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시험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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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
작품등록일 :
2017.04.23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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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7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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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8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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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감 놓고 배 놓고 그것도 놔(2)

DUMMY

내 기억 속의 에리히 머스는 이미 거의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한 번 생김새를 상상하려고 해봐도 스테인드글라스로 그려진 여신님만큼이나 형태가 뭉그러져서, 코가 한 개인 건 맞는지 눈이 세 개였던 건 아닌지 사실 저 먼 서역의 사람이었던 건 아닌지...


이제와 에리히 머스가 여자였다고 해도 그다지 놀랄 것 같지 않다.

물론 에리히 머스는 남자였다. 아무리 관심이 없대도 그것까지 기억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에리히가 이토록 흐리멍텅하게 기억되는 것은 단순히 내 주의력 탓은 아니었다. 그 사람 잘못도 있다.


생긴 건 따뜻한 봄 햇살 쐬면서 고양이나 쓰다듬을 거 같아가지고는 바쁜 체는 또 엄청 해대서, 실은 색유리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니라 손가락으로 문질러 그린 그림 같은 사람이었다.

아마 눈썹이 하도 날려서 좀 빠지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계단의 목재 난간 사이로 목을 빼 내밀어 목표물을 최대한 가까이 관찰했다.


에리히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항상 바빠 보인다고 했던게 평이 무안하게 아주 평온한 모습.


아니, 자세히 보니 평온하지는 못했다. 위쪽의 에리히는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래의 에리히는 인생의 행운이 다 날아가라 기원하듯 무지막지하게 다리를 떨고 있었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한 쪽만 떠는 사람은 많이 봤는데, 지금의 에리히는 양쪽 다 떨고 있었다.


초조하다는 말 천 번을 해도 저 모습보다 진정성 있지는 않을 것이다.

생긴 건 참 멀쩡한 사람이 알게 모르게 깨는 부분이 많다.


오늘도 옷깃이 한 쪽은 접혀있고 한 쪽은 펼쳐져 있는 중구난방 제멋대로의 차림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보고나니 에리히가 꽤 허술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새삼 떠오른다.


저런 사람이 직접 극을 쓰고 극장까지 운영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에리히에게는 미안하게도 이름조차 모르는 그 소극장은 자세히는 몰라도 제법 괜찮게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경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주로 상연해서 그 성적이 나쁘지 않다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 돈 많은 상단인 러너스하이에서도 지원을 하는 거겠지.


부자들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이 약간의 취미 같은 것이라곤 해도 아무 것도 없는 밴댕이한테 재미삼아 돈을 뿌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결국 후원하는 예술가가 얼마나 유명하고 또 유명해지느냐가 그 쪽 사람들의 명예와 관련이 있었으니 말이다.


즉, 에리히 머스가 연극의 질을 높이고 그걸 통해 성과를 내는 것은 밥줄 그 이상의 무언가로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레샤의 영입 또한 그 일환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와서 염탐을 하고 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내가 왜 염탐을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레샤가 대신 좀 가서 봐달라고 하도 생떼를 쓰니까 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누가 이러고 보고 있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냥 내가 에리히 머스를 돌려보내 주길 바라는 걸수도 있다.


조금 지나자 야우라가 나와선 오자마자 날 옆으로 밀어내고는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대체 다른 데 가서 남의 얘기는 왜 함부로 하고 다니냐는 레샤의 울분은 이제 다 들은 모양이었다.


"어때?"


그 애가 말했다.


"조만간 클로에한테 한 소리 들을 거 같은데."


나는 덜덜 떨리는 에리히의 다리를 가리켜 말했다.

그 옆을 여러 번 지나치던 클로에가 그 모습을 발견한지도 꽤 되었다.

그 뒤로, 굉장히 아니꼬운 눈길로 다리를 째려본 게 정확히 네 번이었다.


"근데 있잖아."


야우라는 아주 스멀스멀 얘기를 꺼냈다.


