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판타지

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최근연재일 :
2023.06.27 01:06
연재수 :
327 회
조회수 :
102,756
추천수 :
2,395
글자수 :
2,515,552

작성
19.09.11 01:42
조회
101
추천
4
글자
21쪽

42. 그러니까 이건(1)

DUMMY

"레이크, 의뢰다."


의뢰.

굉장히 멋들어지게 들리는 단어였다.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일을 대신 시킨다는 것.

심부름꾼이라고 불러도 좋을 테지만 약간 달랐다.

저울의 문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어느 쪽이 더 위에 있는지. 아니면 수평을 이루는지.


심부름이라고 하면 가게에서 빵이나 살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의뢰라고 하면 괜히 전문적인 무언가를 할 것 같잖아.


그래 그 무언가가 중요한 거였다.


"듣고 있는 게냐?"


내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세일라 할머니가 다시 물어왔다.


아, 모르는 척 하면 모르는 채 해주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수명을 일 년 정도 가져가도 상관없었다. 아마 평생을 통틀어 따져본다면 그래도 수지가 맞을 것이다.


"의뢰라니까."


시세일라 할머니가 다시 말했다.

할머니는 다른 세 명의 할머니에 비해 유독 인상이 날카로웠다. 코가 크고 새의 부리처럼 오똑 선 데다가 그만큼 눈이 더 움푹 들어가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작정하고 보고 있으면 딱히 심기 불편해하지 않다는 걸 알아도 괜히 신경 쓰이기 마련이었다.


"...뭔데요."


하기 싫은 대답을 마지못해 할 수밖에 없었다.


"어깨 좀 주물러 주렴."


하, 이럴 줄 알았다.

시세일라 할머니의 '의뢰 내용'을 들은 난 탄식을 숨기지 못했다.


"그게 무슨 의뢰에요! 뭐 누구마냥 멋있게 말하면 다 들어주는 줄 알아!"


"이 나이쯤 되면... 어깨가 아픈 건 큰일이지."


"아니 그러니까. 아까 전에도 해드렸잖아요."


저녁 먹기 전의 이야기였다. 지금 식사한 후고.

배부르게 얻어먹고 방 안에서 좀 쉬려는데 여지없이 또 오신 것이다.

나이 먹으면 여기저기 쑤시곤 한다지만 그래도 그 왜, 정도라는 게 있지 않던가.


"어쩌면..."


가뜩이나 날카로운 시세일라 할머니의 눈이 더 희번뜩한 빛을 내었다.


"이번이 마지막 부탁일수도 있는데?"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그 마지막은 뭐. 아무 때나 마지막인가?"


그 혹시 모르는 마지막이 벌써 몇 번째던가.


내가 마지못해 수긍하자 할머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앉았다.


일단 알았다고 했으니 나는 별 수 없이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뼈가 그대로 느껴지는 앙상한 어깨. 이런 말을 하면 뭔가 이상하지만 주무를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아주 낮고 긴 탄성을 내었다.


"아이구.... 시원하다..."


그런 기분일 때 하는 말은 딱 정해져 있는 걸까.

다들 같은 소리, 같은 말을 한다는 것만큼은 재미 있었다.


얼마나 했을까. 보람 하나 느껴지지 않는 안마를 하는 사이, 르위쟈 할머니가 왔다. 할머니는 별 다른 말없이 시세일라 할머니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뭔가 말을 전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하지 못하는 것 같지도 않고, 왠지 거기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가만히 있는다.

나는 그게 퍽 신경 쓰였다.

아니, 거슬렸다.


"할머니는 왜요."


결국은 시세일라 할머니의 어깨를 계속 주무르며 르위쟈 할머니에게 묻게 되었다.

왠지 알 것 같지만...


"다음은 나."


르위쟈 할머니가 말했다.

뻔히 예상대로였다.


"뭘 다음은 나에요!"


이건 화를 낼 수밖에 없잖아.


"좀 해줘. 뭐 어때?"


할머니의 말대로 이건 별 것도 아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뼘 정도 컵을 옮기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것도 정도껏이어야지.


