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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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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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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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5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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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41. 그것뿐이야(6)

DUMMY

침울해 하던 것이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레샤는 아주 거세게 난동을 부렸다.

내 얼굴을 쥐어뜯고 턱을 밀어내고 무릎과 다리로 가슴팍이랑 어깨를 때리고. 뒤집어진 거북이보다 더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 기세로 할 말, 안 할 말 다 했으면 질질 끌릴 것도 없잖아.


"내려줘요, 빨리...!"


아예 모가지를 꺾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건지 레샤는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거듭 밀어댔다.


그러다 내가 앞을 잘못 봐서 고꾸라지면 누구 손해인지는 뻔한데.


"내려주면 네 발로 갈 거야? 아니잖아!"


난 그렇게 받아치는 대신 내려주지 않는 이유를 차분히 말했다. 아마도 차분히 했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내려주면 레샤는 또 도망칠 거고 또 틀어박힐 거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마, 마마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요...!"


"그러니까 그 놈의 준비는 여기 오는 동안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난리를 치던 레샤도 계단을 내려올 때만큼은 얌전히 내 어깨를 잡았다.

진짜 떨어지기는 싫은 모양이다.


계단을 내려오자 까뮤 할머니를 돌보던 에반젤린과 야우라가 보였다. 그 둘은 레샤를 데리고 나오는 나를 무슨 신기한 동물 보듯이 바라보았다.

누워서 연신 앓는 채 하던 까뮤 할머니도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벌떡 일어나 이쪽을 보았다.


"이 녀석! 우리 레샤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게야!"


그리고는 한달음에 달려들어 내게 윽박질렀다.


"결판내러요."


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


"결판?"


야우라에게도.


"네에? 결판이라니..."


에반젤린에게도 그 말은 꽤나 충격적으로 들렸는지 두 사람은 할머니를 따라 이쪽으로 왔다.


덕분에 그토록 싫어하는 사람의 시선을 잔뜩 받게 된 레샤만 얌전히 수그러들게 되었다.

어차피 다 아는 사람들이니 손바닥으로 얼굴 가려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건 언제쯤 깨달을까.


"그냥 빨리 가기나 해요..."


이젠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만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소문이 빨리, 또 널리 퍼지는 건지 제각기 흩어져있던 할머니들도 어느샌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동안 할머니들이 고민 했던 건 레샤에게 바칠 뇌물인 것 같았다. 다들 선물로 보이는 물건을 하나씩들 챙긴 모습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과자 한 바구니를 들고 온 마노 할머니가 물었다.


"결판을 내러 간데."


"결판?!"


까뮤 할머니의 말에 마노 할머니가 크게 놀랐다.


그게 이야깃거리씩이나 될 수 있는 건지 할머니들은 이후로도 거듭 수군대었다.


늪의 길은 험준하진 않았으나 평탄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멍청하게 걸었다가는 자빠지기 일수라는 뜻이다.


조심히 걷기 위해 행렬은 일렬로 이어졌고 레샤를 빼더라도 일곱 명이나 되었으니 꽤나 길었다.


레아가 그걸 이상하게 보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아주머니는 문을 열고 나와 계단에 발을 걸치고선 멀리 내다보듯 몸을 앞으로 기울여 서있었다.


실제로도 멀리 내다보고 있었어서 이내 우릴 발견하고는, 할 말은 많은데 이로 다 할 수 없어 그냥 하지 않기로 한, 그런 얼굴로 맞이했다.


"이 배신자."


내가 계단 밑에 다다르자 레아 아주머니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 말이다.


"아니, 내가 저기서도 배신자였는데 여기서도 배신자 소릴 들어야 해요?!"


나는 불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남의 부탁 들어준 것뿐인데 순식간에 이중첩자가 되다니, 난 그런 죽음의 이지선다 앞에 놓인 주인공 같은 거 되고 싶지 않았다.


아줌마가 원한 건 레샤의 스태프였고 나는 그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다. 단지 꾸러미가 하나 더 포함되어 있었을 뿐인데, 그걸 실패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스태프를 가져오랬지. 누가 남의 딸을 한아름에 담아오랬어?"


아주머니가 말하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레샤가 팔꿈치로 내 가슴팍을 툭 때렸다.

아마도 내려달라는 것이겠지.


내가 발끝부터 천천히 내려주자 레샤는 제 발로 섰다. 다만 얼굴은 여전히 가린 그대로였다.


