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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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복이아빠
그림/삽화
내복이아빠
작품등록일 :
2011.05.26 12:44
최근연재일 :
2019.01.29 07:06
연재수 :
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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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글자수 :
250,466

작성
17.09.2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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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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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10

DUMMY

그렇게 오랜비는 끝났다. 영원히 내릴 것 같았던 빗줄기는 거짓말처럼 그쳤다.

마지막 오랜비가 뿌려지던, 태이의 주검이 비어랑으로 돌아온 그 다음날, 아사달의 주인 가마미르는 비어랑을 상대로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내용은 '요망한 옛 의식을 통하여 가우리의 열두 나라를 지배하려 하는 비어랑의 야심을 꺾기 위하여 가우리 땅의 정의로운 주인 중 하나인 아사달이 친히 나선다.'는 것이었다. 그 같은 내용의 방이 비어랑을 비롯한 가우리의 온 고을에 뿌려졌고, 칠순을 넘긴 노인부터 세 살배기 아이까지 가우리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옛 가우리로부터 이어진 열두 나라는 물론 그 인근 지방의 중소 도시들, 특히 가온디묏줄기와 등묏줄기로 경계 지어진 중서부 지방인 하나암, 비어랑 그리고 아사달과 인근은 벌써 전쟁이라도 난 듯 들썩였다.

이미 하늘뫼, 머릿돌에서 일어났던 비어랑 일가의 무력시위는 비어랑 태이의 죽음과 비어란 한울의 실종이 드러나면서 함께 온 가우리 땅에 알려졌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고, 찬란한 별이 떠오르고, 별똥별이 하늘에 상처 같은 꼬리를 남기는, 달 없는 어둑한 밤.

붉은 가죽갑옷을 차려입은 아사달 가마미르의 싸홀아치들. 그리고 비어랑 씨족의 마지막 생존자 '푸르매 시우'와 그의 반쪽이자 주인이었던 여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검은 옷의 싸홀아치들의 대치.

비어랑 태이의 상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시작된 첫 밤의 시작이었다.

비어랑의 성문은 굳게 닫혔다. 들어오는 사람도, 나가는 사람도 없이, 성 밖에서 아사달의 싸홀아치들과 대치하고 있는 비어랑의 싸홀아치들 말고는 어느 누구도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비어랑의 시민들 중 특별히 솜씨가 출중한 자들과 자원한 자들은 외성벽 쪽에 마련된 임시 막사에 모여 있었다. 그 수는 많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지킬 정도의 실력은 될지 모르나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일 정도의 훈련은 되어 있지 않았다. 믿을 것은 이백이 채 넘지 않는 비어랑 싸홀아치들과 모톨집의 훈련된 모톨아치 마흔두 명, 그리고 성의 방어를 맡게 된 살필집의 살피아치 사백 여명, 이렇게 고작 육백이 조금 넘는 인원뿐이었다.

습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이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리는 희아의 손을 꼭 잡았다. 희아는 분주하게, 또 불안한 듯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겁 묵지 마라."


이리는 희아의 두 어깨를 단단히 붙잡으며 말했다. 희아의 눈동자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역시 그냥 은잔에 두고 올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단 한순간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데리고 왔는데.

절망과 죽음은 감염된다.

이리는 희아의 손을 잡아끌며 은잔으로 향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희아를 데리고 무작정 성 밖으로 나가기엔 너무 위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비어랑은 점령당한다. 미리 도망쳤어야 했지만, 이미 봉쇄되어버린 비어랑을 희아와 함께 빠져나갈 방법 따윈 없었다. 이리는 자신이 너무 멍청했다고 생각했다. 강이 떠날 때, 이리도 함께 떠났어야 했다. 그때 희아와 함께 북쪽이든 남쪽이든 하늬바다를 건너든,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어쨌든.......이미 늦었다. 지금으로선, 이리와 희아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비어랑이 이길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한다. 적어도 이번 전투를 이겨서 아사달이 한동안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 둬야 한다. 그래야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는 강이 말했던 그 위험이라는 것이 뭔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고작 지금 벌어지고 있는 비어랑과 아사달의 싸움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리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희아의 손을 꼭 쥐고 그 아이에게 웃어주면서도 끊임없이 방법을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는가."


이리와 희아가 은잔에 다다를 때 쯤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이리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반사적으로 희아를 등 뒤로 숨기며 벼리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눈을 들어 목소리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천한번째.......밤."


"오, 내 이름을 아는구나.“


이리와 희아의 눈앞에는 온 몸이 새까만 사내가 묘한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이리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사달과 천한번째 밤이 손을 잡았고, 비어랑의 어미인 태이를 죽였을 때부터 아사달이 직접 비어랑을 칠 계획이었다는 걸 깨닫고 그 때 바로 줄행랑을 놓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다분 며칠이라도, 아니 하루라도 벌었을 테고, 이런 위험에 빠지지는 않았을는지도 몰랐다.

이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리야, 누, 누구야?"


희아는 자신도 모르게 사시나무 떨듯 떨려오는 몸을 이리의 등에 기댔다. 든든하고 흔들림 없는 커다란 주인의 품에 안기면,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라 여기는 강아지처럼. 하지만 이리의 등을 껴안은 희아는 마치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 온몸의 근육과 핏줄을 세우며 떨고 있는 이리를 느껴야만 했다.


"이, 이리야......."


