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큰 돈의 용도
파이트 클럽에 왔던 모든 구경꾼은 미리 베팅금을 환전소에 맡겨둔다.
그리고 모든 경기가 끝나고 나갈 때 베팅의 결과에 따라서 처음보다 돈을 잃어버린 사람도, 더 벌고 가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춘향이 무리하게 베팅하지 않게끔 하는 조치이면서도, 돈이 없는데도 몰래 베팅에 참여한다든가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행위를 막기 위한 방침이라고 했다.
특히나 오늘 같은 날은 역 배팅이라고 불리는 이변이 일어나 버린지라 환전소에는 사람들이 스위치를 반납하고 돌아가기만 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있었다.
“ 수수료를 제외하고 남은 금액 32만8천 원입니다~ “
“ 이.. 이거밖에 안 된다고...?! 어느새..?! “
어느 곳에서나 이런 안타까운 말들이 들려온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남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잃었을 때 혼자서 돈을 많이 벌어간다면 당연히 눈에 띄기에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지금 슬슬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환전소에 각자의 복면을 쓴 네 명의 사람이 따로따로 퍼져있다가 모이는 것을 보았다.
정말 자세히 보지 않았더라면 따로 왔다고 생각할 만큼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 음.. 저기는.. “
8번 환전소..
총 40번까지 있는 이곳은 두 개의 언어를 전부 익힌 자들만 일할 수 있는 곳이다.
그중에 앞번호인 8번 환전소는 주로 지구인이 사용하는 환전소이다.
“ 역시.. 범인은 지구인인가. “
처음 이 행성에 자리 잡고 화폐라는 것을 사용하게 되면서 이미 화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으며, 신체 능력도, 마나 운용 방식도 뛰어난 지구인들이 주로 돈을 많이 벌었었다.
게다가 이런 승부 조작 사건은 애당초 돈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사건이다.
그렇기에 큰돈을 걸 수 있는 지구인이 범인이 아닐까 싶었는데..
정답이었나보다.
피렌은 그 네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가방에 환전받은 돈을 쓸어 담는 것을 멀리서 지켜본다.
현재 화폐 중에 가장 큰 단위인 3천 원짜리 화폐를 저 네 개의 가방에 잔뜩 담아 넣는 모습을 보면 오늘 하루 번 돈으로 네 사람이 1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놀 수 있을 만한 양의 돈인 것 같았다.
물론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지만..
대체 저 많은 돈을 어디다 써먹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수상한 네 사람은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피렌은 이 자리에서 붙잡는 거보다 더 파고들어 가 보기로 했다.
네 사람은 서로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하며, 파이트 클럽을 벗어나 어느 한 술집으로 들어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평범한 이 술집에서 그 수많은 돈을 다 써버리지는 못할 것 같고...
“ 으음.. 라티안에게서 망토라도 빌려올 걸 그랬네. “
너무나도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이런 평범한 술집에 들어가기에는 피렌의 하얀 머리도 나름 눈에 띄는지라 걱정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피렌은 한번 헛기침을 한 뒤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딸랑.
아주 예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조금 여유로워 보이던 한 여자아이가 피렌을 향해 달려 나오다 잠깐 멈칫한다.
“ 어서 오세요~... 그.. 언어가 통하려나요...? “
아마 피렌의 얼굴을 보고 지구인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언어가 통할지 걱정한 모양이다.
모습은 헤브나인인데.. 아주 유창하게 피렌과 대화하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도 상당히 유능한 모양이다.
아. 맞다.. 최초의 신에게서 언어를 받았었지..
유능한 쪽은 피렌이었나보다.
“ 아. 네. 헤브나인이신가요? “
피렌이 짧게 대답하자 아주 기쁘게 웃는다.
“ 아 네! 언어가 통해서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못 알아들으실까 봐 걱정했는데 헤헤.. 아! 안내해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
종업원이 안내하는 자리는 1인용 테이블인 바람에 다수가 앉아버린 그 수상한 4인조의 책상과는 멀었다.