항상 말하는 마음의 준비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쉰 레샤는 천천히 내쉬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이제 됐나? 아니, 아직이었다.

잠깐 눈과 코를 내보였던 레샤는 다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힘내라 레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레샤가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자 할머니들이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좋은 마음에서야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럴수록 레샤의 손가락엔 힘이 바짝 들어갔고 귀까지 붉게 달아있었다.


이래가지고는 또 한 세월 걸리겠다 싶었던 나는 결국 한 소리 하기로 했다.


"야. 마음의 준비 언제 다 되는데."


"자꾸 그러는데 되겠어요...?!"


자꾸 보채는 게 짜증나긴 하는지 레샤는 양 주먹 꽉 쥐고 우왁, 성깔을 부렸다.


"레이크가 마음대로 구니까 제가 바보가 된 거 같잖아요...! 싫다는 사람 괴롭히는 게 취미에요...?! 예에...?! 그런 사람이냐고요....!"


그에 이어 레샤는 할머니들에게도 말했다.


"그리고...! 그것 좀 하지 말라니까요...! 창피하단 말이에요...!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는 거냐고요...!"


열불을 토해낸 레샤는 소리 지른 것만으로도 지치는지 몸통이 흔들리도록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을 가리기로 한 건 이미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됐다."


난 그 부분을 짚어 레샤의 얼굴을 가리켜 말했다.


"마음의 준비. 됐지?"


"잇, 엣, 긋...!"


레샤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라고 말해서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무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로. 대체로 그럴 것이다.

얘는 그런 애였으니까.


물론 이제와 다시 얼굴을 가리는 것또한 참 우스운 행태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길 수 없다면 도망가는 것도 상책이었다. 설령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여태까지의 레샤는 대부분의 문제를 그렇게 해결했을 것이다.


나랑 할머니들한테만 빼고.


아무튼, 스태프도 없는 지금.

마냥 사람들의 친절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레아는 레샤에게 말했었다.

스태프를 한 번 빼앗아보아라, 그 때도 레샤는 도망쳤다.

단순히 힘으로는 안 되니까, 덩치가 작으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나는 레샤의 어깨를 잡아다가 똑바로 레아의 앞에 세웠다.


진정하고나자 엄마 앞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나는지 레샤는 뻗뻗하게 서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내려 바닥을 보았다. 그 애는 고개를 수그린 채 가끔 올려보기를 반복했다. 이즈음 되면 지가 무슨 말을 하고 도망쳤었는지도 기억이 날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려는 레샤의 어깨를 더 꽉 눌러 잡았다.


레아는 의심스런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헤아려 보는 것처럼도 보였다. 정말 내가 레샤를 안아 데려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게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기에 나는 괘념치 않고 레아를 향해 말했다.


"결판을 내러 왔어요."


"결판?"


아주머니에게는 그 말이 더 의아한 듯 싶었다. 그러나 이내 그런 기색을 지워버리고선 싱긋 웃었다.


"좋아."


절대 질 자신이 없으신가 보네.




뭐든 간에-


장소는 레샤의 본가 아래. 테라스처럼 만들어져 호수를 볼 수 있었던 그 곳이었다.


나는 야우라에게 부탁해 작은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를 함께 가지고 내려왔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구색 갖추기라고나 할까, 원래는 의자 두 개만 쓰려고 했는데 할머니들이 다짜고짜 테이블을 가지고 나와 버렸다.

덕분에 겉보기는 훨씬 좋게 나왔다.


나는 레샤를 의자에 앉혀놓고 정면의 레아를 보았다. 아주머니는 이미 의자를 본 순간부터 알아서 받아다가 내려놓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등받이에 깊이 기대고 다리까지 꼬은 아주 편한 자세.

이렇게 마주 앉게 된 것이 흥미로운 눈치였다.


"그래서? 무슨 결판을 내는 건데. 배신자?"


아주머니의 첫마디란 그런거였다.


"그 얘긴 언제까지 가는 거예요?"


내가 말했다.


"내 연꽃이 뿌리가 썩을 때까지 할 거야. 이 배신자."


그건 마르고 닳도록 이라는 얘기 같았다.

전과자 소리 안 듣게 된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른 낙인이 찍힌 건지, 범죄자가 꿈이었으면 다들 전도유망하다 그랬을 텐데.


"그래 배신자!"


야우라도 내 잿빛 미래에 힘을 실어주었다.


"넌 뭐!"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저 녀석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게 문제겠지!


"뭐야아! 왜 레아한테는 암말 안 하면서 또 나한테만 그래?"


