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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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복이아빠
그림/삽화
내복이아빠
작품등록일 :
2011.05.26 12:44
최근연재일 :
2019.01.29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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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50,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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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28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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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제3장 도망 - 2

DUMMY

감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리가 처음 칼을 들었던 여섯 살 때였다. 그때 이리의 할아버지는 나무칼을 이리의 발치에 던지고선 말했다.


잡거라.


어떻게 잡으라는 말도, 어떻게 쓰라는 말도 없이, 한마디만을 툭 던진 할아버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칼을 잡자마자 자신의 나무칼로 이리를 후려쳤다. 피할 수 없었던 이리는 바닥을 뒹굴었다. 너무나 아팠다. 영문도 모르는 자신을 무지막지하게 때리는 할아버지가 미웠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할아버지인 것도 잊은 채 칼을 쥐고 달려들었다.

이윽고 얻어맞을 대로 맞고, 탈진해버린 이리를 안아 올린 할아버지가 말했다.


감이 좋구나.


본능적으로 어떻게 맞아야 덜 아프고 어떻게 때려야 더 아픈지를 아는, 짐승 같은 아이라고.

그 말이, 그때는 그렇게 듣기가 싫었다. 이리를 짐승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싫었다. 눈곱만큼의 열정도 없는데 저절로 익혀지는 싸움의 감각들이 싫었고, 손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쥐고 있어야 했던 칼이, 곳이, 활이 싫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리는, 그때 그토록 미워했던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자신에게 살인기술을 가르친 그들이 너무도 고마워서 정말 눈물이 났다. 눈가를 살짝 훔쳤다.

가우리 땅 중서부 지방의 넓은 평원 위에 아침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과 동시에 말까지 완전무장한, 버들이 이끄는 중갑기마대 오십 기가 비어랑의 동문에서 튀어나갔다. 수요가 거의 없어 비축해둔 것 또한 거의 없는 강철갑옷과 쇠곳을 모두 투자한, 급조된 기마대의 전부였다. 이것이 비어랑이 가진 최고의 패. 적어도 비어랑 안의 모든 대장간에서 더 많은 무기를 만들어낼 때까지는, 운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마 부대였다. 쇠뇌나 충분히 거리를 벌린 화살이 아닌 이상 절대 뚫지 못할 중갑기마대는 아사달 본진의 왼편을 송곳처럼 찌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맞추어 서문에서 말 네 마리와 마차 하나가 쏘아지 듯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선두에 선 것은 기다란 낫곳을 든 채 말을 모는 이리였다. 비어랑은 이리와 세 명의 모톨아치들을 알리미(전령)로 하여 비어랑과 가까운 <하나암>, <쥬신>, <고이울>, <한누울>로 글월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이 포위망을 뚫고 추격을 떨쳐내도록 도우면서 하나암의 큰쥬진에게 푸르매 시우의 글월을 전달하는 것이 이리의 임무였다.

서문을 뛰쳐나온 이리와 모톨아치 무리는 아사달군의 얇은 포위망을 뚫고 서쪽으로 내달렸다.

그 두 가지 모두에 충분히 대응할 병력상의 여유가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아사달의 반응은 비어랑의 생각 이상으로 느렸다. 기마대가 진영으로 진입하는 것을 간과한 이상 쇠뇌는 아군을 죽일 확률이 더 높았고, 낫곳을 사용하는 싸홀아치들은 너무 늦게 나타나서 공격은 포기한 채 질주하여 오른쪽으로 빠지는 기마대의 꽁무니만을 쳐다봐야 했다. 본진이 혼란스러워 지자 서문에서 빠져나간 이리를 추격하지도 못했고, 가벼운 무장의 기마병 몇 기 정도만이 이리에게 붙었다.

이리는 말의 배를 박찼다. 말을 몰아 이리에게 달려들던 붉은 옷의 싸홀아치는, 뱀처럼 파고드는 낫곳에 핏빛 안개를 뿌리며 하늘을 날았다. 아주 잠깐 동안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열두 척이 넘을 법한 허공으로 머리가 날아갔으니까.

