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세(2)
첫 의뢰, 쓰레기 청소를 해결한 지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해결한 현상금 사냥은 열다섯이 넘는다.
당연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진우 님."
사소하게는, 이진우에 대한 실비아의 호칭이 바뀌었다.
조금은 더 편하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 분신일 때는 독귀 님이셨죠. 마침 잘 됐습니다. 허락받을 게 있거든요. 새로운 결계인데, 이거 어떻습니까?"
가족을 뜻하는 식구(食口)는 같은 집에서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지난 이주일간 같은 식탁에서 같은 밥을 먹었다.
요리를 비롯한 가사 전반에 능통하다는 실비아의 어필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덕이다.
두 사람은 그럭저럭 식구였으며, 서로 간에 가지고 있던 의심과 불안을 대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딱히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어 뻘쭘해지는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도 컸다.
JW타워는 무려 43층짜리 건물이 아닌가?
사실 밥을 먹거나 따로 용건이 없으면, 얼굴을 볼 일도 많지 않았다.
의외로 두 사람 모두 여유가 없었던 탓이었다.
"새 결계?"
"예. 공기를 정화하는 효과를 가진 결계입니다."
"...굳이?"
"누군가 탑을 공략한다면 그런 방향으로 공격을 시도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의 사태를 고려한다면 효과가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추가로 가능하다면, 이건 좀 비싸긴 한데. 내부에 들어온 침입자에게 전기를 지지는 결계거든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먼저 실비아는 건물 전체에 온갖 종류의 결계를 설치하느라 바빴다.
그녀가 가진 상급 특성인 '데몬 블러드-끈적한 피'는 그녀의 피를 매개로 설치된 결계를 반영구적으로 유지시키는 바.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JW타워는 외부에서 공략당할 여지를 차근차근 지워나가고 있었다.
실제로 며칠 전 비스트의 다른 무리가 JW타워를 습격했으나, 이진우가 직접 독귀를 통해 나설 필요도 없이, 건물 안에서 '딸깍'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것만으로도 모든 습격자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소모되어버린 마정석을 보고 이진우가 피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말이다.
"혹시 지금, 마정석 여분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봐도 돼?"
"왜요?"
"왜긴 왜야. 그 마정석 구하는 게 나니까."
이진우는 그 마정석을 벌어오느라 바빴다.
JW타워의 방어력이 높아지는 건 바라마지않는 일이건만 마정석 소모가 너무 컸다.
실비아는 그야말로 마정석 먹는 하마였다.
하긴 그러니까 4서클의 전력으로 5레벨 다수를 막아낸다는 소리를 할 수 있었겠지.
마정석을 쓸 곳이 많지 않아 얻은 마정석을 족족 그녀에게 투자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이젠 슬슬 과하지 않나 싶다.
"...흠흠. 그럼, 이 이야기는 다음번에 하는 걸로 하고. 오늘 일정 있으신가요?"
물론 득과 실을 따지자면 득이 훨씬 컸다.
비밀을 공유하는 첫 친구는, 이진우에게 상당한 심리적 안정감을 줬으니까.
"왜?"
"저번에 부탁하신 '성형'.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가 겪는 문제점에 대해 실비아가 해결책을 내기도 했다.
"말씀하셨잖습니까. 슬슬 가면 내구도가 떨어져 가니, 독귀 쪽의 얼굴을 마법으로 바꿀 수 있겠느냐고요."
가면 없이 이중신분을 내세우는 방법에 대해서다.
-'근데, 대체 가면은 왜 계속 쓰고 다니는 거야? 얼굴 좀 보여줘!'
친분이 쌓인 건 비단 실비아와만이 아니거든.
레일라와도 꽤나 친해졌다.
독귀에게 레일라는 실력 좋은 정보원이고, 레일라에게 독귀는 단골고객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처음 제시했던 15%의 수수료가 10%로 줄어들 정도였다.
사석에서 만나 술이라도 먹자고 얘기하는데, 가면을 벗을 수가 있어야지.