"나도."


어느 샌가 마노 할머니도 옆에 앉아서는 차례를 기다렸다.

아니 차례를 기다린다니, 접수를 받은 적도 없는데 손님이 늘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까뮤 할머니조차 이쪽에 와서 자리 잡고 앉았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말 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묻기로 했다.


"할머니는 뭐요."


가끔은 결과를 알아도 저지를 때가 있지 않던가.


"나는 허리를 좀."


까뮤 할머니는 주먹으로 허리 뒤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 귀여워하던 손녀딸은 어디다 써먹으려고 저한테 그러세요?"


"물론 레샤가 해주는 것도 좋지만, 그 애는 사실 손구락 힘이 좀 약하거든. 남자 손에 맡기는 게 훨씬 낫지."


그렇게 말하면서 할머니는 음흉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보통 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내겐 그게 음흉해보였다.


하지만 무어라 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안 하겠다고 잡아떼기도 힘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다 됐어요."


내가 어깨를 놓자 시세일라 할머니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일어났다. 그리고는 빙 돌아 다시 까뮤 할머니 옆에 앉았다.


"자자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 그래야 다시 차례가 돌아오지."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 일은 별 것도 아니었다. 컵을 한 뼘 옮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계속 반복해야 한다면 얘기는 다른 것이다.


"이러다 할머니들보다 내가 먼저 죽겠어요!"


나는 다음 차례인 르위쟈 할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소리쳤다.


"뭘 손가락 조금 쓰는 거 가지고."


마노 할머니는 키는 작지만 넉넉한 체구만큼이나 넉넉하게 말했다. 누가 들으면 걱정 말라고 괜찮다고 해주는 것 같지만 지금 일하고 있는 건 나였다.


저런 말을 할 거면 내가 해야지.


"그래, 우리가 이 나이 먹고 또 은제 남자한테 대접 받아보겠니."


까뮤 할머니도 한 수 보탰다.


"자네도 이런 걸 배워두면 나쁠 거 없을 거야."


시세일라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뭘 가르쳐주셨어야죠."


그건, 대뜸 시키기만 해놓고서 할 말은 아니었다.


"진짜 기술은 낮에는 못 가르쳐주지, 남사스러워서."


제발.


"그런 말 막 하지 마세요. 우리 사제님 식겁하는 거 보기 싫으시면."


에반젤린은 사소한 것에도 유난인 면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그 아가씨는 우리랑 안 맞는다니까."


어떤 할머니가 말한 건지 모르겠다.

무슨 할 얘기들이 그렇게 많으신지 목소리는 이내 뒤섞이고 겹치고 물려 시장판처럼 되어버렸다.


그 동안 나는 연습을 했다. 들리지 않는 연습. 제법 괜찮게 된 것도 같았다. 할머니 어깨를 주무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차례가 한 바퀴 다 돌게 되었을 때, 나는 곤란하게 되었다.


"그래서, 레이크 넌 어떻게 생각하니?"


할머니들이 그렇게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뭘요?"


여태 하나도 안 들었기에 난 멍청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긴, 레샤 말이야."


할머니들은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입을 모아 말했다.


아... 그러니까 이건...

대충, 또, 뭐, 그런 얘기 같았다.


"전 안 된다면서요."


이 짓도 단련이 되는 것인지 나는 전보다는 막힘없이 말을 더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뭐, 성에 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레샤 마음이 더 중요한 거니까."


다짜고짜 반대라고 했었던 르위쟈 할머니가 이번에는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암만 그렇게 말해봤자 할머니들은 결국 재미삼아 이런 얘기를 하는 거다.


"그런 쬐끄만한 애한테 뭘요."


대답은 적당하면 그만이었다.


"뭐야? 그럼 자네는 어떤 사람이 좋은데."


이번엔 시세일라 할머니가 말했다.


어떤 사람이냐, 라.

글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 뭐랄까 구체적이지 못했다.


"글쎄요... 그렇게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어서."


