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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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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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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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8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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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쌀쌀하고 살가운(1)

DUMMY

추우면 뭐든 하기 싫어진다. 일어나는 것부터 싫다. 그건 날씨와 관계없이 싫지 않느냐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발가락 끝이 차고 기지개를 켤 때면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품을 하느라 숨을 들이킬 땐 공기가 차다는 걸 새삼 다시 느낀다.

하지만 막상 조금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때가 바로 일어날 기회다.


나는 아침 시간을 비교적 한가하게 가졌다.

이런 저런 일을 겪은 이래, 특히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제멋대로였던 생활습관을 어느 정도 되돌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침만큼은 늘어질 만큼 늘어졌다.

어느 부분에 대해선 예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서는 눈을 감고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생각해보고 눈을 뜬 다음엔 혹시 내 방에 무슨 변화가 생기진 않았나 확인해보고 마지막으로 마른세수를 하다가 그대로 얼굴을 손바닥에 묻은 채 굳어있기도 했다.


도로 누워서 오늘의 일과 계획을 세워보기도 하고 아직 굳어있는 몸을 그대로 이불의 따뜻함에 녹여보기도 하고.

할 일이야 많았다.


그래도 너무 지체해서는 안 된다. 아침식사를 하러 가지 않으면 그 녀석이 날 괴롭히러 오기 때문이다.


하늘그림의 문은 자물쇠가 달려있지만 열쇠가 없어도 여는 방법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쟤가 저렇게 문을 확확 열 수 있을 리 없지.


"야! 레이크! 뭐하냐!"


깨작깨작하는 소리가 들린다했더니 여지없이 야우라가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남의 방에 방문할 때 가져오는 선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나무통도 함께였다.


"그렇게 게을러 빠져서 어쩌려고!"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야우라는 키득키득 웃으며 나무통을 머리에 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으로 가서는 그 나무통을 빼앗았다.

내가 이렇게 거침없게 움직일 줄은 몰랐는지 야우라는 움찔 놀라며 맥없이 통을 빼앗겼다.


예상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물이 들어있다는 것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나는 야우라를 보았다. 녀석은 씨익 웃고 있었다. 입은 웃는데 눈은 경계하는 오묘한 얼굴.


"...너 세수하라고 떠온 거야."


어쩜 이렇게 거짓말도 잘 하는지. 누가 들으면 아주 껌뻑 넘어가겠다.

나는 물통의 물을 끼얹어 버릴 듯 팔을 움찔 떨었다.


"으앗!"


저 잔뜩 쪼그라드는 꼴을 보라. 야우라는 막은 손바닥 사이로 찡그린 얼굴을 내밀어 보였다.


"안 뿌려?"


그 애가 물었다.


"안 뿌릴 거지? 안 할 거잖아. 응? 에이."


점차 내가 뿌리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드는지 히히, 하고 슬며시 웃으며 손도 마저 내렸다.

그리고는 금방 심각한 분위기로 말했다.


"레이크 너, 내가 전에 말했지. 나한테 좀 더 감사해야한다고."


"물 뿌리러 온 사람한테 감사해야해?"


나는 물통을 문가에 내려놓고 말했다. 침대로 돌아가 자리에 앉을 때도 야우라는 안쪽까지 쫓아들어오며 재잘거렸다.


"나 같은... 이런. 어? 이런 엄청난 미녀가 매일 아침마다 깨우러 온다는 건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매일은 무슨. 지 오고 싶을 때만 오면서."


그래도 기왕 떠온 물. 써먹어주는 것이 좋겠단 생각에 나는 다시 문가로 가서 물통을 가지고와 손을 씻고 이어 얼굴에도 물을 묻혀 문질렀다.


"그래서 왜 왔는데."


얼굴에 남은 물기를 훔쳐내며, 나는 물었다.

그게 야우라는 퍽 서운한 듯 보였다.


"뭐야아. 왜 막 가라는 것처럼 말해?"


"아니... 왜 왔냐고."


뭐 무서워서 묻지도 못하겠다.


"그야 가까이 사니까. 그냥 심심하면 올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니야? 너 내가 싫어?"


너랑 노는 거 싫으냐고?

나는 고민했다. 최적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좋다고 하면 빌미를 주는 것밖에 안 되고, 싫다고 하면 왜 싫으냐고 성질을 부릴 테니 적절한 제 삼의 답을...


"뭐야! 왜 고민해!"