서운함 대성황 중인 야우라는 에반젤린이 겨우 말려 옆에 세워두었다.


양상은 그랬다.

한 가운데에 테이블. 그리고 레샤와 레아 아주머니가 양 끝에 세워둔 의자에 앉아 있었고 다른 사람은 전부 한 쪽에 물러나 있었다. 나만 레샤가 도망가지 못하게 그 뒤에 서있었다. 또 쟁점인 스태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야우라 탓에 잠시 얘기가 딴 곳으로 샜지만 지금은 결판의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궁금해 하던 결판. 그건 바로.


"레샤가 할 말이 있다네요."


한 문장으로 간단히 요약되는 거였다. 나는 레샤에게 힘을 불어넣듯 어깨를 꾹꾹 눌러가며 말했다.


정작 그 애는 크게 벌어져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날 보았다.

잘못 들은거라 믿고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


레샤는 내 멱살을 잡아다가 저에게 바짝 잡아당겼다.


"무슨 말을 하라는 건데요...!"


하긴 얘는 단계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으니 할 말을 정하는데도 당연히 준비가 필요했다.

단지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레샤에게 잡힌 멱살을 풀어내고는 바로 섰다.

그 전부터 레아는 이미 나보다는 레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꼬았던 다리를 풀고, 의자를 바짝 당겨 테이블 가까이에 앉아서는 양 팔꿈치를 대고 깍지 낀 손등 위에 얼굴을 올렸다.


"엄마한테 할 말 있어?"


레아가 말했다.


"아잇, 그... 그러니까..."


레샤는 똑같이 마주 앉아서는 머뭇머뭇 말을 흐렸다.

무릎이 서로 닿도록 비좁게 앉은데다 그 위에 손을 올린 탓에 어깨까지 움츠러들어서 가뜩이나 작은 애가 더 작아 보였다.


한참 꼼지락 대던 레샤는 겨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스태프... 고쳐주세요..."


"으음?"


고개를 숙여 레샤를 살짝 올려다보던 레아는 의혹을 가득 담은 콧소리를 내었다.


"스태프... 고쳐달라고요..."


레샤는 나름대로 꿋꿋이 말했다.


"엄마가 그건 안 해줄 거라 했지? 그리고 해주면 레샤는 엄마한테 뭐해줄 건데?"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오죽하면.


"돈. 줄게요... 엄마 돈 없잖아요..."


레샤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듯 싶었다.

애가 돈 얘기를 꺼내자 아주머니는 눈을 세 번 깜빡일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레샤, 돈 있어...?"


한참 만에 꺼낸 얘기라고는 그런 거였다.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눈치.


"그럼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요..."


언뜻 아주머니의 눈동자가 내 쪽을 향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분담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 여행길에 가장 많은 노자를 쓴 쪽은 레샤였다.


이래저래 생각을 하던 레아는 정신 차려야겠다 싶은지 고개를 털었다. 그리고는 깍지도 풀고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 약간은 회의적인 투를 보였다.


"얘는, 엄마한테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그럼 뭘 주면 되는데요..."


"뭘... 아니, 엄마가 뭘 받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거든?"


"그럼요..."


"레샤는 그 돈 어떻게 벌었어?"


할 말이 없는지 레아는 말을 돌렸다.


"엄마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죠...?"


거기에 더 얹어 레샤도 대답하기 보다는 따지고 들었다.


"뭐? 무슨 일을 하는데."


"안 알려 줄 거예요...!"


"앗, 아니..."


아주머니는 또 다시 날 보았다. 이번엔 꽤나 다급한 것이 레샤가 일을 한다는 것도 전혀 몰랐던 것 같고 또 이제는 그게 무엇인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레샤가 알려주지 않는다고 하니 다른 사람이 말 할 수도 없었다.


내가 어깨만 으쓱이고 말자 레아는 내리뜬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배신자.'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잠깐 당황한 기색을 보였던 레아는 천천히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면 뭐해? 이제 못 할 거 아냐?"


레샤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아주머니는 그게 스태프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레샤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니까 스태프를 고쳐달라는 거잖아요...!"


"안 돼. 절대 안 돼."


레아는 단호했고.


"왜요!"


레샤는 악에 받쳤다.


"어떻게 이 막대기 하나만 믿고 살겠다는 거야?"


"만날 빈손으로 집에 오는 엄마보단 나아요...!"


그 때부터는 말싸움이나 다름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아니 처음부터 말싸움이었던가.