그러고 말아버리자 할머니들은 갑자기 내게선 등을 돌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낮에 보니까 레아한테서 눈을 못 떼던데 혹시..."


"역시 그런 쪽인가?"


"하긴, 레아라면 어쩔 수 없지."


재미있게 담소 나누는 것에 딴지를 걸고 싶지는 않으나 그 이상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뭘 어쩔 수가 없어요! 친구 엄마잖아요, 친구 엄마!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야, 도대체!"


아무리 말이래도 말 같은 소리를 해야 말이지.


"더 어린 쪽이 취향이야?"


까뮤 할머니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아니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저는 그런 건 좀... 그, 뭐야..."


"거부감이 든다는 거지?"


"아 그래요, 그거. 그래서 그런 책을 돌려볼 때도 그런 건 안 보고..."


아.


그즈음 나는 실수했음을 느꼈다.


"그럼, 그런 거, 볼 때는 어떤 걸 봤는데? 그걸 말하면 되겠네."


시세일라 할머니는 '그런 거' 라는 부분에 일부러 힘을 주었다.


"그래. 그게 확실하겠네. 역시 젊은 놈답게 좀 화끈한 게 좋나?"


까뮤 할머니가 덧붙였다.


"화끈하긴 뭘 화끈해요! 종이가!"


"에이, 그러지 말고 좀 알려줘봐. 궁금하잖아."


그러니까 그게 왜 궁금하시냐고.


스스로 치부를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 할머니들이 또 무슨 소문을 내고 다닐 줄 알고.


추궁은 계속 되었다.

입을 열게 하기 위한 치근덕 거림도 멈추지 않았다.

슬슬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쉽지 않고 더 도망갈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든 찰나,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로 그 레샤였다.

걔는 문을 열고 들어왔으면 말을 하던가, 아니면 뭘 하던가 할 것이지 고개를 살짝 들이밀고서는 이쪽에 시선만 보내고 있었다.


아 그래. 그럴만하지.

왠지 모르게 할머니들이 날 둘러싸 앉아서는 위협적으로 들이대고 있었으니 이상해보일 법도 했다.

쟤가 항상 하곤 하는 사전 파악이 필요한 순간이란 뜻이다.


"야! 레샤! 할머니들이 나 괴롭혀!"


가만히 뒀다가는 휘말리기 싫어 도망가 버릴지 몰랐기에 나는 얼른 도움을 청했다.


내가 외친 뒤에도 한참이나 눈동자를 굴려가며 이것저것 살펴보던 레샤는 툭 말했다.


"레이크, 엄마가 와보래요. 스태프 고치는데 도와줘야할 게 있다고."


"뭘?"


내가 왜 필요한 걸까.


"저야 모르죠."


레샤의 고개는 그 말만을 남기고 문가 너머로 사라졌다.

아무튼 그렇다고 하니 나는 끈질기게 들러붙으며 말하고 가라는 할머니들을 뿌리치고 뿌리쳐 방을 빠져 나갔다.


복도로 나가자 레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뭐하고 있던 겁니까...?"


그 애는 언제나 그랬듯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언뜻 기분이 나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게 정상이었다.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물어보지 마라. 다친다."


"예에...? 레이크 어디 고장 났어요...?"


"고장난 건 스태프지. 얼른 가자, 얼른 가."


행여 어떻게든 이야기가 새어나갈까 나는 레샤를 떠밀어 아래로 내려갔다.


그 와중에 계단에서 에반젤린을 만났다.


"아, 레이크님. 이... 음... 양배추, 드실래요? 할머니들 가져다 드리는 길인데?"


그 애는 낮에 먹었던 양배추를 쟁반에 담아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이름은 정확히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니. 괜찮아."


내가 사양하자 그 애는 편히 미소 지었다.


"네. 그럼 저는 올라가볼게요."


지나쳐 올라가는 에반젤린에게 조심하라고 일러둘까 했던 나는 그냥 그만두었다.


뭐... 괜찮겠지.