야우라는 물통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아니 이건 시간 유예가 짧아도 너무 짧았다.


"아니아니아니! 알았어알았어알았어!"


까닥하면 물벼락인지라 나는 재빨리 최선의 답을 마구 질렀다. 야우라에게 최선의 답이다.


"알았지? 알았으면 잘 하란 말이야. 앙?!"


"그래그래..."


야우라가 물통을 내려놓고난 후, 나는 한 숨을 크게 쉬었다. 하여간에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다 자기 원하는 대로 흘러가야하는 걸까.


"그건 그렇고."


불은 멀리 두는 것이 좋다고. 나는 이 김에 아예 다른 이야기로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했다.


"너, 저 문 도대체 어떻게 여는 거냐?"


"다 방법이 있어. 너한텐 안 알려줄 거야. 클로에가 나만 알고 있으라 그랬어."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야우라는 거드름을 피웠다.


"그래... 잘 됐네."


뭐가 잘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말했다.


평온하지만은 않았지만 누구누구가 깨워주신 덕분에 무사히 아침을 맞을 수 있게 된 나는 금방 준비를 마치고 아래로 내려갔다.


하늘그림에 묵으면서 절대 잊으면 안 되는 한 가지 중 하나는 바로 숙박비에 아침식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난 이게 엄청난 영리한 상술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식사를 무조건 함께 묶어 팔아버린다는 것 아닌가.


자기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고생하는 것보다 돈이 더 좋다는 게 클로에의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자리 잡고 앉아 누구누구 말에 따르면 좀처럼 맛볼 수 없는, 미녀가 정성스레 만들어 준 옥수수 스튜에 미녀가 정성스레 심부름으로 사다둔 빵을 적셔먹었다.


오늘 아침을 화려하게 시작한지라 이후는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보기보다 여유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웬만하면 가만히 놔둬줬으면 좋겠는데 저 건너편에 벌써 레샤가 보였다. 사람이 보이는 거야 사람 사는 세상에선 흔한 일이니까 별 것도 아니었는데, 유난히 두리번거리는 그 애의 시선이 문득 나와 맞은 것 같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레샤는 걷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지마라.

이쪽으로 오지마라.

이쪽으로 오지마라.


제발.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손바닥까지 마주대고 고개를 숙이고 눈까지 감아가며 염원했지만...

왜, 그,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크게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별 소용 없었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서 발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고개를 들었다.


"뭐해요...?"


레샤에게는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해보인 모양이었다.


"아니, 그냥. 왜?"


또 무슨 일이 있으셔서 날 찾으시나 난 그렇게 물었다.


"예에...?"


도리어 레샤가 약간은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아니... 뭐가 있는 건 아닌데요..."


하며, 그 애는 내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되는 않는 성질을 부렸다.


"근데 전에는 봤으면 아는 체를 하라면서요...!"


"아는 체를 하라고 했지 화를 내라고는 안 했어."


"아. 그잇... 그..."


달리 할 말은 없는지 레샤는 입 안에서 공기를 우물거렸다.


조용한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하던 식사를 이어서 했고 일부러라면 일부러 매우 천천히 씹고 삼키게 되었다.

그건 레샤가 미묘하게 계속 날 쳐다봤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게 참 신기한 것이, 평생 먹는 일을 하는데도 누가 그걸 쳐다보면 갑자기 그게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게다가 고개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보는 둥 마는 둥 움직임이 부산해서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다.


"왜?"


뭐 할 말 있느냐, 나는 다시 그렇게 물었다.


"예? 아니... 그... 레이크 화났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아니. 왜?"


"아니에요...? 그럼... 됐어요..."


방금 전까지 화 안 났었는데 이 말 듣고 왠지 화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짜증을 낼까도 싶었지만 얘가 달리 뭘 한 것도 아니었으니 난 피식 웃고만 말았다.


그 후로도 한참을, 내가 식사를 끝마칠 때까지 레샤는 내 앞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왠지 계속 꼼지락 꼼지락대는 그 꼴을 난 더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아니 왜. 진짜 왜 그러는데. 화 안 낼게. 말 해봐."


"예? 아니. 아니에요. 진짜 아무것도 아닌데..."


"너 왜 애가 야우라를 닮아가냐?"


"뭐라고요...?"


그 소리는 듣기 싫었는지 앙칼지게 되물었던 레샤는 도로 등받이에 몸을 곧게 대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게 아니라..."


잠시 후 그 애는 스스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레이크가 얘기했던 책을 저도 봤거든요."