들어보면 할머니 네 분이 다투던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엄마는 맨날 그래요...! 어느 날 소식도 없이 돌아와서는 하루 있다가 할머니한테 돈만 받아가고...!"


"세상 일이라는 게 생각대로 안 되는 걸 어떡하니 그럼? 레샤는 원하는 대로 다 되서 막대기 딸랑딸랑 들고 돌아온 거야?"


"올 때마다 누군지도 모르겠는 남자를 데려오는 것도 싫어요...!"


"그럼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지낼 수 있어. 그게 말이 돼?"


"그게 더 이상해요...!"


"뭐가 이상해! 레샤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거야! 할머니의 꽃도 시세일라 할머니가 옮겨다 준 거라면서! 그러면서 어떻게 밖에 나가 살겠다는 거야!"


그즈음이었을까, 잠자코 있던 에반젤린이 더는 못 참겠는 건지 나에게 와서 내 팔을 잡고는 한 구석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말했다.


"대체 어쩌시려고요?"


화해를 해도 모자랄 판에 싸움을 붙여서 뭐 어쩌냐 하는 것 같았다.


글쎄, 나도 설마하니 이 정도로 테이블 때려가며 싸울 거라고 생각은 못 했지만... 그래도 이 방법이 제일 나아보였다.


"차라리 이게 낫지."


내가 말했다.


"네에...?"


에반젤린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정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집도 맨날 싸웠는데 뭐."


가끔은 차라리 싸우는 게 나을 때가 있었다. 그건 형제자매끼리의 이야기지 모녀간에는 성립이 안 된다고 하면 할 말은 없었지만 이미 저지른 거 뭐 어쩌랴.


"그러지 말고 너도 누구 편 하나 골라잡아서 지켜봐 봐."


나는 한편에 모여 서서 누구 말이 옳다 누구 말이 옳다 편들고 있는 야우라와 할머니들을 가리켰다.


근데 까뮤 할머니, 아까는 레샤 편이더니 지금은 레아 편에 서있네. 참나.


"알겠어요."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에반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크님에게도 생각이 있으신 거죠? 그럼 저도 일단은 따를게요."


아니 그렇게 대단한 계획이 있는 것처럼 말할 건 아닌데...

하고, 나는 얼버무릴 수 없었다.


어찌되었건 우선은 믿어주기로 한 것인지 에반젤린은 정말 그 쪽에 가서 누군가의 편을 들어 응원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워낙 겹쳐 누구를 응원하는지 까진 알 수가 없었다.

하긴. 누구를 응원하든, 얼마나 응원을 받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기준은 따로 있었다.


"난 엄마처럼은 안 될 거예요...!"


그 동안에도 레샤는 계속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래! 엄마처럼 되지 말라고 이러는 거잖아."


레아도 마찬가지였다.


"거짓말...! 사실은 엄마처럼 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못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게 무슨 뜻이야?"


"저는 마법도 쓸 줄 모르니까...! 할머니나 엄마랑은 다르니까,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하자 또 감정이 복받치는지 레샤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다그치면서도 레아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명백히 당혹스러워 하고 있었다. 이미 낯빛이 바뀌고 몸짓이 바뀌었다. 말투도 타이르다기보다는 설득하려고 하고 있었다.

낮고, 차분하게. 물론 모든 감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말 안 해도 알아요..."


"아니, 아니야... 레샤. 엄마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럼 왜 나가는 건데요...! 옛날에는 같이 살았으면서...!"


"그건, 그건... 레샤가 마력을 다루지 못 하니까... 그래서..."


"거봐요...!"


레샤는 떨리는 목소리를 하고서도 울지 않고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려 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그랬어요...! 엄마는 저 때문에 나가는 거라고...! 그러니까 말 잘 듣고 책 많이 읽으면 다시 옛날처럼 돌아올 거라고...!"


"아니, 엄마...! 설명을 그렇게 하면..."


아차, 싶은지 레아는 저 먼 곳에 계실 그 이쟈벨 할머니를 원망했다.


"레아가 사과해라, 사과해! 잘못 했네!"


수많은, 여섯 명의, 여론. 특히 까뮤 할머니는 그새 레샤로 다시 편을 갈아타있었다.

이쯤 되면 그냥 즐기는 게 아닌가 싶다.


"할망구들은 뭘 잘 했다고 큰소리야?! 레샤가 저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댁들 탓도 있어!"


지금까지는 할머니들이 무슨 소리를 해도 코웃음도 치지 않던 레아는 할머니들에게 화를 내었다.