"나는 그냥 레샤가 극장에 가서 일하면 되지 않나 싶어. 어차피 뭔가는 해야 되잖아. 그럼 하던 거 하는 게 좋지. 응. 맞아 하던 거 하는 게 좋아."


지 혼자 말하고 지 혼자 맞장구 치고 아주 잘 한다.


"너, 내가 저지르고 나서 나중에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말랬지?"


나는 혼자 자신을 용서하는 그 행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왜에.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말하다보니까 이렇게 저렇게 해서 그렇게 요렇게 된 거지 뭐..."


야우라는 서운하고 억울하고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목소리로 쫑알거렸다.

그래, 레샤한테도 많이 혼났을 테니 내가 더 했다간 펑 하고 폭발해버릴지도.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하여 이제 그만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야우라는 이미 건드린 돌이 굴러가는 것처럼 행동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에리히 머스를 또 돌려보내서 만회하는 거야!"


"어, 야. 잠깐만."


그래준다면야 고맙겠지만, 사실 내가 별로 고마울 것은 없지만, 아무튼.

야우라는 건들면 싸울 기세로 계단을 내려갔다.

또 무슨 짓을 할까 걱정된다.

나는 막무가내로 내려가는 그 애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성큼성큼 패기 가득 찬 야우라가 나타나자 에리히의 얼굴은 벌써 밝아져 있었다.

레샤가 같이 내려온 것도 아닌데 벌떡 일어나서는 뭔가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야! 에리히!"


야우라가 소리쳤다.

돌려보내겠다는 게 진짜 싸워 이겨서 내쫓겠다는 의미였는지 무슨 도전장이라도 내미는 투다.


"아, 야우라!"


에리히는 그런 푸대접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눈치였다.


"레샤양은 어디에...?"


오히려 당연히 같이 왔을 줄 안 레샤가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곤 그걸 더 서운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레샤 없어. 아침 일찍 나가서 아직 안 들어왔어."


옆에서 보고 있다가 든 생각이지만, 거짓말을 좀 그럴듯하게 잘 할 수 없나 싶다.


"네? 그럴 리가요. 아까 전에 사제님이 불러주시겠다고 올라가셨는데? 집밖에 자주 안 나가니까 분명히 있을 거라고..."


에리히 머스는 야우라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도 비슷한 말을 자주한 모양이다.


"그, 그거는... 그러니까... 그건..."


야우라는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져 말을 더듬었다.

그러게 금방 들킬 거짓말은 왜 그렇게 하고 다녔냐고. 제 삼자 한 명만 끼어들어도 엉망진창이 되지 않는가.

뿌린 대로 거두리라, 난 그 실황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었다.


뻐끔뻐끔 물고기처럼 입술을 우물대던 야우라는 머릿속에 꼬인 실타래를 마침내 풀어냈다.


"그건, 사실 레샤가 아니야..."


아니 푼 게 아니라 냅다 집어 던져버렸다.


"레샤양이... 레샤양이 아니라고요? 그게 무슨... 무슨 뜻이죠?"


역시나 에리히 머스는 그 얼토당토 안 한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았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레샤가 둘... 아니 다섯 명이거든?"


야우라는 뻔뻔스럽게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집에만 있는 애가 있고. 나가는 애가 있고. 일 하는 애가 있고. 막 그래."


"다섯... 오자매라는 건가요?"


"어, 그거 비슷한 거야."


"비슷하긴 뭘 비슷해."


나는 끄덕이는 야우라의 머리를 한 대 때려버렸다. 그게 우연찮게 숙이는 타이밍에 얻어맞게 된 야우라는 앞에 고꾸라질 뻔 한 것을 테이블을 잡고 겨우 버텼다.


"아아! 왜!"


성질을 내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근데, 해도 해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애를 뭘로 만들고 있는 거야?"


다섯 명이서 한 사람처럼 생활하는 자매라니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설정을 붙여둬야 나중에도 편하지."


제 딴에는 미래까지 생각해 만들어낸 아주 편리한 거짓말이란다.


