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를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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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8.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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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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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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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교주와 나

DUMMY

“범계, 너는 참 신기한 녀석이야”


떠들썩한 술자리가 끝나고 어느덧 대장과 나, 오직 둘만이 남아있을 때였다.

그가 비스듬히 누운 채 술잔을 들어보였다.

하얀 피부와 빛나는 눈동자.

여인처럼 아름다운 그의 얼굴은 취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떤 임무가 주어져도 주저하거나 빼는 법이 없고,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이야기한 것도 기어코 해내고 말지. 도대체 비결이 뭔가?”


“대장. 칭찬은 웬만하면 남들이 듣는 곳에서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잘 들을 수 있도록, 아주 큰 목소리로 말입니다”


대장이 하하핫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는 시원하고 꾸밈이 없어 듣기가 좋았다.

나 또한 나른한 취기를 만끽하며 헛헛 웃었다.


기분 좋은 날이다.

대장이 후계자 후보 중의 한명으로 지명되었던 날이었다.

무려 大 천마신교의 차기 교주 후보 말이다.


신교의 가장 밑바닥 - 하층계급이라 할 수 있는 암혼동 출신으로 시작하여,

이 거대한 조직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교주의 위(位) 턱 밑까지 도달한 것이니

그야말로 파격이자 혁신이고,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전설이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나를 이렇게 잔뜩 띄워주는 것은.


“농담입니다. 지금껏 운이 좋았던 것 뿐이죠. 한낱 심부름꾼에게 무슨 비결이랄게 있겠습니까?”


“그럴리가. 그대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지. 자네야말로 이 홍옥의 제일가는 심복이자 참모이고, 해결사라는 것을”


“어휴. 오늘 술을 많이 드신 모양이군요. 아니면 또 부탁할게 있으신가···”


“내공이라고는 한줌 쥐톨도 없는 자네를, 수하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형님으로 모신다는 것이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 자존심 높은 녀석들이 말이야”


사뭇 진지해진 그의 말투에 내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말없이 그의 빈 술잔을 채워주었다.

그는 찰랑이는 술을 한참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몇몇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한다더군. 홍옥은 하늘 높이 구름을 뚫으며 비상하는 매이고, 범계는 짙은 어둠을 찢어내는 올빼미이다. 홍옥에게 범계가 있으니 결국 교의 미래는 홍옥에게 있을 것이다”


“교의 미래가 대장에게 있다라···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군요”


“좋은 말이지. 좋은 말이야”


그의 말에 여운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도 들리더군. 만약 범계, 그대가 없다면 나는 교의 미래가 아니라는 뜻이 아닌가?”


문득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대장의 눈동자, 그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는 묘한 불길을 본것만 같았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저 시킨대로 일을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야 쓰다가 닳고 헤지면 언제든 바꾸면 되는 존재이고, 중요한 것은 도구를 사용하는 주인이 아니겠습니까?”


대장은 빙긋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 당신은 대체불가능한 존재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선후배들을 규합하여 이곳까지 끌어온 것도, 다른 수많은 교도들이 함께 꿈꿀 수 있는 찬란한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것도 당신입니다. 무려 차기 교주 후보로 선발된 양반께서, 그깟 연기처럼 떠도는 말들의 이면을 음침하게 따져가며 꿍해있을 필요가 없단 말이오”


“음침하다고? 꿍해있다고? 이 홍옥이?”


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 바람에 술잔은 엎어지고 그의 옷은 흠뻑 젖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깔깔 웃으며 말했다.


“과연 범계답군. 나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또 누가 있을까?”


“그거야 셀 수 없지요. 사군평도 있고, 철영, 임강, 조양···”


“아니야. 오직 자네 뿐이야. 오직 자네 뿐···”


한참을 웃던 그가 가까스로 진정한 뒤 나에게 새로이 술을 따라주었다.


“쓸데없는 말을 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나도 흔들릴 때가 있어. 이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헤치고 걸어갈 때마다, 더럽고 추악한 꼴을 보고도 참아야 할 때마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또 다시 자네의 손을 빌려야 할 때마다···”


“저를 신경쓸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복잡한 정치나 교리같은 것 따위는 모르고, 대장께서 백날 외치는 교의 변화와 미래가 당췌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뒤를 쫓을 뿐. 당신의 칼날, 당신의 올빼미로써···”


“좋은 일이군. 자네와 같은 이가 나의 뒤에 있다는 것이”


그는 어느새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꿈꾸듯 반짝이는 눈동자, 자신만만하면서도 보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미소..

언제, 어디서, 무의미하게 소비되었을지 모르는 인생이었던 나에게 처음 손을 내밀었던 날에도

그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가지 부탁할 것이 있네. 이것도 오직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드디어 속내를 드러내시는군요. 무엇입니까?”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어보았지만 대장의 표정은 다시 한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언젠가, 혹시라도 말이야. 내가 완전히 길을 잃고, 형제들을 배신하거나, 자네를 실망시키는 날에는···.”



#



그 대화를 나눴던 것이 벌써 십년 전.


십년이면 많은 것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대장이라 부르던 자가 교주가 되고,

정의로웠던 자가 끝없이 타락하며,

형제라 부르던 자가 원수가 되기에는.


그의 침실.

피 냄새가 난다.

그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시비들이 값비싼 향을 끊임없이 피워댔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어딘가에 가득한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비좁은 침대 밑에 몸을 끼워넣은 채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그의 마음과 행동은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으니, 언제 침실로 돌아올지도 알 수 없었다.

최근에는 그 광기가 더욱 심해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니까.


나는 오늘,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한때 나의 모든 것을 바쳤던···

빛나는 나의 주군, 나의 대장.

천마신교의 교주를 죽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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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전생의 인연들 +2 24.09.15 610 22 14쪽
37 천무관 +2 24.09.14 603 22 14쪽
36 졸업 +2 24.09.13 618 22 14쪽
35 삼년 뒤 +2 24.09.12 694 24 14쪽
34 떠나는 순간 +2 24.09.11 737 21 14쪽
33 취조 +2 24.09.10 727 21 13쪽
32 군사(軍師) +2 24.09.09 743 21 13쪽
31 사도(司徒) +3 24.09.08 827 17 13쪽
30 내가 그렇게 정했다. +3 24.09.07 881 23 15쪽
29 약속 +2 24.09.06 906 20 12쪽
28 예감 +3 24.09.05 930 15 14쪽
27 발단 +2 24.09.04 951 15 13쪽
26 시비 +3 24.09.03 943 20 14쪽
25 알 수 없는 일 +2 24.09.02 953 24 14쪽
24 환희 +3 24.09.01 1,007 20 12쪽
23 증명 +3 24.08.31 990 19 13쪽
22 질주 +2 24.08.30 988 20 12쪽
21 평가 +2 24.08.29 1,010 21 14쪽
20 씨앗 +3 24.08.28 1,027 20 13쪽
19 실험 +3 24.08.27 1,032 19 14쪽
18 자령화 +2 24.08.26 1,009 20 13쪽
17 수색 +3 24.08.25 1,017 18 14쪽
16 목표 +3 24.08.24 1,024 20 14쪽
15 두번째 만남 +3 24.08.23 1,065 18 12쪽
14 살인 +3 24.08.22 1,054 21 15쪽
13 사백이십삼, 사백이십사 +3 24.08.21 1,084 19 13쪽
12 마화단(魔火丹) +2 24.08.20 1,088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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