아래로 내려가자 레샤는 날 식당이 있던 곳이 아니라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거긴 방이라기보다는 거실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원래 거실이라고 생각했던 큰 방은 사실 방이 아니라 그냥 남은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여행을 좋아한다는 이 팔렌팔라라는 사람들이 집에 애착을 크게 가질 리도 없고, 되는대로 꾸민 결과라고 한다면 그럴듯한 모양새였다.


안에는 레아 아주머니와 야우라가 있었다. 아주머니야 당연하지만 야우라는 의외였다.


"응? 레이크구나? 무슨 일이야. 아, 스태프 고치는 거 구경하려고?"


나와 달리 아주머니는 야우라가 아니라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의외인 듯 보였다.


"네? 아니..."


시킬 일이 있다고 해서 왔더니 무슨 소리냐고 하려 했던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거 쬐끄만하다고 무시했던 애한테 크게 도움을 받았다.


내 시선을 눈치 챈 건지 레샤는 힐끗 날 보았다. 어째 그 표정이 좋지 않다.


"뭔가요...? 왜 쪼개고 그래요, 기분 나쁘게...?"


"뭐, 쪼개?"


"그런 걸 쪼개는 거라고 해요. 몰랐어요...?"


말을 말자.

나는 고마운 마음이 더 희석되어버리기 전에 허탈이 웃으며 아주머니와 야우라가 있는 쪽으로 갔다.


소파 앞에 낮은 테이블엔 스태프가 놓여있었고 두 사람은 소파의 앞에 앉은 게 아니라 그 테이블 옆에 서 있었다.


"근데 어떻게 고치는 건데요? 금방 되요?"


내가 물었다.


스태프라는 것은 잘은 몰라도 복잡하고 섬세한 물건이라고 들었다. 그런 물건은 만들 때뿐만 아니라 고칠 때도 어렵기 마련이다.


"당연하지! 레아는 굉장하니까! 이것도 잠깐 보더니 원인이 뭔지 금방 알던데?!"


묻기는 여기 아줌마한테 물었는데 대답은 왜 저기 아줌마한테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야우라는 왠지 잔뜩 흥분해선 이래저래 설명해대고 있었다.


쭈욱 옆에 붙어있더니 보고 들은 게 꽤 많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야우라가 항상 말하던 인물상이 아니던가.

뛰어난 마법사이자 보기 드문 미인. 만인의 연인이지만 좀처럼 잡을 순 없는, 그런 방랑자.


"에헤이, 언니도.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러다보니 아주머니가 이따금씩 야우라를 언니라고 부를 땐 참 적응이 안됐다.


"우리 엄마가 대단한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아주머니는 내려놓았던 스태프를 집어 바닥에 대고 세웠다.

이제 보니 레샤에게 한참 컸던 스태프는 오히려 아주머니에게 크기가 더 잘 맞았다.


"스태프가 고장난건 아니니까 다행이지. 그치?"


레아 아주머니는 레샤에게 묻듯 그쪽에 눈을 맞추어 말했다.

정작 레샤는 소리 내서 대답하지는 못하고 조금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장난 게 아니면 뭔데요?"


내가 물었다.

되던 게 안 되면 그걸 우리 동네에선 고장이라고 불렀는데, 여긴 아닌가 보다.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할까. 이건 마력을 못 다루는 레샤를 위해서 엄마가 특별히 만든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레아 아주머니는 스태프를 잡지 않은 쪽의 손을 스태프 근처에서 흔들었다. 잡을 듯 말듯 팔랑거리면서도 직접 손대지는 않았다.

이윽고 아주머니의 손가락에서 안개처럼 희뿌연 빛이 나오는가 싶더니 곧장 사려버렸다.


아니 그건 사라졌다기보다는 스태프가 연기를 먹어치운 것처럼 보였다.

그 왜, 뜨거운 철이 닿은 물을 먹어버리는 것처럼.

꼭 그런 꼴이었다.


"이 스태프는 주변의 마력을 먹어치워. 지금은 그걸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조차 남아있지 않은 거야. 이렇게 뭉쳐서 던져주면 조금 미끄러져 들어가는 정도지."