"옥수수 이빨 빠진 소리하고 있네. 설정은 무슨 설정이야."


"원래 레샤정도 되면 이런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소문 한 둘쯤은 붙어도 돼."


"그래서 걔도 지한테 새로운 자매 네 명이 생겼다는 사실을 안데?"


내가 묻자 말문이 막힌 것인지 야우라는 팔짱을 끼고선 잔뜩 찌푸린 눈으로 껄렁거렸다.


"진짜... 사사건건 트집이고. 나만 보면 어떻게든 잡아먹으려고 한다니까? 좀 놔두면 안 돼? 내가 사람을 죽였어? 아니잖아, 오히려 네 명 더 만든 거나 다름없잖아. 그럼 잘 한 거 아냐? 레일, 레이, 레삼, 레샤, 레오. 괜찮네!"


투덜투덜 다 들리게 투정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누가 저걸 마흔 두 살이나 먹은 아줌마라고 생각하겠냐고.

나는 이래저래 꿍시렁대는 야우라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훑었다.

어떻게 저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밉상일까.

저것도 능력인가?


"아앗! 나, 네가 그렇게 쳐다보는 거 너무 싫어. 차라리 말로 해."


그게 또 그렇게 기분이 나쁘시다고.


"말로 하면 무슨 말을 들으려고."


"세상에, 대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저런 소릴 하는 거야? 이것 봐. 이게 사람 대 사람으로 해도 될 짓이야? 이거 완전 투옥감 아니야? 범죄자 아니냐고."


야우라는 이쪽에 삿대질을 해가며 그 하소연을 에리히에게 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게 된 에리히 머스는 정확한 대답은 피하고 웃음으로 대충 때워넘겼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됐고. 이제 그냥 올라가서 레샤 데리고 와."


"앗, 그걸 말하면 어떡해. 잘 넘기고 있었는데."


"그럼 언제까지 이러려고."


영원한 거짓말은 없다.

모든 것이 탄로난 야우라는 비통함을 감추지 못 했다.


"으잇... 지금 올라가면 레샤 또 화낼 거 같은데."


"아줌마가 꼬아놨으니까 아줌마가 해결하라고."




그리하여-


레샤는 결국 에리히 머스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어도 불편하다는 건 굉장히 고된 일이었다.


마치 작별 인사 할 거 다 하고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그런 누구도 잘못한 것이 없는 슬픈 어색함.


차라리 그건 둘이라서 다행이지 레샤는 그것을 오로지 혼자 짊어지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레샤양. 잘 지내셨죠?"


에리히 머스가 먼저 친절히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레샤는 적절한 대꾸가 아니라 상투적인 인사말을 했다. 그것도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소리.

게다가 내 책은 왜 가지고 내려온 건지 모르겠다.


"저건 왜 가지고 왔어?"


하여, 나는 같이 내려와 객원으로 빠져 있는 에반젤린에게 물었다.


"음. 글쎄요? 굉장히 소중하게 꼭 안고 가시던 걸요?"


아 방패인가보네.

감히 내 책을 방패로 삼으려 들어?


"야! 내 책 내놔!"


이해는 하더라도 납득은 할 수 없기에 나는 얼른 가서 내 책을 되찾았다.

레샤는 약간 놀란 듯, 익, 하며 허망하게 책을 빼앗겼다.


"뭔가요, 갑자기...?!"


레샤는 에리히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내게 성을 내었다.


"남의 책을 왜 방패로 써먹으려고 그래?"


"그냥 좀 빌린 겁니다. 뭐 어때요, 다 읽고 쓸데도 없다면서...!"


방패로 쓰려고 했던 건 정말인 모양이었다.

허기사 심신의 안정에 눈으로 보이는 벽만큼 확실한 건 없었다.


"쓸모없으니까 가져간다고."


나는 고스란히 되받아쳐주고 다시 물러나려고 했다.


"아앗...! 잠깐만요, 레이크 잠깐만요...!"