"이익! 사람을 개구리로 만드는 마녀가 나타났다!"


할머니들은 그런 식으로 엄살을 부리며 몸을 수그렸다.


"할머니는...!"


자꾸 목이 메는지 레샤는 끅, 끅 대며 겨우 말을 이어 붙였다.


"할머니는 나도 엄마나 할머니처럼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엄마는 그렇게 생각 안 한 거죠...!"


"아니야 레샤 그러니까. 엄마가 왜 그랬냐면..."


레아는 말을 골랐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좀 더 분명하고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입술까지 씹어가며 망설이던 레아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레샤가, 마법 없이도 살 수 있게 하려고 그런 거야."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그건 레샤가 몰라서 그래! 우리한테 뭐가 있니? 나가면 아무것도 없어. 연고도, 친구도, 할머니들도. 다 없다고!"


이어 손을 들어 날 가리켰다.


"네 뒤의 레이크는 언제까지고 널 도와줄 줄 아니? 오늘만 해도 벌써 엄마를 배신했는데!"


"거 누가 들으면 내가 뒤에서 비수라도 꽂은 줄 알겠어요!"


나는 왈칵 소리쳤다.

웬만하면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왜 가만히 있는 사람 자꾸 건드는지 모르겠다.


"내 가슴에 대못을 박았지."


레아는 내가 정말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받아쳤다.


"내가 대못 박을 사람은 따로 있거든요? 지금도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거고요."


"저것 봐, 저런 사람이라고."


레아는 나는 깡그리 무시하고 레샤에게 말했다.


"레이크가 원래 저런 사람이란 건 알고 있어요..."


가관인 건 레샤가 동의했다는 거다.


"왜 거기서 갑자기 의견이 일치하지?"


내가 평화의 사도도 아니고 왜 싸우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나를 협공하느냔 말이다.


이놈의 세상.

말이 통하는 걸 본 적이 없고 뜻대로 되어준 적이 없다.


"아무튼, 그렇다는 거야. 우리는 저 마을의 사람들과 다를 게 없지만. 분명히 달라. 살아온 방식이 다르고, 살아갈 방식이 달라."


레아는 한 차례 쉼표를 찍고 다시 말했다.


"정말 중요할 때. 레샤, 네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단 말이야. 그 사람들은 선택의 순간이 오면 가족과 친지들을 택해. 그게 당연한 거야. 남의 삶에 상관 안 하는 우리랑은 다르다고. 알겠니?"


스스로도 말하면서 착잡한 기분이 드는지 레아는 또 한 차례 날 째려보았다.


확실히, 괜한 짓을 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집하고는 싸우는 주제부터 달랐고 애들 싸움하고 미묘하게 다른 부분들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었다.

아니, 애초에 싸움 붙이러 왔던 게 아닌데.


"그런 거 몰라요..."


한참 침묵을 지키던 레샤가 겨우 말문을 텄다.


"그러니까 엄마가 장사 같은 걸 배워보려고..."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레샤는 엄마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뭐어?"


"그런 거 필요 없다고요...!"


으아, 또 운다.

뒤통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미세한 떨림이라던가, 목소리의 먹먹함이라던가. 그런 건 온전히 전해진다.


"할머니는요...! 나는...! 할머니는...! 엄마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순서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지 레샤는 계속 우물거리기만 했다.

그러나 이윽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할머니는... 그 스태프가 있으면...! 나도 혼자서 잘 할 수 있다고...! 그랬는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었잖아. 그거 하나 믿고 나갔다가 스태프를 잃어버리면? 누가 훔쳐가버리면? 아니면 이번처럼 고장나버리면?"


"할머니는..."


"할머니는 이제 없잖아!"


레샤에게는 때때로 힘주어 말하는 정도에 그쳤던 레아가 처음으로 고성을 질렀다. 그 다음, 아주머니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레샤에게 다가왔다.


"할머니는 연꽃이 되어버렸잖아. 이젠 정말 레샤랑 엄마뿐이야. 다른 할머니들은... 적당히 살다가 따라가겠지, 뭐."


저런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중간에 끼워 넣는 것이 내게는 참 어색했다.

레아는 아직 팔팔하다는 할머니들의 항의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할머니들이 아직 레샤를 돌봐줄 수 있을 때..."


아직 레샤를 돌봐줄 할머니들이 남아 있을 때까지는 레샤를 놔두고 여행을 하고 싶다, 아주머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 순간이나마 함께 다니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는 절로 입맛을 다시게 되었다.