"그래?"


그것 참, 별일이었다. 얘가 책을 봤으면 봤지. 나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해봐야 다른 걸 달라고 하거나 다음 걸 달라고 하거나 하는 정도가 다였다.


"그게 재미있어서... 그... 좋았.... 다구요... 그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저게 그렇게 조심스럽게 해야 할 이야긴가.


"그래서, 다음 거 줘?"


"넷...? 아, 혹시... 레이크는 별로였어요...?"


"아니. 괜찮았는데. 왜?"


오늘따라 뜸을 많이 들인다.


"아뇨. 그냥... 그... 레이크는 별로인 것처럼 보여서..."


"아니야 나도 재밌게 봤어. 특히 주인공이 자기가 종이었다는 걸 스스로 밝히고, 그랬는데도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다시 의기투합하는 부분이 좋았지."


"맞아요."


레샤는 끼어들듯이 불쑥 말했다.


"저도 그 부분이 좋았어요. 그거 말고도 주인공을 속였던 귀족에게 복수를 하거나 함께 다니던 마법사 동료랑 밤하늘을 보면서 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도 좋았어요. 응."


신나게 떠들던 레샤는 문득 조용해서는 힐끗 날 쳐다보았다.

과연 내 눈동자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아, 아무튼 그랬다고요...!"


정신없이 늘어놓을 때는 언제고, 레샤는 얼굴을 붉히며 얼버무렸다.


참나.

나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차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왜요! 웃지마요...!"


아무래도 그건 실패한 모양이다.


그 후로도 레샤는 책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했다.


감상 같은 것을 굳이 서로 나누는 것은 나에게도 드문 것이었던지라 제법 재밌게 이야기한 것 같았다.


그 영문 모를 감상회를 마치고난 뒤 나는 훈련소로 가 정해진 일을 했다.


일이라고 해봤자 내가 하는 것은 정말 별 볼 일 없었다. 진행됨에 따라 그 윤곽이 드러날수록 그건 더 심해졌다. 요즘은 사실 나는 쓰잘데기 없는 짓이나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곤 했다.


잠시 쉬는 시간, 쓸 만한 널빤지를 찾아서 그 위에 비스듬히 누워 전경을 바라보면 난 결국 산의 가운데를 파내어 양옆으로 옮기는 것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전부 다 태워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누가 일부러 그런 일을 하겠나.


도시에는 버려지는 물건이 많았다. 우리 고향이었으면 여기에 쓰겠다, 저기에 쓰겠다, 하며 다 가져갈 텐데.


실제로 땔감으로 쓰겠다며 조금씩 가져가는 사람들이 오곤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하긴, 우리 고향에선 애초에 이만큼 버려지지도 않겠지.


게다가 이만한 양을 태운다면 그것대로 또 문제일 것이다.


널빤지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죽음의 공터를 상상하고 있노라니 그림자가 내 얼굴을 가렸다.


"쉬고 계시는 거예요?"


에반젤린이었다.

그걸 알아채기에 앞서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 에반젤린? 웬일이야?"


아직은 성당 일을 도와야 할 때인 것 같은데.


"아아. 별 일은 아니고. 지나가는 길에 한 번 들러봤어요."


물건을 사러갔다 오는 길이었는지 에반젤린은 팔에 걸고 있는 덮개 닫힌 바구니를 들어보였다.

가벼이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마냥 그럴 건 아닌 거 같았다.


"그러다 없거나 못 찾으면 어떡하려고."


"그럼 나중에 하늘그림에서 만나면 되죠."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여기 와서 힘 낭비, 시간 낭비를 하게 되면 수고스럽지 않느냐 그런...

하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나는 하지 않기로 했다. 에반젤린이 널빤지에 따라 걸터앉았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돌아가야만 하는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추워지네요. 그렇죠?"


에반젤린은 선선히 날씨안부 같은 것을 물어왔다.


"저번에는 밤 당번을 돌다가 새벽바람이 차서 정말 깜짝 놀랐지 뭐에요?"


잠깐 쉰다 싶으면 이렇게 치고 들어와서 당연한 것처럼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좋은 일이었음에도 나는 어쩐지 지쳐간다고 느꼈다.


"저 있잖아... 에반젤린?"


그즈음, 나는 겨울이 아님에도 새벽 사이에 얼음이 얼 수 있을까, 자매들과 토론했다던 에반젤린의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었다.