달려들었던 기마병 넷의 목줄기가 순식간에 모두 찢겼다. 정확하게 기도가 끊겼다. 머리채로 날아가 버린 몇 몇은 그나마 고통을 느끼지 못 했을 텐데, 목의 반쯤만 잘려버린 불쌍한 자들은 피거품을 뿜으며 좀 더 오래 괴로워했다.

기마대의 선두에서 큰곳을 눕힌 채 앞만 보고 달리던 버들, 그리고 서문을 나와 한가람의 줄기를 따라 내달리며 미친 듯이 낫곳을 휘두르던 이리는 아사달의 지휘계통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몸소 실감했다. 하루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 그때 천한번째 밤이 이리를 찾아왔다는 점. 마지막으로 아사달의 진영에 그렇다 할 공성병기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 이리는 아사달 군의 주요전력이 싸홀아치가 아니라 천한번째 밤이었고, 어찌 된 이유인지 천한번째 밤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며, 그 때문에 아사달 군이 당황하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버들에게 귀띔해 준 것이다.

이걸로, 적어도 천한번째 밤에 원하는 것은 아사달이 어라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리는 알 수 있었다. 천한번째 밤은, 누군가를 어라하로 세울 생각은 아닌 듯했다.

누군가가 어라하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기병 무리가 옵니다!"


이리의 뒤에서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가 소리쳤다. 그 사이에 따라 붙은 다섯 번째 목줄기를 낫곳에 달린 가지날로 꿰어버린 이리가 고개를 돌렸다. 아사달의 중갑기병 다섯 기가 벼를 짓밟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기병 다섯 기면 수가 많았다. 죽었다 치고 양동작전을 걸어서까지 빼내려 했던 이리 쪽을 잡는 것이 더 급하다는 판단을 아사달 쪽 누군가가 한 모양이었다.


"계속 달리소. 멈추지 말고! 바로 따라 붙을테이까! 마차 잘 지키고!"


이리는 뒤따르는 모톨아치들에세 소리치고 곳을 돌려 잡았다. 따라붙은 칼잡이들은 다 죽였다. 아무리 뛰어난 살인자라고 해도 온 몸을 철판으로 둘러싸버린 기마병을 쉽게 죽일 수는 없다. 일단 칼날 자체가 들어갈 만한 곳이 없었고, 아무리 힘을 실어도 방향이 맞지 않으면 갑옷을 긁기만 할 뿐이었다.

말머리를 급히 돌린 이리는 박차를 가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말탄 모톨아치 넷과 마차가 순식간에 이리의 옆을 지나갔다. 기마대와 맞설 듯 마주보며 달리던 이리가 한 순간 괴성을 지르며 거꾸로 들었던 낫곳을 던졌다. 드러낸 어깨근육의 섬유 하나하나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를 만큼 혼신의 힘을 실은 강한 던지기이었다.


펑.


폭발음이 들리며 기병 하나의 가슴갑옷이 대포를 맞은 것처럼 찌부러졌다. 낫곳의 가지날이 갑옷에 박힐 정도였다. 가슴에 곳이 박아버린 싸홀아치는 말 등에서 날아가듯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낫곳은 던지라고 만든 곳이 아니다. 휘두르고 찌르는 것이 목표인 만큼 대가 길고 머리가 무거운 중병기다. 그래서 던지는 것도, 던져서 맞추는 것도 결코 쉬운 게 아니었고, 그건 이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리는 오른 어깨가 빠질 듯 쑤시는 것을 느꼈다. 진짜로 근육 몇 가닥이 끊어진 것 같다고 느꼈다.


나머지 네 놈은 어쩐다.


멈추어 선 이리는 두루마기의 아랫도리를 걷어내며 벼리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느린 마차만 최대한 멀리 보내놓는다면, 이리 혼자라면 무거운 중갑병이 탄 말 네 마리 정도는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다. 일단 마차와 거리를 벌려놓은 후 적당한 장소에서 저지하기로 마음먹은 이리는 고삐를 당기려 하였다.

그때, 이리에게 쇄도하던 기창 하나의 몸이 붕 뜨더니 바닥으로 쳐박히는 것이 보였다. 기창의 터져버린 옆구리에는 기다란 쇠 화살이 박혀있었다. 이리는 고개를 돌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푸르매인가.