"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 것도 돼?

일단은 마력을 뭉쳐서 던져준다는 말부터 이해가 안 됐다.


난 내 손끝을 보았다.

광구를 만들 때도, 불꽃을 튀길 때도, 무언가를 차게 만들 때도 일종의 감각이 있었다. 손끝에서 뭔가를 굴린다는 걸, 혹은 끌어올린다는 걸.


손가락 끝에 작은 빛을 내보았다. 희미하게 깜빡이던 빛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만질 수 없는 마력을 던져버린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내 손끝에서 나오는 건 결과뿐이었다.


"레이크는 참 정직하네."


레아가 말했다.


"네?"


"정직하게 마법을 쓴다고. 아닌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레이크처럼 마법을 쓰니까."


"그것도 아닐 걸요. 전 이거 말곤 할 줄 몰라요."


"그래도 되지. 뭘 중요한 거라고. 대신 레이크한테는 다른 게 있잖아."


아주머니는 격려라도 해주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어 레샤에게도 당부했다.


"어쨌든 최소한의 마력만 담아두면 다시 전처럼 쓸 수 있을 거야. 너무 막 다루지만 않는다면 반영구적인 물건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의아하긴 한지 아주머니는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 신기하네. 어떻게 이렇게 텅텅 비게 됐지? 엄마가 실수한 것 같지는 않은데. 전도성이 더 강한 물건과 닿은 적이 있나? 레샤는 뭐 짚이는 거 없어?"


그 때부터 양심의 가책이 무겁게 내 마음을 짓눌렀다.

그건 특히 엄마의 질문을 받은 레샤가 선뜻 대답하지 않고 힐끗 날 보았을 때 더 가중되었다.


전도성이라는 건, 마력이 옮겨 다니는 성질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역시 그거밖에 없잖아.

완전 미력의 돌 말하는 거잖아, 이거.


"어쨌든 계속 이런 식으로 해주면 금방 예전처럼 돌아올 거야."


의심스레 레샤와 날 두리번대던 아주머니는 더 캐묻지 않고 픽 웃으며 다시 한 번 스태프에 흰 연기를 먹였다.

말 그대로 그건 먹이를 주는 거였다.


"얼마나요...?"


레샤가 물었다.


"음. 마냥 쑤셔 박아봐야 그만큼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까. 한... 사흘은 이러고 싶은데. 레샤는 괜찮지?"


아주머니는 따님에게 눈높이를 맞추어주고선 말했다.


"저는... 괜찮은데..."


레샤는 중얼거리며 나랑 야우라의 눈치를 보았다.


"뭐 어때. 온 김에 좀 놀다 가면 되지."


야우라는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을 몸으로도 표현해주고 싶은지 낡은 소파에 풀썩 앉았다.


"난 여기 좀 마음에 드는 거 같아. 그... 느낌이."


"그래? 그럼 여기서 사는 건 어때?"


아주머니가 반기듯 물었다.


"그건 싫지만!"


거절조차 천진난만하게 한 야우라는 아예 그 위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나라고 해서 할 말이 있나.


"뭐... 어쩔 수 없죠, 그럼. 며칠 더 있는다고 뭐 있겠어요?"


내 손가락은 할머니들에 의해 죽어나가겠지만 망가뜨린 장본인에겐 할 말이 없었다.


그 말이 퍽 반가운지 아주머니는 살갑게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래. 나한테 그런 창피한 꼴을 보이게 만들어 놓고서 그냥 가려고? 어림도 없지. 이 배신자."


하여간에.


그 무렵, 바깥에서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물건이 떨어진 것 같지는 않고, 사람이 뛰는 소리 같았다.

여긴 언성으로 시끄러울지언정 그런 둔탁한 소리가 들릴 곳이 아니기에 우리는 문을 열고 바깥을 보았다.


거기선 할머니들이 서로 뒤엉켜 쓰러져 있었다. 온통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서는 도망치려는데, 그 다리와 팔이 서로 꼬여 다시 넘어지고 있었다.


"살려줘!"