그러나 레샤가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왜."


하도 아래로 당겨대는 탓에 하는 수 없이 나는 몸을 숙여 레샤에게 귀를 가져다댔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전해주세요..."


"네가 말해... 바로 앞에 있잖아... 이미 들렸겠다!"


무슨 대단한 전언이라도 있나 했더니 바보 같은 소리였다.


"저는 좀 그렇단 말이에요..."


"뭐가. 너 하나 만나겠다고 온 사람인데 좀 만나줘라."


"그러니까 그런 거라고요..."


그 말인 즉, 에리히 머스의 지극정성이 부담스럽단 의미 같았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겠다 싶다.

아무리 잘해준대도 오히려 그게 불편할 데가 있는 것이다.


하...

깊은 탄식이 나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에리히 머스에게 말했다.


"오늘은 안 될 거 같다는데. 다음에 오실래요?"


"네? 아니 그게... 저희도 오늘이 아니면 안 되는데요."


에리히 머스의 입장은 분명했다.

내 생각도 그랬다.

오늘의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언제가 될지, 그것은 에리히는 물론 레샤 본인조차 알 수 없는 거였다.


"저희 극장에선 비교적 쉽고 직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보여주는 게 확실해야 반응도 좋아요. 그런 의미에서 레샤양의 마법은 저희의 가장 강한 무기 중 하나였죠."


극장 주인으로 돌아온 에리히 머스는 이제 협상과 설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 레샤가 다시 내 옷자락을 당겼다.

나는 등을 구부려 그 전언을 듣고 다시 몸을 바로 세웠다.


"그건 마법이 아니시랍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이나 전해주고 앉았지.


"아아, 이거 제가 실례했군요. 정령술이었죠? 죄송하다고 전해주시겠어요?"


이젠 에리히 머스까지도 나한테 전해달란다.

힐끗 내려다보자. 수신인인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데요."


이쯤 되면 나도 발언권을 가져도 되지 않나 싶다.


"근데, 그게 꼭 레샤여야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


내가 묻자 에리히 머스는 금방 답하지 못하고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역시 대답을 피해서는 협상을 이어나갈 수 없겠다 싶었는지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웬만한 마법사 분들은 보수를 엄청 세게 부르시거든요... 저희 같이 규모가 작은 곳 입장에서는 그걸 맞춰 드리기가..."


이야기하기 힘들어한 이유를 알겠다.

비싸서 못 구한다는 말, 곡해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너, 사기 당하고 있었데."


너는 푼돈 받고 착취당하고 있었노라고, 나는 레샤에게 그렇게 전했다.


"아뇨아뇨아뇨! 그게 아니라 저희는 그러니까..."


에리히가 당황하는 보니 장난이 과했나 싶기도 했다.

허둥대고 사색이되어선 팔을 허우적 거리고.

사람이 참 허술하다니까.


"아 그러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극장에서 보수를 제일 많이 받고 있던 것도 레샤양이거든요... 근데 그 분들은 그것보다도 더 많이 부르니까..."


아아, 그런 뒷이야기가.

그즈음 나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네가 싸게 이용해 먹기 좋았데."


"그, 급료는 다시 정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에리히는 정말 어디 불이라도 난 것처럼 진땀을 뻘뻘 흘렸다.

얼굴도 울그락불그락 해져서는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몸을 벌벌 떨었다.


사실 오해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너, 저 사람 언제까지 괴롭힐 거야?"


하여 에리히도 좀 도와주기 위해 이번엔 먼저 레샤에게 물었다.


"예에...? 괴롭힌 건 레이크잖아요..."


레샤는 저에게 씌워지는 덤터기를 얼른 걷어차 버렸다.

그 또한 맞는 말이다.


"그래, 뭐든 간에 어차피 따로 할 거 없으면 야우라 말대로 이거나 계속하지 그래? 네가 최고라잖아."