이리의 눈에 멀찌기 성벽 위에서 거대한 활을 든 채 두 번째 시위를 먹이고 있는,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보였다. 딛옷(상복)만을 입고 있음에도 갑옷을 걸친 듯 우람한 근육을 잔뜩 부풀어 올린 채, 마치 짐승의 갈기처럼 풀어헤친 곤색 머리를 바람에 맡기고, 이글거리는 잿빛 눈동자로 적을 바라보는 비어랑 싸홀아치의 주인, 어쩌면 비어랑 태이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던 푸르매 시우였다.

곧 두 번째 화살이 하늘을 갈랐다.


쿵.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던 세 기의 기병 중 하나가 쓰고 있던 투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투구의 관자놀이 양쪽이 터지며 핏덩이가 튀어올랐다. 나머지 두 기의 싸홀아치는 곧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시우는 세 번째 화살을 뽑아들며 외쳤다.


"이리!"


하나암으로 보내는 글월의 전달을 이리가 하겠다고 했을 때, 버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지금 비어랑은, 가족을 볼모로 잡고 약점을 캐내서라도 하나라도 더 많은 싸홀아치를 붙잡아 두어야 했다. 욕을 먹어도, 배덕하단 말을 들어도 넋 놓고 몰살당하는 것 보단 나으니까. 하지만 시우는 그러지 않았다. 이리의 요청대로 희아를 보호해주었고, 이리를 자신들의 싸홀아치와 같이 대우하였다. 이리조차도 모두 반대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 이리가 내건 조건은 이리의 진심을 믿을 수 없도록 만들기에 충분히 이기적이었으니까. 배신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했으니까.

이리가 희아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을 때, 버들은 핏발을 세우며 이리의 멱살을 잡았고, 그 자리에 있던 싸홀아치도, 모톨아치도, 살피아치도 모두 이리를 욕했다. 이리의 신의 없음을 비난했고, 배신이라며 분노했다.

하지만 시우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은 호수 같은 잿빛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마치 이리 말하는 듯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네. 지어미와 아들을 잃었네.


"너는 끝까지-......!"


이리는 시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마차와 모톨아치 무리가 간 방향을 향해 말을 몰아 달렸다. 그의 귓가로 화살이 공기를 찢는 소리와, 육중한 철판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두 번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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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제3장 도망 - 7 17.10.13 107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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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제3장 도망 - 5 17.09.28 119 1 9쪽
28 제3장 도망 - 4 17.09.28 79 1 9쪽
27 제3장 도망 - 3 17.09.28 98 1 9쪽
» 제3장 도망 - 2 17.09.28 109 1 10쪽
25 제3장 도망 - 1 17.09.28 107 1 9쪽
24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10 17.09.28 95 1 11쪽
23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9 17.09.28 87 1 10쪽
22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8 17.09.28 91 1 8쪽
21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7 17.09.28 90 1 7쪽
20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6 17.09.28 69 1 12쪽
19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5 17.09.28 85 1 7쪽
18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4 17.09.28 95 1 10쪽
17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3 17.09.28 98 1 7쪽
16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2 17.09.28 78 1 8쪽
15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1 17.09.28 119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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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제1장 남자와 소녀 - 13 17.09.28 87 1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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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1장 남자와 소녀 - 11 17.09.28 112 1 9쪽
10 제1장 남자와 소녀 - 10 17.09.28 119 1 6쪽
9 제1장 남자와 소녀 - 9 17.09.28 154 1 7쪽
8 제1장 남자와 소녀 - 8 17.09.28 169 2 7쪽
7 제1장 남자와 소녀 - 7 17.09.28 181 1 8쪽
6 제1장 남자와 소녀 - 6 17.09.28 215 4 8쪽
5 제1장 남자와 소녀 - 5 17.09.28 250 4 7쪽
4 제1장 남자와 소녀 - 4 17.09.28 289 6 8쪽
3 제1장 남자와 소녀 - 3 17.09.28 342 6 6쪽
2 제1장 남자와 소녀 - 2 17.09.28 523 6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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