이리는 벼리를 꼭 쥐었지만, 차마 뽑을 수가 없었다. 아니, 뽑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손끝이 무섭도록 떨려왔다. 자신의 앞에 선, 시리도록 빛나는 흰자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온통 새까만 어둠과 도저히 맞설 수가 없었다.


"내 뒤에 꼭 붙어 있어라. 절대 떨어지지 말고."


이리는 이를 악물고 겨우 말했다. 굳어 있는 오른팔을 움직여 벼리를 뽑아내었다. 칼을 뽑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순 없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천한번째 밤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바로 희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비어랑을 치려는 이유가 바로 희아인 걸지도 모른다. 강이 말하기로는, 강과 산은 천한번째 밤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은 이리에게 희아를 지키라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희아를 지키기 위해 천한번째 밤을 막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지금, 천한번째 밤은 희아의 앞에 나타났다. 천한번째 밤이 희아를 노리고 있는 것은 확실한 듯했다.

하지만 이리도 쉽게 희아를 찾아올 수 있는 자라면, 굳이 왜 아사달과 비어랑이 싸우도록 판을 짰을까. 그런 번거로운 방법이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번쩍하고 나타나 납치해가면 그만일 것이다. 이런 술수를 부리는 데에 꼭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번 <전투>의 목표는 희아가 아니라는 걸까.

그렇다면 도대체 저자가 왜 지금 이곳에, 이리와 희아의 앞에 나타났을까.

생각을 계속 이어가면서도, 이리는 천한번째 밤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보았다. 저 여유 넘치는 모습, 적진에 홀로 들어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생각을 이어갈수록, 천한번째 밤의 손짓 하나, 발짓 하나에 마치 보조를 맞추듯 자리를 잡으며 계속 경계를 이어갈수록 처음의 절망감과 공포가 점차 사라져 갔다.

전투을 안배해 놓고, 적진에 홀로 들어와 어찌되었든 자신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이리와 희아의 앞에 스스로를 드러낸 자.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들의 앞에 나타난 이유.


아마 저 자는.......


나름의 결론을 내린 이리는 벼리를 고쳐 쥐고 칼을 들어 천한번째 밤에게 향했다.

이리의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던 천한번째 밤이 저음의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그럭저럭. 이번에는 입을 열고 말하네. 목소리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구마.”


있지도 않은 여유를 가장하며 이리가 말했다.


"그나저나 뭔 일이고?"


이리는 왼손에 쥔 칼집을 더욱더 세게 틀어쥐며 말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잡아 본 칼과 칼집. 힘껏 쥔 손잡이의 실 꽈베기의 느낌에 뜨거운 피가 뒷목까지 뻗어 올랐다.


“오호, 나와 한 번 붙어보겠다는 건가.”


“아인데.”


이리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도망칠 낀데.”


“하하하!”


천한번째 밤이 유쾌한 듯 웃어재꼈다. 그 새하얀 이를 한껏 드러내며. 그의 웃음소리가, 터질 듯 박동하는 이리의 심장을 쥐고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천한번째 밤이 이윽고 웃음을 멈추었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던 듯 새까만 손으로 눈가를 슥 훔쳤다. 여유로웠다. 마치 궁지에 몰린 쥐를 앞발로 가지고 노는 살쾡이처럼. 그래서 얼빠진 듯 보일 법한 손짓 하나도, 표정의 변화 하나까지도, 이리는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눈물을 훔쳐내는 손가락도, 배를 움켜쥐고 웃어댈 때의 그 눈언저리의 주름도, 마치 칼을 뽑아내는 악마의 몸짓과 같아서 언제든 순식간에 이리와 희아의 목숨줄을 끊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놓아주지. 어차피 오늘은 그저 구경을 온 것뿐이니."


이리의 생각대로였다. 저자는, 사냥감을 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사냥감을 가지고 놀려고 온 것이었다. 고양이가 쥐를 궁지로 몰아넣으며 그것을 재밌어 하는 것처럼, 저자 역시 이리와 희아를 궁지에 빠뜨리는 척하면서 그걸 즐기고 있었다.

이리는 칼을 든 팔을 내리며 말했다.


“그래, 고맙네.”


“직접 만나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지.”


말을 마친 밤의 눈동자가, 이리의 뒤에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을 희아를 향했다. 이리는 이를 드러내며 다시 칼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밤의 시선 속에 이리 따위는 없었다. 희아의 존재를 핏방울 하나까지 각인시키겠다는 듯, 빛마저 빨아들이는 듯한 눈동자로 희아를 훑어보는 밤의 시선에 희아가 몸서리를 쳤다.


"어차피 달이 필요한 때는 마지막 하나의 해가 떠오를 때. 지금은, 조금 더 무르익기를 기다려야겠지."


밤의 주변에 짙은 어둠이 서렸다. 달빛마저 가려진 그 밤보다 더 어둡고 두꺼운 어둠이. 어두워지고 어두워져 두 눈만이 하얗게 빛났다.


"숨거라. 도망치거라. 불길을 뿜어대며 뒤엉키는 전쟁 끝에 남을 단 하나의 해, 그 주인의 귀환까지 보물을 지키는 충성스런 개처럼 말이야."


이윽고 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허공을 맴도는 그 지독한 저음의 목소리는 여전히 남아 이리의 귓가를 울렸다.


“주인의 손길만을 기다리는 멍청한 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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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4 17.09.28 95 1 10쪽
17 제2장 오랜비가 끝나면 - 3 17.09.28 98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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