"근데, 그 사람들... 제가 그만둔다고 하니까 파티까지 열었다고요...? 그런 곳에 돌아가 봐야 웃음거리만 되는 거 아닙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그게 너 가서 좋다고 그러는 거겠냐? 잘 가라고 그 정도는 하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들어는 봤나, 송별회라고.

내 상식이 틀린 건가?


"레이크는 그 자리에 없어서 모르는 거예요... 그런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혼자 내버려지는 그런 기분을... 그건 분명히... 분명히..."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레샤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푹, 한 숨을 쉬었다.


"아아..."


나는 그 입장에서도 한 번 생각해봤다.

얘한테는 송별회가 곤욕이자 치욕이고 가혹한 시간일 수도 있던 것이다.


"댁들이 잘못했네! 왜 애를 괴롭혀! 아무리 맛있는 케이크라도 단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 에리히 탓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그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저희 나름대로... 그... 그걸 한 건데..."


에리히는 당연한 것처럼 사과했다.


"근데, 너 진짜 안 할 거냐?"


그건 차치해두고 다시 레샤에게 물었다.


너무나도 좋은 대우와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 이 이상의 조건을 찾기가 쉽지는 않아보였다.

낯도 가리고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오해를 하고 또 오해를 만들어내는 애가 일하기에 이 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안 하겠다고 딱 정한 건 아니에요... 근데 그냥... 갑자기 제가 불쑥 찾아 가기도 그렇고 해서..."


레샤 본인도 할 마음은 있다는 거 같았다.

다만, 계기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저기, 에리히. 레샤가 말하길. 조건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말하자 죽어가던 에리히에게 화색이 돌았다.


"그 조건이라 하면?!"


그 조건.

나는 당연히 레샤에게 물어보아야 했다.


"뭐할래?"


"뭘요...?"


레샤는 꺼림칙하게 되물었다.


"조건. 지금 하는 거 보면 급료도 두 배는 더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두 배는 무슨 세 배도 가능해 보였다.


"예에...? 그렇게 많은 돈은 필요 없어요... 불안하기만 하고... 그러다가 실수하면 돈값 못 한다는 얘기만 돌 거 아녜요..."


레샤는 싫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내참 실수할까봐 돈 더 받기 불안하다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일단은 받고 나중에 생각해봐도 되지 않은가.


이런 것도 레샤가 팔렌팔라인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어쨌거나 나는, 그러시구나, 하고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 나!"


그 때 무슨 볼 일인지 야우라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모두의 주의가 모이자 야우라는 또박또박 선언했다.


"나는 연극이 보고 싶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궁금합니다."


왜 갑자기 지 희망사항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뻔뻔하다고 하기도 민망한 속이 훤히 보이는 행동.


"그래요."


헌데 정작 레샤는 괜찮은 듯 보였다.

오히려 괜한 고민거리가 없어져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렇게 해요. 그래도 되죠...?"


이어 직접 에리히에게 묻기까지 했다.

그 사람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이죠! 괜찮고 말고요. 계약에 대한 얘기도 거기서 다시 하는 걸로 하죠."


무너졌던 하늘에 솟아날 구멍이 생겼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초조함이 사라진 에리히는 그야말로 환히 웃었다.


에리히는 바로 우리를 극장으로 안내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이 그 사람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와본 곳이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넓은 공간이 비좁아 보일만큼 잡동사니로 가득한 곳이었고 멈춰선 사람이 하나도 없이 어수선 했다.


레샤를 보면 반갑게 인사하는 것까지 그대로였으니 그간 힘들었다고 말해도 나름대로 잘들 지내는가 싶었다.


나도 그 중에 아는 사람이 있었다. 날 집어던지려고 했던 남자. 톨로였다. 그렇지만 일부러 아는 채 하지는 않았다. 그 때 사과는 받았지만 그 사람은 아직도 무섭다.

또 바쁜 사람 굳이 찾아갈 필요 없잖은가.

별로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 뒷문으로 들어갔기에 나는 당연히 우리가 대기실 같은 곳에 들어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에리히는 쭉 가로질러 우리를 위층의 객석까지 안내했다.