“ 음.. 일행이 올지도 모르는데 옮겨도 될까요? 한 6명쯤 될지도 모르는데. “
“ 아! 그러시면 이쪽으로 오세요. “
자연스레 4인조의 옆자리로 유도하는 데 성공한 피렌은 조용히 생맥주와 닭강정 하나를 시키고 종업원에게 몰래 돈을 더 찔러넣어 준다.
조금 큰돈을 넣어주었더니 종업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넘어온 듯하다.
이로써 종업원은 무슨 의미의 돈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피렌을 위해 도와줄 것이리라.
사실 딱히 도움받을 건 없고... 분주한 가게에서 6인용 테이블을 혼자서 쓰고 있기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쓴 돈이었다.
이제 준비는 다 됐고..
뒤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볼까..
“ 흐우.. 거의 마지막쯤에 그 베팅은 뭐야? 그거 한 번에 2천만 원을 넣은 거지? “
“ 그러니까 말이야.. 얼마나 부자면 그렇게 돈을 막 쓰는 거람? 지면 어쩌려고. “
네 명 중에 가장 몸집이 있는 남자와
몸매가 상당해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여자가 베팅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아마 피렌이 15번째 베팅에서 갑자기 2000만 원을 부어버린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마 그로 인해 배당률이 낮아져 예상한 금액보다 조금의 손해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다음 베팅에 그 이상으로 복구했겠지만..
“ 그래도 마지막 베팅 때 갑자기 3천만 원이 올라가서 다행이지! 아마 그 신경 쓰이던 녀석이 부어댄 게 아닐까? “
넷 중에 가장 키 작은 여자가 의자를 뒤로 젖히며 웃는다.
“ 목소리가 너무 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
“ 에이~ 뭐 어때! 우리가 돈이 있다는 걸 들어봤자 훔쳐 가기라도 하려고? 그게 가능하겠어? 킥킥.. “
꽤 큰 목소리 중에도 ‘ 돈이 있다는걸 ‘ 이라는 단어를 강조해 일부러 페이크를 넣는다.
자신들은 나쁜 행동을 하기보다 단순히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이러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듯한 연기력이다.
물론 피렌은 이미 이들이 승부 조작의 중심 인물이라 판단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이런저런 잡담이 오가고 닭강정 3조각과 함께 생맥주 한 모금이 들어갔을 때쯤
옆쪽의 테이블에서 2명의 모험가가 나타난다.
딱 봐도 체격 자체가 모험가였다.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 여! 왔는가! 오늘의 주인공들! 하하하! “
“ 목소리가 크다니깐. “
아랑곳하지 않고 해맑게 웃는 키 작은 사람의 맞은편에 앉은 모험가들은 피렌이 살며시 뒤를 돌아봤을 때 얼굴이 보이기에 틈틈이 확인하며 외워두기로 했다.
음..
딱히 아는 얼굴들은 아니다.
“ 물건은? “
“ 큭큭큭.. 성격 참 급하시네! 술 한잔하면서 오늘의 업무를 마친 보람을 느낀 뒤에 정산해도 상관없잖아? “
무뚝뚝한 모험가와는 달리 상당히 여유로워 보이는 4인조는 그대로 자신들이 시킨 음식들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저 모험가 둘은...
갑옷을 입고 파이트 클럽에 참가한 파이터들이었나보다.
그렇게 승부 조작에 가담해 돈을 받는 그림이겠지.
“ 우린 너희처럼 여유롭지 않아. 빨리 끝내자고. “
즐거운 돈벌이 이후에 들뜬 기분을 술로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차갑게 식어버릴 말이었는지 한순간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그러나 결국 상대는 모험가.
네 명 쪽이 물러난다.
자.. 이제 서로 돈을 교환하는 현장을 목격했으니..
슬슬 움직여서 붙잡아 볼까..?
“ 칫. 까칠하긴.. “
-착.