"예, 가능합니다. 단 독귀 님과 진우 님이 동시에 건물 바깥으로 나가 무적을 해제하셔야 합니다. 그럼 독귀 쪽의 얼굴을 건드려, 인상을 뒤바꿀 수 있습니다. 그럼 더 이상 가면을 쓰고 다니실 필요는 없겠지요. 방어 마법진도 미리 설치해 놓았습니다. 중간에 사고가 터지진 않을 겁니다."
옥상.
탁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며 잠깐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말씀드렸듯 성형 수술 동안은 무적을 해제해야 하기에, 제게 목숨을 맡기셔야겠습니다만."
그러나 그 순간.
웅웅!
휴대폰이 울렸다.
-[독귀! 시간 돼? 잠깐 만나서 할 얘기 있는데.]
문자가 도착했다.
레일라로부터였다.
"누굽니까?"
"레일라."
"아, 그 불여우 말이십니까."
"불여우?"
"그렇잖습니까. 얼굴도 묘하게 여우상이고, 머리도 빨갛고."
그 소식을 들은 실비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가 보십쇼. 마정석 벌어 오셔야죠."
"성형은─"
"그건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확신이 섰을 때 천천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 턱을 깎아달라거나, 원하는 요구사항이 있으면 미리 전달해주셔야겠지만요. 안 그러면 제 취향대로 얼굴을 건드려 버릴 테니."
이야기를 뒤로하고, 이진우가 독귀를 통해 JW타워를 나섰다.
***
비스트에게 빼앗은 차를 무면허로 대충 운전한다.
차량에 자동 운전 기능이 달려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어찌저찌 독귀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약속 장소는 양양에 자리 잡은 한 지하 술집이었는데, 위치 탓일까.
손님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잔에 담긴 위스키를 통째로 들이켜는 레일라와,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뚱뚱한 흑인, 또. 후드를 뒤집어쓴 한 남자만이 각자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독귀? 여기!"
독귀가 인기척을 내고 나서야 그들이 반응했다.
"호오, 이 사람이 독귀신가. 속초에서 활동한다는?"
레일라에게 다가가자, 황금빛 의수가 독귀의 앞에 뻗어졌다.
황금 의수엔 금반지가 마구잡이로 끼워진 채다.
"나는 체스터라고 하네. 소소하게 중개업을 해서 먹고 살고 있지. 그래도 이 바닥에선 상당히 잘 나가는 편이야."
독귀는 고개를 돌려 손을 뻗은 남자를 마주 봤다.
목에는 금목걸이가, 귀에는 금반지가 있다.
그 모습이 '이 바닥에선 상당히 잘 나가는 편'이라는 체스터의 말을 뒷받침했다.
"옆은?"
"하하, 신경 쓰지 말게. 내 보디가드 같은 친구니까."
"...세릭스입니다."
적당한 통성명이 끝난 이후에야 독귀가 레일라에게 시선을 던졌다.
"할 말이라는 건."
그가 질문을 꺼낸다.
"맛있는 의뢰가 들어와서 말이야. 간만에 현장 일 뛸려고 했는데, 영 빡세서 말이지. 지난주부터 아는 사람들 쭉 둘러봤는데 너만한 적임자가 없는 것 같아."
"레일라 말이 맞네. 레일라가 실력 좋은 해결사긴 하다마는, 혼자 처리하기엔 지나치게 위험해. 그래서 아는 실력자가 있냐고 물어봤더니, 자네를 추천하던데."
"생각 있어? 단가 세. 현상금 사냥 30번해도 이만큼 못 벌걸."
"대강 알겠군."
지난 보름간, 독귀가 해결한 의뢰는 많다.
대부분이 간단한 현상금 사냥이긴 해도, 거의 하루에 하나씩 의뢰를 해치운 탓이다.
절반 이상의 해결사가 의뢰 다섯을 해결하기도 전에 죽는다는 걸 고려한다면, 독귀는 벌써부터 상당한 수준의 경험을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많이 위험한 의뢰인가 보지?"
