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를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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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8.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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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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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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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DUMMY

온몸이 불타오르는 고통.

영원할 것 같던 고통 끝에 평온이 찾아오는가 싶었는데,

칠흙같은 어둠 속 어딘가에서 어린아이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이나마, 누군가 나를 위해 상(喪)이라도 치르나 싶었다.


그럴리가.

나를 위해 애도할 이가 과연 누가 남아있겠나.


“조용히 좀 해라. 어떤 겁쟁이 녀석이 이렇게 우는거냐?”


어디선가 거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쩍거리던 아이가 겁먹은 듯 뚝 울음을 그쳤다.


“곧 천마신교에 도착한다. 그곳에서도 그렇게 질질 짜봐라. 어떻게 되나 보자”


침묵이 감돌았다.


눈이 떠졌다.

흔들리는 수레 안이었다.

짙은 어두움과 퀴퀴한 냄새.

다닥다닥 붙어앉은 겁먹은 아이들.


여긴 어디지.

교주는 어디에 있나?

그는 죽었나?

내가 죽은 것인가?


벌떡 몸을 일으켰지만 수레 천장에 내 머리가 닿지 않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야. 저 녀석 드디어 깨어났다”

“그러게. 태평하게 잠만 자더니”

“이제 와서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몇몇 덩치 큰 아이들이 숨죽여 키득거렸다.

설마 나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우두커니 선 채 수레 안을 둘러보았다.

많아봤자 열네다섯 살정도밖에 되지 않을법한 아이들이 좁은 수레 안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레가 크게 흔들리며 균형을 잃었다. 다급히 벽을 짚어 넘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나에게 밟힌 아이들에게 욕을 또 한가득 먹어야만 했다.


얼떨떨하게 자리에 앉으며 몸을 웅크렸다.

주변에서 뭐라고 말하든,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오직 하나.


벽을 짚었던 나의 오른손이었다.

아직 내 몸에 온전히 붙어있는,

어린아이의 손.



#



조그마한 오른손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 스스로 벽을 짚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의식하여 움직이려 하자 오히려 나의 의지에 따라주지 않았다. 축 늘어져 덜렁대는 것이 마치 의수(義手)같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제 위치에 달려있는 팔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동그랗게 몸을 말은 채 왼손으로 오른팔 이곳 저곳을 꼬집었다. 이 생생한 감촉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승에 온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 앞의 아이들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들려왔다.


“너도 팔려온거야?”

“아니. 나는 자원했어”

“자원?”

“응. 최소한 밥은 제때 먹여준다고 하니까”

“아이고, 이 화상아. 여기까지 올때는 제대로 주디?”

“···...”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려니 무언가 벼락같이 나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분명 겪어본 적이 있는 장면,

들어본 적이 있는 대화였다.


천마신교에 처음 도착하던 날이다.

암혼동에 들어가던 날.


이 수레에 타고 있는 아이들은, 한창 세력을 확장 중인 신교가 부족한 무인들과 하인들의 수를 채우기 위해 중원 각지에서 공수하여 데려오는 어린아이들 무리였다. 나 또한 그들 중 하나.


설마. 과거를 다시 경험하고 있는건가.

사람이 죽기 전에 일생을 반추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정없이 덜컹거리는 수레에 나의 상념이 깨졌다. 수레가 뒤쪽으로 크게 기울면서 아이들간의 간격은 더욱 더 좁아졌다. 천마신교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직감한 아이들은 더욱 더 말수가 없어졌다. 짖궂게 웃어대던 덩치 큰 아이들 조차도.


산비탈을 얼마나 올랐을까.

수레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누군가 벌컥 문을 열어 제꼈다.

친절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친 목소리.


“모두 내려라. 빨리 움직여!”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레에서 뛰어내린 아이들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고 굴렀다. 나 또한 오른팔이 덜렁거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은 채 아이들 틈에 섞여 달렸다. 어찌 해야할지 모를 때엔, 일단 튀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정답이다.


수십개의 수레가 각기 수십명의 아이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높은 절벽에 둘러싸인 넓은 공터. 그곳에 모인 수백명의 아이들.

작게는 일곱, 여덟 살부터, 많아봤자 열넷, 다섯 살 정도인 각양각색의 아이들이 딱히 기준이랄 것도 없이 모여있었다.


팔려오는 아이들이라는 것이 대충 그렇다. 어차피 필요한 것은 교의 가장 하위계급을 담당할 이들. 일단 최대한 많은 아이들을 확보하고, 그로부터 재능이 뛰어난 이들을 솎아내는 것이 암혼동의 취지이자 목표였다.


“곧 등급 판정이 시작된다. 옷을 모조리 벗고 줄을 서라!”


수십명의 무인들 - 교관들이 살벌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싸고 지시하고 윽박질렀다.


“등급? 그게 뭔데?”


겁먹은 아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후다닥 옷을 벗었다. 사방에 살색이 가득하다.