"요즘 내가 너희들한테 너무 휘둘리는 거 같지 않아?"


그러자 에반젤린은 살짝 벌어진 입술을 채 다물지 못하고 한참이나 날 바라보았다.


"하하. 요즘 들어 날씨가 정말 많이 추웠죠?"


에반젤린이 침묵 끝에 미소와 함께 내놓은 답은 그거였다.


"아니아니아니. 지금 밤에 너무 추워서 내가 어떻게 됐다는 게 아니야."


지금 내 머리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네? 그럼요?"


아무래도 에반젤린에겐 그게 더 충격인 것처럼 보였다.


"뭐... 별 건 아니고. 내 개인적인 시간이 부족하다고 할까, 내 인생이 내 게 아닌 거 같다고 할까."


"레이크님의 삶은 레이크님만의 것이 아니죠. 저도 옆에서 함께 걷고 있다고요. 다들 그렇게 살고 있어요. 누구나."


왠지 그 말을 하는 에반젤린에게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아니 그러니까 웬만하면 혼자도 좀 걷고 싶다고."


"무슨 고민 있으세요?"


"아니 고민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혹시 뭔가 걱정거리가 있으시다면 저에게도 꼭 말씀해주세요."


"아니. 아니라니까."


오늘 벌써 '아니.' 라는 말을 몇 번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 혹시, 제가 너무 귀찮게 굴어서?!"


"사제님 나한테만 이러는 거죠? 다른 사람한텐 멀쩡한데 나한테만 이러는 거지?!"


"물론이죠. 레이크님은 저에게 아주 특별한 분이니까요."


"아니. 아니... 아니...... 어..."


저렇게 말하니 도무지 할 말이 없었던 나는 이제 그 '아니'라는 말을 놓기로 했다.


"그냥 일어날 때 추워서 투정부리는구나 그렇게 생각해줘... 그냥 그런 거야."


"그죠? 역시 그러실 것 같았어요. 걱정 마세요. 이번에 성당에 두꺼운 모포가 꽤 많이 들어왔거든요. 레이크님에게도 한 장 나눠드릴게요."


"그거 맘대로 빼내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묻자 아차 싶은지 에반젤린은 움찔 놀랐다.


"어... 그럼! 제 거 드릴게요."


아니...

내가 참지 못하고 다시 그 말을 하려 했을 때 에반젤린은 주섬주섬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러고 보면 잠시 들른 길이라고 했었지.


"그럼 나중에 다시 봬요. 이불은 어디서 새로 구하지 마세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에반젤린에게 그저 손을 흔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불은 새로 구해야겠다. 안 그러면 윗이불 빼서 아랫이불에 괴는 우스운 사태가 일어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분명히 쉬는 시간을 가졌는데 왜 전혀 쉰 것 같지 않을까.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런 식으로 만성 피로가 쌓이다간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는 수가 있었다.


나는 연무장을 나와 관사로 들어갔다. 별 건 아니고 먹을 거나 좀 빼먹을까 싶어서였다.

이 제멋대로인 직장에서 유일하게...


유일하게 낙을 가져다 주곤 하던 구석의 탕비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가 흘끗 보인 내부의 광경에 황급히 돌아서게 되었다.

전에 본적 없던 광경이 날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하하, 보였다. 레이크."


비셔스 경이 늘 하듯 웃으며 날 불렀다.

눈썰미가 정말 기가 막히게 좋은 사람이다.


별 다른 수 없이 난 원래 하던 대로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묻기는 했지만 물을 필요도 없었다. 비셔스 경은 혼자서 차를 끓이고 있었다.

잔에 물이 이미 조금 차있는 걸 보니 부으려는 찰나에 내가 들어온 듯 싶었다.


"아아. 스우렌우나가 고향으로 내려갔거든."


비셔스 경은 찻잔에 물을 마저 부으며 말했다.


"네? 말도 없이요?"


"뭐. 가끔은 얼굴을 비춰야 한다더구나."


"가끔이라고 해도 왔다갔다 하기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내가 하는 것도 아닌데. 아하하.'


비셔스 경은 호탕이 웃으며 잔 한 개만 달랑달랑 들고 탕비실을 나섰다.

저렇게 보면 격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마침 잘됐다. 언제 부르러 갈지 고민 중이었거든. 따라 올라와라, 레이크. 할 말이 있다."


윗층의 방으로 돌아가서 비셔스 경이 애용하던 커다란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나도 그 언저리의 아무 의자에나 자리 잡고 앉아서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기다렸다.