그리고서는 어느 자루를 모험가들에게 건넨다.
“ 자. 80만 ‘ 블랑 ‘ 이다. 오늘의 일당에서 계산한 거야. “
‘ 블랑...? ‘
피렌은 일어나려다 다시 앉았다.
뭘 주고받은 걸까.
80만이라는 숫자는 작은 숫자가 아니다.
무언가 종이를 80만 장을 건넸다고 해도 부피가 장난이 아닐 것이다.
저런 자루에 담겨 있을 만한 것이 아니다.
그 자루를 80만 블랑이라고 부르며 건네주었다는 것은..
..
저 안에 든 무언가를 값을 매기고 거래를 하는 건가..?
“ ...뭐? 약속은 120만 블랑일 텐데? 40은 어디로 간 거지? “
한순간 블랑이라는 무언가 때문에 분위기가 살벌해진다.
“ 너무 그러지 말라고. 너희는 파이터라서 모르겠지만 베팅하는 와중에 방해가 들어와서 우리 쪽도 손해를 봤다고. 40만 블랑은 그때 방해한 녀석 때문에 손해 본 금액이야. “
“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그냥 너희가 주기 싫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 “
점점 언성이 높아지자 주위에서도 조금씩 쳐다보기 시작한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복면과 함께 안경을 쓰고 머리를 위로 올린 남자가 자신의 품에서 자루를 하나 더 꺼냈다.
“ 칫... 우리도 손해를 본 거라서 어쩔 수 없다고. 자. 20만 블랑이다. 우리의 정을 생각해서 이 정도만이야. 이러면 우리도 본전치기나 다름없어. “
한순간 조용해지고, 4인조와 모험가 사이에 눈빛만이 오가고 있었다.
“ 야.. 양고기 스튜 나왔습니다아~... “
아까 전 피렌을 안내해준 여종업원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 어떻게 서빙을 할지 고민했었는지 급하게 스튜를 4인조 중에 가장 키가 작은 사람의 앞에 놓아주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난다.
이어서 다른 남자 종업원이 와서 두 명의 모험가에게 주문을 받는다.
“ 손님들께서는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
아무래도 저 여종업원에게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 서빙을 시키는 것이 무리였던 모양이다.
덕분에 흐름이 끊겼다고 생각했는지 모험가는 한번 혀를 차더니 주머니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 칫.. 이번만 넘어가 주도록 하지. “
고민이다.
모험가를 쫓아가는 쪽이 좋을까?
아니면 4인조를 쫓아가는 쪽이 좋을까?
80만 블랑은 무엇을 뜻하는 거였을까?
“” 엇.. “”
고민하는 사이 두 명의 모험가가 피렌의 옆을 지나가다 멈춘다.
...표정을 보아하니..
...알아본 듯하다.
“ 튀어!!!! “
“ 어딜 도망가려고...!! “
피렌은 온몸에 바람을 두르고 테이블을 밟고서 공중을 날아 가게의 입구를 먼저 막아버렸다.
-꺄악!!!!!!
한순간 아수라장이 된 가게 안에 손님들이 벌벌 떨면서 가게의 음식들이 떨어지든 병이 깨지든 상관없이 벽면을 향해 도망친다.
아무래도 피렌이 입구를 막아버린 탓에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은 벽이었나보다.
“ 칫...! “
한 명의 모험가가 피렌을 향해 손을 내밀자 다섯 손가락의 끝에서 다섯 줄기의 물이 뻗어 나온다.
피렌은 당연히 가볍게 피해내자 그대로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버린다.
아까 본 얼음 마법을 사용하는 갑옷 파이터였나보다.
피렌은 자세를 낮춘 그대로 바람을 두르고 달려나가..
“ 움직이지마!!! “
“ 사.. 살려... 살려.... “
두 명의 모험가를 나가지 못하게 막기 위해 입구로 달려가는 바람에 4인조를 너무 내버려 두었나 보다.
