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성식 슬라이더(2)
17. 윤재성식 슬라이더(2)
인천 국제 공항.
게이트 주변으로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막 공항에 도착한 서울 드래곤즈 선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비췄다.
“윤재성 선수, 손 한 번만 흔들어주세요!”
“범준 선수!”
“예, 저도 손 흔들어 드릴까요?”
“그, 나와주실 수 있나요? 재성 선수 가려서요.”
재성은 오랜만에 쏟아지는 이 스포트라이트가 싫지 않았다.
“각오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해서 어게인 2043, 어게인 윤재성 해보겠습니다.”
“천즈셩이다!”
“즈셩 선수 이쪽이요!”
인터뷰를 마친 재성은 천즈셩에게 어그로가 끌린 틈을 타 빠르게 게이트를 벗어났다.
얼마나 걸어 왔을까?
“빠아아아-!”
“새벽아!”
아빠를 발견하고 멀리서부터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새벽이.
와다다 달려와 재성의 가슴팍에 몸을 던졌다.
“으쌰. 우리 새벽이 안 본 새 많이 무거워졌네.”
“아빠 보고 시퍼쎠. 아빤 새벽이 안 보고 시펐어?”
“보고 싶었지. 쪽쪽.”
“히히. 아이 간지러.”
재성은 새벽이를 안은 채로 그동안 참았던 뽀뽀 세례를 날렸다.
차마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부녀의 상봉에, 원영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자기, 나는 투명 인간인가 봐?”
“새벽아, 엄마 삐졌나 봐.”
“엄마 삐져또?”
원영은 환상의 밉상 콤비네이션을 보이는 부녀를 보며 볼을 부풀렸다.
재성은 그런 원영을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끌어안았다.
“애 본다고 고생 많았다. 별일은 없었어?”
“응. 자기는?”
“말도 마. 죽을 뻔했어.”
“뭐? 왜! 누가 당신 괴롭혔어? 훈련하다가 사고라도 난 거야?”
원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재성은 그런 원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에다가 속삭였다.
“당신이랑 새벽이 보고 싶어서 죽을 뻔했어.”
“으이그.”
원영은 짓궂은 농담을 한 재성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러나 남편의 그런 맨트가 싫지 않았다.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원영.
원영은 새벽이가 듣지 못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재성에게 속삭였다.
“나도 뽀뽀해 줘.”
“참아. 새벽이 재우면 원 없이 해줄 테니.”
“응. 기대할게.”
귀국 기념 뜨밤을 계획하는 두 사람.
그런데 재성의 가슴팍에 안겨있던 새벽이가 게슴츠레한 눈을 하곤 말했다.
“엄마. 아빠.”
“응?”
“왜?”
“새벽이 재우고 모할곤데?”
“어? 무슨 소리야 새벽아. 엄마 아빠가 새벽이 재우고 뭘 해.”
“맞아. 새벽이 자면 엄마 아빠도 자야지.”
“엄마 아빠 먼저 자. 새벽이는 오늘 안 잘고니까.”
뭘 아는지 모르는지.
부모로서 이럴 때만큼 난감한 상황도 없다.
재성이 멋쩍게 웃었고 안고 있던 원영을 놓았다.
“얼른 집에 갈까? 나 배고파.”
“어? 어! 어서 가자. 집에 당신이 좋아하는 거 많이 해놨어.”
재성은 굳게 마음먹었다.
오늘 아내가 살려달라 애원할 때까지, 사랑으로 괴롭혀 줄 거라고 말이다.
* * *
“재성아.”
“...”
“재성아!”
“더는 안 돼. 살려줘 제발!”
하하하-.
선수들이 선잠에서 깬 나를 보고 웃었다.
아 참, 집합이었지.
나를 깨웠던 진호 형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재성아. 너 괜찮냐?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나나 원영이나 나이는 속일 수 없었다.
한 달이나 쌓인 장작에 불이 붙으니 걷잡을 수 없이 번지더라고.
나중엔 새벽이가 깰까 봐 근처 모텔방을 잡았고, 내가 이제는 봐달라고 세 번 정도 애원하고 나서야 끝을 낼 수 있었다.
그래도 주변 반응을 보니, ‘여보’나 ‘원영아’ 같은 부끄러운 말은 안 했나 보네.
“얘 봐라. 식은땀까지 흘리고. 훈련 빼줘? 쉴래?”
“아닙니다. 안 좋은 꿈을 꿔서 그래요.”
“몸 관리 잘해라. 너흰 몸이 돈이다.”
“예.”
캠프 이후 첫 출근.
시범 경기주를 앞두고 2군 선수들과 육성 선수까지 팀에 합류했다.
저기, 내가 아는 얼굴들이 손 인사를 해온다.
지난 시즌 대부분을 2군에서 지냈던 탓에 아는 얼굴이 많다.
감독님은 저 친구들 중에서 보물을 발굴하리라 부푼 기대를 안고 있겠지만, 나는 안다.
드래곤즈 2군 팜에 인재란 없다는 걸.
곧 우리를 집합시켰던 감독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글라스를 낀 감독님은 선수들을 한 번 훑으며 분위기를 잡았다.