"그러게 우리는 사제랑 안 맞는다니까!"


"안 할게, 이제 그런 얘기 안 물어볼 테니까 그만!"


같은 아우성들이 들렸다.


뒤이어 에반젤린이 계단에서 내려와 할머니들을 돌봤다. 그러면서도 하는 말이 또 따로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건. 그런 것보다는 다른 취미를 가지시는 게 더 좋다는 거예요. 이맘때쯤 다른 어르신들은 뜨개질을 취미로 많이 하시니까요. 물론 당연한 일감이긴 하지만 옷감 말고 다른 걸 짜는 거죠. 그러니까 저랑..."


"싫어! 그런 재미없는 건 싫다고!"


"아니에요. 분명 해보시면 다르게 생각하실 거예요. 이게 또 나름대로..."


"으아아!"


안 맞는 정도가 아니라 상극이라는 얘기도 하더니 저런 의미였나 싶다.


"거기, 사제님!"


잠자코 구경하던 레아 아주머니는 할머니들에게 뜨개질의 세계에 대해 절절이 읊는 에반젤린을 불렀다.


소리를 들은 그 애가 고개를 들자 이어 소식을 전했다.


"여기서 사흘쯤 걸린 거 같은데, 괜찮아? 일행들은 다 괜찮다는데."


"네? 아 물론이죠. 말끔히 고쳐주신다는데, 그 정돈 당연히 기다릴 수 있죠."


에반젤린은 싫은 기색 없이 기껍게 말했다.


"자, 그럼. 체류 문제도 해결도 됐고..."


레아 아주머니가 하던 말을.


"간식!"


야우라가 가로챘다.


"한 건 했으니까. 우리 간식 먹자!"


뭘 하신 게 있다고, 방랑 검사님은 연신 간식을 부르짖었다.


"그럴까? 오랜만에 걸어 다니는 쿠키나 먹을까? 레샤는?"


"예? 아... 저는 뭐... 좋아요..."


레샤가 고개를 숙이듯 끄덕이자 아주머니는 준비를 하기 위해 복도를 돌아 옆의 주방으로 향했다.

야우라는 그걸 또 도와주겠다며 따라갔다.

진짜 돕는 건지 아니면 구경을 하러 가는 건지 그건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랬다.


근데.


"걸어 다니는 쿠키가 뭐야?"


나는 레샤에게 물었다.

여기 와서 처음 듣고 보는 게 너무 많았다.


"있어요, 그런 게. 걸어 다니는... 쿠키가..."


레샤도 정체는 잘 모르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짜 어릴 때 이후로는 못 먹었었는데... 저는 그거 되게 좋아했거든요... 걸어 다니는 게... 귀여워서..."


혼잣말 하듯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정말 기대하는 것 같았다.


그래, 저러는데 사흘 정도야 별 것도 아니었다. 누구 말마따나 조금 놀다 가면 되지.

할머니들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어떤 의미론 속죄를 대신한다고 할 수 있었다.


여기 오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는데, 체류까지 하게 되었으니 하늘그림으로 돌아가는 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리게 되었다.


거기서 지내게 된 이후로 이만큼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


긴 시간 떨어져 있다가 보면 항상 같은 거더라도 약간의 변화를 감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꼭 재미있는 일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 생긴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하늘그림에 없었을 때의 이야기다.