거기가 좋은 자리라는 것을 난 기억하고 있었다. 전에 비셔스 경도 이 비슷한 자리에 앉았었지.


그 후에는 연극의 준비가 끝나고 손님들이 들어올 때까지 거기서 기다리는 것이 우리 일이었다.


에반젤린이야 점잖게 참는 것을 잘했으니 다소곳이 앉아 시간을 기다렸지만 야우라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박스 형태의 객석 창가 쪽에 붙어 무대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옆구리에 레샤까지 붙여놓고서는 이래저래 집어 가리키고 묻고 하는 것이 많다.


얘는 레샤 없는동안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나는 소란스럽게 구는 야우라에게는 신경 끄고 나름대로의 구경을 이어나갔다.


무대는 소품과 장치를 살피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 한편엔 배우들도 있었다.


화려한 분장과 화장을 한 사람들.

그 중에 나는 눈에 띄는 사람을 한 명 발견했다.

분장도 화장도 하지 않은 사람.

이질적이지만 서도 어딘가 익숙한 사람.

나는 레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저거 너네 엄마 아니냐?"


작가의말

ㅁㅇ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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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45. 처음엔 두 칸이지(1) 19.12.03 88 4 16쪽
259 44. 따뜻하고 매정한(7) 19.12.01 118 4 24쪽
258 44. 따뜻하고 매정한(6) 19.11.17 91 4 17쪽
257 44. 따뜻하고 매정한(5) 19.11.08 91 4 21쪽
256 44. 따뜻하고 매정한(4) 19.11.04 97 4 17쪽
255 44. 따뜻하고 매정한(3) 19.10.30 71 4 15쪽
254 44. 따뜻하고 매정한(2) 19.10.26 73 5 22쪽
253 44. 따뜻하고 매정한(1) 19.10.22 72 4 20쪽
252 43. 쌀쌀하고 살가운(5) 19.10.18 60 5 19쪽
251 43. 쌀쌀하고 살가운(4) +2 19.10.15 67 4 16쪽
250 43. 쌀쌀하고 살가운(3) 19.10.13 56 4 16쪽
249 43. 쌀쌀하고 살가운(2) 19.10.11 56 4 14쪽
248 43. 쌀쌀하고 살가운(1) +2 19.10.08 72 3 19쪽
247 42. 그러니까 이건(9) 19.10.06 62 5 17쪽
246 42. 그러니까 이건(8) 19.10.06 56 4 21쪽
245 42. 그러니까 이건(7) 19.10.02 150 4 21쪽
244 42. 그러니까 이건(6) 19.09.30 83 4 16쪽
243 42. 그러니까 이건(5) 19.09.26 80 5 22쪽
242 42. 그러니까 이건(4) +4 19.09.22 86 4 19쪽
241 42. 그러니까 이건(3) +2 19.09.18 78 4 17쪽
240 42. 그러니까 이건(2) 19.09.17 91 4 21쪽
239 42. 그러니까 이건(1) 19.09.11 102 4 21쪽
238 41. 그것뿐이야(6) 19.09.05 106 5 25쪽
237 41. 그것뿐이야(5) 19.09.01 100 4 26쪽
236 41. 그것뿐이야(4) 19.08.27 84 4 18쪽
235 41. 그것뿐이야(3) 19.08.25 83 4 16쪽
234 41. 그것뿐이야(2) +4 19.08.22 94 4 17쪽
233 41. 그것뿐이야(1) +2 19.08.20 128 4 16쪽
232 40. 연꽃이 자라는 곳(6) 19.08.15 94 5 18쪽
231 40. 연꽃이 자라는 곳(5) 19.08.13 83 5 26쪽
230 40. 연꽃이 자라는 곳(4) +2 19.08.07 96 5 18쪽
229 40. 연꽃이 자라는 곳(3) 19.08.03 92 4 17쪽
228 40. 연꽃이 자라는 곳(2) +2 19.07.30 110 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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