하여, 그는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글쎄. 의뢰 위험도라는 건 해결사 실력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 아닌가?"
"내가 보기엔 할만한 것 같아. 보상도 좋고. 내용 확인해 볼래?"
레일라가 체스터에게 눈치를 준다.
체스터는 특유의 황금 의수로 바 아래를 뒤지더니, 머지않아 종이 몇 장을 꺼내 독귀에게 넘겼다.
독귀의 손에 의뢰서가 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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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 보편적 건강보장】
말이 제약회사지, 백천제약의 주력 돈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질 좋은 마약입니다.
아, 값비싼 도핑제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최근 백천제약에선 마소병 억제를 위한 신약을 개발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쓰레기들도 가끔은 착한 일을 하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익명의 의뢰주는, 더 착한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신약 조합식을 탈취해 카피약을 만드는 거죠.
그걸 뿌리기만 해도 백천제약은 엿을 먹고, 서민들은 값싼 치료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들의 연구소* 메인 컴퓨터 인트라넷에 보관 중인 신약 조합식을 탈취해 주세요
해킹 장비*와 연구소 진입을 위한 신분*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돈도 벌고, 겸사겸사 좋은 일도 하고. 최고지 않나요?
[목표]
-백천제약의 신약 조합식 탈취.
[의뢰 유형]
-자료 탈취
[보상]
-팔천만 원(80,000,000원)
*연구소
-백천제약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연구소입니다.
-이 연구소는 설악산 초입에 숨겨져 있으며, 백천제약의 방어 인력들이 인근에 근무합니다.
-자세한 정보는 추가 자료를 참고해주세요.
*해킹 장비
-물리적 해킹 툴이며, USB의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메인 컴퓨터 디바이스에 삽입할 시, 몇 분 안에 자동으로 정보를 탈취합니다.
-산업 스파이의 보안 허점 누출로 만들어졌습니다.
*신분
-의뢰주는 당신에게 갱단, '독사파'의 간부라는 신분을 제공합니다.
-해당 신분을 내세운다면, 당신은 도핑제 거래를 빌미로 연구소 옆 건물 생산시설에 진입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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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서를 읽은 독귀가 묘한 반응을 보였다.
"연구소?"
"응. 백천제약 물건 유명해. 아마 속초나 양양에선 세 손가락 안에 들걸? 요즘 굴러다니는 마약 중 상당수는 저기랑 관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가끔 막 나가는 해결사들이 사용하는 마약성 도핑제도, 저 연구소에서 나왔다는 소문이 자자하네."
"아, 너 지난주에 비스트 애들이랑 엮였다며. 걔들 쓰던 약도, 저기 거라더라."
독귀가 다음 장을 살핀다.
연구소의 자세한 위치와 사진들이 보였다.
"어때?"
독귀가 잠시 고민했다.
둘이 나눠먹는 게 팔천만 원.
인당 사천만 원.
보상 자체는 차고 넘친다.
지금까지 한 의뢰보다 위험해 보이는 게 문제긴 해도, 그는 무적 아닌가?
딱히 리스크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도핑제라.'
게다가 도핑제라는 물건에는 독귀도 관심이 많았다.
보통 저런 약물이라는 게, 그렇다.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부여하는 대신 커다란 부작용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독귀에겐 피해 면역이 적용된다.
부작용을 걱정할 필요 없이, 과실만을 취하는 게 가능하단 뜻이다.
"좋다."
이러나 저러나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단, 비율은 7대 3. 내가 7이다."
"야, 미쳤어? 험한 말 나오게 하네? 내가 먼저 침 바른 의뢰를─"
"끝까지 들어라. 대신, 내가 위험을 전담하지."
"뭐?"
"대놓고 주의를 끌어 방어 인력을 집중시키겠다. 넌 자료 탈취에만 집중해라."
"...자세히 말해 봐."
다음 행선지가 확정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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