우리가 왜 우르르 레샤를 따라온 거였더라.


단순히 동굴 안에 왔다는 이유로 의심받는 그런 상황에서 레샤는 혼자 타개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레샤가 또 다시 할머니 얘기를 했을 때, 레아는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보였다.


"내가 혼자서 잘 할 수 있게 되면...! 엄마가 같이 살 거라고 그랬는데...!"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얼굴이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 어...?"


레아는 땅을 박차고 나가려다 엎어진 것처럼 김샌 소리를 내었다.


편 가르고 응원 같지도 않은 응원을 하던 할머니들도, 눈치가 있어서 그런 건지 없어서 그런 건지 함께 하던 야우라조차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난 그냥 엄마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한거였는데...!"


레샤가 말을 할수록 레아의 안색은 허옇게 떴다. 눈을 크게 뜨고 입도 그에 따라 벌어졌다.


"아 미안해, 레샤. 엄마가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레샤 마음을 엄마가 몰라줘서 미안해."


아주머니는 자세를 낮추어 레샤를 끌어안고 거듭 미안하다고 되뇌었다.


넘어져 우는 아이를 달래듯 묘한 웃음을 지으며 레샤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샤가 혼자가 됐을 때 내버려둬서 미안해. 아, 그, 어... 스태프 안 고쳐준다고 심술부려서 미안해. 엄마가 꼭 고쳐줄게. 응?"


내내 완고하고 여유롭던 레아가 한 방에 무너져버렸다.

진짜 울고불고하니 이겨버린 거다.


잠시 후 품안에서 레샤를 달래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었다. 그건 되었다 싶어서 그만하는 게 아니라 꼭 무언가 이상을 느껴서 멈춰버린 것 같았다.


"...진짜 고쳐줄 거예요...?"


어느덧 훌쩍이는 걸 멈춘 레샤는 제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그러엄 물론이지. 엄마는 레샤의 할머니의 딸이니까."


레아는 기꺼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레샤를 떼어내 마주보고선 새로운 제안도 건넸다.


"스태프 고치고 나면 엄마랑 같이 다닐까?"


당장 드는 미안한 감정에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꺼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말 한 마디와 눈물 한 방울에 이리도 쩔쩔매는데, 그런 귀한 따님을 할머니들에게 놔두고 오는 데에는 레아 역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샤는 고개를 저었다.


"응? 왜?"


레아는 그게 이해가 안 되는 듯 했다.


"저는 원래 일하던 곳이 있거든요..."


레샤는 소매로 눈가와 얼굴을 훔치고는 말을 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일 하는 거, 엄마는 두드러기 오르잖아요..."


"아니거든? 그냥... 조금... 성미에 안 맞는 것뿐이야."


레아는 엄마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했다.


"그러니까요..."


"그게 뭐야. 그럼 엄마도 레샤 스태프 안 고쳐줄래."


"할머니의 딸로서 고쳐준다 해놓고 무르는 게 어디 있어요. 할머니가 화 낼 거예요..."


말문이 턱 막힌 것인지 레아는 허! 하고 헛숨을 뱉었다.


"누구야? 남의 순질한 딸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녀석이?“


그리고는 주변을 향해 엄포를 놓았다.


"울고불고하면 될거라고 그랬어요... 레이크가..."


거기서 레샤는 내 탓을 했다.


아니?


내가 변명해볼 새도 없이 레아는 곧장 은근한 시선에 쏘아댔고 나는 궁지에 몰려 제대로 말 한마디 꺼낼 수조차 없었다.


'배 신 자.'


그 눈빛이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이러다 진짜 뿌리 썩을 때까지 그 소리 듣겠네.


나한테 물먹여놓은 건 아무렇지도 않은지, 레샤는 별 다른 해명도 없이 반대로 엄마를 끌어안았다.


"엄마, 심한 말해서 미안해요..."


그리고는 맨 처음으로 돌아가, 그 품 안에 사과했다.


작가의말

새삼 저에겐 마무리 짓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게 실감됩니다.


//


그리고 그런 것보다, 제가 장장 5개월 동안 몰랐던 사실이 있습니다. 알고보니 리뷰를 하나 남겨주신 분이 있더라고요. 시스템에 대해 무지해서 생긴 제 실수입니다. 뒤늦게나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물론 여러분들이 써주신 댓글이나 눌러주신 추천 또한 제겐 감사하지만 이건 감상이 또 다르더라고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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