그건 그렇고. 못 보던 사이에 방이 좀 어수선해졌다.

불필요한 물건들이 많아 보인다고나 할까. 비셔스 경하고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장식품들도 보였다.


"아, 전부 나스가 가져다준 선물들이야. 아하하."


내 시선을 눈치 챈 것인지 비셔스 경이 묻기도 전에 먼저 말해주었다.

그건 그렇고.


"근데 무슨 일이세요. 설마 스렌이 없는 동안 그 빈자리를 채워라. 그런 건 아니죠?"


"아하하. 듣고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구나. 근데 그러긴 힘들 것 같아. 이번에 귀찮은 일에 엮이게 됐거든."


설마하니 그 귀찮은 일.


"저한테 떠넘기시려고."


"아하하, 어쩜 그렇게 말을 하니. 너에게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는 못 하겠는데."


"제가 뭘 어쨌는데요."


나는, 기사단장을 귀찮게 하는,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 기억이 없었다.


"하아... 나미얀의 카니발. 정말 지루했지. 그런 건 수도 없이 봤다."


"...그걸 왜 저한테 그러세요."


본인이 귀빈이라 초청받은 거라고 자랑해놓고서.


"원래는 참석해서 이름만 올려주면 되는 거니까 쉬는 시간에 적당히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거기서 딱 네가 나타나잖니. 부하가 곤경에 처한 걸 보고 그냥 지나갈 수도 없고... 하아... 아하하."


결과적으로 비셔스 경이 하는 말은 그거였다.


"로스를 살리는데 내가 힘좀 썼다."


"아니 그걸 왜 저한테 그래요!"


나로선 기가 막힌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원래 다 서로서로 돕고 사는 것 아니냐."


"그렇다하더라도 저 말고 로스한테 그러세요!"


"뭐어... 너도 봐서 알겠지만. 그 녀석은 좀."


조목조목 따지던 나는 로스가 못미덥다는 이야기엔 결국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세상이 서로서로 돕고 사는 거라면 나에게도 로스를 지켜줄 말이 있을 텐데.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아하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그 녀석이 와서 해줄 거다."


"누구요?"


또 누가 온다고. 나는 얼른 물었다.


"기다려봐."


그새를 못 참느냐고, 비셔스 경은 못내 웃음을 흘렸다.


작가의말

우리 주인공은 날이 갈수록 성격이 나빠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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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43. 쌀쌀하고 살가운(4) +2 19.10.15 67 4 16쪽
250 43. 쌀쌀하고 살가운(3) 19.10.13 56 4 16쪽
249 43. 쌀쌀하고 살가운(2) 19.10.11 56 4 14쪽
» 43. 쌀쌀하고 살가운(1) +2 19.10.08 73 3 19쪽
247 42. 그러니까 이건(9) 19.10.06 62 5 17쪽
246 42. 그러니까 이건(8) 19.10.06 56 4 21쪽
245 42. 그러니까 이건(7) 19.10.02 150 4 21쪽
244 42. 그러니까 이건(6) 19.09.30 83 4 16쪽
243 42. 그러니까 이건(5) 19.09.26 80 5 22쪽
242 42. 그러니까 이건(4) +4 19.09.22 86 4 19쪽
241 42. 그러니까 이건(3) +2 19.09.18 78 4 17쪽
240 42. 그러니까 이건(2) 19.09.17 91 4 21쪽
239 42. 그러니까 이건(1) 19.09.11 102 4 21쪽
238 41. 그것뿐이야(6) 19.09.05 106 5 25쪽
237 41. 그것뿐이야(5) 19.09.01 100 4 26쪽
236 41. 그것뿐이야(4) 19.08.27 84 4 18쪽
235 41. 그것뿐이야(3) 19.08.25 83 4 16쪽
234 41. 그것뿐이야(2) +4 19.08.22 94 4 17쪽
233 41. 그것뿐이야(1) +2 19.08.20 128 4 16쪽
232 40. 연꽃이 자라는 곳(6) 19.08.15 94 5 18쪽
231 40. 연꽃이 자라는 곳(5) 19.08.13 83 5 26쪽
230 40. 연꽃이 자라는 곳(4) +2 19.08.07 96 5 18쪽
229 40. 연꽃이 자라는 곳(3) 19.08.03 92 4 17쪽
228 40. 연꽃이 자라는 곳(2) +2 19.07.30 110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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