나 또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고 벗겨진 채 길게 줄을 섰다.

털 하나 없이 매끈한 몸이 어색하여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온 몸에 가득했던 커다란 흉터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 차례가 되었다.

책상 위에 나무조각을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말라깽이 교관이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몇살?”


내가 몇살이었더라.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몰아친 때문인지, 순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도 열 두살쯤 되었을 것이오”


교관이 흥 코웃음을 쳤다.


“열두 살이 이렇게 작아? 말투는 또 왜 이래? ”


때마침 예전의 기억이 돌아왔다.

열 살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일단 처음 주장을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열두 살. 맞습니다”


허리를 쭉 피고 교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끌끌. 눈빛 보소. 그래. 네놈 말이 맞다고 치고···”


교관이 처음에 집어들었던 얇은 나무조각 대신 조금 더 큰 나무조각을 집어들었다.


“차라리 더 어린 나이라고 우기는 게 좋았을 거다. 너같이 조그만 녀석이 거친 훈련을 받게되면 금방 죽어버릴 가능성이 높거든”


그가 붓을 든 채 차근히 내 몸을 살폈다.


“근데 자세가 왜 이래? 똑바로 서라”


하는 수 없이 비스듬히 서있던 자세를 풀고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힘없이 늘어진 팔을 본 그가 눈을 찌푸렸다.


“오른팔은 왜 그러고 있어? 장애가 있나?”

“잘 움직입니다”

“지랄. 속일 생각하지 말아라”


그가 나무조각을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졌다.

하필 내 오른손이 있는 방향으로.


“...호오”


말라깽이 교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나의 손.

지금껏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던 오른손이 정확하게 그것을 잡아내었다.


“제법 감각이 있는 놈이구나”


놀란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다가가 나무조각을 다시 그에게 건넸다.

붓을 든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무언가를 끄적였다.


“그래도 네 체격에 높은 등급을 주긴 어렵지. 훈련을 받다가 죽지나 말아라. 알겠냐?”


마치 큰 특혜라도 준 듯이 으시대는 그에게 간단히 목례하고 돌아섰다.

그에게 받은 나무토막에는 숫자 오(五)가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



오등급.

무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게 되는 아이들 중에는 최하위의 등급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는 숫자였다.


‘과거가 바뀌었어’


그저 과거의 삶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무언가가 달라졌다.

단지 몇살인지를 헷갈렸다는 이유만으로.


본래대로라면 나는 왜소한 체구와 나이 때문에 기타등급으로 분류가 되고, 덕분에 신교 곳곳의 청소를 하거나 심부름 따위를 하며 수년을 보내게 된다. 어느날 다른 하인 녀석들과 시비가 붙은 끝에 수십명을 때려눕히는 일이 없었다면, 그대로 늙을 때까지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암혼동에 수년은 더 일찍 들어온 셈이군’


바꿀 수 있는 과거.

이것을 회귀(回歸)라고 부르던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축 늘어진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것 또한 기존 과거와 달라진 점 중의 하나.

내 기억으로 오른손이 내 의지를 배신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잘려나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의지를 담아 오른손을 살짝 움직여보았다.

이전보다는 나았지만 아직까지는 어설프게, 그리고 간신히 움직일 뿐이다.

아까와 같이 신속하고 섬세한 움직임을 어떻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덧 공터에는 무인으로서 키워지게 될 오백여명의 아이들만이 남았다.

나머지 백여명의 아이들 - 결국 등급외로 분류된 어리고 허약한 아이들은 어느새 수레에 타고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타야했을 그 수레다.


남은 아이들은 모두가 똑같은 잿빛의 무복을 지급받았다. 딱히 질이 좋다고 할 수 없는 빳빳한 재질의 천으로 만들어진 무복이었지만, 온갖 오물과 땟국물로 절여진 기존 옷 대신 새 무복을 받아든 아이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개중에는 아마 자신의 옷이라는 것을 처음 받아본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체구가 작은 탓에 팔 다리의 단을 몇번씩이나 접어야만 했다. 그래도 여전히 커다란 옷을 입은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새삼스레 내가 얼마나 어린 시절로 되돌아왔는지를 체감했다.


“참 나. 내가 이런 꼬마녀석이랑 같은 등급이라고?”


내 뒤에 선 덩치가 툴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뭘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마음대로 오급이야. 오급은···이 몸이 어울리는 곳은 저쪽이란 말이다”


녀석의 시선이 공터 저 반대쪽 끝편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비슷한 나이대지만 이미 근골이 범상치 않게 발달하고, 눈에서 형형한 안광을 내뿜는 아이들이었다.


일급(一 級).

수십 수백명 단위로 바글바글하게 모여있는 기타 등급의 아이들과는 달리, 녀석들은 모두 합쳐서 스무명도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급과는 옷조차도 달랐다. 어정쩡한 잿빛 대신 짙은 검은색의 무복.