그리고는 선수들 앞에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내가 캠프에서 한 말이 있다. 여기 있는 모두의 스타트 라인은 같다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로스터에 들고 싶으면 실력으로 어필해! 실력만 있으면 2군이든 육성이든 쓸 거라고 이 럭키 비키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자! 시간이 왔다!”
지금 비키 감독님의 말을 통역하고 있는 저 통역사 아주 실력이 좋다.
언어 통역뿐만 아니라, 감독님의 표정까지 통역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가끔 지금처럼 너무 이입해 지나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아, 점점 눈이 감긴다.
오늘은 무리하지 말아야지.
* * *
야수조를 보고 있으면 우리보다 10배는 힘들어 보인다.
주루, 타격, 송구, 포구 등등, 일단 투수보다 연습할 게 많은 게 팩트지만.
감독님은 대부분의 연습 시간을 야수조에 할애할 만큼, 야수조를 괴롭히신다.
특히 포수 수비 훈련만 들어가면 날이 서시는데.
“재호! 우리 집 치와와 히트가 너보다 잘 받겠다. 참고로 히트는 올해 15살이야.”
“거짓말. 개가 어떻게 공을 받아요. 형님, 이건 통역하지 말아 주세요.”
“호령 앞으로!”
“앞으로.”
감독님은 실력을 인정한 이호령을 조교로 써가며, 어떻게든 백업을 만들려고 애를 쓰고 계셨다.
이번에 합류한 애들 중에 좀 괜찮은 애들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매번 포수 훈련 때만 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감독님을 보니 어려울 것 같다.
투수조는 그나마 양반이다.
감독님은 투수조를 수석 코치와 투수 코치님에게 위임했는데, 가끔 오셔서 훈련을 보고 피드백을 하실 뿐이다.
감독님은 투수들에게 감각과 벨런스를 강조한다.
“머슬 메모리에 저장된 감각! 감각으로 던지는 거야! 항상 벨런스를 의식하면서 하나 던질 때도 완벽하게 던져 봐. 밸런스도 근육이 기억하니까.”
감각을 유지하는 건 가만히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감독님의 말은, 많이 던지라는 거다.
“부담 적은 네트 스로우를 많이 해 재성. 손끝으로 슬라이더를 느끼는 거야.”
당장 내 앞에 놓인 숙제 슬라이더.
분명 손끝도 나쁘지 않고 이보다 더 잘 챌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각도 만전인데, 일단 각 잡고 던지기 시작하면 흐물흐물한 공이 되고 마니 원.
그래, 내가 제대로 던졌으면 그런 밋밋한 각이 나오지는 않을 거다.
결론은 훈련! 훈련뿐이다.
내가 슬라이더 감각을 익히고 있자 쭈뼛쭈뼛 장범준이 다가왔다.
“내가 슬라이더 좀 봐줘?”
“네가?”
“이래 봬도 내가 슬라이더로 살아남았잖냐.”
범준이가 가끔 바보 같은 짓을 해서 그렇지, 자기 주제는 잘 아는 놈이다.
자기가 어떻게 드래곤즈 필승조를 맡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범준이의 슬라이더, 내가 봐도 잘 던진다.
각은 평범한 슬라이던데, 끝에 예리한 맛이 일품이다.
“크흠, 그럼 처음으로 동기 도움 좀 받아볼까?”
“처음?”
“그럼 무슨 도움을 줬는데.”
놈은 음-, 소리를 내며 엄청 길게 고민하더니.
“존재만으로도 너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얼른 시작하자.”
“응.”
“잘 봐. 하나 남은 동기.”
범준이의 비법이 뭘까?
범준이는 투구 자세를 잡았다.
피칭으로 보여주며 설명할 모양이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던지면 돼. 어때 쉽지?”
표정을 보니 장난은 아닌 것 같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어쨌든, 작년보다 올봄은 훨씬 과열돼 있다.
간당간당한 주전들이 매일 같이 감독님의 잔소리를 듣고, 로스터에서 빠지는 말을 들으니.
그 주전 자리를 노리는 하이에나들과, 다음은 자신이 될까 벌벌 떠는 주전 맹수들까지. 누구든 간에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그 이야기를 퇴근하자마자 원영이에게 해줬더니.
“당신은 잘하고 있어?”
질문에서 해도 되나 라는 망설임이 느껴진다.
그동안 눈치를 많이 봤구나 싶긴 하네.
사실 나도 안정권은 아니다.
감독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들과 똑같은 잔소리를 먹게 될 게 분명하니까.
그래도 입스 이후에 캠프보단 훨씬 순조로우니까 편하게 해주자고.
“응. 감독님이 너는 내 럭키 비키야. 매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하하, 거짓말하지 마. 그거 우리 4~5살 때 유행했던 밈 아니야? 외국인이 그 밈을 어떻게 알아.”
“뭐 그 정도 신뢰는 있다는 거지.”
나는 원영이 다리를 베고 누웠다.
조금 전에 샤워를 하고 나와서 그런지 향긋한 바디워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원영이의 허벅지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쓰읍. 냄새 좋다.”
“어? 신호야? 고?”