4인조 중에 가장 덩치가 큰 사람이 종업원 하나의 목을 붙잡고 칼을 쥐고 있었다.
“ 저.. 저.. 사.. 살려주세.. 요...!!! “
“ 조용히 해!!! “
“ 꺅..!! “
하필 피렌을 안내했던 종업원이어서 그런지 피렌을 향해 손을 내뻗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더욱 과격하게 목을 움켜쥐게 된다.
피렌은 최대한 상황을 시뮬레이션해본다.
바람을 두르고 앞에 있는 남자의 발을 건 다음, 쓰러져 있는 테이블을 던지며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옆으로 접근해 팔을..
“ ...가라. “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종업원의 눈빛이 너무나도 불안해하고 있다.
종업원의 목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피렌은 어쩔 수 없이 길을 비켜준다.
4인조와 모험가는 피렌의 눈치를 살피며 아주 조심스레 한발씩 문을 향해 걸어간다.
피렌은 그 발걸음에 맞춰 멀리 떨어져 준다.
물론.. 이대로 보낼 생각은 없다.
인질이 풀리는 순간 피렌은 바람을 두르고 문 앞의 통유리를 전부 부숴서라도 최단 거리로 쫓아갈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문 앞에 다가간 4인조는..
인질로 잡은 종업원을 앞으로 밀치는 것과 동시에 하나의 가방을 풀어 그 안에 있는 모든 돈을 공중에 흩뿌렸다.
“ 무슨...?! “
한순간 모든 사람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 수많은 돈을 뿌렸다.
저 돈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뿌려진 돈이다.
“ 돈..! 돈이다! “
“ 돈이야!!! “
한순간 사람들이 몰려든다.
피렌만이 도망치는 두 명의 모험가와 4인조를 어이없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 돈을 벌기 위해서 승부 조작까지 해놓고
인질을 붙잡았기에 벗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번 돈의 1/3을 도망치는데 공중에 날려버렸다.
왜?
한순간 도망치던 다른 모험가가 손가락을 허공에 조준한다.
아니..
돈을 향해 조준한다.
-화륵...
“ 다들 조심해!!!! “
가장 바깥쪽에 흩날리던 돈부터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공기 중의 흐름을 타고 흩날리는 돈들과 뱀처럼 이어지는 불길이 이 가게에 내려앉는다.
아니
내려앉기 직전에 피렌이 바람으로 불길을 꺾는다.
그렇게 바람과 함께 불꽃을 가게의 밖으로,
공중에서 원형으로 굴려 가며 천천히 사그라들게 만든다.
“ 휴우... “
하마터면 이 가게 안의 모든 사람이 불에 타죽을 뻔했다.
돈으로 사람들이 달려들게 하고 그대로 돈을 태워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그사이에 도망치다니...
조금 얕본 모양이다.
“ 그.. 저.. 저기... “
굉장히 떨리는 목소리.
아직도 겁을 먹고 떨리는 손.
그런데도 두 다리로 일어서있는 것을 일반인치고는 매우 용감하다고 생각되는 인질이었던 여종업원이 피렌을 부른다.
“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피렌은 더이상 불안해하지 않도록 여종업원을 향해 웃어주었다.
“ 괜찮으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
피렌은 아주 조심스레 웃는 여종업원에게서 눈을 떼고 가게를 바라보았다.
음...
처음부터 붙잡으려고 했었으면 이 정도까지 난리는 나지 않았을 텐데..
대체 그 블랑이라는 건 뭐였을까..?
피렌은 아직도 자신을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는 여종업원을 향해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 카린을 불러오겠습니다. 금방 가게를 수리해줄 거에요. 아 그리고 제 실수로 민폐를 끼친 것이니 최고로 좋은 제품으로 만들어달라 했다고 가게 주인분께 전해주세요. “
- 작가의말
손해 안봤는데 일단 손해봤다고 하면서 40블랑을 빼서 주는걸 보면 사기꾼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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