지금 이 녀석들에게는 일급이 제일 선망의 대상이겠지.

하지만 이들은 아직 모른다.

산 위에 산이 있고,

하늘 위에 또다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무인들의 지시에 따라 또다시 한참동안 산길을 걷다가, 갑작스레 맞닥뜨린 거대한 바위 사이로 들어갔다. 입구 역할을 하는 바위의 틈만 해도 성인의 키보다 두배는 될만큼 높았고, 그 안은 그보다 훨씬 더 높고 넓은 구역이 펼쳐져 있었다.


생각지도 못할만큼 웅장한 동굴의 규모, 수백년에 걸쳐 형성된 기이한 종유석과 석순, 석주 등에 압도당한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앞으로 몇년동안 이곳을 단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하고.


‘아까 수레에서 뛰어내렸어야 하나?’


만약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면,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애초에 이곳 암혼동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나의 선택지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긋지긋한 천마신교와 아예 연을 끊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낚시꾼이 되거나 농부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상인이 되는 것도 좋겠지.

어쩌면 무림맹에 입단하는 것도 재미있을 수 있겠다.

언젠가 이곳의 교주가 될 홍옥을 상대로 마교척결의 깃발을 세우는거다.


“......”


홍옥을 생각하자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그는 죽었을까?

과거로 돌아온 것은 나뿐일까?

아니면 그 또한 과거로 돌아왔을까?


“정신을 어디에 놓나? 빨리 빨리 걸어!!”


발걸음이 멈춘 나를 보고 교관이 윽박질렀다.


그래. 빠져나가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다.

일단은 튀지 않게 아이들을 따라 줄지어 걸었다.


끝도 없이 계단을 내려가다보니 마침내 다다른 동굴 바닥.


“이곳, 암혼동에 온 것을 환영한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위대한 천마신교의 일원이다”


높은 바위 위에 올라선 털복숭이가 외쳤다.

나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곳 암혼동을 오랜 시간 맡아온 우두머리 교관, 임풍이었다.


“밖에 있어봤자 하루하루 배를 곯지 않을 걱정만 하다가 결국 주린 배를 붙잡고 죽는 것이 너희들이 본디 맞이했어야 할 운명이었겠지. 하지만 이곳은 달라. 너희들이 수련만 열심히 한다면 배를 곯을 일은 없을거다”

“삼년간의 훈련을 거치고나면 제법 사내구실을 할 수 있게 될거다. 네 녀석들은 그나마 좋은 기회를 얻은거야. 아까 수레를 다시 탄 녀석들이 어디로 가는지 아나? 아마 알고 싶지 않을거다”

“너희들이 스스로를 증명해낼 수 있다면 월봉으로 은자 수백냥을 받는 지위까지 올라갈 수도 있겠지. 제길, 너희들 중에 나보다 월봉을 많이 받는 녀석이 나올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임풍 교두가 껄껄 웃었다. 가당치도 않다는 듯한 웃음이었지만, 아이들 중에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을 불태우는 녀석들이 있었다. 그럴싸한 가죽조끼를 걸치고 커다란 칼을 옆구리에 찬 우두머리 교관이 꽤나 멋지게 생각된 모양이었다.


주변의 달라진 공기를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아이들 중 꽤나 많은 수는 거친 훈련과정에서 죽게 될 지도 모른다.

애초에 최하급인 오등급으로 분류된 아이들이라면 그 확률은 더더욱 높았다.


“단지 은자 뿐이겠느냐? 무(武)를 최고의 가치로 치는 곳이 이곳 천마신교다. 오직 강해지기만 한다면 너희들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없을거다. 혹시 아느냐? 이곳 암혼동 출신 중에···”


털복숭이 임풍이 목소리를 낮추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이목을 한껏 끌어당긴 그가 나지막한,

그러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래 천마신교를 이끄는 사대단주 중의 한명이 탄생할지도 모르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한 몇몇 아이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웃지 않았다.

그것을 실제로 이뤄낼 사람을 알고 있으니까.

아니, 그것조차 뛰어넘어

아득한 정상까지 다다를 사람을 알고 있으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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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화단(魔火丹) +2 24.08.20 1,195 17 12쪽
11 면담 +3 24.08.19 1,218 19 12쪽
10 쟁탈전 +4 24.08.18 1,256 21 15쪽
9 일혼(一魂) +4 24.08.17 1,290 20 12쪽
8 뇌옥 +3 24.08.16 1,324 19 13쪽
7 내공 +4 24.08.15 1,410 22 12쪽
6 복수의 방식 +4 24.08.14 1,439 24 13쪽
5 이름 +4 24.08.13 1,507 22 13쪽
4 재회 +4 24.08.12 1,540 26 14쪽
» 회귀 +6 24.08.11 1,674 28 14쪽
2 암살 +6 24.08.10 1,783 33 12쪽
1 서막. 교주와 나 +4 24.08.10 2,168 28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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