작가의말

저희 집에는 볼트와 너트 뭉치가 있어요. 작은 플라스틱 상자에 거의 꽉차게 담겨있죠. 어릴적에 과학상자라는, 말하자면 철제 블록 같은 걸 샀을 때 부록된 부품인데, 얘만 남았어요. 그 때는 그게 왜 그렇게 가지고 싶었나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77 48. 볼록과 볼록(4) +2 20.02.08 162 3 22쪽
276 48. 볼록과 볼록(3) 20.02.04 135 4 17쪽
275 48. 볼록과 볼록(2) 20.01.30 219 4 15쪽
274 48. 볼록과 볼록(1) 20.01.27 148 4 16쪽
273 47. 눈 감고 한 판 뒤집기(5) +2 20.01.22 160 4 22쪽
272 47. 눈 감고 한 판 뒤집기(4) 20.01.19 145 3 20쪽
271 47. 눈 감고 한 판 뒤집기(3) 20.01.14 147 4 15쪽
270 47. 눈 감고 한 판 뒤집기(2) +2 20.01.10 137 4 17쪽
269 47. 눈 감고 한 판 뒤집기(1) +2 20.01.08 150 4 18쪽
268 P.S 색과 향을 쫓아 20.01.04 137 4 24쪽
267 46. 감 놓고 배 놓고 그것도 놔(5) +2 20.01.01 135 4 32쪽
266 46. 감 놓고 배 놓고 그것도 놔(4) 19.12.27 141 4 17쪽
265 46. 감 놓고 배 놓고 그것도 놔(3) +2 19.12.23 142 4 19쪽
264 46. 감 놓고 배 놓고 그것도 놔(2) 19.12.18 127 3 20쪽
263 46. 감 놓고 배 놓고 그것도 놔(1) +2 19.12.13 128 4 19쪽
262 P.S 향과 색을 쫓아 19.12.09 111 3 21쪽
261 45. 처음엔 두 칸이지(2) 19.12.05 98 5 14쪽
260 45. 처음엔 두 칸이지(1) 19.12.03 88 4 16쪽
259 44. 따뜻하고 매정한(7) 19.12.01 118 4 24쪽
258 44. 따뜻하고 매정한(6) 19.11.17 91 4 17쪽
257 44. 따뜻하고 매정한(5) 19.11.08 91 4 21쪽
256 44. 따뜻하고 매정한(4) 19.11.04 97 4 17쪽
255 44. 따뜻하고 매정한(3) 19.10.30 71 4 15쪽
254 44. 따뜻하고 매정한(2) 19.10.26 73 5 22쪽
253 44. 따뜻하고 매정한(1) 19.10.22 72 4 20쪽
252 43. 쌀쌀하고 살가운(5) 19.10.18 60 5 19쪽
251 43. 쌀쌀하고 살가운(4) +2 19.10.15 67 4 16쪽
250 43. 쌀쌀하고 살가운(3) 19.10.13 55 4 16쪽
249 43. 쌀쌀하고 살가운(2) 19.10.11 56 4 14쪽
248 43. 쌀쌀하고 살가운(1) +2 19.10.08 72 3 19쪽
247 42. 그러니까 이건(9) 19.10.06 62 5 17쪽
246 42. 그러니까 이건(8) 19.10.06 56 4 21쪽
245 42. 그러니까 이건(7) 19.10.02 150 4 21쪽
244 42. 그러니까 이건(6) 19.09.30 83 4 16쪽
243 42. 그러니까 이건(5) 19.09.26 80 5 22쪽
242 42. 그러니까 이건(4) +4 19.09.22 86 4 19쪽
241 42. 그러니까 이건(3) +2 19.09.18 78 4 17쪽
240 42. 그러니까 이건(2) 19.09.17 91 4 21쪽
» 42. 그러니까 이건(1) 19.09.11 102 4 21쪽
238 41. 그것뿐이야(6) 19.09.05 105 5 25쪽
237 41. 그것뿐이야(5) 19.09.01 100 4 26쪽
236 41. 그것뿐이야(4) 19.08.27 84 4 18쪽
235 41. 그것뿐이야(3) 19.08.25 83 4 16쪽
234 41. 그것뿐이야(2) +4 19.08.22 94 4 17쪽
233 41. 그것뿐이야(1) +2 19.08.20 128 4 16쪽
232 40. 연꽃이 자라는 곳(6) 19.08.15 94 5 18쪽
231 40. 연꽃이 자라는 곳(5) 19.08.13 83 5 26쪽
230 40. 연꽃이 자라는 곳(4) +2 19.08.07 96 5 18쪽
229 40. 연꽃이 자라는 곳(3) 19.08.03 92 4 17쪽
228 40. 연꽃이 자라는 곳(2) +2 19.07.30 110 4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