해서 달빛을 빌어 말을 달렸다. 흥왕부에서 오십리정도 멀어지자 항응은 말을 멈췄다.
아이는 말에서 내리자 얼얼해진 엉덩이를 연신 손으로 만졌다. 소월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자 소월은 아이가 불쌍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소월도 전란에 가족을 전부 잃어 어린 나이부터 외롭게 자랐다.
그러고 보니 항응도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고 다른 가족들의 냉대 속에서 자랐다. 아이에게 연민을 느낀 항응은 가면을 벗고 엄숙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말했다.
"나 항풍과 목예란의 아들이자 패왕성 성주 항불의 손자 항응은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진심으로 원하면 나한테 절을 올리거라."
아이는 가면을 벗은 항응의 얼굴이 예상외로 어려보이자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하지만 패왕성이라는 말에 반색을 했다. 패왕성의 기마부대인 흑풍혈로의 명성은 남한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항응에게 삼고두(三叩頭)를 올린 아이는 항응을 사부라 불렀다.
"사부님, 제자가 태어나 얼마 안되어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고아(苦兒 - 불쌍한 아이)라고 불렀는데 사부님은 부모와 같으니 제게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항응은 소월에게 부탁하고 싶으나 그러면 사부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 한참 고심하던 항응은 허리춤의 검을 풀어서 제자에게 주었다.
"일단 너는 검동이다. 나의 검을 너에게 맡길 것이다. 언젠가 너에게 이름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그때 직접 이름을 지어 사용하거라."
검동은 항응이 내린 검을 공손히 받았다. 졸지에 사질이 한명 생긴 소월은 자신도 뭔가 챙겨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항응 대신 소월이 검동에게 월녀검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항응은 검동에게 패왕성의 기본무공을 가르치며 아이의 자질을 알아본 후 어떤 무공을 가르칠지 결정하기로 했다.
검동은 항응에게 왜 흉측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지 질문했다. 항응은 가면이 용의 역린으로 내공의 수련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검동의 두눈에는 패왕성의 이름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확신이 깃들었다.
항응이 나뭇가지를 모아놓고 손을 넣어 불을 피우는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만난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지만 사부라면 저정도는 손쉽게 할 것이란 믿음이 검동에게 생겼다. 검동은 소월을 꼬박꼬박 사고(師姑)라고 불러 소월을 기쁘게 했다.
항응은 제자에게 해남도로 가려는데 말을 실을 수 있는 큰 배를 어디가면 탈 수 있는지 물었다. 검동은 계추의 밑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이 많다. 큰 배를 가지고 해남도로 장사를 다니는 자들은 혜주에 많이 모인다. 아이는 혜주로 가서 알아보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답했다.
소월과 검동의 덩치가 비슷하여 소월의 옷 한벌을 검동에게 주어 갈아입게 했다. 다행히 소월의 옷이 전부 남자 옷이라 어색하지 않았다. 소월은 자신이 강호를 주유할 때에는 소검이란 이름을 사용하며 자신을 사고가 아닌 사숙으로 부르라 단단히 일렀다.
검동이 벗은 옷은 모닥불에 태워 없앴다. 다행히 아직 여름철이고 원래 더운 지방이라 이불 없이도 잘 수 있었다. 검동은 자신이 가죽으로 간편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집을 만들 줄 안다면서 시간이 날 때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이튿날 셋은 혜주를 향해 움직였다. 소월과 검동이 말 한필을 함께 탔다. 둘이 몸무게가 적게 나가고 오운답설의 체력이 적구보다 더 좋기 때문이다. 검동은 사람 말을 알아듣는 듯한 묵구가 신기한지 자꾸 눈길을 줬다.
혜주는 생각보다 작은 곳이었다. 하지만 장사치와 뱃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서 아주 복잡해 보였다. 별의별 이상한 사람들이 다 모여서 가면을 쓴 항응이 평범해 보였다.
어렵지 않게 해남도로 향하는 배를 찾을 수 있었다. 식량과 의복 및 일부 사치품을 실은 배는 돌아올 때면 육지에 없는 해남도의 과일들을 가져온다. 검동이 해남도의 용하(龍蝦)가 팔뚝만 하다는 말에 항응과 소월은 반신반의했다. 작은 민물새우만 보아온 둘은 바다새우가 팔뚝만큼 크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항응은 혹시 팔뚝만한 새우이면 내단을 품지 않을까 해서 검동에게 질문했다. 검동은 새우에게는 없지만 일부 조개는 진주를 품었다고 대답했다. 진주는 아주 진귀하고 상서로운 보석으로 취급 받는다. 소월은 해남도에 가면 꼭 조개를 잡아 배를 가르겠다고 다짐했다.
배가 해남도로 가는 건 일년에 두번이라고 한다. 과일의 수확철에 맞춰서 가는데 지금 출발하면 조금 일찍해서 덜 자란 과일을 가져와야 한다. 하지만 더 늦으면 해룡이 난동을 부리기 때문에 목숨걸고 출발하는 배가 없다고 한다.
뱃사람은 성격이 급하고 거칠다. 성격이 유순한 사람도 배에서 오래 생활하면 급하고 거칠어 진다. 죽음의 고비 몇번 넘기고 나면 부처님이 아닌 이상 해탈이 아니라 폭급해지기 마련이다.
검동으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항응은 귀찮은 일을 피해야겠다 생각했다. 선원들이 짐을 전부 배에 싣자 항응은 적구를 번쩍 들고 배에 올랐다. 두필의 말을 차례로 들어 배에 싣자 선원들이 항응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배가 출발하자 셋은 뱃전으로 나가 바다를 구경했다. 두필의 말과 한마리의 늑대는 창고안에 갇혀있다. 말처럼 예민한 동물들은 보통 바다를 처음 보면 미쳐 날뛴다. 그래서 갑판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해안가에서 배가 멀어지자 소월과 검동은 뱃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둘은 서로를 부축하며 선실로 돌아갔다. 항응은 갑판에 서서 바다의 힘을 느꼈다. 바다가 품은 웅혼한 힘은 아무런 의도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배를 흔들고 사람을 흔들었다.
항응은 바다의 힘의 흐름을 감지하려 애썼다. 바다의 힘이 너무 거대해서 바닷속에 있었으면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커다란 배에 타고 그 배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니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다는 강물과는 달리 흐르지 않는 듯하나 수많은 흐름이 있었다. 그 흐름들은 배와 부딪히며 배에 영향을 주었다. 거대한 배와 거대한 힘의 부딪힘이 항응에게 전달되며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
항응은 지동산요권을 사용만 했지 지동산요권에 맞아본 적은 없다. 여직껏 무공서의 서술대로 정확히 시전했고 성공했지만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바다는 항응에게 지동산요권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해줬다.
바다의 어떤 흐름들이 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관찰하며 항응은 지동산요권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했다. 그러면서 항응은 지동산요권의 극의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지동산요권은 항응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무공이었다.
- 작가의말
소월 : 조개를 잡아 배를 갈라 진주를 찾을거얍!
항응 : 바다 한번 안가본 촌놈티를 내지마. 조개 뱃속이 아니라 입안에 있다잖아! 머리를 자른 뒤에 입을 벌려서 찾아야지!
검동 : 조개 한번 보고 얘기하세요.
개문제자, 첫 제자를 뜻합니다. 마지막 제자는 관문제자 입니다. 용하는 랍스타입니다.
지동산요권의 극의는 원자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핵융합이 일어나 거대한 힘을 방출하죠. 쉽게 말하면 지동산요권의 완성된 무공명은 핵펀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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