“아...! 아쉬워라. 내일 시범 경기 있잖아.”
“출전해?”
“다, 당연하지.”
“수상한데.”
“진짜야.”
휴.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 * *
- 반갑습니다 여러분! 드디어 여러분이 기다리던 야구 시즌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저희는 잠실 야구장에서 서울 드래곤즈와 부산 호크스의 시범 경기로 인사드립니다.
- 허허, 다들 겨울에 야구가 많이 그리우셨나 봅니다. 시범 경기인데 팬들이 꽤 보여요.
- 그렇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이번 시즌 행방을 가늠해보는 맛보기 경기 아니겠습니까?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 시범 경기라도 찾아오신 거죠.
부산 호크스와 서울 드래곤즈의 라이벌 매치.
드래곤즈의 드, 꼴찌 호크스 꼴크스의 꼴.
일명 드꼴라시코의 경기가 준비되고 있었다.
- 잠깐 두 팀을 설명해 드라면 호크스는 지난 시즌 10위 팀이었고, 드래곤즈도 7위로 하위권이었습니다. 매년 순위만 보면 드래곤즈가 좋지만, 이상하게 상대 전적은 8승 8패에요.
- 3년 연속이죠?
- 예. 그래서 드래곤즈와 호크스의 라이벌리는 KBO에서 단연 최고의 라이벌 매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라인업 살펴보시죠. 1회 초 부산 호크스의 공격입니다! ... 9번 유격수 방일염 선수입니다. 다음은 서울 드래곤즈의 타선입니다. 1번 타자 2루수 차시완, 2번 중견수 황태경, 3번 DH 알바노 마르티네즈, 4번 1루수 황지호, 5번 타자 우익수 배복남, 6번 3루수 강희수, 7번 타자 좌익수 우정탁, 8번 유격수 도연호, 9번 포수 박재호. 그리고 부산 호크스의 타선을 상대할 선발 투수는요. 대만 리그를 침몰시킨 천즈셩 선수가 선발을 맡겠습니다.
- 예, 천즈셩 이 선수, 드래곤즈가 엄청 기대하는 선수죠. 메커니즘이면 메커니즘, 빠른 볼이면 빠른 볼, 변화구도 잘 던져요. 특히 빠른 볼처럼 날아오다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지는 포크를 직접 봤는데 진짜 기가 막힙니다.
- 여기, 제2의 윤재성이 되겠다 도연호 선수도 보이네요. 조금 긴장한 것 같죠?
- 아직 어린 선수니까요. 그래도 참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연습 경기 봤는데 제2의 윤재성. 허세는 아닌 것 같습니다.
- 하하. 센스쟁이 카메라 감독님께서 제1의 윤재성, 그냥 윤재성이죠. 투수 전향을 선언한 윤재성 선수를 비춰주는데요. 비키 감독이 마무리 투수로 쓸 생각이라고 밝혔습니다.
- 야구 재능이 진짜 미친 선수죠? 투수로도 미래가 보여요. 캠프부터 153km/h를 던지질 않나, 일본의 야신 하베 감독이 반한 커브도 상당하죠. 오늘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기대해보겠습니다.
* * *
“즈셩. 잘해보자.”
“한국어로 하면 얘가 알아듣냐 재호야.”
“참, 통역하시는 형님 어디 가셨대.”
“형이 또 중국 투수한테 중국어 좀 배우지 않았냐. 쯔셩! 짜요!”
“크하하하 뭐가 짭니까 형님. 악!”
박재호가 썩은 중국어를 듣고 자지러지자, 이호령이 엉덩이를 걷어찼다.
“시끄러 인마. 원어민한테 배운 발음이니까.”
천즈셩을 앞에 두고 포수 듀오 이호령과 박재호가 만담을 시작했다.
둘을 번갈아 가며 보던 천즈셩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흐흐. 어. 찌야요.”
“어 웃었다.”
“그러게요 쯔셩이 형님 웃는 거 처음 보네.”
그러게. 나도 처음 본다.
말이 잘 안 통하는 것도 있었지만, 천즈셩은 그렇게 팀원들과 친해지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묵묵하게 던지고 훈련하고 조용히 숙소로 가는 선수.
물론 그런 천즈셩을 싫어하는 선수는 없었지만, 친한 선수가 없는 건 당연했는데.
이 별것 아닌 웃음 하나가, 보이지 않는 국적의 벽을 조금은 허문 것 같아 좋았다.
경기 직전 감독님은 짧고 임팩트 있게 선수들에게 말했다.
“가라! 그리고 내게 어필을 해라!”
“예!”
당연히 나는 벤치 시작이다.
물어봤는데, 오늘 출전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단다.
무슨 대답이 그런가 싶긴 한데.
오늘 출전하지 못하면.
- 재성, 아?
와 씨.
상황 봐서 제발 내보내달라고 빌어야 할지도?
“플레이 볼!”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심이 경기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천즈셩의 152km/h 시원한 투심 패스트볼로 경기가 시작됐다.
“스트라이이잌-!”
- 작가의말
우투좌타는 그대로고 던지는 손만 바꿨습니다.
내용은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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